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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거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04년 4월
평점 :
#1. 책에서
서울에서 장흥으로 귀향한 한승원님의 경험과 생활이 바탕에 깔린 단편집으로 농촌에서의 생활이나 가족간의 애증을 연작형식으로 풀어놓는다. 마치 덜컹거리는 열차의 연결부를 지날 때처럼 각 이야기들의 고리를 신나게 넘나든다. 때로는 찡하게, 때로는 애달프게...
<수방청의 소>
실직한 후 주식으로 퇴직금마저 다 날려버린 아들과 아흔여덟 살의 혈기왕성한 노모를 둔 김명윤은 소를 팔아 주식 밑천을 마련해 달라는 아들을 매몰차게 쫓아버린다.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 아들과 정신적 강자로 등극한 어머니를 통해 삶의 비예를 들여다보는 듯 하다.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
결국 아들은 아버지(김명윤)가 지극정성으로 키운 소를 도둑질한다. 하지만 노모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 아버지에게 손자의 신세를 걱정하며 경찰에는 신고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아버지는 울분을 못 이겨 파출소를 찾지만 “율산으로 갈라면 어디로 가야 쓰요?”란 엉뚱한 말만하고 나온다.
부모자식간의 끊을 수 없는 연, 좋든 싫든 일단 ‘가족’으로 엮어진 이상 그 고리의 겁을 이고가야 할 우리. 가족이라는 피붙이 속에 숨겨진 질긴 힘줄을 느낀다.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사진사 이장환은 김명윤의 노모와 10대 소녀를 꾀어 “곱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알몸을 렌즈에 담는다. 이에 격분하는 김명윤과는 달리 노모는 그 사진을 흥겨운 놀이(예술)로 인정하고 즐겁게 받아들인다.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카메라만 들이댄다고 다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옷을 벗었다고 무조건 외설이 되는 것도 아니리라. 책장의 골을 따라 그 모호한 경계 속을 걷는다.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섹스와 관음증에 대한 욕망이 전직 경찰 오경만의 사건을 통해 전개된다.
“모든 남자들은 사실 다 색남입니다. 다만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면 나는? 너는? 우리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지 못하고 억압받는 과정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참 ‘예술’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커밍아웃은 언제나 이르다...
<감 따는 날의 연통>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맞본 아들은 급기야 “빚 보증 서준 친구들 신세까지 죄다 망쳐” 놓는다. 이로 인해 할머니와 손자(영구)는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앞마당의 풍성한 감나무처럼 자족하며 살아간다.
손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할머니는 돈을 통해 사람의 존재가치를 따지는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버들댁>
지극정성으로 손자를 쓸어안는 버들댁, 비록 천하가 손가락질하는 버러지 같은 놈일지라도 그녀에겐 유일한 혈육이자 삶의 온기다. 손자를 위해 자신의 집까지 팔아버린 버들댁은 국가대표가 된다는 그의 헛말에 더없이 기뻐한다.
‘할머니’란 단어가 든든한 기둥처럼 느껴진다. 어떤 어려움이나 낭패가 있더라도 되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아닐까. 비록 이런 내리사랑에 이용만 당한다 한들 그 보금자리의 존재는 변함이 없으리라.
<잠수 거미>
“자낸 무슨 재미로 사는가?”
그렇다면 나의 재미는... 책을 읽거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 혹은 학생들과 이심전심으로 교감했을 때나 비 오는 날, 마음 맞는 친구랑 술이라도 한잔 걸칠 수 있는 것?
우리들은 물속에서 공기주머니에 의지해 위태롭게 살아하는 장수거미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누구든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길 꿈꿔본다. 어쩌면 그 탈출의 열쇠는 “흰 구름 사이의 쪽빛 하늘”같은 소소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닐까.
<깨진 크리스털 조각>
할머니는 정직하게 살아왔던 자식의 병을 위해 무덤을 파헤쳐 인골을 꺼내 약재로 쓴다. 하지만 그의 손자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 자상하던 할머니와는 다른 기괴하고 역겨운 모습에서 충격을 받는다.
도덕적 관념과 인간과의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이 그려진다. 인간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할 ‘도덕’이라면 지나친 사치인가? 그 미궁 속을 손자의 깨진 크리스털 조각을 통해 들여다본다.
<홀>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종순 역시 남성들의 오줌통(성욕의 배출구)으로 전락한다. 결국 낙태까지 하고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지만 남성들의 ‘홀’과 같은 생활은 여전하다.
순박하던 한 소녀를 인생의 검은 홀로 몰아가는 건 남성들의 이기적 욕망 때문이 아닐까...
<별>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황녀같이 산다는 것, 그 끝없는 외로움의 모양새가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돈은 많지만 점점 소원해지는 정신에 타인을 끌어들이지만 결국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버린다.
별처럼 화려한 인생이지만 실속 없고 허세 가득한 삶. 그러다 보면 느는 것은 말, 공허한 말뿐이다.
<길을 가다보면 개도 만나고>
댐이 들어서는 땅을 매입해 보상금을 타려는 친구와의 악연이 그려진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친구를 이용하는 친구.
사회가 물질중심으로 바뀌다보니 우리의 관계도 돈을 중심으로 형성되거나 소멸해가는 건 아닐까. 나 역시 몇 푼 돈에 친구에게 상심하는 현대인일까...
<그 벌이 왜 나를 쏘았을까>
벌에 쏘여 고통스러웠지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어떤 이의 말에 은근히 벌어질 앞날을 기대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방문한 처자를 두고 은밀한 상상 속에 빠져든다.
행동한다는 것보다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있을 때가 더 행복할 경우가 있잖은가! 로또 1등에 당첨되거나 멋지고 아름다운 연인과의 데이트, 혹은 빨간 스포츠카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등의 ‘상상’이야말로 아무런 현실적 문제없이 즐길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유흥이 아닐까.
#2. 독서토론회에서
그와 스치다.
토론회장이 있는 시내의 모 서점에서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책을 본다. 문득 옷깃에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한승원.
주최 측이 간단히 인사를 하며 주차장에 대해 물어본다. 그러자 “친구랑 같이 왔는데... 그냥 놔두세요.” 라며 소탈하게 웃는다. 글로는 전달될 수 없는 작가의 인생이 미소 속에 숨겨져 전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여기 온 목적의 90퍼센트를 조금 전에 이뤄내 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말을 못한다. 아니 말을 못해야 작가다.”
말로 쏟아내기보다는 글로써 흘러넘쳐야 된다는 작가론을 펼친 친구의 말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토론회를 시작한다. 곧이어 청중을 기죽게 만드는 논리 정연한 평론가의 장문이 토론회의 열기를 끌어올린다.
고향과 농촌, 가족과 남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간다.
고향을 찾아 귀향하는 모습이나 평상에 앉아 휴식하는 모습과 같이 한승원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기에 자신은 물론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많은 부분을 빌려 왔다고 한다.
특히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노인과 아이에 대해 사라짐과 태어남, 꽃방과 꽃씨 등의 비유를 들며 소멸과 생성의 윤회관계로 설명한 부분이 인상 깊다. 아이를 통해 노인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이로써 아이는 미래를 여는 희망으로 자라난다고...
또한 여성을 어머니나 창녀라는 이미지로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성적인 도구로만 인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도 있었는데 한승원님은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우주적 입장에서 양과 음의 상이한 존재로 탄생되어 융합되는 존재라 보고 남성성에 대비되는 여성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자신의 작품을 페미니스트적인(여성운동의) 관점에서 보지 말아달라고 했다.
진지하고 의미 있는 토론회였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사실 난해한 표현과 용어가 많아 그 핵심을 찾기가 힘들었다.(위의 글처럼!) 조금은 알아듣기 쉬운 말로 질문과 답변이 오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책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한승원님의 생각이나 글 속에 숨겨진 코드를 음미해 볼 수 있었다. 또한 정확하게 작가의 느낌을 끄집어냈다는 자부심과 함께 더 깊고 다양한 소감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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