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호국보훈의 달’이 다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와 빨간색으로 꾸며진 모양새가 맘에 들어 구입했지만 나의 부름이 없었기에 여태껏 책장 속에서 한숨만 쒔던 놈이다. 아니 ‘분’이다. 그래서 유월이 다가기 전에 먼지를 쓸어내고 책장을 펼쳐든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이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확연히 인지된다.
2차대전 중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한 유대인 꼬마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혹은 강인함)이나 현실에 순응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숨겨진 ‘무엇’을 잔잔하게 그려놓았다.
수용소 생활이라기보다 친구들과 떠난 소풍 같은 여정으로 마치 영화 <아름다운 인생>의 호기심 많고 순수한 동심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래서 더 전쟁이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게 표현된 ‘슬픔’이랄까...

어느 날 소년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어딘가로 끌려간다. 그리고는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서 노동을 하며 생활한다. 급기야 병에 걸리고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질퍽한 흙탕물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진듯한 음산한 축축함, 그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점점 그 ‘무엇’을 알아간다. 적응과 체념, 불안한 상상을 통해 인생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년(작가)은 인생이란 자신 앞에 도열한 방을 하나하나 거쳐 나가듯 진행되는 것이기에 기쁨이나 고통 역시 인생이라는 긴 연장선을 이어주는 하나의 ‘간이역’ 일뿐 그 자체(운명)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운명이란 누구나가 만나게 되는 인생의 일시적인 과정이므로 ‘팔자소관’으로 자포자기하기 보다는 각 인생장면들을 통해(받아들여) 스스로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약간은 불교적이고, 도가적 인생관이 엿보이는 것도 같다.
‘인생은 순간의 연속이다. 집착을 버리고 순간을 살라. 그러기 위해선 자신과 세상을 한 발짝 물러나 관조하듯 쳐다보라. 자 알겠는가? 기쁘고 슬프다는 허상에 집착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뭐 이런 식으로.

'전쟁'으로 시작해서 '인생'으로 마무리 된 책이다. 오랜만에 인생이나 운명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게 되지만 역시나 어렵다. 아직은 어린 나이기에 섣불리 인생은 ‘이거다’라고 정의하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 보다는 과정 속에 의미를 찾고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불확실하기에 더 아름다운 게 ‘인생’ 아닐까...

ps:
번역상의 문제인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조금씩 보인다.
나와 저자, 유럽과 한국의 시공의 벽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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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


20.5℃
태풍이 지나간 비오는 오후, 이어폰을 귀에 꼽고 버스에 오른다.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바람이 많아서 그런지 오히려 상쾌하다.

21.7℃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공연장 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리라.
나 역시 그 소란한 행렬에 몸을 싣는다.

26.5℃
몇 개만 켜진 조명이 공연 전의 기대감을 더한다.
환호와 박수소리가 객석을 채워나간다.
하얀 조명은 객석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뿌연 먼지처럼 도드라지게 한다.
순간, 공연장이 암흑으로 변하면서 모든 것이 숨을 멈춘다!

29.4℃
무대가 천천히 푸른색으로 밝아지면서 음악은 시작된다.
베이스의 든든한 받침위에 기타선율이 리듬을 잡아가자
드럼의 묵직한 저음이 심장박동을 끌어 올린다.
그때, 가느다란 빛줄기 속에 그가 나타났다.
그가 무대 중앙으로 뛰쳐나오자 사람들의 함성과 고갯짓은 하나되어 요동친다.

34.9℃
노래와 함께 거듭된 열기는 스스로를 증식하며 공연장을 메운다.
너무 뜨거워진 열기는 음악 속으로 숨어버렸는지 아무 느낌이 없다.
ZERO-0℃
'Take Five', 노란 종이비행기가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공연장을 날아다닌다.
그리고는 경쾌한 비트의 'Live Wire'에 맞춰 신들린 듯 머리와 팔을 흔들어댄다.
“상쾌한 내 샤워 같은 소리로 이 메마른 널 위해 비를 내려 적시네“
공연의 악센트에 맞춘 무대에선 불과 물을 뿜어댄다.
우리들은 그 뜨거움 아래서 시원스레 몸을 뒤흔든다.

35.3℃
음악이 끝나면 절정에선 느낄 수 없었던 열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비추는 라이트의 강한 빛만 남았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옷에는 미쳐버린 땀으로 흥건하다.





- 2004/07/04
  'ZERO-Seotaiji Live Tour 2004' 부산공연에서 본...
  태지의 미쳐버린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음악은 물론 무대나 연출에서도 최고이려는 프로정신이 인상 깊다.
  또한 그의 음악적 즐거움 못지않게 관객들의 맛 간(?) 모습 역시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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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아래서


토요일 아침.
비가 뒤섞인 공기는 느낌만으로도 시원하다.
우산 속, Hanson의 ‘Mmmbop’을 들으며 출근하는 길...
비 아래서, 음악 속에서, 길 위에서 나만의 상상을 한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그 경쾌함.
낮게 깔린 구름은 무대를 메운 드라이아이스처럼 부드럽고
길에 고인 빗물 역시 나의 발장단을 장식할 소품이 된다.

양손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빙글빙글 돌아본다.
무대 위에선 발장단에 튀긴 물방울들이 부채꼴로 화사하게 펼쳐진다.
길거리 관객들의 의아한 시선도 무시한 체 나만의 리듬에 빠져든다.

경쾌한 음악이 있는, 이 얼마나 상큼한 아침인가...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나만 아는 아침 율동이 된다.



- 2004/06/19
  아침에 Hanson의 ‘Mmmbop’을 들으며 등교(출근)하는 길...
  감자기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나는 등교하는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포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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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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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을 쓰는 행위가 무의식의 지층을 쪼는 곡괭이질과 다름없을진대, 곡괭이 끝에 과거의 생생한 파편이 걸려들 때마다, 나는 마치 그때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처럼 희열에 휩싸이는 것이다.” (p133)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현기영님의 자전적 이야기로 소설속의 말처럼 차분하면서 애틋한 마음으로 그때의 파편들을 일궈낸다.
마치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흑백영상들처럼 투박하고 정겹게 다가온다. 하얀 저고리를 입고 물동을 이고 가는 아낙이나 동생을 업은 코흘리개 아이, 한쪽 팔을 크게 흔들며 제기차기에 열중인 아이의 모습들이 깜빡이는 화면 속에서 뒤뚱거리며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제주도의 4.3사태와 6.25전쟁과 같은 역사의 어두운 조각들도 존재하기에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직 어린 나이기에 4.3사태의 역사적 의미보다는 검붉은 잿더미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가족들, 이웃의 눈물과 곡소리를 통해 그 실체를 어렴풋이 알아간다. 그리고 전쟁의 발발과 함께 몰려든 피난민을 통해 또 한번의 사회적 아픔과도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던가~ 아직은 어리기에 그 슬픈 흔적들도 쉽게 치유되는가 싶다.
역사의 그늘이 있지만 그 속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어린 동심은 소설의 중, 후반으로 가면서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홍당무 소년’으로 바뀐다. 수줍고도 아름다운, 하지만 혼란스러운 사춘기의 소년, 그 소년의 원색적인 엉큼함마저 감미롭게 다가온다.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옥상에 올라 동네 골목길을 바라보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지나가는 누나들과 아줌마의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보면서 킥킥거리던 일들이 수줍게 기억난다.

특히 그 시기(사춘기)에 보였던 ‘문학적 성숙단계’가 눈에 띈다.
4.3사태의 암울한 상황과 몇 번의 병치레에서 오는 허허로움을 스스로 감내하면서 글쓰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다. 소설 속 베르테르처럼 우울하고, 고독한 지성인의 모습을 흉내 내려는 어눌한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보인다.
“나도 한번 우울해져볼까?”하는 작위적 욕심마저 들게 한다.

정형화된 사무실의 끈끈한 오후, 나는 제주도의 푸른 파도소리를 듣는다.
해안에 부딪혀 조각난 바다의 파편은 잔잔하고 감미롭게 내 마음을 적신다.
현기영님이 미치도록 부럽다. 그 부러움의 끝을 이 책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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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도둑
수잔 올린 지음, 김영신 외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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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붙어서 살아가는 착생식물과에 속하는, 메마르고 삐죽삐죽 가시가 돋친 브롬엘리아드와 난초...(p26)”

작년 한 학생에게 선물 받은 책인데 조금은 전문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서야 읽는다. 착생식물을 의미하는 브롬엘리아드, 그중에서도 유령난초를 찾아 늪지를 여행한다.

아름다우면서 희귀한, 하지만 재배하기 어려운 폴라리자 린데니, 일명 ‘유령난초’를 대량 복제하려는 난초광 라로슈의 이야기로 마치 영원의 향수를 만들고자 했던 그르누이(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연상하게 한다.
라로슈는 나비가 꽃의 색과 향의 이미지에 이끌리듯, 돈벌이보다는 난초라는 존재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몰입한다. "미치광이 같은 영감에 휘둘리며...(p70)” 난초에 집착한다. 급기야 난초를 밀반출하다 적발되어 추진 중인 프로젝트가 뒤틀리고 동료들로부터 외면받자 난에 대한 열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일순간에 사그라진다.

아직은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난초에 대해 많은 것이 담겨있다. 난초를 소재로 적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난초에 대해 설명한 논픽션에 가깝다. 초반의 인물과 사건중심(라로슈와 난초채취)의 흐름과는 달리 중반으로 갈수록 난초의 역사적인, 과학적인, 학술적인 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선지 책 뒷면에 소개된 “난초수집가들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 내면의 어두운 열정과 집착!”이라는 소설적 느낌은 별로 와 닿지 않는다. 물론 난초에 대해 관심이 부족해서겠지만 조금은 지루하다. 책 초반의 난초라는 청초한 식물에 대한 관심이 중, 후반부의 ‘난초학습’을 거치면서 식어버린 느낌이다. 난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야 상당한 재미와 지식이 전달될 수 있겠지만, 나 같은 식맹(植盲)들에겐 원하는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것 같다.
난초와 관련된 그들만의 리그인가? 아니면 ‘난’쟁이들의 베스트셀러인가? ^^;

그리고 책 내용 중, 라로슈가 교접을 통해 새로운 난초를 만들 때의 말이 기억난다.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이 있으니까요. 나는 상상의 식물학을 믿습니다. 나는 가능한 한 식물의 관점에서 보고 식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목적이 전혀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오직 잡종들밖에 없습니다. (p150)”

그럼 나의 특징은 무엇인가. 조용하고 차분하다? 신중하지만 결단성이 부족하다? 협동성이 부족하고 혼자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런 특징에는 과연 어떤 목적이 있을까...
사람이 식물처럼 단순히 수정이라는 목적 하나로 살아가는 건 아니라지만 혹시 아무런 쓸모도 없이 조작된 껍데기뿐인 존재는 아닐까? 여기저기 주워들은 가식으로 위장한 체 ‘잡종’으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나는 잡종인가? 난초를 통해, 라로슈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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