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술잔
현기영 지음 / 화남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검푸른 제주바다를 닮은 표지를 넘긴다.
먼 곳을 응시한 작가의 사진은 바다의 심연을 헤집고 깊이 잠들어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하다. 몇 장의 간지를 더 넘기자 흰 여백의 모퉁이에 <바다와 술잔>이라는 흘림글이 보인다.
어쩌면 바다는 현기영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하는 비밀상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 제주 바다에서 한모금의 술로 지난날과 오늘을 어우른다.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다와 술잔>은 “한 소설 작품을 끝낸 후, 남은 자투리들로 마음 편하게 에세이를 엮는 일”이라 얘기했듯 현기영님의 자전적 소설적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못 다한 잔 얘기가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인간과 대지]에서는 제주라는 천해의 환경에서 태어난 현기영의 유년시절을 얘기한다. 하지만 그 기억 대부분은 4.3사태의 검은 잿더미와 산업화의 회색 콘크리트에 의해 매몰되어 버렸다. 제주는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동심이 없어진 저자는 용두암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우리들로 인해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대지(지구)에 대해 <녹색평론>의 글을 빌어 개탄한다. 물리적인 쓰레기와 함께 정신적인 공해까지도 점차 우리를 죄어온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연’이라는 화두는 어디에도 변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질문일 것인데...
또한 세상 속에 휩쓸리며 치고 박고 싸우기보다는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음미할 수 있는 관조의 자세, 오늘날의 각박함과 살벌함을 벗어날 수 있는 아웃사이더의 ‘변방정신’도 얘기한다.

[입새 하나 이야기]에는 소설 형식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잔잔하면서 조금은 서글픈 듯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세월은 물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게 만든다. 산문집 속에 들어있는 소설 같은 산문, 산문 같은 소설이라는 모호함에 색다른 재미를 느낀다.

[상황과 발언]에선 사소하지만 일상에서 음미해 봐야할 모습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영화라든가 TV, 신문과 같은 미디어로부터 폭력과 전쟁, 테러와 같은 문제까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얘기한다.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작가의 폭넓은 시선이 돋보인다.
그래서 조금은 논설조의 글도 보인다. 4.3과 같은 암울한 격동기를 몸으로 느낀 작가이니만큼 오늘날의 부조리를 매우 위태롭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그치고 설득하고 애원한다한들 고착화된 우리사회의 바이러스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말의 정신]을 통해 자신의 글에 대해 주로 얘기한다. 그의 글이 4.3이라는 비극을 묻고 있는 제주도에 너무 얽매여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그 내력에는 타지인의 무지와 외면 외에도 슬픈 역사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울분이 숨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멋모르던 시절의 의구심과 나이가 들어가며 알아가게 되는 ‘제주도’의 의미가 작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의 문화와 사회를 꼬집는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점점 동떨어져 가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변경인 캐리커쳐]에서는 검은 목탄으로 대강의 윤곽을 잡아 날쌔게 그린 캐리커쳐처럼 작가의 지인들을 투박하게 그려놓았는데 거친 질감 속에 숨겨진 정겨움이 인상 깊다. 문화와 예술을 넘나들며 선배와 후배, 친구로서 만나고 이야기하며 술잔을 돌린다. 그 거나하고 왁자한 분위기에 괜한 입맛을 다셔본다.


술잔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조금은 애잔하고 씁쓸하다. 비워버린 술잔에 이런저런 상념을 풀어놓으며 또다시 한잔을 들이킨다. 붉게 격앙된 취기어린 목소리도 들리지만 어쨌든 그 속에는 바다라는 넉넉함과 따스함이 숨어있다.
오래전에 둘러봤던 용두암과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가 다시금 생각난다. 그곳에서 한잔 술로 바다에 취하고 싶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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