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특이한 소설이다. 평소에 소설을 즐겨보지 않지만 이 책은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열린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프리랜서 기자로 틈틈이 이 소설을 썼고 일년후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되었다고 한다. 기자출신답게 소설을 경쾌하고 문장은 분명하게 잘 읽힌다. 뭔가 생각할 거리를 독자앞에 던져주고 열린 응답을 기대하는 저널리즘의 반대점에 서있는 듯한 소설이다. 분명하지 않는 결론, 하지만 분명한 문체와 인물들, 이러한 것들은 열린 우리네 인생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삶의 가치가 정해지는 듯한 모호함과 분명함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25살의 빛나는 시기에 맬컴 애드는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뭔가 개성있고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했던 맬컴 애드는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25살이후로 침대에서 어머니에게 사육(?)되기 시작한다. 분명치는 않지만 맬컴 애드는 똑같이 결혼하고 똑같이 자식을 기르고 융자를 갚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삶에 의문과 회의를 던지는 것이 유일한 단서가 될뿐 그가 왜 침대에 들어가 20년간 나오지 않았는지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는 않는다. 맬컴의 행동은 분명히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이지만 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는 그런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만족을 느끼는 그의 어머니이다. 침대에 누워만 있는 아들 맬컴 애드에게 음식을 갖다 바치며 몸이 비대해져가는 형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사랑의 전형이라고 할 수있다. 635킬로까지 되어 더 이상 밖으로 나갈래야 나갈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의 이 비정상적인 행위가 소설에서는 무덤덤하게 정상적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정상와 비정상의 전도하는 방법으로 삶의 아이러니를 묻는 작가의 물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사랑에 대비해서 맬컴 애드의 여자친구인 루는 정상적이고 성숙하기 까지한 맬컴의 어머니와는 대조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기이한 형을 사랑하는 루를 향해 남모르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화자 '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어쩌면 '익명'의 화자라고 할수 있다. 나는 가족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수동적인 청자이자 조연이고 가족에서 형은 언제나 주인공인데 그것을 늘 부러움과 경이로움으로 쳐다보게 된다. 맬컴 애드로 인해 가족은 점점 망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침 20년후 맬컴 애드가 자신의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붕을 부수고 기중기로 끌여올려진 맬컴 애드는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꼬라박은 가해자(?)임에도 언제나 당당하다. 이런 형에 대해서 '나'는 형 맬컴 애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게 진짜 삶이야? 우리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아. 형은 엄마를 노예로 만들었고, 아버지를 은둔자로 만들었어. 루는 내가 원한 전부였어. 그런데 형 때문에 영원히 못가질 뻔했지.

 

이런 동생의 물음에 형 맬컴 애드는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엄마에게 누군가를 이십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렸어. 내가 엄마를 살게 한거야

 

이런 불합리하고 부조리까지 한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삶의 아이러니, 삶의 비합리성, 삶의 의문,, 작가는 정답을 던지지 않는다..특별한 결론도 없다. 이한나 느낌은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한눈팔기>의 결론과 비슷하다. 끝까지 읽어도 답은 없고 허무하고 뭔가 미궁에 빠진 모습이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화이트 하우스도 또한 우리에게 나쓰메 소세키와 마찬가지로 삶은 때로는 미궁에 빠지게 하는 미로와 같고, 때로는 불합리하며, 때로는 부조리까지 한 우리의 손에 잡힐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삶의 희미한 형상 앞에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진지한 물음을 오히려 던지는 작가의 반전이 보여지는 듯하다.

 

모든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방쳐놓는 이기적이고 뻔뻔한 맬컴 애드, 이러한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매저키즘적인 어머니, 가장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그러나 그러한 상식적인 루도 비정상적인 맬컴 애드를 사랑하는 역설적인 인물, 이름도 갖지 못한 소설속의 피해자 '나'는 제각각의 삶속에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벼랑에서 바위를 굴리고 내려와 그것을 굴려 올려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는 부조리한 삶의 역설을 비쳐보여주는 인물들이 아닐까..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읽지도 않는데 이 책 <침대>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문체의 분명함과 주제의 모호함이 삶의 부조화를 말해주듯 말이다. 어쨌든 읽어볼만한 매력있는 소설임에는 적어도 나에게는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체르노빌 원전사고..그 말을 들은 것은 오래전 희미한 기억속에 어렴풋하게 딱 그 단어들만이 생각난다..'체르노빌 원전사고' 그냥 기억속에 원전이 파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이라는 흐린 기억만 생각날 뿐이였다. 이 책은 나에게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어떤 사고였는지 객관적인 정보 뿐 아니라 그 후로 그곳에서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게 해주었다. 엠마뉘엘 르파주라는 작가가 직접 아직도 방사능 피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지역에 직접 들어가서 취재하며 그곳에서 아직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취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흑백과 칼라의 색감이 살아있는 르뽀만화의 장르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따뜻한 감성과 그곳 체르노빌의 아픈 참사를 고스란히 만화의 느낌으로 전해주고 있다. 죽음과 아픔..그리고 상처와 아직도 삶이 교차하는 그곳의 인생에 대해서 논리적인 서술이 아니라 그림이 주는 감성으로 그곳의 흑과 백을 교차하며 그곳 체르노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왜 그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을까..그들의 삶의 뿌리를 박고 있는 터전이라서..아니면 다른 곳에서는 삶의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그 땅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어서..아니면 재정적인 능력이 없어서...엠마뉘엘 르파주는 몽환적으로 그곳 사람들의 흑과 백, 그곳 체르노빌의 과거와 현재의 흑과 백, 그리고 미래의 흑과 백을 교차적으로 그리며 삶과 죽음, 아픔과 절망과 이어지는 삶을 어지럽게 그려가고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아무리 최악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고 해도 결코 꺾을수 없을 수 없는 삶의 질긴 생명력을 그려주고 있다.

  

뭔가 혼미하고 야릇한 기분..이 만화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뭔가 원전에 대한 강한 경각심이나 그곳 피해자들을 돌아보자는 직선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그냥 뭔가 멀고 먼 원시적 생명에 대한 갈망..파괴..나무..공작..웃음..단절..어둠..빛...우울..분노..감상..르뽀...이러한 단어들이 얽히고 섥히며 묘하고 우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일련의 체르노빌 리스트에 <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아주 예술적이며 섬세한, 그리고 몽환적이기도 한 만화 한 권을 추가하려 한다. 이 성공적인 작품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더 만은 조사를 해서 뭔가 더 알고 있다는 그런 '갑빠'를 완전히 풀어헤친 그림들을 보여준다. 얼마 전부터 이유 없이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단어, '실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다.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에 들어가서 뭔가 예술적인 실마리를 끄집에 내어야 하는 예술가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삶, 이 이상의 실존이 있을 수 있는가? 존재가 아니라 그야말로 실존들이 엠마뉘엘 르파주의 손을 거치면서 몽환적으로 펼쳐진다. 꿈인가, 악몽인가, 이니면 삶인가? 그것은 실존이다. 그림이 이렇게 고울 수 있고, 그런 그림들이 이렇게 영혼을 빨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석훈-

 

우석훈의 위의 글처럼 이 책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느낌을 가장 잘 포착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잠시 빌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서 직간접적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정책을 결정하여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제도이다. 여기가 가장 중요한 용어는 시민이라는 말이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내며 소수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었던 그리스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현대로 오면서 국가가 커지면서 시민들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은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원하지 않는다. 이 책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세 시작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시민에서 고객으로, 주권자에서 자원 봉사자로,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이다.

 

이 책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어떻게 정부가 평범한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나 집단적인 지지에 의지하자 않고 전쟁을 수행하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의 정치 참여에 의지하고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행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은 유권자 대중들을 주변화 하였고, 점차 소수의 관료들과 공공의 정치기관을 통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다. 이러한 경향들을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구분해서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대중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발적 직간접적 정치의 참여의 장이 있었지만 이제 개인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를 의도적으로 소외시킨다. 이것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의 결정에 의해서 거대한 정치적 결정이 정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후퇴일 수도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경험은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개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p.9

 

이 책에서 분석하는 정치적 현실은 미국의 정치 지형의 변화이지만 지금 현국의 정치적 현실로 비슷하다. 이것은 정치적인 집단 뿐 아니라 NGO같은 비정부조직 같은데 에서도 민주적인 절차나 방법이 무시되고 일반 시민들의 참석이 제외되어 결정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점점 정치조직이나 비정부조직들이 비대해 지면서 자연스럽게 일반 시민이나 대중들은 주변화되고 원리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인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 참여가 축소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촛불시위같은 것은 이러한 자발적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아닌가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촛불시위같은 대규모 시민들의 정치적 행사는 실제로 정치적 현안이 될 수 없고 반영되지 않는 제외된 주권자들의 외침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소수 엘리트 정치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정치 주권자들이 주변화 되는 것은 소수 엘리트 정치인들의 권력 독점현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려가 있음을 이 책은 지적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유권자 개인 등록제를 실시함으로써 투표율을 낮추는 이상한 역행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은 정당의 성향에 맞는 미디어, 싱크 탱크, 이익집단, 종교단체들과 결탁함으로써 조정과 통제가 가능한 그들만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오히려 대중들의 정치참여를 밀어내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엘리트들의 기획에 의해서 실시되는 여론조사는 이미 소수의 정치인들의 고안한 기획에 의해서 여론이 수집, 가공될 가능성이 많아지고 모든 유권자들과 잠정적 정치 참여자들인 대중들을 기만하여 전체 여론을 조정가능하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정치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공공선을 위해 그리고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 선하고 의미있는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대중들이 주변화 된다는 것은 정치의 의도가 소수의 정치인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비단 미국의 문제 뿐 아니라 거대화되고 소수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이끌려져가는 모든 나라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책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시민권과 민주주의가 서있는 위치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대중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한과 참여를 충분히 감당할 때 소수 정치 엘리트에 의해서 개인민주주의로 역행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자각하고 그것을 찾아 참여할 때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로써의 기능을 하고 그러한 민주주의의 체제의 작동에 의해서 참된 정치는 실현되며 공공선은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시민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이 정치 경쟁의 조건을 만들었다. 관직과 영향력을 얻고자 경쟁하는 집단과 정당들은 시민을 조직하고 동원해야 했다. 대중의 지지는 권력의 원천이었으며, 정치 지도자들은 집권 경쟁을 통해,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높은 참여율을 일궈냈다. 그러지 않았다면 대다수의 시민들, 특히 저학력, 고소득층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한된 정보, 공적 문제에 대한 낮은 관심, 의사소통 기술의 미발달이 그들을 공적 삶의 변방에 남겨 두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활발하게 경쟁했던 지도자들이 그들을 공공의 장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활성화될 수 있었다. p.2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그리스, 현대 서구문명을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태이다. 현대 서구문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 문명과 히브리 문명의 두축으로 엮어져 있다.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거대한 담론이다. 그런데 그리스 문명이라 함은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적'이라는 형용적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서 정치, 철학, 문학, 예술, 여행등의 모든 인간의 활동이 총망라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틀과도 같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그리스 문명', '그리스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단어가 주는 역사적, 문화적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각론이 모여서 총론이 되듯이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역사를 통해서 한사람 한사람들이 만들어간 살아있는 역사이다. 다른 책이나 공부를 해도 언제나 '그리스'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모태본능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인류 문명에 있어서 그리스는 모태와 같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문명의 배꼽, 그리스>라고 지은것아 이닌가 한다. 그리스는 문명의 배꼽이다..매우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나는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적이 없고,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도 무지한 편이다. 그래서 '그리스적'이라고 말할 때 거대담론으로 내려오는, 나에게는 각론적 지식이 없는 거대한 이론적 단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경철의 이 책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나에게 '그리스작'이라는 말의 각론적 의미를 비교적 쉽게 가르쳐 주었다. 저자 박경철은 우리나라에서 청춘 멘토라고 할말큼 잘알려진 분이다. 원래 직업은 의사인데 의사 생활을 하면서 쓴 에세이 집이 인기를 얻어 이름을 얻었고, 그 후에는 투자전문가로써 이름을 알렸다. 의사이면서 투자전문가라는 두가지 전문직이 양립할 수 없는 부분인것 같은데 이것은 모두 이루어낸 것을 보면 대단한 집중력가 학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청년들의 멘토로 수없는 청년들을 만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멘토로 활약을 하였다. 안철수를 밀어주다가 혹 정치권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살짝 염려하기도 했지만 그의 그리스 여행기인 이 책을 보니 그가 정치를 할려는 야망이나 현실참여적 지식인이라가 보다는 인생과 삶을 관조하는 인문적 지식인이라는 생각이지배적이였다. 언제 또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책까지 내었나 생각하게 되었고, 조금은 마음 편하게 여행다니면서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지적 부르주아(?)라는 생각도 들긴했다.

 

마무튼 인류문명의 한축을 담당하는 거대담론인 '그리스 문명'을 직접 발로 밞으며 돌무더기인 고대문명의 현장속에서 영욕의 세월을 읽고 인생과 역사를 엮어나가는 여러 키워드들을 버무려 역사적 그리스 여행기를 써내었다. 특히 저자 발경철을 그리스의 유명한 여행가이자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안경으로 그리스를 여행했다. 그는 젊은 20대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를 읽고 영혼의 감동을 느껴, 그의 저작을 다 읽고나서 여행에 대한 소망을 키워가다 40대 후반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그리스 여행을 동반하게 된다. 저자는 그리스 땅을 밟으며 자신의 영혼의 작가였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와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저자가 떠올리는 질문을 그에게 묻고 그에게 답을 얻는다. 이렇게 이 책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철저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안경으로 보는 여행기였다. 그래서 그런데 박경철의 문장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장과 너무도 많이 닮아있었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지식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을 다소 감상적인 문장에 담아 살짝 양념치듯한 수사적 문장을 구사하였다. 그러한 문장방식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거의 비슷했다. 이렇나 수사적 문장이 나는 다소 낯간지럽기도 했지만 인문적 성향이 강한 저자 박경철의 여행의 향기가 전해지는듯 했다. 두사람의 문장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이 느낌이 비슷하다.

 

 

고대와 현대의 지혜는 영혼에게 필연성의 법칙에 순종하라고 꾸짖지. 지혜는 식물과 짐승과 신들이 다 같이 앞으로 달려나가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똑같은 방법으로 멸망한다는 비겁한 위로의 말을 통해 필연성을 설명하려 하지. 하지만 빈틈없는 영혼은 그런 위안을 섣불리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네. 왜 그러는지 알겠는가? 영혼은 필연성의 법칙에 선전포고를 하려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의 말대로 코린토스인들은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위안보다, 스스로에 대한 선전포고가 필요햇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의 영혼에 빈틈이 너무 많았고, 정신은 부패해서 이미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기어를 바꿔 넣으며 액셀러레이터를 조금 힘주어 밟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빈틈투성이였던 코린토스인들의 역사적 실패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는 듯하여 어지럽기만 했다. - 박경철

 

팩트(fact)보다는 감상적 수사(rhetoric)가 섞인 문장이 두 사람이 너무도 닮았다. 이 책의 거의 절반이상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는 나태와 열정, 문명과 야만이 공존하는 나라라고 한다. 특히 작가가 기획하는 10권의 그리스 여행기중 1권에 해당하는 이 책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문턱에 있는 코린토를 첫 여행지로 삼고 여행하며 감성을 적어주고 있다. 코린토스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세운 교회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특히 그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가지 문제들 특히 성적인 문제들이 많았는데 이 여행기를 보면서 아폴론의 여자세들이 매춘행위를 하였고 특히 '고린도인들 처럼 행한다'라는 말이 음락과 타락의 표현이였다는 것을 보고 왜 고린도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적이 문제가 있었는지 알수 있엇다. 이렇듯 내 말로 직접 걷지는 못했지만 작가의 길을 따라가며 그리스 문명의 문턱인 코린토와 펠로폰네소스의 기억의 역사를 보면서 그곳에서의 영욕의 역사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도록 많은 발판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의 나라, 철학의 나라, 인류문명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어준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특권이자 공부일 것이다. 박경철의 이 책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특히 나에게 거대담론이였던 그리스 문명의 각론적 실마리를 보여준 책이였다. 조금씩 그리스의 돌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 서있는 거대한 신전과 신의 형상이 어떤 문명으로 형상화되었는지 조금이나마 만질수 있는 기회였다. 앞으로 시리즈로 나올 박경철의 그리스 여행기가 기대된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취와 인류 문명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던 그리스의 발자취를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란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허리 휘도록 무거운 돌덩이를 등짐지어 나르며 그 위해단 문명의 탑을 쌓아올린 이름 모를 민초를 빼놓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 문명의 정통성이 바로 민초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p.18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