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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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음식에 관한 티비 다큐멘터리나 책들이 많이 나온다. 음식에 관한 책들도 많이 출판된다. 음식을 의식주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써 그리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들이 많이 나온다. <한국인의 밥상> 이나 <음식이 제국>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것들이라 하겠다. 다이어트나 건강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써 음식을 코드삼아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최근에 다양하게 회자된다. 그리고 이러한 먹거리라는 문화적인 코드로 읽힐때 이것은 비단 '먹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모습이 담겨지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이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는 러시아 문학에 담겨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즐겨보는 독자층이 아닌 나같은 사람들에게도 러시아 문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음식문화적 코드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분석방법은 러시아 문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접근하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다수의 러시아 문학에 관한 책을 펴낸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이 책외에도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에 관한 책들을 펴냈고 또 문학속에 숨겨진 '뇌'라는 흥미있는 주제로 책을 썼다. 러시아 문학을 하나의 코드로 엮어서 문학의 역사와 러시아 사회의 문화사를 함께 풀어내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 문학 작가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퓨쉬킨, 솔제니친,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속에 담긴 음식코드를 통해서 러시아 문화사와 사회사와 문학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저자는 작품분석을 통해서 러시아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작품속에서 어떻게 음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고 그것이 상징성을 가지게 되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작가들이 의도적으로 음식을 문학을 풀어가는 상징적 코드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음식이라는 코드는 그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 코드로 적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작가는 '텍스트와 전기를 이어주는 여러 연결고리 중의 하나로 작용하며 문화적인 기호로써 작품과 작가를 배출한 시대 상황을 조망해 준다.' 고 말하며 음식이 문화전반, 즉 정치, 경제, 사회, 과학등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고찰의 대상이 되었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음식과 문학을 연결시킨다. 표트르 대제는 놀라운 개혁추진력으로 유럽식 문화를 들여오면서 러시아 특유의 음식문화와 유럽의 문화가 결합하여 풍성함과 화려함으로 대변되는 음식문화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음식'과 '남의 음식'으로 구별하여 비교분석하고 있고 이어서 육체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 옛음식과 새음식으로 구분하므로 러시아 문학속에 담긴 음식코드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 나간다.

 

솔직히 러시아 문학을 잘 알지못하고 읽어보지 못한 나로써는 이러한 구체적인 문학 분석이 그렇게 많이 와닿지 않았다. 차리라 러시아 문학을 읽어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급선무인지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러한 음식코드를 통한 러시아 문학의 분석은 상당한 러시아 문학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코드로 분석하는 미시적인 해석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작품은 그 자체로 감상하고 그 느낌을 포착하여 개인적인 예술적 감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분석하는 태도는 예술을 잘게 쪼개는 썩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이것은 수전 손택이 그녀의 책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책에서 피력한 견해이다.

 

어쨌든 음식이 이제 인간이 기본적으로 향유해야할 하나의 기본적 향유조건이 아니라 문화와 인문적 포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학에서도 음식이라는 코드로 하나의 내러티브로서가 아니라 거대서사적 배경까지로 포착할 수 있는 좋은 분석도구가 된다는 것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이 책은 나에게 하나의 코드로 문학을 좀더 깊이 감상할 수 있는 툴(tool)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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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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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는 매우 유명한 고전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신들을 믿지 못하게 하고 청년들을 교란시킨다하여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의 죽음은 장엄하였으며 그의 평소의 신념에 따른 철학자 다운 죽음이였다. 그때 플라톤의 나이는 28세였고 그때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평소에 스승 소크라테를 존경하였고 그래서 플라톤이 쓴 책에는 거의가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이 플라톤 철학에 흐르는 큰 방법론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하여 결국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플라톤에게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인물이였고 그는 그를 따랐던 인물이였다. 따라서 이 책 <국가>에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후기로 갈수록 자신의 철학이 더 많이 묻어난다. 크게 나누면 이 채은 1,2권과 그 나머지권들로 나눌 수 있다. <국가>에는 오래동안 철학적 정치적 주제가 되어왔던 큰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정의란 무엇인가?’, ‘이상 국가에서는 애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 ‘모방적인 시는 왜 이상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물음과 답이 있다. 이러한 주제는 오랜세월이 흐르면서도 다양한 답변들이 시도되고 있어서 과연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할만하다.

 

번역하신 분은 천병희 선생님이신데 이분은 그리스 고전에 대한 전문번역가로 이름이 높다. 또 그것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 ‘숲’에서 출판된 것도 이 책의 번역에 대한 신뢰를 높인다. 번역자에 따르면 이 대화편의 그리스어 원제는 Politeria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라틴어 Respublica로 번역되면서 그것이 으레 <국가>라고 변역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의미는 ‘정체(政體)’에 더 가깝다고 한다. 아마도 물론 국가에 대한 통치이념과 통치자에 대한 기술들이 나오겠지만 그 범위가 국가라는 주제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국가>는 원래 플라톤이 정계에 진출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아카데미아를 설립한 지 얼마 안 되어 쓴 것으로 추정한다. 그후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상국가에 대한 이론적 원조가 되어서 서양의 철학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형이상학, 정치철학, 윤리학 등 거의 모든 철학분야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지금도 그 원류를 흘러보내주고 있다.

 

플라톤은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말은 현대에 와서는 그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그당시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은 바로 철학자의 모습이였다.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고 그에 따른 통치이념과 기술도 복잡해 지면서 국가 통차자의 모습은 단순한 이상적인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기술적 문제로 바뀌면서 플라톤이 말한 통치자로써의 철학자의 이론은 조금 그 빛을 바랬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이상적인 국가에서 통치자로서 철학자가 중요하다고 말했는가? 플라톤은 통치자는 온순하면서도 격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리고 지혜를 사랑해야한다고 믿었다. 즉 통치자는 어떤 것을 기술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를 볼수 있는 능력, 즉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는 지혜를 구하는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국가는 어느 한부분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국가 구성원 전체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곧 통치자라고 말하고 그것이 통치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모든 국가 구성원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국가의 타락에서 찾았다. 즉 구성원의 ‘부와 빈곤’의 차이가 상대적인 박탈을 느껴서 행복하지 않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당히 현대적인 생각을 느낄수 있다. 현대인들도 중산층이지만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중산층이 아니라 빈곤층이라고 느낀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를 부유층과 비교하고 그에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이 그들을 스스로 빈곤층이라고 느끼게 한다. 아마도 플라톤 시대에도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요인이 물질적인 부분이 가장 컸나보다. 이러한 상대적인 빈곤은 국가의 타락을 가져오고 그것은 전체적으로 국가의 약화를 동반한다.

 

플라톤은 이상적은 국가를 위해서는 통치자가 지혜가 있어야 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하고, 또 이상적은 이데아적 국가를 위해서는 남녀평등의 이념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한다. 현실정치인이 아니라 철학자의 견해라서 그런지 다소 이상주의적은 냄새가 많이 난다. 시를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가 아닌 그림자는 추방해야 한다는 부분은 철학자의 사변적인 비현실적 견해가 분명히 한계를 보이며 드러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정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며 그것이 바람직한 국가론에 모델을 보여주고 현대국가가 국가론에 대한 정의를 내릴때 중요한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개인이나 사회가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았다. 자질이 있더라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론의 정립은 정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성립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이 책 <국가>를 통해서 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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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4-22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제 읽기 시작하였는데 방대한 분량이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ㅎㅎ
리뷰 보니 얼릉 읽고 싶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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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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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건축을 위한 철학>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번 훑어보았는데 인문적 내용이 상당히 좋았다. 나는 철학과 건축에 관심이 있는데 이 책은 두 개의 분야를 연결시키기를 시도하는 책이였다. 제목에서 볼수 있듯이 건축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즉 공간을 채우는 거주와 예술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건축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철학으로 놓기 위한 인문적 책이다. 요즘 집짓기에 관심이 생기고 거주와 공간의 예술로서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실제적인 측면에서의 건축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통해서 건축보다는 철학적 개념과 구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철학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보통 돈(?)이 되지 않는 머리 아프고 복잡한 작은 사유의 흐름을 포착에서 개념화시키고 이론화 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철학의 개념은 쉽게 잘 이해가 되지 안았다. 그런데 이 책은 오히려 나에게 서양철학의 기본 개념과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서양철학의 가장 주된 주제중의 하나인 '존재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다.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핵심 기둥으로 개별적 존재의 실체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개념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통해서 왜 서양에서 존재론, 즉 있음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플라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존재, 즉 실체(substance)라는 것은 개별적인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실체로써 존재한다고 하는 개념을 '이데아'라고 부르며 정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실체는 없으며 개별적 사물에 보편적 실체가 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을 건축을 존재의 기호로 보면서 철학과 건축을 연결시켜나갔다.

 

 

보통 철학자들은 인간의 사유는 오직 언어를 통해서 표현된다고 말한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사고가 전적으로 말을 바탕으로 하며, 언어 특정적 성격이 있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p21 그리고 "모든 사고는 언어적이다."라고 주장한 영국 철학자 마이클 더멧(Michael Dummett, 1925~ )은 시각적 상상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것을 사고로 간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p22 만약 모든 사고가 언어를 바탕으로 일어난다면, 우리가 알거나 믿는 것은 다 우리가 사고에 사용하는 언어에 좌우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언어가 현실을 조각해 우리의 사고대상으로 빚어낸다고 말한다. p22 이 말은 인간존재의 표현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 그 대상을 조직할 수 있다는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은 20세기 건축가들에게서는 공감하기 힘든 말이다. 건축가들은 공간을 차지하는 기호인 건축이야말로 진정으로 인간존재와 지각하고 인식하는 대상들을 잘 드러내주는 사고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인간사유의 표현은 언어뿐 아니라 건축이라는 대상물로도 표현될 수 있다고 하므로써 건축이 단순히 거주의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다른 양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므로 건축을 위한 철학의 당위성을 알린다.

 

 

그러나 이 책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건축을 위한 책은 아닌것 같다. 현대철학의 주요한 인물의 철학사상들을 설명한다. 그것도 매우 간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데 이부분에서 오히려 현대철학의 전체 흐름을 매우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는 특히 앞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어려운 '존재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었다. 이 책 전체의 구성은 현대철학의 맥과 상응한다.

 

 

1장 플라톤, 2장 아리스토텔레스, 3장 근대성의 부상, 4장 이마누엘 칸트, 5장 낭만주의 역사주의 , 6장 현상학과 해석학, 7장 필로소프와 필로서퍼, 8장 분석철학

 

 

건축을 배우기 위해서 이 책을 본다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책은 분명히 형이상학을 형이하학과 연결시켜 철학적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즉 형이상학인 철학을 형이하학인 건축에 빗대어 그 개념을 설명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건축이야 말로 철학개념을 잘 설명해주는 형이하학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웠다. 존재론, 구조주의, 해제주의, 현상학, 분석철학 등의 커다란 철학적 주제가 건축과 상응한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철학의 도면이라면 건축은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과 건축, 이 매력적인 두 분야가 만나서 무엇을 돋보이게 하는가? 적어도 이 책에서는 건축이 아니라 철학이다. 건축은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어지는 것 같다. 오히려 제목이 <건축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철학을 위한 건축>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 같다.

 

 

플라톤은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형상이 실재한다고 추론하고, 변하는 물질 사물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존재론'이라는 철학 분야를 창시했다. 존재론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그것이 어떤 의미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한 마디로 존재론은 '존재'자체를 다루는 분야이다. 비록 건축 이론가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철학자들은 건축 이론 중 특정 문제들을 '존재론적 문제'라고 말할 것이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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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4-2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친구의 리뷰는 핵심과 감성의 집합체 ㅋㅋㅋ 제가 타당한 주장을 한 거죠 ㅋㅋ
건축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건축이론을 위한 철학의 구조가 맞다는 ㅋㅋ
친구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같은 생각에 위로 받습니다 ㅋㅋ
 
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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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정한 기간동안에 떠오르는 화두가 되는 주제가 있다. 몇해전에는 ‘불루오션’, 최근에는 ‘인문학’, ‘힐링’, ‘뇌과학’이 그것이였다면 가장 최근에는 아마도 ‘공부’가 아닐까 한다. 얼마전에 티비에서 방영했던 4부작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필두로 공부에 관한 책들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한국에서 중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익숙한 공부라는 주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할 수도 있겠다. 나 또한 그랬다. 공부라고? 그것이 무엇이 새롭다는 것이지..라는 생각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동안 우리가 공부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의미의 재정의로써 이 말이 떠올랐을 것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닌가 싶다. 나도 진정한 공부, 진정한 배움을 익혔던 것은 제도권안에서의 성적을 잘받아 좋은 학교가는 공부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홀로 책을 읽으면서 깨달아가고 스스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공부의 맛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동양의 공부론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전통이 있는데 왜 한국교육은 그러한 좋은 동양의 공부와 수양의 전통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단순한 정보와 지식을 암기하는 저차원의 공부로 급락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공부는 자기를 확장하고 내면의 동기를 유발하여 스스로 성장하고 세상에 유익을 주는 발전이 공부의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최고의 공부>는 비록 서구적인 분석적 공부론의 한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원래 공부의 목적과 의미에게 상당히 유사하게 다가간 것에 대해서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는 켄 베인이다. 앞날개 저자의 이력을 보니 오래전에 EBS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최고의 교수>를 진행하고 기획했던 사람이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8명의 최고의 교수를 연구 분석하여 그 결과를 한권의 책으로 엮고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 이 책 <최고의 공부>의 저자 켄 베인이였다.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이 책은 공부의 목적과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좋은 성적을 얻기위해서? 좋은 인생의 도로를 닦기 위한 도구가 되니까? 남보다 더 뛰어날 수 있으니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한다.

 

학생들이 모든 배움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세상에서는 배움이 사람들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바꿔 놓는다. 사람들은 더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더 창의적이고 자비로우며, 책임감 있고 자신만만하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문과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영역을 느긋하고 즐겁게 탐구하며, 세상이 얼마나 복잡해 질수 있는지 알기에 무척 겸손하다. 학습은 모험과도 같다. 비록 몇몇 사실을 잊는다 하더라도, 필요하면 다시 찾는 방법을 알수 있다. (p.18,19)

 

위의 문장에서 참된 공부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 중요한 진술을 몇가지가 포함되어있다. 여기서 나는 공부는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렇다. 참된 공부는 머리의 차원에서 인식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 자극을 주어서 깨닫고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세상의 지식을 통해서 자신을 사신됨 즉 정체성을 바르게 형성해나가는 것은 무엇보다 참된 공부의 매우 중요한 기능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나를 만든 5할이 독사라고 생각한다. 어려울때 내가 흔들릴때 무너질것 같을때 책을 들고 읽었다. 가장 작은 움직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건설적인 것이 독서였기 때문이였다. 그때는 생존 때문에 읽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독서가 지금의 나를 형성해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공부는 자신의 자신됨을 다져주고 확장시켜주어 좀더 나은 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확장되어 참된 자기 정체성을 가지면 당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창인 세계관도 더 넓어지고 확장될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문장에서 세상을 알고 세계관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알기에 더 겸손해 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지식이 말고 배울수록 교만해져서 배움이 적어야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말이다. 참된 공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넓어지면 당연히 겸손해 진다. 이해력이 깊어질수록 세상과 사람은 넓고 자신은 그 넓은 세상에 작은 한부분임을 알기에 더욱 겸손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공부는 자신의 사고 자체를 볼줄 아는 능력이 생기기에 더욱 신중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공부를 통해서 스스로를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학습자는 자신의 능력과 그 밖의 것을 인지하여 매사에 분명하고 창조적인 활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메타 인지는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의미있는 사고를 하고 자신의 전문 기술에 적응해, 최고수준의 성장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참된 학습은 자신을 상대방을 세상을 피드백할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키울수있는 능력이 된다. 안과 밖을 조망하여 전체 인식적 지도를 자신의 제한적인 인지안에서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된다는 말이다.

 

저자는 학습자를 세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피상적 학습자, 둘째는 심층적 학습자, 셋째는 전략적 학습자이다. 피상적 학습자와 전략적 학습자는 비슷하다. 자가확장이 아니라 자기성공의 도구로 사용하는 학습자를 말하는 반면 심층적 학습자는 공부를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기는 하나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앎을 추구하고 배움을 통해서 자기 확장으로 나아가는 학습자를 말한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단순한 지식의 추구보다 태도를 중요시하며 앎 자체를 선호하기에 끈기와 노력을 통해서 깊은 학습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서 자아 정체성과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아간다. 이러한 두 번째 유형 심층적 학습자야 말로 진정한 공부를 하는 유형인 것이다.

 

이 책은 학습을 통하여 자기확장과 성공에 이른 사람들을 분석하여 그 결과를 알려주는 형식이다. 서구식 학습방법이라는 한계도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부의 의미에 대해서는 동양공부론이 서구식 공부론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하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과 세상은 포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적 방법론은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파편적이고 좁다. 그러나 이 책 <최고의 공부>는 참된 공부의 의미를 최대한 그 원래 의미에 밀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보니 전정으로 평생동안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여 더 나은 나의 모습과 나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갖게한다. 평생 공부하여 자신과 세상을 통합시키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책은 그러한 소망을 꿈꿀 수 있도록 나를 자극하는 책이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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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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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이한 소설이다. 평소에 소설을 즐겨보지 않지만 이 책은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열린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프리랜서 기자로 틈틈이 이 소설을 썼고 일년후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되었다고 한다. 기자출신답게 소설을 경쾌하고 문장은 분명하게 잘 읽힌다. 뭔가 생각할 거리를 독자앞에 던져주고 열린 응답을 기대하는 저널리즘의 반대점에 서있는 듯한 소설이다. 분명하지 않는 결론, 하지만 분명한 문체와 인물들, 이러한 것들은 열린 우리네 인생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삶의 가치가 정해지는 듯한 모호함과 분명함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25살의 빛나는 시기에 맬컴 애드는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뭔가 개성있고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했던 맬컴 애드는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25살이후로 침대에서 어머니에게 사육(?)되기 시작한다. 분명치는 않지만 맬컴 애드는 똑같이 결혼하고 똑같이 자식을 기르고 융자를 갚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삶에 의문과 회의를 던지는 것이 유일한 단서가 될뿐 그가 왜 침대에 들어가 20년간 나오지 않았는지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는 않는다. 맬컴의 행동은 분명히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이지만 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는 그런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며 만족을 느끼는 그의 어머니이다. 침대에 누워만 있는 아들 맬컴 애드에게 음식을 갖다 바치며 몸이 비대해져가는 형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는 비정상적이고 뒤틀린 사랑의 전형이라고 할 수있다. 635킬로까지 되어 더 이상 밖으로 나갈래야 나갈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의 이 비정상적인 행위가 소설에서는 무덤덤하게 정상적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정상와 비정상의 전도하는 방법으로 삶의 아이러니를 묻는 작가의 물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사랑에 대비해서 맬컴 애드의 여자친구인 루는 정상적이고 성숙하기 까지한 맬컴의 어머니와는 대조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기이한 형을 사랑하는 루를 향해 남모르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화자 '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어쩌면 '익명'의 화자라고 할수 있다. 나는 가족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수동적인 청자이자 조연이고 가족에서 형은 언제나 주인공인데 그것을 늘 부러움과 경이로움으로 쳐다보게 된다. 맬컴 애드로 인해 가족은 점점 망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침 20년후 맬컴 애드가 자신의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붕을 부수고 기중기로 끌여올려진 맬컴 애드는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꼬라박은 가해자(?)임에도 언제나 당당하다. 이런 형에 대해서 '나'는 형 맬컴 애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게 진짜 삶이야? 우리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아. 형은 엄마를 노예로 만들었고, 아버지를 은둔자로 만들었어. 루는 내가 원한 전부였어. 그런데 형 때문에 영원히 못가질 뻔했지.

 

이런 동생의 물음에 형 맬컴 애드는 뻔뻔하리만큼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엄마에게 누군가를 이십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렸어. 내가 엄마를 살게 한거야

 

이런 불합리하고 부조리까지 한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삶의 아이러니, 삶의 비합리성, 삶의 의문,, 작가는 정답을 던지지 않는다..특별한 결론도 없다. 이한나 느낌은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한눈팔기>의 결론과 비슷하다. 끝까지 읽어도 답은 없고 허무하고 뭔가 미궁에 빠진 모습이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화이트 하우스도 또한 우리에게 나쓰메 소세키와 마찬가지로 삶은 때로는 미궁에 빠지게 하는 미로와 같고, 때로는 불합리하며, 때로는 부조리까지 한 우리의 손에 잡힐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삶의 희미한 형상 앞에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진지한 물음을 오히려 던지는 작가의 반전이 보여지는 듯하다.

 

모든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방쳐놓는 이기적이고 뻔뻔한 맬컴 애드, 이러한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는 매저키즘적인 어머니, 가장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그러나 그러한 상식적인 루도 비정상적인 맬컴 애드를 사랑하는 역설적인 인물, 이름도 갖지 못한 소설속의 피해자 '나'는 제각각의 삶속에서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벼랑에서 바위를 굴리고 내려와 그것을 굴려 올려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는 부조리한 삶의 역설을 비쳐보여주는 인물들이 아닐까..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읽지도 않는데 이 책 <침대>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문체의 분명함과 주제의 모호함이 삶의 부조화를 말해주듯 말이다. 어쨌든 읽어볼만한 매력있는 소설임에는 적어도 나에게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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