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힌트를 주는 방식
귀향하지 않은 작가들 - 하 진 & 이윤 리
중국인 시 씨는 이혼한 딸을 만나러 미국에 온다. 그러나 딸과의 이야기는 시 씨가 원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버지와 딸은 그다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원하지만 딸은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딸의 혼자의 삶은 결코 충만하지 못하다. 딸이 새로운 삶을 살기를, 그러니까 다른 남자를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딸은 결코 아버지의 뜻대로 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은 여자에게, 특히 그의 딸처럼 생각 많은 여자에게 건전하지 못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는 딸의 고독을 방해하기 위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그가 보지 못하는 딸의 생활에 대해 질문을 한다. ( 천년의 기도, p.328)
아버지의 질문에 딸은 단답형으로만 대답을 하거나 방문을 닫거나 한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는 원만하지 않다. 시 씨는 집 앞 공원에서 이란 여자를 만난다. 그 둘은 영어로 대화한다. 그러나 둘 다 영어가 서툴다. 그 둘은 서로가 하고 싶은 속 깊은 얘기는 자신의 나라 말로 얘기한다. 시 씨는 중국어로, 이란 여자는 페르시아어로.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서로에게 반응하고, 대꾸하고, 이해한다. 오히려 같은 나라 말을 쓰는 딸 보다 다른 언어를 쓰는 이란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음은 나는 가장 처음, '필립 클로델'의 『무슈린의 아기』에서 알게 됐다. 이 책속에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노인이 벤치에 앉아 우정을 나눈다.
영화 『만추』에서도 그랬다. 하오/화이 씬을 좋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이 영어로 얘기하면 그 둘은 서로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얘기했다고 해서 상대와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상대에게 내 뜻과 감정을 밝히는 수단이지만, 그 수단이 반드시 언어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윤 리'의 단편집 『천년의 기도』에서 내가 가장 처음 읽은 단편이며,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이기도 한, 이 [천년의 기도]에서 아버지는 이란 여자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중국에는 수백세가동주修百世可同舟, 즉 누군가와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인연에는 3백 년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마담에게 영어로 설명할까 생각했지만 그깟 언어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마담은 통역이 있건 없건 그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 우리가 이럴 수 있기에는 오랜 시간의 기도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는 중국어로 마담에게 말한다. 마담은 동의하는 미소를 짓는다.
"그 속담의 뜻은 모든 관계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친구와 적,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베개에 나란히 머리를 누이는 데는 3천 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딸? 아마 천년은 필요하겠지요. 아무렇게나 아버지와 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p.333)
이 문장을 읽고 있노라니 나의 모든 관계가 소중해진다. 우리는 결코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백년을 혹은 천년을 기도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잃을 수 없다. 그 모든 나의 기도를 헛되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 기도는 나 혼자만의 기도였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삼천년을 기도했지만 당신은 삼십년쯤 하다가 말았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 관계는 공평하게 시작할 수 없었고, 이대로 천천히 아니, 갑작스럽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관계였던 것처럼.
임태경의 노래 가사도 생각났다. 이 생 다 지나고 다음생에 꼭 만나기를, 이라는 가사. 다음생에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 당신의 삼천년의 기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미 해두었으니.
어제는 볼 일이 있어서 마치고 나니 저녁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저녁 대신 두유 하나만을 먹은 상황. 밥을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무척 고팠으니까. 나는 대체로 지친 하루를 마감하면서 푸짐하게 저녁을 먹자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오늘 저녁은 초라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피곤했으니까 초라하고 간단하게 먹은 뒤에, 그리고 푹 쉬자, 라고. 어제는 초라하게 먹고 싶은 날이었고, 나는 걷다가 분식집에 들렀다. 여덟시가 넘은 분식집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라면과 김밥을 시켰다. 내가 생각하는 초라한 밥상이었다. 그런데 6,500원이 나왔다. 아 짜증나..무슨 초라한 밥상이 6,500원 씩이나 해? 뼈다귀해장국도 6천원인데.. 내가 먹은건 고작 라면 과 김밥 일 뿐이었는데 6,500원이라니. 이건 좀 너무한게 아닌가 싶었다. 라면은 돈 없을때 가장 먹기 편한 식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왜 6,500원이나 투자해야 하는가!! 이것은 잘 먹는 것이잖아. 6,500원은 결코 초라한 식사 비용이 아니잖아!! 나는 몹시 화가났다.
초라한 식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라면 하나만 시켰어야 했던걸까?
아니면 김밥 한줄만?
아니면..
참치 김밥...을 시키면 안되는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