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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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호 캐비닛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13이라는 숫자에 큰 의미는 없다. 그저 왼쪽에서 번호를 붙였을 때 열 세 번째의 캐비닛이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캐비닛에 무언가 낭만적인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상상, 일찌감치 집어치우란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므로!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김언수의 <캐비닛>은 그야말로 캐비닛에 관한 이야기이다. 캐비닛의, 캐비닛을 위한, 캐비닛에 의한 이야기라 하면 조금 과장일까.

 

 

  그래놓고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루저 실바리스'라는 죄수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은 화산 폭발로 인해 분출된 화산재와 용암이 '앗 죽는다! 피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뒤덮으면서 세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 수감되어있던 죄수 루저 실바리스다. 그는 마을을 떠나 멕시코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진 곳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그 남은 30년 동안 상피에르 마을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는데, 상피에르 사람들의 모습은 상당히 기괴하다. '뭐 나만 살아남았으니까 내 맘대로 쓸래!'라고 생각했다한들 루저 실바리스는 왜 그런 기록을 남긴 것일까.도대체, 루저 실바리스는, 왜? (p.22)




  그 다음부터는 화자인 '공덕근 대리'가 13호 캐비닛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습으로 급격하게 장면이 전환된다. 그는 연구소의 행정직에 입사한 뒤 따분하기 짝이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우연히 들어간 자료실에서 13호 캐비닛 속에 있는 진기한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권박사'에게 들킨 뒤로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권박사의 조수가 되어 13호 캐비닛에 들어있는 사연의 주인공들의 전화를 받아, 상담 시간을 조정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준다. 아니, 그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인간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식료품을 규정하는 이 세계의 상상력을 전복시키고 일대 충격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믿거나 말거나> 같은 프로그램에 한 번 출연해보려고?_p.29





  휘발유를 BMW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있고, 평생을 유리만 씹어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느날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난 남자가 있고,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는 잠깐의 찰나였으나 순식간에 세월을 뛰어넘어버린 타임 스키퍼(time skipper)가 있고, 한번 누웠다 하면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잠들었다 깨어나 삶의 활기를 되찾는 토포러(torporer)가 있다.

  입 속에 도마뱀을 키우던 여자의 혀는 어느샌가 도마뱀이 되어버린 키메라 형질이 발견되었고, 고양이에 대해서만 오로지 감정 표현이 가능한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고양이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남자가 있다.

 

 

 

  권박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13호 캐비닛에 보관해 뒀다. 인간이라는 종(種)의 무대가 막을 내릴 때가 온 지금, 종의 진화가 아닌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참으로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과학의 현미경 밖에 놓여있다는 이유로 이단이 되어버릴 새로운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 '심토머(symptomer)'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것은 무슨 인류학 박물지 같은 것입니까?"

내가 처음 13호 캐비닛에 대해 물었을 때 권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성경의 끝이지. 인간이란 종의 마지막 단계고. 그리고 새로운 종의 시작이지."_p.31





  제1부 [캐비닛]에서는 그러한 심토머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죽 나열되어 있다. 작가는 분명히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 등등에 나올 만한 그런 이야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생각은 그런 쪽으로 흘러간다. 혹시, 여기에 이렇게 나오고 있는 심토머들 중에서 내가 분명 TV에서 한 번쯤 보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신기하답시고 그야말로 흥미를 위한 눈초리를 보낸 후 급격하게 관심이 식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TV에 나오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기타등등. 나도 모르게 소설 속에서 작가가 풀어놓는 그럴듯한 '구라'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2부 [천국의 도시]에 이르러서도 심토머의 이야기는 옴니버스식으로 계속해서 나열된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들려주던 심토머들의 이야기가, 그럴듯한 '구라'로 포장되어져 있을 뿐 그 본질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너무나도 빠른 흐름 속에서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타임 스키퍼'가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빨리 변하는 현대 일상에 휩싸여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혀가 도마뱀이 되지 않았을 뿐, 자신의 속내를 감추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언제나 틀에 박힌 반복된 삶 속에서 지쳐버린 우리는 '토포러'처럼 푹 잤다가 깨어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저도 심토머인가요?"

"아뇨, 당신은 심토머가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은 아직 이 도시에서 견딜 만합니다."_p.293


 




  <캐비닛>이라는 소설은 이렇게 상당히 낯선 존재가 현대 사회의 실체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토머라는 상당히 낯선 존재들의 나열,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뒤에서 조용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아포리즘.

  캐비닛 속에 들어있던 심토머들을 지켜보며 문득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깨닫는 순간 입가에 지어지는 씁쓸한 미소.

  이처럼 <캐비닛>은 블랙유머로 무장한 캐비닛 속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어느 한 구석인가에 펼쳐보인다. '그래,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든?'하고 물어보면서 말이다.

 


 

 

 

  소설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루저 실바리스의 이야기는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잘 알려진 마르케스의 작품에 단 두 줄 등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작가는 A4용지 여섯 장 정도의 분량으로 풀어냈다고 하는데, 아마 소설 속 심토머들의 모습 역시, 마르케스의 작품 속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등장하곤 하는 '마술적 리얼리티'를 지닌 등장인물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소설의 처음과 비슷한 장면으로 마지막을 마무리 짓는다. 공 대리는 키메라 연구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려는 기업의 협박에 시달리다 끝내 은둔의 삶을,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마 루저 실바리스처럼, 30년에 걸쳐 13호 캐비닛 속에 들어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자신 혼자만을 위해 써내려가며 심심함을 달래곤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일관성있는 소설의 구성은 상당히 좋지만, 그를 위해 갑자기 등장한 거대 기업과 그들이 자료를 입수하기 위한 행보가 조금 아쉬웠다. 갑자기 너무 산으로 가는 것 같아 깜짝 놀랐는데, 마지막 마무리를 위한 구성이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방법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 속 상당히 달콤하지만 쌉싸래한 블랙유머가 마음에 든다. '그럴듯한 구라'에서 시작된 캐비닛 속 이야기는 '좋은 구라다.' 하고 만족스럽게 책을 덮게 해 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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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치여자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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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갑자기 떡하니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인류는 털이 북실북실했을 것이고, 그렇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처음'이 되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자기와는 조금 다른, 홀로 진화에 한 발짝 더 내딛었을 뿐 그 주변에도 분명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가 있지 않았을까.




  그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부터 언어는 발달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언어를 갖추어 조금 더 나은 생활 방식을 모색하며 차츰차츰 발달했다. 그에 따라 상당히 직접적인 의사 표현만 했던 언어 체계 역시 점차 정교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사고가 언어에 앞서지는 않았을까.




  분명 태어나면서부터 언어는 완벽하지 못했겠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는 사고마저 자연스럽게 습득한 모국어를 이용한다. 그렇게 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하게 '언어가 먼저냐, 사고가 먼저냐'와 같은 알쏭달쏭한 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만다. 이미 말을 못하던 아기 시절의 내 사고는 어땠는지 기억할 방도가 없기에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세 가지 장점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1.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2. 나는 상상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쓸데없이 걱정하거나 속을 끓이지 않는다.

3.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은─사실 그게 훨씬 더 많지만─절대로 모른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는 스탠더드한 인간들에 비해 내가 지닌 커다란 장점이었다._p.44~45













  이사벨 이모는 캘리포니아에서 살다가 유산 상속 소식을 듣고 멕시코 마사틀란을 찾아온다. 그녀가 상속할 유산이란 바로 '아투네스 콘수엘로'라는 이름의 참치 가공 공장이었다. 처음 공장을 방문한 그녀는 쉴새없이 참치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며 그 속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흥건한 장면을 보며 그 비린내에 바로 토악질을 하고 만다.

  게다가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온 또 다른 유산인 집은 그야말로 보수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말도 없이 날뛰며 그 창문을 다 부숴버린 지하실에 갇힌 짐승 한 마리. 카렌과 이사벨 이모의 첫 만남은 그런 것이었다.













인간들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이처럼 명료하게 표현해주는 문장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선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을 한다는 사실쯤은 두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이다._p.53













  그러나 이사벨 이모는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카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나' 그리고 '너'에 대한 구별을 잘 하지 못했던 카렌은 차츰 언어를 익혀가기 시작했고, 비록 조금은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약간의 자폐증'과 '부족한 능력'뿐 아니라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 역시 갖추고 있었기에 대학에서 축산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키워나간다.




  어느 자폐증 소녀가 뒤늦게 익힌 언어로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깨부수고 비유가 아닌 오로지 직설적인 대화를 하며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사유(思惟) 그리고 그녀의 재능이 참치 양식과 포획 과정에서의 '인도적 도살' 방법을 개발하며 꽃피워져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소설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렇게 두 가지로 이야기하기에 이 소설은 너무나도 많은 색채를 띠고 있다. 굳이 큰 두 갈래로 말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아주 가끔씩, 그것도 꼭 필요할 때만, 아주 느릿느릿 어렵사리] 생각한다.













야, 너 잘 나왔는데. 군살도 없고. 완전 근육질 몸매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그건 합성이란 말이야. 망할 놈의 비유를 자꾸 사용하다보면 결국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비유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비유는 현실에 대한 정보를 왜곡시키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 빌어먹을 비유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그러는 걸까?_p.331













  사비나 베르만이 소설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문장은, 다시 말해 화자 카렌이 쓰고 있는 문장은 그렇기에 상당히 이채롭다.

  비유도, 대화를 구별하기 위한 문장부호도 없다.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감정과 그 감정에서 비롯된 표현은 솔직하고, 상상을 하지 않는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이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한 공상을 펼쳐나가지 않으며, 도면마저 간략한 부호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담아낸다.




  '스탠더드한 인간'은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사고가 견고해질 무렵이면, 언어의 틀에 완벽하게 갇혀진 스스로의 사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사벨 이모와의 만남 이전에는 '언어'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 카렌은 처음으로 '나' 그리고 '너'에 대한 인식을 시작으로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차츰차츰 축적되어가는 언어이지만 그녀는 그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거기에 지배당하고 스스로를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는 존재한다. 고로 가끔씩, 아주 가끔씩 필요할 때 느릿느릿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카렌은 '세상의 중심을 향해 잠수해 들어간다'.













공기총을 쏠 때는 시선을 돌리던 이들이, 지금은 연한 고기 맛을 즐긴다





  이야기의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대학에서 축산학을 배우면서 이모와 자신의 참치 가공 공장을 위한 참치 양식법과 '인도적인 도살 방법'을 극대화시키는 '성공시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공장의 참치 포획 방법에 대해 미국의 동물보호단체에서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서 '아투네스 콘수엘로'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그로 인해 참치 포획과 가공이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던 마사틀란의 주민들은 미국의 횡포로 인해 생계 수단을 잃고 가난에 허덕이기 시작한다.




  공장을 살리려고 카렌은 다양한 방법을 물색한다. 그 과정에서 카렌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만난다.

  참치가 죽을 땐 시선을 돌릴 게 분명한 사람들이 참치 뱃살 한 점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하고, 막상 접시 위에 놓이면 맛있게 먹을 것이면서 그 음식이 되어줄 참치가 죽을 땐 시선을 돌려버리고, 자연산 참치는 돌고래에게 피해를 입히니 잡지 말라고 하지를 않나, 그래서 양식을 하려니 좁은 공간에서 참치가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데카르트 그리고 참치













이참에 비밀 하나 말해줄게. 이모는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서 말했다. 인간이 아닌 종들과 비교해보면, 인간은 모두 자폐증 환자란다._p.361













  소설은 전반적으로 카렌의 삶과 그에 따른 그녀의 사유를 그녀만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크게 관계가 없을 듯한 참치 도살과 본격적인 사업 그리고 그 주변을 압박해 들어오는 몇몇 세력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렌의 '조금 다른 언어'는 '스탠더드'에 맞선다는 것. 카렌과 도살당하는 참치와 소와 돼지가 인간과 자본의 다른 얼굴에 맞서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스탠더드'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게 카렌이라는 존재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이 소설은 매력적이다.




  나 역시 완벽하게 언어로 사고를 하는 틀에 갇혀 있는 이로서, 하필이면 또 이런 시기에 멕시코에서 미국의 거대한 힘에 무자비하게 휩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카렌의 언어와 사고가 데카르트에 맞서고 참치와 함께 하며 DHA를 마음껏 흡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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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굴레 - 경성탐정록 두 번째 이야기 경성탐정록 2
한동진 지음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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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홍주, 왕도손, 레이시치 경감, 허도순 부인, 손다익 박사.

  조금 고쳐서 이야기 해 보자. 셜록 홈스, 존 왓슨, 레스트레이드 경감, 허드슨 부인, 손다이크 박사.

  이건 뭐 스코필드를 석호필로 부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동진이 쓰고 동생 한상진이 원안을 구성한 <피의 굴레 : 경성탐정록 두 번째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셜록 홈스의 패스티시 작품이다.










  패스티시(pastiche)란 다른 작품으로부터 내용 혹은 표현 양식을 빌려 와 복제하거나 수정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 또는 그 작품을 의미한다. 흔히 패러디(parody)와 비교되는데, 패러디는 다른 작품의 내용이나 형식을 빌리되 특정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는 데 반해 패스티시는 목적의식 없이 다른 작품들의 요소를 단순 나열한다._2차 출처 : 네이버 지식사전










  패스티시라는 용어가 주로 영화에 쓰이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용어의 뜻을 조금 더 명확히 해 보니 이 책에 패스티시라는 말을 붙여주면 안 될 것 같다. 등장인물과 형식을 빌려왔지만 배경은 1930년대의 경성이며 그 때 벌어진 사건은 바로 그 때의 경성이었기에 일어났을 법한 사건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런 형태의 작품에 '패스티시'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으므로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는 하다. 이름은 빌려왔지만 전혀 다른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명탐정 설홍주가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인 한의사 왕도손의 모습을 꽤나 즐겁게 지켜볼 수 있었다.










  총 네 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살인을 저지른 후 시체의 신원을 감추어 사건 그 자체를 은폐하려 하는 「외과의」의 시도는 지금과 같은 최첨단 과학수사가 아닌 지문과 같은 거의 원론적인 방법으로 피해자의 신원이나 용의자의 증거를 수집하는 수사 방법의 허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미처 용의자가 놓쳐버린 방법으로 함정 수사를 동원해 심증만 있던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그야말로 그 때의 시대적 배경이기에 단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싶은데 그것이 의외로 신선하게 다가온다.

  당시 악명을 떨치던 투기꾼 신의택 '신타로'는 「안개 낀 거리」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누가 언제 시체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피해자의 신변 그리고 인적 드문 거리를 안개가 가려준 덕에 용의자를 좁혀나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덕분에 종로서 레이시치 경감은 설홍주에게 의뢰를 하고, 그는 살해 방법을 바탕으로 용의자를 좁혀나간다. 범인의 정체나 범행 동기 등은 역시 당시 근현대가 공존하고 있던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표제작이자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피의 굴레」는 그야말로 그 당시 경성을 흔들었을 만한 스캔들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극장주의 죽음이 타살로 밝혀지면서 극장 운영 관계자들과 극장 간판 여배우까지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는 당시 사랑받았던 라무네(ラムネ)의 독특한 뚜껑을 이용한 트릭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위시(前衛時)의 수수께끼를 푸는 등 다양한 소재를 경성 한복판에 녹여냈다. 계속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 어쩔 수 없다. 진짜 그런 걸 어떡하나.ㅋㅋ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사채꾼 백청만 '사이고 시로'의 「날개 없는 추락」을 둘러싼 진범을 찾는 이야기다. 경성 불꽃놀이를 하던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추락사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추락의 흔적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덕분에 최초 발견자이자 사이고 시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현준건의 소행으로 좁혀지고 사건은 정치 테러 사건으로 발전되기 직전에 이른다. 이 때 설홍주는 현준건의 혐의를 벗기고,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진범을 찾아낸다.










  셜록 홈스의 이름을 이어받은 명탐정 설홍주답게, 그 역시 셜록 홈스와 마찬가지로 동료 왕도손을 비아냥거리며 자신의 추리를 한껏 뽐낸다. 힌트보다는 주로 혼자 여차저차 생각하며 돌아다니다 '진실은 이런 거였어!'하며 잘난척을 하는 것도 셜록 홈스와 완전히 판박이구나.




  지금은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꽤나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기에 확실히 고전으로 평가받는 셜록 홈스 시리즈 역시 지금 읽기에는 트릭의 측면에서 올드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피의 굴레 : 경성탐정록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트릭을 한국 근대의 정서에 맞게 바꾼 정도다. 지금 일본 미스터리를 통해 꽤나 눈이 높아진 독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기발한 트릭이나 반전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쁘게 말하면 그래도 아직은 독자들을 놀라게할 만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게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셜록 홈스의 패스티시 그 자체다. 등장인물을 적절하게 바꾼 것에서부터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을 법한 트릭에 이르기까지. 배경만 일제강점기의 경성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실은 처음부터 트릭에 대한 어마어마한 기대를 가지고 펼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점차적으로 발전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게다가 「피의 굴레」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트릭보다는 스릴러로서의 서술에 오히려 더 집중하고 있기에 트릭의 부족함을 오히려 다른 방법으로 보완했다. 패스티시라고는 해도 설홍주와 왕도손이라는 캐릭터와 조금은 부족한 트릭이라 한들 꽤나 탄탄한 시나리오와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당시 경성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복원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기에 그럼에도 나는 거기서 이 경성탐정록 시리즈의 가능성을 더 기대하고 싶다. 












"신념은 여전히 여기 있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안개 낀 거리와도 같아. 전혀 앞이 보이질 않아……. 정의? 잊혀져 가는 개념이야. 거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고 봐야지. 총독부의 법률과 경찰이 정의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건 나라를 팔아먹어 돈과 작위를 챙긴 놈들뿐이겠지."_p.107, 「안개 낀 거리」












  우울한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지금이랑 다를 게 뭔데!!). 진짜 저런 사람 안 죽고 뭐하나 싶은 양아치와 매국노 역시 들끓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설홍주라는 탐정을 등장시켜 시대의 안개 낀 정의에 맞서 자신만의 정의를 구현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실은 충분하다. 그 시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만나보는 것은 씁쓸하나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이 경성탐정록 시리즈를 기다려보려 한다.




  일단 첫 번째 시리즈인 <경성탐정록>을 읽어보는 게 순서구나. 가장 첫 번째 이야기에서 설홍주가 왕도손을 처음 만나 하는 이야기가 눈에 선하다.










"아니, 제가 한의사라는 걸 어떻게 악수만 하고 알 수 있었죠?"

"손 끝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습니다. 가느다랗고 딱딱한 무언가를 꾸준히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바늘이나 침. 중국인 남성인 선생님이 바느질을 할 것 같지는 않고, 당연히 침을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_<주홍색 연구>를 참조한 나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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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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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알고 있을랬는데…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들킨 이상 너네 많이 읽어라! _미치오 슈스케(36세, 소설가)














  미치오 슈스케의 귀여운 투정이 섞인(?) 추천사와 함께 아름다운 표지가 내 마음을 흔드는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은 절판된 오래 전의 작품을 2009년, 슈에이샤 문고에서 복간하게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미치오 슈스케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몰래 사탕 한 알을 빼먹듯 꺼내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런 오래된 팬들의 바람이 무색하게 지금의 독자들에게 작품을 알리고자 출판사 측에서의 '복간'을 결정하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굉장히 차분하고 담담한 이야기다. 주인공이 꽤나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시종일관 유지되는 덤덤한 문체와 깔끔한 문장, 그리고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사건 현장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게 만든다. 작가는 과연 어떤 비수를 감추고 있기에 이다지도 담담한 것이며, 그 칼날은 얼마나 날카롭길래 그 시퍼런 서슬이 살짝살짝 내비치는가.














난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기로 결심했단 말이야. 세상 모든 사람한테 버림을 받아도 나만은, 나 혼자만은. _p.11














  스트립 댄서로 활약 중이었던 주인공 미미 로이는 재벌가의 방탕한 외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트립 댄서가 재벌가의 며느리라니, 이게 무슨 어불성설인가. 그럼에도 모든 반대에 맞서 부부는 오직 사랑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 꿈은 시아버지가 살해당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시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별채로 향한 그녀는, 그 곳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시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날은 남편이 아버지와 함께 큰 말다툼이 일어났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위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위증은 오히려 용의자를 궁지에 몰리게 한다. 시아버지를 살해한 진범은 누구인가? 벼랑 끝까지 몰려 사형을 앞둔 용의자의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킬 변호 측 증인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증언을 펼칠 것인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 재산 상속을 노린 결혼을 선택한 아내(로 주변인이 추정하거나 진짜일 수도 있음).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하는 이 완벽한 설정은, 시댁과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는 드라마에서뿐만 아니라 그에 맞춰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는 요소만 하나 더 첨가하면 미스터리를 위한 무대로서도 상당히 깔끔하다. 재산 상속이라함은 수많은 미스터리 속에서 범행을 저지르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결국 용이자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하룻밤 사이의 시간은 의외로 짧은 법이다. 대략적인 증언을 통해서라도 용의자는 단번에 좁혀진다.


  그러나 무고한 용의자의 상황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증언과 증거는 없는 것일까. 과연 작가는 소설 속에 모든 것을 뒤집어 진영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오셀로의 기막힌 빈 칸을 숨겨놓기는 한 것인가.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은 열세에 몰린 오셀로를 단 한 칸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한 한 수를 독자가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 지켜보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가가 보여주고 있던 칼자루를 잡고 칼집에서 이를 꺼낸 순간, 상당히 의외의 것―예를들면 '파'라거나ㅋㅋ―이 눈앞에 나타난다. 사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그다지 의외가 아닐 수도 있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이 눈에 띌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상당히 예리하게 틈을 파고들어 허를 찌른다. 그리고 독자는 깨닫는 것이다. 지금까지 작가가 마련해놓은 빈틈을 채운 것은 다름 아닌 독자 자신이었다는 것을.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상당히 교묘해,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상상해봐! 라고 말하면 그 상상력은 쉽사리 발휘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치밀하게 밑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빈칸을 남겨두고 그 빈칸을 독자 스스로가 채워나가게끔 유도하고 있다. 그렇게 그녀가 그려둔 밑바탕에 색을 칠해나간 것은 바로 나였다. 뭔가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선택한 색으로 그림을 칠하고 있으려니, 누가 그렇게 칠하라든? 하며 살짝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얄밉게 떠올랐다.










  설정과 등장 인물 사이의 갈등, 범행 수법은 그렇게 참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옛날 작품인 것 만큼 식상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의외로 허를 찔러오는 반전과 그를 위한 작가의 물밑 작업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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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올해 국내에 소개 된 일본 미스터리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단연코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아닐까 싶다. 이미 일본에서는 데뷔한지도 꽤 시간이 된 그런 작가이건만, 그럼에도 역시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가 2011 서점대상 1위에 선정되고 사쿠라이 쇼 주연의 드라마까지 만들어지면서 작가로서의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에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며 사랑을 받고 있고.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출발점이자 작풍을 엿볼 수 있는 데뷔작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가 출간되었다. 실제 가상의 도시인 이카가와(烏賊川)(오징어강) 시를 무대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부터 벌써 무대를 소개하는 데 있어 이런저런 언어유희를 구사하고 있으니 이것 참.

 

 

  빌딩에서 투신해 시체로 발견된 한 여대생. 그러나 경찰은 감식 결과 그저 추락사가 아닌 그 전에 칼에 찔린 흔적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사건 현장에 머무르고 있던 경찰 한 명은 학창 시절의 동창을 마주치지만, 그 동창인 모로 고사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사건 현장을 떠난다.

  한편, 그렇게 사건 현장을 떠난 모로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집으로, 그 날 그는 자신의 후배인 도무라 류헤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난 뒤 술판을 벌일 예정이었다. 실은 장을 보러 나섰다가 사건 현장을 둘러 본 것.

  그러나 장을 보고 난 뒤 목욕을 하겠다며 욕실에 들어간 모로가 당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혼자 술을 마시던 류헤이는 욕실을 들여다보지만 모로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언제? 난생 처음 보는 시체에 류헤이는 꼬박 밤을 새도록 기절을 하고, 다음 날 눈을 떠 봐도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완벽한 밀실에서 죽어있는 시체를 보며, 무엇보다 의심을 받는 것은 자신임을 깨달은 류헤이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재빨리 사건 현장을 떠난다. 그리고 전 처남이자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우카이 모리오를 찾아간다. 가짜 형사 흉내를 내면서 시체가 발견되기 전 탐문을 하고 다니는 수상쩍은 2인조. 그러나 류헤이의 행동으로 인해 쉽게 풀릴 수도 있었던 수사는 꼬이기만 한다.
 

 

"아니, 그렇지가 않아. 오히려 너무 완벽하다는 게 허점이지."


(중략)


"그렇다면 체인을 건 사람은……엉?"


"맞아."


우카이가 씨익 웃었다.


"혹시……저예요?"


"너 바보냐?"


-p.154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살해당한 채 추락한 여대생과 칼에 찔린 채 완벽한 밀실 속에서 쓰러져 있던 남자의 시체. 그리고 그 둘은 류헤이의 전 연인이자 절친한 선배로, 류헤이가 아니면 공통된 연결고리조차 없다. 류헤이의 무죄를 어떻게 증명을 해야하는가!라는 전반적인 심각한 상황의 세팅을 히가시가와 도쿠야는 특유의 가벼운 문체와 분위기로 전개해 나간다. 특히 도움을 청하겠다고 찾아간 우카이 모리오의 등장부터는 아예 대놓고 우스꽝스러운 변장으로 경찰인 척 탐문하고, 형사들과 미묘하게 스쳐지나가는 등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

  평소 해파리를 이용한 기상 관측을 취미로 삼고 있는 스나가와 경부나 학창시절 꽤나 눈에 힘 주고 다녔을 것 같은 시키 형사 콤비의 투닥거림은 생략해도 괜찮을 것 같다. 형사의 무게감 있는 이미지를 유지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형사와 류헤이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히가시가와 어쩌고라는 작가로 추정되는 화자는 꼭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해설 같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여차저차 이런저런 화자의 개입이 아마 히가시가와 도쿠야 특유의 '유머 본격 미스터리'라는 그만의 작풍을 만들어내는 데 한몫 한 것 같은데, 보기에 이런 작가의 유머러스한 부언이 누군가에게는 유쾌하게,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사족으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가볍지만 상당히 유쾌하게 다가오면서 쉬어가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유머 본격 미스터리'에서 마냥 '유머'에만 무게를 두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 유머 본격 미스터리로 유머와 본격의 균형이 상당히 잘 맞아떨어지는데, 그 가벼움에 쉽게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트릭은 꽤나 본격적이고 잘 만들어져 있다. 그 균형을 유지한 것이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저력이 아닐까.

  히가시가와 도쿠야는 이번 사건에 있어서 '탐정'의 등장에서부터 이미 독자에게 밀실의 열쇠를 빌려준다. 그리고 그 열쇠와 함께 밀실의 문을 끼워맞출 수 있는 다른 조각들을 하나 둘 흩어놓는데, 숨어있는 조각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나 그 조각을 제자리에 맞추려는 시도는 결코 쉽지가 않다. 그 퍼즐 조각 역시 본격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트릭이었으니 약간 어수룩한 탐정 우카이와 너무나도 유력해보이는 용의자 류헤이와 함께 찾아보는 게 꽤나 즐거울 것 같다.

  게다가 가장 허를 찌르는 것은 '탐정'의 역할이다. 트러블을 언제나 환영한다는 탐정이 뭘 하는지 한 번 지켜보시라. 뭐 이런 탐정이 다 있어, 하고 우카이라는 존재 역시 상당히 유쾌하게 다가왔더랬다.

 

  독설 집사와 재벌2세 아가씨만큼의 캐릭터의 파급력은 조금 덜하지만, 유머스러운 문장과 그럼에도 꽤나 본격적으로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 <밀실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였다. 그 균형을 잘 맞추어가고 있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또 다른 이카가와 시 시리즈를 기다려본다. 또 Welcome Trouble!이라는 말과 함께 우카이가 등장해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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