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능력의 한계가 좁은 사람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서거나 운이 따라준다고 해도, 그를 절반은 동물인 평범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총량 이상으로 데리고 가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중략) 사실 가장 고상하고 가장 풍요로우며 가장 오랫동안 이어지는 쾌락은 특히 타고난 지적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따라, 우리가 가진 개성에 따라, 행복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운명만을,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보여주는 것만을 고려한다. 운명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천국에서 천상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은 끝까지 어리석을 것이고 바보는 끝까지 바보로 남을 것이다.


쾌락의 풍요로움, 심지어 성적 쾌락의 풍요로움도 지성에 달려 있으며, 지성 그 자치의 힘에 비례한다. 안타깝게도,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 / 미셸 우엘벡>


도대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 더 구체적으로는 지적 행복은 뭘까? 나는 인간의 육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여기기에 육체를 가진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또한 행복과 지적 능력이 무슨 큰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바에 따르면 대체로 사고력이 낮고 단순한 기질의 사람들이 매사에 행복했(해보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평범한 사람은 자연이 매일 수천 가지로 만들어 내는 제조품과 같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고찰(이것이 참된 정관이지만)은 오래 계속할 수 없다. 그가 사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은 그 사물이 간접적으로라도 그가 가진 의향에 어떤 관계를 갖는 한도 안에서만 그렇다. 언제나 관계들의 인식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는 사물의 추상 개념이 있으면 충분하다. 또 대개의 경우 그 편이 한층 더 효력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언제까지나 단순한 직관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게으른 자가 의자를 찾는 것처럼 자기에게 나타는 모든 것 가운데 개념만을 급히 찾아 다닌다. 또한 언제까지나 하나의 대상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을 얻으면 곧 그 사물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은 예술 작품, 아름다운 자연, 여기저기서 깊은 의미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인생의 여러 모습 등을 접해도 곧 결정을 내린다. 그는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자기가 걷는 인생의 길뿐이며, 무른 자기의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넓은 의미로 말해 지형 측량으로 메모하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고찰 같은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천재의 인식력을 우세하기 때문에, 사물을 다른 것과의 관게에서가 아니라 그 사물의 이데아를 파악하려 한다. 이것이 지나쳐서 이따금 그는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등한시하며 대개 실생활에 서투르다.

평범한 사람에게 인식 능력은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지만, 천재에게는 세계를 비추는 태양이다. (중략) 따라서 '천재적인 표정'은 의욕보다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우세하고, 의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식, 즉 '순수 인식'이 거기에 나타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쇼페하우어>


천재에게 인식이란, 지속 가능한 행복(즐거움)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같은 류의 행복(즐거움)이라는 걸까?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이 수학경시반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번번이 행복과 지능의 상관관계를 운운하는 것일까? 세상이 수학경시반이라면 수학 논리 지능이 높은 사람이 행복하겠으나, 이 세상이 그저 거대한 유치원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반대로 지능이 낮을수록 행복한 것 아니겠는가? 나에게 이 세상은 거대한 특수학교 또는 하염없이 뽀로로나 방영하는 유아채널이다. 


사람들은 주택대출금 이자, 자식,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 마이너스통장, 명절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앞에 나열한 저 모든 것에 해당사항이 없는 나는 취업이라는 것을 한 이후로 그 어떤 변주도 없는 저 이야기를 십 수년째 들어주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느니 차라리 하루종일 뽀로로를 보는 게 낫겠다 싶은 심정.


지능이 높을수록 행복할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나는 반대한다. 이 세상은 지능이 낮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더 많다. 2022년의 이 세상을 쇼펜하우어가 봤다면 아마도 내 말에 동의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