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는 죽음에 품위가 있고 없음에 계급의 영향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미술품 컬렉터인 앙드레는 자신이 단순히 부유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귀족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에 늘 자부심을 안고 살아왔는데요. 그래서 이 남자는 끝까지 죽음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문해서 얻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할 수도 있는 태도를 앙드레가 보일 수 있는 건 그에게는 떠날 날을 정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겠죠. "그냥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죠.

<씨네21 김혜리 트위터 스페이스, 김혜리의 랑데부: 프랑스아 오종 감독의 '다 잘된 거야'>



피지 워터를 회사로 배달시켰다. 남은 생은 피지 워터만 마실 생각이다, 적어도 회사에서만은. 나에겐 3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에비앙, 볼빅, 피지 워터. 피지 워터를 고른 이유는 패키지가 예쁘고, 큰 차이는 아니지만 셋 중에 제일 비쌌기 때문이다. 미네랄 함량도 제일 높다고 어디선가 본 듯도 하고.


생수병 쓰레기가 싫어서 생수를 최대한 피하는 삶을 살아왔다. 외출할 때도 물병에 물을 담아갔고, 출근할 때는 물 부족 국가의 소녀처럼 거대한 보온병에 물을 담아 갔다(회사 정수기 불신, 회사가 있는 곳의 상수원 불신). 보온병만 들고 다닌 건 아니다. 매일 투명 유리컵을 전용 누빔 주머니에 담아서 들고 다녔다. 왜냐 나는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도 싫어하니까. 그것뿐만이 아니다. 화장실의 핸드 페이퍼가 싫어서 마리메꼬에서 핸드타월을 10장 정도 사서 그것을 하루에 1장씩 사용했다. 이것도 출퇴근 짐이다. 또한 스마트폰 화면을 주시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양장 다이어리도 매일 들고 다닌다. 여하튼 짐이 많다. 이것들을 나는 작지만 두꺼운 쇼핑백 2개에 나누어 담아서 매일 들고 다닌다. 그러니 따로 탑핸들 핸드백을 들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내 몸은 매일 병들어 가고 있다. 검사를 할 때마다 각종 수치들이 악화일로다. 의사는 나를 인간 체르노빌로 만들 작정인 듯하고, 나는 꼭 그래야만 합니까?라고 반문만 하고 있다. 이 가련한 전교 1등 소년에게 내가 "내가 치료받지 않고 버티다가 안락사 말고는 방법이 없을 때까지 버티면 안락사 인증해 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이 샌님같이 생긴 의사놈은 뭐라고 할까? 


배를 가르고 썩어버린 장기 일부를 제거한 후, 제거된 장기를 보완해줄 알약을 먹으면서, 삶의 질이 바닥을 친 상태로, 굳이 그렇게까지 내가 살아야 하나?


난 싫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내 말을 듣는 부모, 동생, 애인, 회사 동료들은 다들 동공이 흔들린다. 그 표정은 맹수를 발견한 초식동물과 같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렵고 두려운 표정. 그 표정이 정말 싫다. 그들이 사랑해 마다하지 않는 소중한 삶과 목숨이라는 것을 나는 단물 빠진 껌을 뱉듯이 뱉어 버리려고 하니까. 


추석 연휴에 <다 잘된 거야>를 봤다. 안락사에 몰두해 있는 내가 이 영화를 놓칠 리가 없지. 그리고 약간 좌절했다. 프랑스 마저도 안락사가 쉽지 않았다. 안락사는 현대의 생명윤리에 어긋난 패륜인 것이다. 나에게 안락사는 인간 존엄의 최고점이데!!!!!!!!!!


태어나는 건 내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죽는 것만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리고 나에겐 그 기회가 왔다. 죽는 것, 안락사, 생명윤리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해서 나는 이미 내가 죽었고, 지금 이 순간도 그저 꿈의 일부인 듯 하다.


더 병든 인간이 되기 전에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조금은 의욕이 있을 때, 사치를 하자, 사치가 하고 싶어졌다. 무엇을 해야 가장 사치스러울까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론은 비싼 물, 탑핸들백과 가뿐한 걸음, 무용한 독서(예를 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같은 책을 꼭꼭 씹어 읽는 것)였다. 


어제 오후에도 업무는 대충 미뤄두고 피지 워터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회사에서 빌린 <달까지 가자>를 읽다가 퇴근했다. 띠어리 가을 신상 실크 블라우스와 디올 가을 신상 미챠 스카프를 한 채로 한쪽 팔에는 레이디백을 걸치고.  


앞으로 남은 생은 한쪽 팔에 우아하게 레이디백만을 건 채로 가뿐하게 걷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 이럴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남았을까 싶다. 얼마 안 남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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