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곤지암>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소는 목욕탕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밀의 방 402호도 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쉿, 여기까지.
그 흔한 칠판 긁는 소리 하나 없이
그저 거친 호흡만으로도
공포영화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장르다. 나는 어중간하다. 시도때도없이 귀신이나 좀비가 등장하는 정신사나운 건 별로지만 사람 심리를 건드리며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는 경우는 대환영이다. <로즈마리의 아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내 돈을 내고 영화관까지 가서 공포물을 보지는 않는다. 곰곰 이유를 생각해보니 솔직히 말해 겁이 나서다. 겉으로는 센척 하지만 사실 무서워서다. 어렸을 적 티브이에서 본 천년호를 보고도 일주일간 잠을 설쳤을 정도니.
큰 만 먹고 <곤지암>을 관람했다. 정직하게 말해 대작도 없었고 딱히 눈에 뜨이는 영화도 없었기 때문이다. <7년의 밤>이 그나마 볼만한듯 싶었는데 평이 영 아니다. 아무리 변신을 했다고 해도 너무 잘생긴 배우에 대한 비호감도 한몫했다.
평일 오후 4시의 극장은 적당히 관객이 차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남여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의 입소문을 담당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왠걸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다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지 조용했다. 창피하지만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건 나였다. 분명히 만들어진 상황이고 실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만.
잡다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냅다 폐병원에 들어가 종횡무진 귀신에 사로잡히는 스토리는 압권이었다. 그 흔한 칠판 긁는 소리 하나 없이 그저 거친 호흡만으로도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리는 서너번 질렀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도리어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유가 뭘까? 아! 영응담과 교훈이 없었군.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끝까지 귀신과 싸우는 끈적끈적함도 학교교육의 폐해를 주절주절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냥 깔끔하게 순서대로 사라져버린다. 앗, 스포일러인가?
덧붙이는 말
영화의 배경이 된 곤지암 정신병원은 아쉽게도 실제로는 다른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부산의 예전 해사고등학교라고 한다. 건물이 낯익어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무한도전에 나왔던 곳이다. 유재석이 벌칙으로 방문했던 곳이다. 한낮에도 음산한 기운이 가득해서 인상에 남았는데 바로 그곳이었다.
내내 조용했던 학생들은 불이 켜지자마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수다의 절정은 화장실에서 이루어졌다. "야 씨x x나 무서워." "뭐가, 난 아무렇지도 않던데" "X까, 너 내내 눈감고 있는거 내가 다 봤는데" "쪼금 지리긴 하더라." 에스컬레이터에 탄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진짜 내가 안본다고 했잖아." "니가 가자고 했잖아." "이럴 줄 몰랐지. 잠 다 잤어" "ㅋㅋ 나도 그랬어." "노란통닭이나 먹으러 가자"
우연히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화 <곤지암>을 소재로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들었다. 진행자는 본인은 절대 공포영화는 보지 않는단다. 현실이 지옥같은데라고 이유를 달았는데 왠지 입에 발린 말 같았다. 대신 주변 사람들의 평을 전했는데 중장년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지만 어린 친구들은 자지러졌단다. 평론가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담고 있다고 생각한 반면 노인들은 딴 세상 스토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고프로를 들고 다니면서 현장에서 실시간 중계할 용기따위는 없다. 늙은이는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