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울극장의 추억
내 유년 기억의 시작은 극장과 함께 였다.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또렷하게 각인된 장면은 가슴 졸이며 엄마 손을 꼭 쥐고 내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다. 일찌감치 눈을 뜬 탓인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장 극장 순례에 들어갔다. 천호극장, 문화극장, 그리고 동서울극장. 조그마한 동네에 무려 세개의 영화관, 비록 재개봉관이었지만, 이 있었다는 것은 씨네마 키드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곳은 동서울극장이었다. 다른 두 영화관이 대로변에 있었던 것과 달리 동서울은 시장을 지나 거의 끝에 다다라야만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린 내게는 모험이었다. 시각과 청각은 물론 후각까지 건드리는 모든 갖가지 자극을 받고 극장에 간다는 것 자체가. 벌써 몇 십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벤허>의 대형입간판과 매표소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스피커로 틀어놓은 둥둥거리는 북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를 보고 나올 때였다. 시장이 워낙 복잡하고 밤이면 출입구를 막아놓아 다른 길로 돌아나와야만 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노란 등이 가지런히 자리잡은 그곳은 창녀촌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이상하게 끌리는 미스테리함에 사로잡혀 약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종종 걸음으로 벗어났다. 다행히 어떤 누나도 나를 부르거나 붙잡지는 않았다.
그렇게 멋진 영화를 보고 온 날 밤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곤 했다. 꿈속에서 채찍질을 맞으며 어서 빨리 노를 저어야겠는데 다급한 심정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숨이 너무 차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새빨간 입술을 하고 하얗게 화장을 한 여자가 나타나 구원자 예수를 도와달라고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동서울 극장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영화관 자리는 도서관과 공원으로 바뀌었다. 창녀촌도 철거되었다. 시장은 여전히 활기를 띄고 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때까지밖에 살지 않았으니 기껏해야 3, 4년 정도였지만 내 어린시절은 그 시간, 그 장소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