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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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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0여 페이지, 불과 다섯 장 밖에 안 되는 분량을 넘기면서 이토록 다양하고 생생한 감정을 느낀 적이 또 있었던가.

여행에세이를 이토록 재미있게 박장대소하면서 읽은 건 아마 류시화의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두 번째이지 싶다. 차이가 있다면 <하늘호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여행기였다면 이 책 <히말라야>는 유행가 가사를 빌려 '소설인듯 소설 아닌 소설 같은' 여행에세이라는 점이랄까. 다시 말하지만 이 책, 단언컨데 웬만한 소설보다 재미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작가의 말발에 빨려 들어가 의식도 못 하는 사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하나 둘 머리 속에 진을 치더니, 이내 여행계획이 구체적으로 거미줄을 치고, 그러다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간다니 안 되겠어, 히말라야는 무리야' 중얼중얼 할 즈음 푸핫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이 작가 정말 글을 재미있게 쓰는 구나.
'히말라야', '환상', '방황'.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만 봐도 이미 충분히 '힐링'스러운 이 여행에세이를 펼칠 때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책을 '거대한 자연과 마주친 인간의 한없이 작음을 발견하는 얘기이겠거니' 했다. 책 뒷표지의 '유쾌발랄'이라는 단어를 스치듯 볼 때도 설마 이 책을 소설처럼 읽으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다. 좌충우돌이라는 표현이 그야말로 적확한 작가의 여정은 말 그대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그대로 쫓아가는 소설식 구성을 하고 있다. 참고로 작가와 작가의 안나푸르나 종주를 위기와 절정으로 모는 키워드는 '고산병'이다.
작가의 육성으로 읽는 실감나는 종주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틈틈이 끼어드는 작가의 연상 기억도 무척 재미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스티븐 킹의 소설도 재미있고, 작가의 사생활의 단편도 재미있고, 환상방황에 함께한 일행 검부와 버럼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오히려 소설 속 인물처럼 친숙하다. 이런 이유로 실명을 제외한다면 한 권의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단 생각이 든다.

 

정유정은 내겐 좀 예외적인 작가인데 그러니까 맨처음에 읽었던 <심장을 쏴라>가 그닥 취향이 아니었던 탓에 그녀는 이후 관심에서 벗어났던 작가였다. 그러나 책에 관한한 귀가 습자지처럼 얇은 나는 베스트셀러 <7년의 밤>을 자자한 입소문에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올 초에 뒤늦게 구입했는데 구입하고도 첫 인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새 책 그대로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는 상황. 그러다 보니 그녀의 신간 <28>이 요란하게 등장했을 때도 심드렁 본체만체 했는데 <히말라야>를 읽기 시작하고 몇 분 후 자신을 매우 치며 당장 <28>을 보관함에 담았다. (덧. 책을 읽은 직후 <럼두들 등반기>와 조용호의 <떠다니네>도 보관함에 담았다.)
낯선 곳에서 뜻하지 않게 반가운 얼굴을 만나는 건 여행의 묘미다. 트랙킹 도중에 만나 그녀에게 사인을 받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던 '보이'가 부럽다.

 

* 사족
제목을 잊어버렸는데 어릴 때 읽었던 소설 중에 K2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내용의 소설이 있었다. 덕분에 자연이 그저 보기 좋은 배경 역할을 하는 정물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인간을 위협하고 때로 인간을 죽음으로 모는 살아있는 그 무엇(It)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문 중 '작가의 말'에 작가가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인용한 '어린아이가 삶을 배워가는 존재라면 어른은 죽음을 배워가는 존재다'라는 글귀가 유독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비슷한 맥락으로 어린아이가 자연의 거대한 물성에 압도 당한다면, 어른은 헤아릴 수 없는 그 관념성에 압도당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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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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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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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작가인데 무심코 이름을 검색했다가 주루룩 펼쳐지는 목록에 놀랐다. 약력을 보니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에세이스트라고 한다. 누군가의 일상이 공감을 얻는다는 건 그 누군가의 일상이 소소하지만 과장되지 않고 진솔하다는 의미일 텐데 더군다나 그 누군가가 이웃나라 작가라니 책을 펼치기도 전에 호기심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고운 연분홍, 반짝반짝 분홍색 가름끈. 보는 순간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아, 이 책은 여자를 위한 책이구나" 다. 첫인상을 배반하지 않는 이 예쁜 책은 책을 펼치면 활자가 말을 걸어온다. 조곤조곤 더 없이 음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일상, 느낌, 생각을 얘기한다.
절반쯤 읽다가 책의 표지를 다시 확인하고 제목을 새삼 눈여겨 보게 된 이유는 독서 도중에 문득 책을 가득 채운 일상의 주인공이 '나이'라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 '아, 그래서 첫 에피소드도 법령선이구나' 했다. '법령선'이라니, 처음 보는 단어라 찾아봤는데 아마 표준국어는 아닌 듯 하다.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팔자주름'이 있다.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답게 인물의 나이를 법령선으로 구분하는 작가의 고민은 과연 또래 연령대의 여자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공감지점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일상이 공감을 끌어내는 힘은 아마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일상성의 힘은 '공감'을 끌어는 데서 발휘되는데 마스다 미리의 소박한 일상이 설득력을 가지는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건 수다에 추억이 차지하는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인 듯. 옛날에 말이야, 내가 **할 때 말이야,... 등등 과거 얘기가 현재를 온통 채운다. 뭐, 꼭 서글픈 일은 아니지 않을까. 정작 중요한 건 이런 것, 마스다 미리가 인용한 영화 대사처럼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p.61) 이니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녀의 얘기에 공감하고 동조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와 친구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한번에 일독하는 것보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기를 권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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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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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줄로 요약된 한 인물의 연대기를 읽는 기분은 늘 묘한 감상을 남기는데 이는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임을 확인하는, 자연순응에서 오는 체념 때문인 듯 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1888년 출생, 1959년 사망은 축복받은 긴 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울할 것도 없는 나름 선방한 긴 생이다. 또 작가의 입을 빌리면 불혹을 넘겨 탐정소설로 데뷔해 소설작가로, 시나리오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고 자신이 활동하던 장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타일'도 남겼으니 작가로서도 꽤 만족할만한 삶이다. 무엇보다 30년 넘게 친구로 동반자로 사랑하고 의지한 아내가 있었으니 그만하면 남자로서도 제법 축복 받은 삶이지 않는가. 요약하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누구의 부러움을 사도 당당한, 이만하면 꽤 괜찮은 삶을 살았던 남자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비교하자면 스티븐 킹의『유혹하는 글쓰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세이다. 킹의 에세이는 제목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노하우를 담은 책이지만 챈들러의 에세이는 지인들과 주고 받은 작가의 편지를 통해 '작가로서의 일상'을 토로하는 책이다.
순전한 챈들러의 육성을 통해 챈들러에 대해 한 자락을 발견하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 책, 보다 정확한 의미로 '챈들러의 편지'를 읽으면서 순간 순간 피식 웃는 지점이 있는데 이를 테면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는 A에게도, 비판하는 B에게도 챈들러는 공평하게 불퉁하다. 그때문인지 전반적인 작가의 인상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고 까칠한 느낌이다. 이는 사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에겐 장점이 더 많은 성격이지만 아마 챈들러가 이 글을 본다면 '네가 뭘 모르나 본데(블라블라)' 불만을 토해낼 것 같다.
「필립 말로」제목이 붙은 4장은 작가가 설명하는 필립 말로가 등장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무방할 필립 말로에게서 작가의 자화상을 더듬게 된다. 물론 실제로도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장르문학, 구체적으로 '탐정소설'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특히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 끝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챈들러는 천생 작가다. 그것도 뛰어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작가다.
장르소설(구체적으로 탐정소설)을 하위문화로 분류하는 평론에 거세게 반발하는 챈들러의 모습은 호모폴리티쿠스로서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정치성을 가지게 마련이고 작가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 문화예술이 다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투영해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 연장선에서 최근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는 정의를 현실에서도 추구하는가, 라는 부분.
실제 챈들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정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챈들러는 필립 말로에 대해, 어느 누가 경제적 이득 없이 위험에 자신을 던져 정의를 실현하려고 들겠는가, 라고 말로를 지지한다. 탐정소설이 남자들에게 특히 인기를 끄는 건 역시 주인공을 통해 남자들의 로망을 실현하는 대리만족의 의미가 크지 않을까.
역자의 역주에 오랜만에 만족하면서 읽었다. 역자와 편집자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서 느껴지는 한 권이었다.

덧1> 책의 만듦새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겉표지를 벗기고 속지를 보는 순간 "아,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덧2> 말라르메의 고양이와 챈들러의 고양이가 만나는 상상을 해봤다. 아마도 제 인간주인보다 시니컬하고 삐딱한 대화를 하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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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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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량이 저조해 한때 절판됐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바뀐 표지 상단의 요란한 홍보문구는 확실히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가!' 원망도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더이상 부끄럽지 않을 뿐더러 밑줄 쫙 긋고 별 100개쯤 달아주고 싶은 건 역시 '소설이 재미있어서'다. 그렇다. 소설은 재미있으면 다아~ 용서 된다.


작가는 70년대 말~90년 대 초 옛소련에서 일어난 52명의 아동살해사건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차일드44』를 구성하는 역사적 사건은 크게 두 개인데, 하나는 작가가 말하는 아동 연쇄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대학살)이다.
소설은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 시절 우크라이나 한 지역에서 출발한다. 더 이상 먹을 거라곤 남지 않은 마을에 사는 소년은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를 포획하러 동생을 데리고 숲속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소년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후 소년은 고양이와 함께 실종되고 동생은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간은 훌쩍 뛰어 넘어 1953년 모스크바로 이동한다.
전쟁영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레오는 유능한 MGB(KGB전신)의 상급요원 조사관이다. 그러나 출세길이 보장되고 한창 잘 나가던 레오에게 어느날 시련이 닥친다. 아내 라이사가 스파이혐의로 수사 리스트에 오른 것. 아내에게 씌어진 혐의가 자신의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일종의 시험인 걸 알지만 레오는 아내를 선택하고 그 대가로 좌천당한다.

『차일드44』는 주인공이 아동연쇄살인을 조사하지만 추리물은 아니다. 한편 주인공이 냉전시대 권력의 아귀다툼 한복판에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물도 아니다. 이 소설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데, 이는 주인공 '레오'의 탓이 크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스릴러의 성격이 강한데 이 스릴러는 전적으로 레오의 순진할 정도로 원리원칙을 우선으로 하는 성격에서 기인한다.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공포사회에 최적화된 것 같은 인물형인 레오는 당이 하는 일이므로 옳고, 당의 모든 결정은 대의라고 믿는다.『태백산맥』때 그런 얘기를 쓴 적이 있는데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에겐 어린아이 같은 순수성이 있다. 오로지 인민과 당이 선(善)의 모든 것이고, 대의가 모든 것에 앞선다고 믿는 그들은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레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레오에게 최초 균열의 단초를 제공하는 이가 수의사 아나톨리다. 아나톨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소설 초반 몇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데, 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인물은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후에도 그 잔영이 오래 남는다. 아나톨리의 인간적인 본성은 레오의 '당의 대의'를 향한 신념에 최초의 균열을 일으키고 그 균열에 힘을 가하는 인물이 바로 레오의 아내 라이사다. 라이사는 이제 막 알을 깨고 바깥으로 나온 레오에게 그가 알고 있던 세상 바깥에 있는 또다른 세상으로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단순히 스파이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엔『차일드44』는 가지고 있는 미덕이 많다.
일견 조지 오웰의『1984』를 연상케 하는,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공포사회의 경직된 분위기는 피가 난무하는 잔인한 장면 없이도 좁은 공간에 갇혀 감시 받는 것 같은 억압되고 폐쇄적인 공포를 자아낸다. 소설을 읽던 중간에 M에게 소설 초반 레오에게 닥친 시련을 얘기해줬더니 영화 <이퀼리브리엄>이랑 비슷한 내용이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면 두 작품 모두 전제정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일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개인을 부정하고 개인의 인간성을 그들 시스템의 적으로 간주하고 억업하는 과정은 어쩌면 그렇게 공식적인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소설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된다고 했다.『차일드44』는 일단 재미있다. 무엇보다도 깔끔한 문장이 주는 몰입감은 최고다. 호흡이 짧고 건조한 느낌이 드는 단문은 그 속도감이 굉장해서 특히 추격 장면 등은 지면을 벗어나 한편의 영상을 보는 현장감을 준다. 무엇보다 꽤 오래전에 흥미가 다했다고 생각했던 장르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동력! 덕분에 아마존에서 오랜만에 책을 검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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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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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K의 관계의 가난에 마음이 쓰였다 (p.104)
(->나는 K의 가난한 관계에 마음이 쓰였다)

 

예시한 문장처럼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제법 있는데 단순히 작가의 개성적인 문체라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퇴고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 참고로 내 책장엔 이번 소설을 제외한 작가의 전작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모든 작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국내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동굴에 틀어박혀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버틴 이들의 특정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도통 자기 내면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일 뿐더러 외부 세계와 소통할 생각도 없어보인다. 내 얘길 좀 들어봐, 내 얘길 좀 들어줘.......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무지 소화할 수 없는, 소통불가한 타인의 혼잣말에 귀기울이는 것은 숫제 징벌 받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맞고 사는 아내의 반복되는 넋두리도 한두 번이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런 넋두리라도 일기가 아닌 이상 뭔가 확장되는 세계의 찌끄러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일곱 개 목차의 공통점이라면 '미숙한 인간이 미숙한 행동을 벌이는 이야기'라는 것인데 똑똑한 인물도, 똑똑치 못한 인물도 다들 하나 같이 삶의 바다를 건너는 것에 미숙하다. 하물며 그 바다에 부는 풍랑이 그닥 대단치 않아도 그에 반응하는 태도는 가히 허리케인급 태풍을 만난 듯 과장되고 호들갑스럽다. 더욱 불편한 점은 그럴 주제도 못 되면서 그들 스스로 뒤집어 쓴 위악의 껍질이다. 위악도 영리한 인간이 부려야지, 미숙한 인간의 위악은 그 자체로 범죄다. 이건 도무지 갱생의 여지가 없기 때문.
그럼에도 이 단편집엔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보석이 하나 숨어 있는데, 바로 마지막 목차「프랑스식 세탁소」에 액자식으로 등장하는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다.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나마 액자식이라 띄엄띄엄 흩어져 있지만 이 부분만 똑 떼어내 간직하고 싶을 만큼 문장도 내용도 구성도 참 좋다. 배경과 인물이 서양으로 옮겨가면 이야기가 품고 있는 보편성도 달라지는 걸까, 궁금해지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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