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해피엔딩 - 황경신 연애소설
황경신 지음, 허정은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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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구성:

1부 덜 사랑하는 자

2부 더 사랑하는 자

3부 모두에게 해피엔딩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와 비의 엇갈린 연애가 안타까워서 애닳아하고 그것도 모자라 책을 덮은 뒤에도 이런 찜찜한 연애소설이라니, 괜히 읽었다는 후유증이 오래 갔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책장을 훑다가 문득 눈에 띄어서 다시 읽은 이 소설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당황스럽다. 나와 에이와 비의 얘기는 더 이상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기 때문. 변한 게 있다면 아마 나일 거다. 정확히는 내 감성이 변한 것일 테다. 나이 들어 어릴 적 첫사랑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이 소설보다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첫사랑 연애담이 이 소설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재미있으리라는 거.

 

중/고생 때 등교하지 않는 날은 집에서 케이블 채널의 영화를 보곤 했다. 그 중에 <풋사랑>이라는 한국영화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1년 개봉작인데 출연자가 무려 나훈아, 문희, 노주현 되시겠다.

이 영화의 줄거리가 어떠한가 하니..., 여주가 남주1도 좋고 남주2도 좋고, 결국 두 남자 중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없어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린다는 여주 멘붕 스토리. 천지 구분 못하던 시기임을 감안해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결말이지만 그래도 풋사랑의 '풋'이 어떤 의미인지 어린 나이에도 개념 공부는 됐다.

 

갑자기 왜 거의 반 세기 전의 영화를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 <풋사랑>의 연애소설 버전이『모두가 해피엔딩』이기 때문. 재미있는 건,『모두가 해피엔딩』을 몇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땐 영화 <풋사랑>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는 거다. 그러니 변한 건 '나'다.


『모두가 해피엔딩』은 소제목을 길라잡이로 진행된다. 얜 너무 좋아서 못 가지겠고, 쟨 덜 좋아서 못 가지겠고, 에라 모르겠다 너(3의 인물)하고 놀아야겠다. 그럼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가 줄거리.

 

우정이냐 사랑이냐,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황경신의 글에 일관되게 등장한다. 전형적인 십대 소녀감성인데, 그래서 이 소설은 연애소설 보다는 감성소설로 읽으면 차라리 속편하다.

정통소설이라기엔 글의 밀도가 약하고 오히려 장문의 아포리즘을 읽는 기분에 가까운데 이건 소설과 에세이를 경계 없이 쓰는 황경신의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분명 소설인데 고백에세이와 차이가 안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 있다. 실상 노희경의 에세이『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몇몇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면 그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싶기도 하다. 

나는 이런 쪽으로는 좀 고지식한 데가 있어 장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작가의 애매모호한 글쓰기 방식은 좀처럼 응원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황경신의 글이 전반적으로 이런 형식을 고수하니 결국 황경신과 내가 맞지 않는 거다.

그럼 연애소설의 예를 들어봐라, 한다면 아마 드라마 작가 노희경 때문인가 싶지만 지금 막 떠오르는 건 김수현의『겨울로 가는 마차』. 이거 수애 주연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 배우도 작가도 시청률도 대박날 텐데...는 아묻따 내 생각.

 

뭐 어쨌든,

영화 <풋사랑>은 결말이 공감은 안 가지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주에게 동정적이기라도 했다면『모두가 해피엔딩』은 연애를 장기판으로 보고 에이와 비와 예술가를 장기말로 부리는 여주를 보는 기분이라 뒷맛이 영 찜찜하다. 마지막의 '모두가 해피엔딩이지' 하는 여주의 독백도 실상 여주에게만 해피엔딩일 뿐 그녀의 연애스토리에 들러리가 된 세 남자는 무슨 죄인가 싶다. 첫 독서 때 내 감성이 그토록 자극 받았던 건 아마 여주에 빙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해본다. 무려 세 남자에게서 사랑받는 여자라니, 게다가 세 남자 모두 여전히 선택지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결말이라니 한마디로 '여주만 좋지 아니한가' 결말인 거지. 

 

이 소설을 재독하기 전에 황경신의 신간 서너 권을 주문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장바구니에서 뺐다. 그중『국경의 도서관』은 내 책장에 있는『초콜릿 우체국』의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하니 조금 더 고민하고 장바구니에서 삭제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고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걸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껏 변치않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안 읽히는 글은 안 읽는다라서.

최근 몇 년은 내 감성이 좀 심하게 메마른 사막이라 가끔 오아시스처럼 사막에 습기를 뿌려줄 감성충만한 글이 필요해-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이런 류의 소설을 막 쓸어담는데 이번은 적절한 때에 브레이크가 걸린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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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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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글을 읽게 되면 대개 두 종류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오스카와 사랑에 빠지던가, 오스카 그게 뭐? 하던가.

동성 스캔들로 2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연인 더글러스에게 쓴 서간문『심연으로부터』의 첫 페이지를 열 때, 내게 오스카 와일드는 그저 <행복한 왕자>를 쓴 동화작가였으나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이런 첫인상은 완전히 전복된다. 이토록 예민하고 감성충만하며 나르시시즘 덩어리인 작가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이 '좋아해'는 좀 복합적인 감정이어서 '좋아서 미치겠어'가 아니라 연민, 동정, 호감, 비호감 등등을 단서로 달고있는 '좋아해'다.

 

육체적 죽음이든, 사회적 매장이든 작가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그 순간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 스러지는 현장이기 때문.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 p.9

 

책을 읽다 보면 유미주의자이며 자타공인 나르시시스트였던 그가 현실의 삶과 문학 속 삶을 혼동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드문 일은 아니지만 오스카의 경우는 불행히도 혼동에서 나아가 현실의 삶이 가상의 세계에 매몰되어 현실 세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재능에 대한 대가랄까, 피그말리온의 비극은 예술가들의 숙명인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오스카의 생애 마지막 5년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문학적이다. 사랑과 배신과 용서와 우정으로 점철된 마지막 시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해서 그러한 불행조차도 오스카가 스스로 조탁한 문학의 한 방식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 정도.

  

 

어느 날, 와일드의 어머니의 친구였던 애나 드 브레몽 백작 부인이 그에게 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지 묻자(그녀는 전날 그를 모른체 했던 것을 미안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글로 쓸 수 있는 것을 다 썼습니다. 나는 삶이 무너지는 의미를 모를 때 글을 썼지요. 이젠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p.32)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일화인데, 이는 오스카 스스로 자신의 작가적 생명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장면이기 때문.

자신의 작가적 정체성에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린 오스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예술가인 자신이 예술가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인간을 포함해 지상의 모든 것 위에 존재했던 예술이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것들과 섞이자 단 한 줄도 못 쓰게 된 것이다.

예술은 대중의 사랑을 자양분으로 삼는데 애초에 사랑을 못 받았으면 모를까 성공의 가장 정점에서 추문과 함께 끌어내려진 오스카는 아마 실형을 받고 레딩 감옥에 입소할 때까지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 기소 전과 선고 직후 해외로 달아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를 거부했던 것일 거고.

아주 어려서부터 문학적인 시각으로, 문학적 틀 안에서, 문학적인 삶을 지향했던 오스카는 감옥에서 그 어떤 것보다 냉엄하고 엄혹한 현실과 직면했을 것이고 그 경험은 오스카를 비로소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에 발 딛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지상에 발을 딛은 그는 더 이상 예술의 허구를 끌어안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가짜가 진짜의 흉내를 더 잘 내는 법이다.

그리하여 2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할 때 작가 오스카는 이미 인간 오스카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스카는 자신이 다시 작가로서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레딩 교도소장의 예언보다 조금 더 살긴 했지만 불과 3년을 못 넘기고 사망한다. 그의 육체적 사망을 연장했던 것도, 앞당겼던 것도 아마 소설에 대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삶에서 사소한 일이나 큰일 같은 건 없어. 모든 게 다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크기로 이루어졌지. 모든 것에서 당신에게 굴복하는 내 습관ㅡ 처음에는 대부분 무관심에서 비롯된ㅡ은 서서히 진정한 내 본성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 거야. 내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러한 습관은 나의 기질을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한 가지 성격으로 고착시키고 만 거라고. (p.56)

 

'Dear Bosie'로 시작하는 옥중 서간『심연으로부터』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장렬한 구애이며, 로비(로버트 로스)를 통해 전하게 한 건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함이라는 장정일의 해석에 동의하기 힘든 것은, 오스카가 더글러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 때문이다. 오스카는 언제나 더글러스를 내려다 봤다.

연민은, 츠바이크에 의하면 양날의 검이다. 오스카는 악덕, 위악, 경박, 천박, 즉물성으로 다져진 더글러스의 모든 단점을 제법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것을 연민하고 때로 동정하며 가련한 한 인생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다.

감히 자신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신의 흉내를 냈던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가 거듭 말하는 것처럼 그는 실제로 더글러스에 대해 더글라스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그런 이유로 오스카의 통렬한 자기순애보적 고백, 자기참회는 동성 스캔들로 인해 야기된 현실적인 문제보다 왜 삶은 문학을 모방할 수 없는가를 향한 비탄으로 읽힌다.

오스카는 무신론자였으나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가톨릭 영세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의 회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진 건 사후였다.

 

신들은 참 이상해. 우리를 벌줄 때 우리의 악덕을 그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이용해 우리를 파멸로 이끄니 말이야. - p.80

 

난 이제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뿐 아니라 자신의 선행 때문에도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 나는 그러는 것이 정당하다고 굳게 믿고 있어. -p145-146

 

11장은 이전 장에 비해 오스카의 종교적인 태도가 뚜렷해진 차이가 확실히 느껴진다.

 

 

"당신은 이야기를 눈으로 듣는군요. 그래서 당신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들판의 꽃들은 몹시 슬퍼하면서 강물에게 그를 애도하기 위한 물방울을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러자 강물은 이렇게 대답했죠. '그럴 수 없어요. 내 물방울들이 모두 눈물이 된다면 내가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데 필요한 물이 부족해질 거예요. 난 그를 사랑했어요.' 그러자 들판의 꽃들이 말했어요. '오! 어떻게 나르키소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청년을 말이에요.' '그가 아름다웠나요?' 강물이 물었어요. '누가 그걸 당신보다 더 잘 알 수 있겠을까요? 그는 매일 당신의 기슭에서 몸을 숙여 당신 물속에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춰보았는걸요…….'"

와일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 말했다.

"그러자 강물이 대답했어요.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일 때마다 그의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와일드는 야릇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덧붙였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제자」입니다."

 

-pp.251-252,「오스카 와일드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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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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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미치고 환장'하는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이더라 꼽아보니 최근엔 소설을 거의 안 읽었구나.

거의 종장까지 읽었을 무렵, 너무 좋아서 책을 안고 방방 뛰다가 결국 M에게 전화했다.

목소리에서 흥분이 전해졌는지 어쩐 일로 M이 두서없이 마구 쏟아지는 내 말을 군소리 없이 들어주었는데 그와중에 나는 낭독까지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독서가 환희였던 건 아니다.

 

『프래니와 주이』는 중단편「프래니」와「주이」연작 소설로 등장인물은 프래니, 주이, 글래스 부인(엄마), 레인(프래니의 남자친구) 넷이고 이들 외에도 편지와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등장하는 버디(둘째 형), 시모어(첫째 형)가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처럼『프래니와 주이』도 '기-기-기-결'의 지루한 구성인데, 중반이 지나도록 그들이 대립하는 내용이 공감도 안 가고 이해도 안 되니 이야기 속으로 진입하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이 소설은 종교적 담론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데, 샐린저의 개인 성향인지 청교도적 교조주의는『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종교는 그 생리 자체가 폐쇄성과 결벽증을 갖고 있다 보니 '예수기도문'이 실린 작은 책을 둘러싼 글래스 남매의 다툼에 가까운 대화 역시 공감보다는 먼나라 먼이웃처럼 '아이고 의미없다'는 생각만 자꾸 든다.

 

재미있는 점은 종교에 대한 샐린저의 이중적인 태도인데, 매맞는 아내랄까, 그러니까 청교도주의 세태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구원은 청교도주의 안에서 찾는다는 샐린저식 해법은 일견 '종교가 다 해줄거예요~'하는 허탈감을 준다.

게다가 이 소설은 샐린저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인상이 강한데 이는 프래니와 주이가 '배우'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주부인 글래스 부인(베시 글래스) 역시 젊은 날엔 배우였으니 이 집안의 내력이 그러하다.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가 한결같이 연극적 대사, 연극적 제스쳐를 취하니 좋은 말로도 소설의 흡인력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소설에서 감각적인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

 

일본판『프래니와 주이』의 역자인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소설 속 종교적 담론을 일종의 정신적 메타포로 수용하면 '종교'라는 허울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의 핵심에 접근하는데 보다 쉬울 것이라고 했지만, 이게 사실 간단치가 않다. 이 연작 소설이 발표된 1954년, 1957년은 아이젠하워(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사령관) 집권기이고, 10년 째 접어드는 전후 냉전체제가 공고히 다져지고 있고, 매카시즘 광풍이 한바탕 휘몰아쳤던 직후이다. 이런 세태와 청교도라는 배경을 깔고 뉴욕 부유층 남매가 종교적 담론을 벌이는 것이다. 문화의 뿌리가 아예 다른 국가의 독자들은 1950년대 뉴욕의 세태와 더불어 종교적인 장벽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작가로서 샐린저의 명성이 여지 없이 빛나는 지점이 있다. 이 낯설고 까다로운 대화를 인내심을 가지고 듣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보편적 감동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기어이 온다.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데, 같은 길을 이어 붙이기 한 것 같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고 저 아래로 걸어온 길이 완성된 풍경을 이루는 장광을 보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고진감래(苦盡甘來)!

 

소설이 끝나가는 거의 막바지에 소나기처럼 등장한 '뚱뚱한 여자'는 의미 그대로 이 소설의 화룡점정이고 절창이다. 주이에게 구두를 닦게 하고, 프래니에게 무대를 재미있게 만들도록 감시하고 조종하는 시모어의 '뚱뚱한 여자'가 주이가 이해한 것처럼 정말 '그리스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나)로 하여금 소설 전체를 되돌아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구원의 메타포임에는 분명하다.

 

(샐린저를 대변하는 것 같은)샐린저의 소설 속 '오빠'에게 여동생은 특별하다.『프래니와 주이』에서 내가 감동 받았던 장면은 두 곳인데 모두 주이가 프래니에게 내면적 소통을 시도하던 장면이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왠지 홀든이 피비로 인해 구원받았던 빚을, 주이가 프래니에게 갚는 것처럼 느꼈고 괜히 울컥했다.

 

* 소설을 읽으면서 영혼 없는 은유 만큼이나 의인법을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거실 나머지 부분에는 그리도 무례하게 굴던 태양이 훌륭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 햇살은 사실 아프간 담요 전체를 씻고 있었고, 연푸른색 울 담요에 노니는 따스하고 화사한 빛의 유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바라볼 가치가 있었다. -p.158

 

 

* 다음은 샐린저의 예술론 혹은 작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어떠한 의미에서든. -p.250

 

분량이 짧은「프래니」편은 그냥 저냥 읽고「주이」편을 읽던 도중, 결국 거미줄보다 얇은 인내심을 탓하며 책 후면을 뒤졌다. 도대체 작가가,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옮긴이든 작가든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 엔딩 뒤로 페이지가 공백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뒤늦게 샐린저의 소설은 작가 에이전시의 요구로 서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내친 김에 일본어판 역자인 하루키의 해설이 궁금해 잉여력을 발휘, 하루키 역자 서문을 잠깐 훑어봤다. 하루키 역자 서문은 삽지 형태로 책에 끼웠다고 한다.

 

 

- 아래는『프래니와 주이』일본어판 하루키 역자 서문(혹은 역자 해설)을 읽고 짧은 감상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이 소설의 재미는 단연 '매력적인 문체'에 있다고 단언하는데, '버디 문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주이」는 주이에게 보낸 버디의 편지로 시작하는데, 서간문의 특성상 화자의 개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그로 인해 친밀감이 더 느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버디 문체'라고 특정 짓기에는 '홀든 문체'와 그 차이가 썩 안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한발 더 나아가 하루키는 샐린저가 버디의 문체를 차용해 '주이'를 쓰고 있으며 문장이 자유자재로 변화한다고 감탄하는데 역시 공감하기 어렵다.「주이」는 서사가 아니라 종교적 담론을 바탕으로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나는 소설이라 딱히 문장을 음미할 대목이 없기 때문. 만약 문법적인 요소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하루키 개인의(혹은 일본인 정서의) 취향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참고로 내가 읽은 '호밀밭'과 '주이'는 역자가 다르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책을 읽은 사람은 대개 공감하겠지만,「프래니」가「주이」의 도입부로 읽힌다는 부분과 샐린저가 레인을 통해 학벌주의 엘리트를 비판한다는 부분인데, 사실 학벌주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는 부분은『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이미 한차례 등장했기 때문에 딱히 새롭지는 않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다 웃음이 터졌던 부분은 독자들이 제기했다는 '프래니 임신설'이다. 이유는 너무 자주 실신하고, 섭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데 뭔가 설득력이 있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하물며 비평가들마저 이 의문에 가담했다고 하니 자기 소설에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을 가진 샐린저가 기함하고 펄쩍 뛸만 하다.

 

「주이」는 애초에 두 가지 이유로 뉴요커지(紙)로 부터 거절 당했는데 '분량'과 너무 '종교적'이라 게 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래로 위기에 닥친 작가 옆엔 능력있는 편집자가 있는 법. 뉴요커지 편집장의 결단력과 팬심으로 소설은 분량은 좀 줄었으나 무사히 뉴요커 지면에 실리고 샐린저는 작가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에도 언급하지만 국내『프래니와 주이』역시 책 서두에서 샐린저가 아들과 더불어 편집장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는 헌사를 볼 수 있다. 샐린저의 은둔 성향을 미루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국내판 역자도 일러두기에 Zooey의 발음 표기를 놓고 판본을 가진 에이전시에 연락해 'zooee'라고 발음을 확인했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는 일본도 상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경우 기존엔 'ゾ-イ-'(조이)가 일반적이었으나 'ズ-イ', 'ゾ-イ'등을 놓고 숙고 끝에 'ズ-イ'를 선택했다고 한다. * 'ズ'의 원어민 발음은 주와 즈의 중간 어드메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샐린저 사후 작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는 내용. 작가가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지만 독자는 그저 반가운 일.

거의 홀짝 수준으로 대충 역자 서문을 훑은 소감은, 그 발로가 하루키의 팬심인지 아니면 역자로서의 성실성과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례사 비평의 느낌이 드는 대목도 적지 않다는 거.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역자 서문만으로도 이런 감상을 쓰게 하는 하루키의 힘이랄까.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하루키를 안 좋아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은 직후 국내 출판사 제공 책소개(=출판사 리뷰)를 읽는데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에 대조해 보니 일본판 하루키 서문과 국내판 출판사 리뷰 중 일부는 거의 번역 수준으로 흡사하다.

1950년대 미국, 동양철학, 원시그리스도교리, 비트세대, 반물줄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성, 아카데미즘, 샐린저의 트라우마 등등...

참고로 하루키 역자서문이 실린 일본어판은 2014년 3월에 출간됐다.

아래는 각각 문학동네의 출판사 리뷰와 하루키 역자 서문 중 일부를 비교한 것.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양철학과 원시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금보다 훨씬 절박하고 리얼한 존재성을 띠었고, 비트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였다. 이러한 종교성은 반물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며 압도적 번영을 반성 없이 향유하던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차갑고 경직된 아카데미즘이나 상상력이 모자란 획일적 미디어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또한 제2차세계대전에 병사로 종군하며 격전지를 헤쳐온 샐린저가 짊어지게 된 깊은 트라우마의 절실한 위안 수단이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말하고자 했던 영성은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일반적인 ‘신을 원하는 심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출처. 온라인 서점 출판사 리뷰 中)

 

ただひとつご理解いただきたいのは、一九五〇年代のアメリカにおいては、東洋哲学や原始キリスト教の教義は、おそらく現在よりもずっと切迫した、リアルな存在性を持っていたという事実だ。ビート・ジェネレーションへと繋がっていくひとつの思想的ファッションとなっていた、と言ってしまってもいいかもしれない(もちろんサリンジャーの場合はそれは単なるファッションに留まらず、良くも悪くも彼を全的に包含していったわけだが)。それらの宗教性が意味するのは反物質主義であり、反プラグマティズムであり、圧倒的繁栄を無反省に享受するアメリカ社会への静かなる「ノー」であった。冷たく硬直したアカデミズムや、想像力を欠いた画一的メディアに対する「ノー」でもあった。また同時にそれは、第二次大戦に兵士として従軍し、数々の激戦の中をくぐり抜けてきたサリンジャーが背負うことになった深いトラウマの、切実な癒やしの手段であり、ヒューマニティー回復への大事な道筋でもあった。 (출처. http://www.shinchosha.co.jp/fz/fz_murakam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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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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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쓸쓸한, 뭐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 2부 타인의 증거를 읽을 때는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건조하고 차갑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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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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꼽아보니 내게 루시디였다가 루슈디가 된 시간은 살만 루슈디와 파트와의 시간, 딱 그만큼이다. 루슈디의 자서전이라니 왠지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얄미운 인간에게 휘두르면 딱이겠다 싶은 총 824쪽의, 중간중간 북마크를 꽂고 메모를 하는 수 초도 아까워하면서 키득키득 읽어내려갔던 이 두꺼운 양장본은, 완독하는대로 논문에 준하는 장문의 리뷰를 써주겠어-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읽은 직후 부산에 다녀오는 공백을 거치면서 내 머리 속도 공백이 되었다. 그나마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의심하며 독서 틈틈이 건성건성 메모한 것마저 없었으면 이 재미있는 책에 대해 내가 할 말은 '재미있었음' 이 한 줄이 전부가 될 뻔 했다.

 

* 이하, '조지프 앤턴' 메모...

  

- 루슈디는 메리앤과 도대체 언제 이혼하는가. CIA가 안가를 뒤졌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고, 남편의 지인들에게 남편을 비겁한 겁쟁이로 매도하고, 시시때때로 거짓말은 일상다반사, 와중에 남편의 친구와 바람도 피는 나쁜 메리엔. '사랑과 전쟁' 수준의 막장에 준하는 루슈디와 메리엔의 일화. 욕하면서 읽는 재미.

- 모든 삶은 정치적 선택의 연속 - 하물며 저녁 테이블 위에 올라온 한 끼도 정치적 산물이다.

- 국가간 정치적 이해관계가 종교적 위협으로부터 작가를 어떻게 방치하는가.

- 소설적 재미가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을 때와 유사하다. 확인하니 역자가 같다. 내친김에 책장을 뒤져보니 같은 역자의 책을 다수 발견. 기쁨.

- 긍정과 낙관이야말로 삶을 견디는 원동력.

- 살만 루슈디의 1989년

역사적 사건: 톈안먼 사태, 베를린 장벽 붕괴

개인적 사건: 파트와(전 세계 무슬림에게 살인면허를 쥐어주는 일종의 사형선고)

- 10년이 넘게 지속된 파트와, 무슬림의 협박과 죽음의 공포. 루슈디 경호를 예산낭비라고 비난하며 경호 철회를 주장하는 내부의 '적'들.

- 파트와 공표 이후 몇 개월이 지날 무렵 가명 '조지프 앤턴' 탄생. 이는 즉 그의 도피와 은둔 생활이 장기화된다는 의미.

- 궁금했던 제목 '조지프 앤턴'의 정체는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C.체홉에서 딴 것.

- 힌두교 80.5%, 이슬람 13.4%인 인도가 무슬림의 표적인 루슈디 고립에 그토록 앞장선 이유는?, G7과 서유럽으로 구성된 서방세계를 상대로 그토록 오랫동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란의 지정학적, 정치적 입지 혹은 배경은 무엇?

- 영국내 무슬림의 질적양적 영향력, 파급력.

- 88년 이란의 시아파 수장 호메이니가 파트와 공표, 89년 호메이니 사망 후 공식적으로 파트와 철회. 그러나 실제로는 1주기가 돌아올 때마다 파트와 재천명.

- 파트와 해결에 햇수로 13년(1989-2002)이나 걸린 건 루슈디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던가 아니면 그닥 '별볼일없는' 기회비용이었던가.

-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니까.

- 삶을 지배하는 건 운명이 아닌 우연.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니까'는 루슈디가 절망하려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고, '삶을 지배하는 건 운명이 아닌 우연'은 엘리자베스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인데, 그의 상황과 별개로도 울림과 공감이 크다. 참고로 은둔 생활 중에 만나 애틋했던 엘리자베스와는 이후 볼썽사나운 싸움 끝에 이혼했다. 루슈디의 *'우울함, 호전성, 현명함, 자기연민, 조심스러움, 나약함, 이기주의, 강인함, 쩨째함, 단호함'과 관련된 일면들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그의 여성편력인데, 일단 책에 등장하는 두 번의 결혼은 모두 모양새가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이별이 되었다. 이는 루슈디가 여자를 '몹시' 좋아하는 남자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따라오는 여난인데, 순수한 호기심으로 파트와 철회 이후를 검색해보니 그의 여성편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양.

인도인 남성하면 흔히 떠올리는 정체성이랄까, 민족성이랄까...를 생각하면 루슈디 입장에선 한때는 사랑이었던 그녀들의 비난이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이제 정신 좀 차렸으면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작가로서의 재능을 아끼기 때문이다. 재능있으면 일부일처, 일부종사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못할 건 뭔가? 반문하고 싶다.

 

* 그들은 루슈디의 온갖 모습을 - 우울함, 호전성, 현명함, 자기연민, 조심스러움, 나약함, 이기주의, 강인함, 쩨째함, 단호함 등을 - 두루 목격하면서도 끝까지 그를 도와주었다. -p.262

 

자서전으로는 독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직접 3인칭 시점으로 쓴 이 책은 유년, 청소년기가 잠깐 등장하고 작가로 등단했던 시절을 짧게 거쳐 호메이니의 파트와 공표와 함께 바로 본문으로 들어간다.

죽음이 발뒤꿈치를 끊임없이 쫓아오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하물며 그 시간이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다면.

그 시간이 11년이 될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견디기가 더 쉬웠을까. 삶과 죽음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은 의미 없겠으나 분명한 건 그 지난한 시간 동안 루슈디를 지탱해준 건 낙천과 긍정이었다는 거다. 이후 자서전의 영양분이 되었던 은둔 기간의 메모가 그것을 증명한다. 루슈디가 가진 최고의 재산은 책 한 권을 쓰는 지성이 아니라 삶을 향한 애착이었던 것.

 

이 책을 읽기 전, 하필 모커뮤니티에서 인도인에 대한 사실적인 불평, 불만, 비난, 비판을 읽은 터라 어쩔 수 없이 특정 민족을 향한 약간의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가령 루슈디가 존 르 카레,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가디언 지면을 통해 펜으로 싸웠을 때, 루슈디의 편을 들어 '우리 작가님한테 왜 그래요!'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나 사정이 있었겠지- 라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던지 하는. 실제로 루슈디는 ** 르카레의 인터뷰를 잊지 않고 지면에 첨언한다. 본인도 인정하듯 쩨쩨할지는 모르나(11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는 쪼잔함을 보라) 한편 그의 기본적인 성향은 낙천성이라는 짐작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별개로 인도계 문학인들 모임에서 만난 줌파 라히리를 말그대로 '까는' 일화를 읽을 때는, 아니 이 나쁜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인정한다. 난 여자의 적이다. 참고로, 글쓴이가 작가이다 보니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직,간접으로 찬조출연하는 재미는 덤.

 

**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8년, 존 르카레가 인터뷰에서 오래전의 그 사소한 언쟁에 대해 언급한 글을 읽었다. "어쩌면 내가 틀렸는지도 모릅니다. 틀렸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pp.683-689)

 

이 책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인간의 11년의 기록이다. 그런데도 유쾌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건 그 끝이 결국은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남았고, 죽음의 그림자를 따돌리고 승리했다. 파트와와 함께 한 살만 루슈디의 11년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성으로는 비관해도 의지로는 낙관하라'(by 그람시)가 그야말로 제격이다.

 

"밥 경위님, 이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차량 아홉 대에, 모터사이클에, 사이렌, 경광등, 게다가 경찰관도 너무 많고. 차라리 낡은 뷰익을 타고 조용히 뒷길로 지나가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자 밥 경위는 대책 없는 바보나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선생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밥 경위님, 저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거창한 대우를 받습니까?"

"아라파트 정도는 돼야겠죠."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동등한 예우라니 좀 놀라웠다.

"밥 경위님, 만약 제가 대통령이라면 지금보다 뭘 더 하는 겁니까?"

"선생님이 미국 대통령이라면 이 길 전체를 봉쇄하고 건물 지붕마다 저격수를 배치했겠죠. 오늘은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은 이 행렬은 맨해튼을 향해 달려갔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차량 아홉 대가 한 줄로 늘어서고 모터사이클을 울려대고 경광등은 마구 번쩍거렸다 -p.407

 

행운이 한번 더 찾아왔다. 마침 인근에 밀턴 울라둘라 병원이라는 작은 의료 시설이 있어 구급차가 빨리 올 수 있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오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실례지만, 혹시 살만 류슈디 씨 아니세요?" 그 순간만큼은 아니고 싶었다. 그냥 치료를 받고 있는 익명의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 그는 루슈디였다. "정말요? 지금 이런 부탁을 드리면 힘드시겠지만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는 생각했다. 사인 한 장 해줘. 구급차와 함께 온 사람이야.

(…중략)

트럭 컨테이너에는 신선한 거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다소 흥분해서 자파르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 말은 우리가 똥을 실은 트럭에 깔려 죽을 뻔했다는 거야? 산더미 같은 분뇨에 깔려 죽을 뻔한 거야?" 그랬다, 사실이었다. 7년 가까이 암살 전문가들을 잘도 피해 다녔건만, 그와 그의 사랑하는 가족은 거대한 똥사태에 파묻혀 종말을 고할 뻔했다. -pp.61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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