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을 만나러 가는 고속 버스 안에서 이 글을 쓴다. “제4회 예스24 문학기행”에 운 좋게 추첨된 것이다. 첫 날의 강사는 은희경 작가이고, 둘째 날 황석영을 만난다. 때문에 급히 그의 소설 ‘바리데기’를 읽는다. 황석영의 이 소설에는 잔잔한 대하가 흐르는 듯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고단한 길을 걸어간다. 그러니까 황석영의 소설 속에는 물과 길이 어우러져 흘러간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존경받는 중견작가로서의 완숙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은 기성 작가들이 보이는 일종의 굴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처럼 망치를 가지고 이것저것 깨부수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대학교수와 같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축적형 철학자’가 있다. 내가 가는 길이 아무리 금태를 두른 듯 보이고, 존경과 선망을 받는 듯 보여도 나 자신에게는 가시밭길이자 굴곡이다. 특히 작가라면 자신의 아우라를 허물고 전혀 새로운 캐릭터로 변모를 거듭해야 하지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황석영은 ‘중견작가 혹은 원로작가’의 직함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야기는 ‘바리’라는 주인공의 태생에서부터 아기를 낳고 가족을 이룰 때까지의 경과를 다루고 있다. 바리가 살아온 행로는 고난의 길이었는데, 그것은 토속신앙에서 ‘바리’라는 인물이 만인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설 속에서 반영한 결과이다. 바리가 고난을 겪고 사람들을 만나는 행로는 사뭇 안정적이며 노련미 있다. 사건과 사건 간의 인과관계가 매우 세밀하며 상황 속에서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으면서도 문체 자체는 그야말로 청산유수처럼 쉽게 읽힌다. 그의 소설을 기대한 독자이거나 소설의 미학적이고 기법적 향취를 얻고자 하는 독자라면 일정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이런 이유 때문에 불만이다. 즉 주인공의 운명과 운명에 걸쳐 있는 메시지는 깔끔히 정리돼 있었으며 담아야 할 이야기 오늘날의 핵심적인 담론들, 이에 대한 작가의 입장과 읽은 후에 독자가 얻게 되는 교훈까지도 작가는 모두 배려했다. 마치 소설을 통해 강의를 들을 느낌이랄까? 나에게 소설 읽기는 소설쓰기의 일환이며, 본질적으로 그것은 ‘모험’이다. 소설은 나에게 무지의 세계이며 모험이며 내가 차곡차곡 쌓아둔 ‘도덕의 성’을 공격하는 적병이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는 임종 시에 신비를 발휘한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사리’라는 기제를 통해 죽음의 신성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하지만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그 살이 부패하고 구더기가 모든 살을 파먹은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리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허무는 것이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대심문관’은 어떤가, 예수가 강림했지만 사제는 그를 처형하려 하고, 그를 거부한다. 이것은 독자가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은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 아쉽다. 그가 비록 형식적 완성을 이뤘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세계관은 침해당했다. 개인적으로 도스또옙스끼를 환기시켜 준 점은 이 소설을 읽고 내가 얻은 것이다. 핵심 담론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건드렸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가르쳤을 뿐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환기시켜준 것은 아니다. 나는 사회운동가이자 지도층으로서의 황석영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황석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