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완전한 뻐꾸기



아인슈타인은 예순여섯 살이 되던 전쟁이 끝난 해에 공식적으로 고등연구소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1주일에 사흘을 작은 사무실에서 보냈고, 통일장이론을 탐구했다.
그는 주중에 적당한 시각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신문을 읽은 후 10시경에 머서 가를 느리게 걸어서 연구소로 갔다.
그의 동료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운전기사가 갑자기 긴 백발에 검은 모직 모자를 단단히 눌러쓰고 길을 따라 걷고 있던 아름다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나무에 충돌했던 사건”을 기억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J.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소의 소장으로 로스앨러모스에서 프린스턴으로 옮겨왔다.
총명하고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던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원자탄을 제조한 과학자들의 감동적인 지도자가 될 정도로 권위적이면서 유능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추종자가 되거나 적이 되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가 1935년 처음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그는 연구소를 “갈라지고 불운한 황무지에서 유아독존으로 빛나는 권위자들”로 채워진 “정신병원”으로 불렀다.
그런 권위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에 대해서 오펜하이머는 애정 어린 뜻으로 보이지만 “아인슈타인은 완전한 뻐꾸기”라고 했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봉화가 아니라 경계석”이라고 했다.
그의 위대한 승리는 감동적이지만 현재의 노력에 대해서는 추종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또 다른 생생한 묘사를 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기도 하면서 심각하게 완고하고 강력한 순수함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소의 또 다른 우상과 같은 인물이었던 극도로 내향적이며 브르노와 빈 출신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학논리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del(1906~78)과 가까운 친구 겸 산책 동료가 되었다.
괴델은 유용한 수학시스템이 그 시스템의 가설만으로는 진위를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논리적 증명으로 이루어진 불완전성원리로 유명했다.

물리학과 수학과 철학이 뒤엉킨 고도로 긴장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식인의 세계에서 20세기의 세 가지 삐걱거리는 이론들이 등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그리고 괴델의 불완전성이 그것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세 가지 단어들은 모두 잠정적이며 주관적인 우주를 그려내지만 이론은 물론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들은 모두 철학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그것이 바로 괴델과 아인슈타인이 연구소로 함께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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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한 마리가 관찰한다고 우주의 상태가 변합니까?”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이론의 추구에 계속 실패했다고 해서 양자역학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인식이 약화될 것은 아니었다.
1948년 연구소에 머물기 위해 온 닐스 보어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솔베이회의에서 있었던 자신들의 논쟁에 관한 글을 쓰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사무실보다 한 층 위에 있던 자신의 사무실에서 글과 씨름하던 그는 슬럼프에 빠져서 에이브러햄 파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보어가 흥분해서 타원형의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면 파이스가 그를 달래면서 노트를 받아 적었다.

보어는 좌절하면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서 “아인슈타인 ... 아인슈타인 ...”을 중얼거렸다.

언젠가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발끝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파이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의사가 피우지 말라고 지시한 담배를 훔치러 온 것이었다.
계속 중얼거리던 보어가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을 외치면서 돌아서다가 자신을 걱정하게 만든 인물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이스는 “보어가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표현”이라고 술회했다.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인슈타인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한 다른 동료 중에 프린스턴 대학의 이론물리학자 존 휠러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에 그는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대학원생과 함께 개발했던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설명하려고 아인슈타인을 찾아왔다.
휠러는 “새로운 시각에서 보았을 때 양자이론의 자연스러움을 아인슈타인에게 설명해주려는 희망을 갖고 그에게 갔었다”고 술회했다.
아인슈타인은 20분 동안 인내를 갖고 들었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나는 여전히 신이 주사위놀이를 한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라는 익숙한 후렴을 반복했다.

휠러는 실망감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그제야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주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는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그러나 어쩌면 나는 실수를 저지를 권리를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훗날 아인슈타인은 어느 여자친구에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누가 옳은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휠러는 계속해서 그를 방문했고, 때로는 자신의 학생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주장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개종하지 않았다. 말년에 가까워서 아인슈타인은 휠러의 학생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관찰이 실재에 영향을 주고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아인슈타인은 학생들에게 “쥐 한 마리가 관찰을 한다고 우주의 상태가 변합니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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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약한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된 밀레바 마리치는 여전히 취리히에 살면서 요양소에서 점점 더 이상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에두아르트를 돌보고 있었다.
재정문제가 다시 어려워지면서 전남편과의 갈등도 되살아났다. 노벨 상금에서 그녀를 위해 미국의 신탁에 넣어두었던 돈의 일부가 대공황 때에 사라져버렸고,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세 채의 아파트 중 두 채는 에두아르트를 돌보는 비용에 사용되었다.
1946년 말 아인슈타인은 남아있는 집을 팔아 그 돈을 에두아르트를 위해 지명된 법적 보호자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치는 그 집의 사용권과 수익금은 물론 대리 위임권까지 갖고 있었으며, 그런 권리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 어느 추운 날 마리치는 에두아르트를 만나러 가던 길에 쓰러져 낯선 사람이 그녀를 발견할 때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해 5월에 마리치는 다시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석 달 후 숨을 거뒀다.
그녀의 아파트를 팔아서 받은 8만5천스위스 프랑이 그녀의 침대 밑에서 발견되었다.

멍한 상태가 된 에두아르트는 어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근처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의 친구 카를 젤리히가 그를 자주 찾아갔고 정기적으로 아인슈타인에게 그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1948년에 아인슈타인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그는 소화불량과 빈혈에 시달려왔으며, 그해 말에 심한 통증과 구토를 경험했고, 그로 인해 브루클린에 있는 유대인 병원에 입원했다.
진단을 위한 수술에서 복부 대동맥에 동맥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의사들은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것이 그의 사망 원인이 되었지만 건강식을 하면 덤으로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플로리다주의 사라소타로 갔다. 헬렌 듀카스가 그를 따라갔다.
엘자가 타계한 후 그녀는 충성스러운 보호자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한스 알베르트의 양녀 에벌린이 보낸 편지를 그에게 전해주지 않기도 했다.
버클리 대학의 공대 교수가 된 한스 알베르트는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연애를 하고 있다고 의심했으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듀카스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리아의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는 무솔리니가 반유대인 법률을 시행하면서 프린스턴으로 왔지만 몇 년 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그녀의 남편 파울 빈텔러는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 미셸 베소가 살고 있던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마리아는 뇌졸중을 겪었고, 1948년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이 그녀를 돌보았다.
매일 저녁 그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1951년 6월에 마리아가 사망하자 아인슈타인은 몹시 슬퍼했다.
그의 양녀 마르고트가 그를 위로했다.
마르고트 역시 그녀의 남편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은 오래 전부터 원했듯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비공식 전기를 썼다. 마리아와 마르고트 모두 나이가 들면서 남편과 사는 것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이 플로리다주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70회 생일기념학술대회를 열어주었다.
강연은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따뜻함과 인간적인 면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연구소에서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선물로 마련한 첨단 AM-FM 라디오와 고음질 녹음기는 어느 날 그가 연구소에 있는 동안 그의 집에 몰래 설치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감격했으며, 그 기기를 음악뿐만 아니라 뉴스를 듣는 데도 사용했다.

그는 이미 바이올린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피아노에 열중했다.
한 번은 한 구절에서 계속 실수를 하던 그가 마르고트에게 웃으면서 “모차르트가 이렇게 엉터리로 곡을 만들었군”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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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에게 이스라엘의 대통령직을 권하다




1921년에 아인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려온 끈기 있는 시온주의자 카임 바이츠만이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은 총리와 각료들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주어진 체제에서는 명예롭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자리였다.
바이츠만이 1952년에 타계하자 예루살렘의 신문들은 아인슈타인이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여론의 압력에 굴복했고, 아인슈타인에게 요청이 갈 것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바이츠만이 타계하고 1주일이 지난 후 『뉴욕 타임스』에 실린 작은 기사에서 그 소식을 처음 보았다.
처음에는 그와 집에 있던 여성들이 모두 웃어넘겼지만 기자들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손님에게 “이건 정말 거북합니다. 정말 거북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몇 시간 후 워싱턴의 이스라엘 대사인 압바 에반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그 전보는 대사관에서 공식으로 그를 면담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내가 거절한 텐데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먼 길을 와야 하나?” 하고 한탄했다.

헬렌 듀카스는 에반 대사에게 전화를 하는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인슈타인이 전화를 했고, 에반은 “저는 선생님이 전화로 거절했다고 정부에 보고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행동을 해서 공식적으로 제안을 전달해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에반은 결국 보좌관을 보내 아인슈타인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공식 편지를 전달했다.
에반의 편지는 “수락하시면 이스라엘로 이사를 가서 시민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에반은 서둘러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의 일이 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정부와 국민은 선생님의 위대한 과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대통령직은 그의 존재가 필요할 뿐이지 실제로 일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거절편지를 준비해놓은 아인슈타인은 에반의 특사가 도착한 즉시 그 편지를 전달했다.
방문객은 “저는 평생 변호사로 살았지만 제가 설명도 하기 전에 반박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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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최후



1954년 3월 동료들이 75회 생일선물로 자신들이 5년 전에 마련해준 음향기기를 바꿔주자 아인슈타인은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이 담긴 RCA 빅터 레코드판을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에 베토벤을 “너무 개인적이고 거의 벌거벗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종교적 본능에는 그런 종류의 부속물이 포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잔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산책을 좋아했다.
괴델과 함께 연구소로 가거나 연구소에서 걸어서 돌아오기도 했으며, 마르고트와 함께 프린스턴 근처의 숲을 거닐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핵시대에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격려했다.
러셀은 자신들이 모두 1차 세계대전을 반대했고, 2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했다.
이제 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것이 필수였다.
러셀은 “저는 유명한 과학자가 정부에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깨닫게 해줄 극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답장에서 그들과 몇 사람의 다른 유명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서명할 수 있는 공개선언을 제안했다.

닐스 보어는 거절했지만 막스 보른을 포함한 9명의 과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할 것을 동의했다.
러셀은 제안문을 단순한 청원으로 마무리했다.
미래의 어떠한 세계대전에서도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 확실하고, 그런 무기가 인류의 지속적인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세계의 정부들이 세계대전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결과적으로 국가 간 갈등의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적 수단을 찾아낼 것을 요청한다.

아인슈타인은 76회 생일가지 생존했지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머서 가 112번지 앞에 모여든 기자와 사진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러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며칠 후 그는 과학적 조언자였던 미셸 베소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는 베소의 가족에게 보낸 위로편지에 “그는 이렇게 이상한 세상에서 나보다 조금 먼저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가진 물리학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완고한 환상일 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1일에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에 서명했다.
훗날 러셀이 밝혔듯이 “그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남아있었다.
그 문서에서 비롯된 것이 매년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모여 핵무기를 통제하는 방법을 논의했던 퍼그워시회의Pugwash Conference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였다.

그날 오후 늦게 이스라엘 대사 압바 에반이 유대국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예정된 아인슈타인의 라디오 연설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에반은 그의 연설을 5천만 명이 청취하게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제 내게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기회가 생겼습니다”라면서 웃었다.

아인슈타인이 다음 날 연구소로 출근했지만 사타구니에 통증을 느꼈다.
다음 날 그는 집에 머물렀다.
이스라엘 영사가 찾아왔다.
방문객들이 떠난 뒤 그는 잠을 자려고 누웠다.
듀카스는 그가 한낮에 화장실로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는 그곳에 쓰러졌다.
의사가 그에게 모르핀을 주사하여 잠을 자도록 했으며, 듀카스가 자신의 침대를 그의 침대 바로 옆에 옮겨두고 밤새도록 탈수된 그의 입술에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그의 동맥류가 터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의 집으로 불려온 여러 의사들은 상의 끝에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동맥을 고칠 수도 있는 외과 의사를 추천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듀카스에게 “삶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품위가 없다. 나는 내 몫을 했고, 이제 떠날 시간이다. 나는 우아하게 떠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듀카스는 그가 심한 고통을 느끼고 머리를 들지도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전화로 달려갔고 의사는 그를 병원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구급차의 자원봉사 구급대원은 프린스턴의 정치경제학자였고, 아인슈타인은 그와 활발한 대화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마르고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전화했으며,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의 병실에 도착했다.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된 동료 독일 망명자였던 경제학자 오토 나탄도 뉴욕에서 달려왔다.

일요일이었던 4월 17일에 잠을 깬 그는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그는 듀카스에게 자신의 안경과 종이 그리고 연필을 가져다달라고 했고, 몇 가지 식을 적어나갔다.
그는 한스 알베르트에게 몇 가지 과학적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주고 나탄에게는 독일 재무장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을 가리키면서 반농담으로 아들에게 “내가 수학을 조금 더 알았더라면”이라고 말했다.

월요일이었던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에 간호사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의 독일어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큰 물집처럼 동맥류가 터져버렸고, 아인슈타인은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침대 옆에는 이스라엘 독립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연설문의 원고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미국 시민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야기합니다”라고 시작되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빽빽하게 쓴 방정식을 지우고 수정한 12페이지의 서류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의 잡히지 않는 통일장이론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을 자기 직전에 쓴 것은 자신과 우리 모두를 우주의 법칙에 나타난 정신에 조금 더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라고 바라던 한 줄의 기호와 숫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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