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여자들



아인슈타인의 생애에서 여성과의 관계는 복잡했는데, 그의 매력적인 호소와 감동적인 예절이 여성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엘자와 결혼한 후인 1923년 그는 비서인 베티 노이만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그해 가을 라이덴을 방문하던 그는 뉴욕에서 직장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녀가 비서로 함께 갈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그녀와 엘자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내가 아내를 설득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뉴욕 외곽에 큰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비웃는 답장을 보냈고 그는 곧바로 자신이 “무분별한 바보”였음을 인정했다.
“당신은 늙은 수학자이인 나보다 삼각형 기하학의 어려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별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한탄하면서 사랑을 끝냈다.
“사랑하는 베티, 나를 늙은 원숭이라 비웃고 나보다 열 살은 젊으면서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세요.”

그러나 관계는 계속되었다.
다음 해 여름에 아들을 만나러 독일 남부에 간 아인슈타인은 인근 휴양지에 와있던 엘자와 그녀의 딸들에게 가는 것이 “지나치게 좋은 일”이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베티 노이만에게 몰래 베를린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만약 엘자가 그런 사실을 알면 “날아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그런 사실을 말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카푸트에 집을 지은 후에는 엘자가 매우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계속 찾아왔다.
반제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미망인 토니 멘델이 가끔 카푸트르로 와서 함께 보트를 즐기기도 했으며, 그가 보트를 타고 그녀의 별장으로 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늦은 밤까지 머물기도 했다.
그들은 가끔 베를린의 극장을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운전사가 모는 리무진이 아인슈타인을 데리러 왔을 때 엘자는 그녀와 심하게 싸우고 그에게 용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에텔 미카노프스키라는 베를린 사교계의 명사와도 관계를 가졌다.
그녀는 1931년 5월 그의 옥스퍼드 여행에 따라가서 그 지역의 호텔에 머물렀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느 날 크리스트 처치 대학의 편지지에 그녀를 위한 오행시를 짓기도 했다.
그 시는 “긴 가지가 정교하게 매달린, 그녀의 눈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로 시작되었다.
며칠 후 그녀는 그에게 비싼 선물을 보냈지만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는 “작은 소포가 정말 날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내게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 어차피 무분별한 넉넉함으로 가득한 영국 대학으로 그런 것을 보내다니!”하고 했습니다.

미카노프스키가 옥스퍼드로 아인슈타인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자가 분노했다.
아인슈타인은 옥스퍼드에서 엘자에게 침착하도록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마르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여성 중에서 나는 실제로 전혀 해가 되지 않고 존경할 만한 L 부인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이는 그가 공개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마르가레테 레바흐라는 이름의 금발 오스트리아 여성이었다.
카푸트를 방문한 레바흐는 엘자를 위해 과자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엘자는 당연히 그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바흐가 오는 날에는 베를린으로 쇼핑하러 마을을 떠났다.

한번은 레바흐가 아인슈타인의 보트에 옷을 남겨두었고 그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났다.
엘자의 딸이 그녀에게 아인슈타인이 관계를 끝내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엘자는 남편이 거절할 것을 두려워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남자와 여자는 자연적으로 일부일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결국 엘자는 자신들의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아인슈타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은 엘자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그를 보호해주고, 그에게 충성스러우면서 위협이 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헬렌 듀카스는 아인슈타인이 심장 감염으로 침대에 누워있던 1928년에 비서로 들어왔다.
엘자는 그녀의 언니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는 유대인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엘자는 그곳의 명예회장이었다.
엘자는 듀카스가 아인슈타인을 만나기 전에 먼저 면담했으며, 듀카스가 믿을 만하고 더 정확하게 모든 면에서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듀카스가 아인슈타인을 만나기도 전에 일자리를 제안했다.

1928년 4월 서른두 살의 듀카스가 아인슈타인의 병실로 들어섰을 때 그는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여기 늙은 아이의 시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1955년 그가 사망할 때 자신이 사망할 때인 1982년까지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었던 듀카스는 그의 시간, 사생활, 명성 그리고 훗날에는 그의 유산을 맹렬하게 지켜냈다.

외부의 입장에서 듀카스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사나운 개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그녀를 자신의 작은 하데스 왕국을 지키는 경비견인 케르베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언론인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그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것으로 생각되는 편지는 그에게 전해주지 않았으며, 그녀가 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덮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듀카스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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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큰아들 한스 알베르트



한스 알베르트는 부모의 모교인 취리히폴리테크닉을 다니는 동안 자신보다 아홉 살 연상의 프리다 크네흐트와 사랑에 빠졌다.
152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던 그녀는 평범하고 퉁명스러웠지만 매우 총명했다.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교활하고, 매력이 없으며, 육체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마리치에게 “나는 최선을 다해 한스에게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설득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한스 알베르트에게 “그녀가 너를 먼저 사로잡았을 것이고, 이제 너는 그녀가 여성의 구현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여성이 순진한 사람을 이용하는 잘 알려진 방법이란다”라고 했다.
그는 매력적인 여성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한스 알베르트는 25년 전 아버지가 그랬듯이 완고했다.
그는 프리다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아들에게 자식을 낳지 말 것을 약속하라고 강요했다.
아인슈타인은 “네가 그녀를 떠나야 한다고 느끼게 되면 내게 망설이지 말고 말하려무나. 어쨌든 그런 날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

한스 알베르트와 프리다는 1927년에 결혼했고, 아이들을 낳았으며, 그녀가 31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부부로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에두아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스 알베르트의 결혼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현했다.
“인종의 퇴화는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알베르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란다. 나는 그에게 행복한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어 본능적으로 그를 피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나 2년이 지나지 않아서 아인슈타인은 프리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부부는 1929년 여름에 그를 방문했고, 그는 에두아르트에게 그들과 평화롭게 지냈다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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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둘째아들 에두아르트




에두아르트는 학업에 적응했지만 그의 신경 문제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는 열광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했고, 특히 쇼팽을 좋아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강렬했다.
철학과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마구 쏟아냈다.
아인슈타인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냉정하게 반응했다.

에두아르트는 취리히 대학에 진학해 의학을 공부했고,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침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두었고, 스스로 자기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나 자신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아버지를 가지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고 했다.
몇 달 후에 그는 더욱 불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지적인 일로 시간을 채우는 사람들은 병들고, 신경질적이며, 때로는 완전히 바보 같은 자식 예를 들면 아버지와 나를 낳는다.”

훗날 그의 편지는 더 복잡해졌다.
자신이 권위를 경멸한 죄 때문에 운명은 자신을 권위로 만들었다는 아버지의 유명한 한탄을 분석한 경우가 그러했다.
에두아르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그것은, 당신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굽히는 대신 싸우고 싶었기 때문에 당신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신년에 빈에서 베를린으로 온 프로이트를 만났다.
당시 일흔 살이던 프로이트는 입에 암이 생겼고, 한쪽 귀는 멀었지만 두 사람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자신들의 연구 분야가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프로이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아인슈타인은 내가 물리학을 이해하는 것만큼 심리학을 이해한다”고 적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아들을 만나거나 치료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으며, 심리분석에 감동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무의식을 파고드는 것이 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다리는 100여 개의 서로 다른 근육에 의해서 통제된다. 우리의 다리를 분석해서 각 근육의 기능과 그것들이 작용하는 순서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걷는 것에 도움이 될까?”라고 했다.
그는 또 “나는 분석되지 않은 어둠의 상태로 남아있고 싶다”고 선언했다.

대학에 다닌 동안 에두아르트도 연상의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 특징은 가족의 내력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고통스런 결론에 이르게 되자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아인슈타인은 그에게 더 잚은 장난감에서 재미를 찾아보라고 제안했다.
직장을 찾아보라는 제안도 했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천재도 실업으로 낙심했었다. 인생은 자전거타기와 같은 거란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단다”라고 했다.

에두아르트는 그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수업을 빼먹고 방에 틀어박혀 있기 시작했다.
그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보살핌과 관심은 더 늘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930년 10월에 에두아르트를 방문해서 마리치와 함께 그의 침체된 기분을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함께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두아르트는 계속해서 더 어두운 곳으로 빠져들었다.
아인슈타인이 떠난 직후에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겠다고 위협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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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점술가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1930년 12월에 시작된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미국 방문은 첫 번째 방문과는 다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번에는 대중의 열광이나 야단법석은 없을 것이었다.
대신 그는 연구원으로 두 달 동안 칼텍Caltech(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을 방문하기도 되어 있었다.
그의 여행을 준비한 관리들은 그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독일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홍보를 품위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가 온 것이 알려지자 매일 강연 제안과 수상식 초청을 비롯한 십여 통의 전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그는 모든 것을 거절했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그와 그의 수학계산기 발터 마이어는 선원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위층 선실에 숨어서 통일장이론을 수정했다. 
 그의 여행일기에 따르면 50여 명의 기자와 50여 명의 사진기자들이 독일 영사와 그의 뚱뚱한 조수를 동반하고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질문을 했고, 나의 시시한 농담 같은 답변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네 번째 차원을 평범한 말로 정의해달라는 요청에 아인슈타인은 “점술가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상대성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까?
“짤막하게 정의하려면 사흘이 걸릴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독일의 텅 빈 뱃속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조건이 개선되기만 하면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인물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타임』지는 그 주에 모자를 쓰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의 아내 역할에 들떠있는 활기찬 엘자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잡지는 “수학자 아인슈타인이 은행 계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재정 문제를 챙기고, 여행 계획을 마련해야만 했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잡지 기자에게 “내가 그런 모든 일을 해야만 그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내 인생의 전부이다. 그는 그럴 가치가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 부인이라는 것이 매우 기쁘다”라고 했다.
그녀가 스스로 맡은 임무는 남편의 사인에 1달러, 사진에 5달러를 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장부를 작성해서 모은 돈을 아이들을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중심가 있는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1만5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유대교 축제일인 하누카Hanukkah(Chanukah 혹은 Chanukkah라고도 한다)를 기념했고, 자동차로 차이나타운을 돌아보고, 『뉴욕 타임스』 편집위원들과 점심을 먹고, 선풍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예리차의 <카르멘>을 들으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도착해서 환영을 받았으며, 지미 워커 시장으로부터 시청 열쇠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으로부터 “정신의 지배적 제왕”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막 완성된 2,100석 규모의 중앙 홀을 갖춘 거대한 리버사이드 교회도 방문했다.
침례교회였지만 서쪽 현관 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10여 명의 사상가들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전신상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유명한 선임목사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 현관에서 아인슈타인과 엘자를 마중을 나와 안내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정원에 있는 임마누엘 칸트의 스테인드클라스 창문 앞에 서서 감탄을 한 후 자신의 동상에 대해서 물었다.
“이 모든 역사적 인물들 중에서 내가 유일한 생존자입니까?”
포스딕 박사는 함께 있던 기자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중량감으로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 교수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생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말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조심해야겠습니다”라고 아인슈타인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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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겠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연설은 그가 신新역사회에서 했던 낭랑한 평화주의 요구였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반전과 군복무거부”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용감한 2퍼센트에 대한 유명한 요구의 발언을 했다.
“소심한 사람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우리는 감옥에 가게 될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군복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서 2퍼센트만 전쟁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면 ... 정부는 무기력해질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히 감옥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연설은 곧바로 반전선언문이 되었으며, 단순히 2퍼센트만이라고 새겨진 단추가 학생과 평화주의자들의 옷깃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이야기를 1면에 싣고 연설문 전체를 보도했다.
뉴욕을 떠나던 날 아인슈타인은 다시 히틀러에 대해서 질문을 받은 그는 만약 나치가 권력을 잡게 되면 독일을 떠날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아인슈타인의 배는 파나마 운하를 통해서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아인슈타인은 쿠바 지역의 과학원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 뒤 파나마로 갔다. 그곳에는 취리히폴리테크닉 졸업생으로 밝혀진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곳의 관리들은 아인슈타인에게 훌륭한 환영식을 열어주었으며, “문맹의 에콰도르 인디언이 여섯 달에 걸쳐 짠” 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크리스마스에는 배의 무선 라디오를 통해 미국으로 성탄인사를 방송했다.
1930년 마지막 날 아침에 배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때 십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두 사람은 갑판에 서둘러 오르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제목을 착용한 500명의 여학생들이 갑판에 늘어서서 그를 위해 세레나데를 불렀다. 연설과 수여식으로 채워진 화려한 축하연은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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