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정말 흥분되는 상황이네”라고 했다



1931년 1월 아인슈타인은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마운트 윌슨 천문대를 방문했다.
그는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1889~1953)과 함께 산뜻한 피어스-애로 관람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갔다.

허블은 1924년부터 마운트 윌슨 천문대에 있는 100인치 반사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고, 그의 첫 번째 발견은 안드로메다 성운Andromeda galaxy으로 알려진 흐릿한 별이 사실은 100만 광년(현재 우리는 이것의 실제 거리의 두 배 정도로 알고 있다)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 은하와 같은 크기의 또 다른 은하라는 것이었다.
곧 이어서 그는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적어도 20개가 넘는 은하들을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는 1천억 개 이상의 은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허블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별빛의 스펙트럼의 적색편이red shift(우주팽창에 의한 도플러효과Doppler effect로 파장이 몰리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를 측정함으로써 은하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모든 방향의 멀리 있는 별들이 모두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주의 전체 계량이 팽창하기 때문이다.
허블은 두 배만큼 멀리 떨어진 은하들은 두 배만큼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세 배만큼 멀리 떨어진 은하들은 세 배만큼 빠르게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풍선이 팽창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인슈타인은 허블과 함께 천문대로 향하는 산의 정상에서 에테르 표류실험으로 유명해졌지만 이제는 늙고 병든 앨버트 마이컬슨을 만났다.
화창한 날이었고, 아인슈타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망원경의 다이얼과 기구들을 살펴보았다.
그와 동행한 엘자는 그 장치들이 우주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녀는 “글쎄요, 내 남편은 오래된 봉투의 뒷면을 이용합니다”라고 말했다.
언론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인슈타인이론에 대한 도전이라고 소개했다.
연합통신(AP)의 기사는 “거대한 천체들이 지구로부터 초속 7,300마일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문제를 던져주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 소식을 반가워했다.
그는 베소에게 보낸 편지에 “마운트 윌슨 천문대의 사람들은 뛰어나네. 그들은 나선형 성운이 공간에 대략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고, 그것들이 거리에 비례하는 강력한 도플러효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네. 그것은 우주상수가 없는 일반상대성이론에서 곧바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지”라고 적었다.
이는 정적인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마지못해 도입한 우주상수는 실제로 팽창하는 우주에서는 필요가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베소에게 “정말 흥분되는 상황이네”라고 했다.

훗날 조지 가모브Georgy Antonovich Gamov(1904~68)는 “내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우주 문제를 논의할 때, 그는 우주상수를 도입했던 것이 그의 평생에 저질렀던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고 술회했다.
노벨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불행하게도 진공의 에너지 밀도에 기여하는 모든 것이 우주상수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주상수를 제거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우주상수는 제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주론 학자들은 우주의 가속팽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주상수가 필요함을 밝혀냈다.
그런 팽창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는 신비로운 암흑에너지는 마치 아인슈타인 상수의 발현인 것처럼 보인다.
2005년 11월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자신의 방정식에서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기 위한 우주상수를 도입했다가 그것을 포기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이 새로운 연구에 의해서 정당한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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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마음속에는 극단적 평화주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탄 기차는 1931년 3월 1일 아침에 누욕 시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16시간 동안 아인슈타인에 대한 열광이 극에 달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저항자연맹(WRL)의 회원 400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배로 갔다.
그는 무도장에서 연설했다.
“평화 시에 평화주의 조직의 회원들이 감옥에 갈 각오로 정부에 반대하여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가장 마음이 굳고 의연한 사람들만이 반대할 전쟁 중에는 그런 노력이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광적으로 폭발했다. 너무 흥분한 평화주의자들은 달려 나가서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옷을 만졌다.

오후에 아인슈타인은 월도프 호텔로 인도되었다.
그는 복잡하게 뒤엉킨 방에서 헬렌 켈러와 여러 언론인을 비롯한 많은 손님들을 만났다.
그날 저녁 그는 이미 매진된 시온주의 모금만찬에서 연설한 후 자정 직전에 배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하루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많은 젊은 평화주의자들이 “영원히 전쟁 반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반겼다.
훗날 그들은 청년평화연맹을 결성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들에게 “더욱 본격적인 평화주의 운동에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1920년대에 아인슈타인의 마음속에는 극단적인 평화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쉰 살이 되면서 물리학의 선두에서 물러나던 그는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적어도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가 집권할 때까지는 군비축소와 전쟁반대가 그의 주된 목표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만들어졌으나 미국이 참여하기를 거부한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이 선택한 신중한 접근방법을 거부했다.
연맹은 완전한 군비축소를 요구하는 대신 교전과 군비경쟁의 적정한 규칙을 정하려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었다.
1928년 1월에 독가스무기 제한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연맹의 군비축소위원회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그런 미봉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전쟁을 통제하기 위한 규틱과 제한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게임이 아닙니다. 그래서 게임에서처럼 규칙에 따라 전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투쟁은 전쟁 그 자체에 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국민들은 군복무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전쟁 당국과 가장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WRI)이 이끄는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28년 11월에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 런던 지부에 “모든 종류의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국제운동이 이 시대의 가장 유망한 발전 중 하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의 반전운동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해인 1932년에 절정이 이르렀다.
그 해에 국제연맹과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서 조직된 일반 군축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렸다.

소설가 친구이고 동료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은 “아인슈타인은 고하가 분야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경향이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고려하면 군축은 환상이고, 평화주의의 희망은 아인슈타인이 가끔씩 던지는 말처럼 순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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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신의 개념에 대한 믿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는 순진한 사람의 종교성과는 상당히 다른 특별한 종류의 종교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턴의 추기경 윌리엄 헨리 오코넬은 “나는 아인슈타인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런 의문과 함께 공간에 대한 애매한 회의의 결과는 무신론의 무시무시한 망령을 감추고 있는 가면이다”라고 했다.
뉴욕의 정통 유대인 지도자 허버트 S. 골드스타인 랍비는 아인슈타인에게 신을 믿느냐고 전보로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전보로 보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가 말한 신을 신봉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흥미를 느꼈고, 그가 현대 사상에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는 영혼과 육체를 두 개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은 모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았다. 일부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스피노자가 그런 믿음을 가진 이유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사회에서 쫓겨났고, 덤으로 가톨릭교회에서도 비난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뉴욕 브롱스의 어느 랍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코넬 추기경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사람들의 운명과 행동에 관심을 가진 신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영역이 아닌 것에 대해서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없이 만족해했다. 그 흔적이 창조의 영광에서 나타나고, 일상적인 존재와는 씨름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신의 개념은 유럽이나 미국 모두의 훌륭한 전통 중 일부였다. 



아인슈타인은 쉰 살이 될 무렵부터 여러 글, 인터뷰, 편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유대 전통과 어느 정도 다른 의미에서 신, 즉 상당히 비인격적이기는 하지만 신의 자연신교적 개념에 대한 믿음을 좀더 분명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중력장 방정식의 아름다움을 포용하거나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거부할 때도 우주의 질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다.
50회 생일 직후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종교적 사고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드러낸 인터뷰를 했다. 기독교의 영향을 어느 정도까지 받았냐는 질문에 그는 “어린 시절에 나는 성경과 탈무드 모두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번쩍이는 인물에 매혹되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예수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실제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매력이 모든 단어에서 고동칩니다. 그런 삶에는 어떤 신화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신에 대한 유대인 개념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결정론자입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자유의지를 믿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교리를 거부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불멸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닙니다. 내게는 한 번의 삶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응답했다.
뉴욕에서 일요학교 6학년에 다니는 어린 소녀는 조금 다른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과학자도 기도를 하나요?”라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소녀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말했다. “과학적 연구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아이디어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들의 행동에도 적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사건들이 기도자, 즉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전달한 소망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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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과학과 종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과학의 영역은 무엇이 사실인가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반대의 입장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함께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과학은 진리와 이해에 대한 영감으로 완전히 젖어든 사람들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솟아난다.”

그의 이야기는 신문의 1면을 장식했고, 그의 의미심장한 결론은 유명해졌다.
“그런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종교가 없는 과학은 다리를 절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 하나 있다면서 자신이 창조한 것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자신이 창조한 대상의 삶에 대해서 변덕을 부리는 성령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오늘날 종교계와 과학계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의 주된 원인은 이런 인격적 신의 개념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태도는 그것이 인간 도덕성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막스 보른과 같은 친구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나는 선생이 어떻게 전적으로 기계적인 우주와 윤리적 인간의 자유를 결합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론적 세계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선생이 옳을 수는 있습니다. 세상은 선생이 말한 그런 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는 물리학도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나머지 세상은 더욱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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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세 번째 미국 방문



아인슈타인은 1931년 12월에 세 번째 미국 방문을 위해 대서양 횡단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베를린을 영원히 떠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베를린은 그에게 17년 동안 고향이었고, 엘자는 그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이번의 미국 방문은 칼텍에서 두 달 동안 방문교수로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친구들도 그를 채용하려고 몇 년 동안 노력해왔으며, 옥스퍼드도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칼텍의 훌륭한 교수회관인 애서니엄의 사무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미국의 유명한 교육학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Abraham Flexner(1866~1959)가 그를 찾아와 회랑으로 둘러쳐진 정원을 한 시간이 넘도록 산책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찾아와 점심을 먹으라고 말하는 엘자도 물리쳤다.

록펠러재단의 임원으로 미국 고등교육을 개혁하는 일을 담당한 플렉스너는 학자들이 아무런 학술적 압력이나 강의 부담 없이, 그의 표현에 따르면 “당면한 일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천국”을 만드는 중이었다.
1929년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몇 주 전에 백화점 체인을 팔아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 루이 뱀버거와 그의 누이 캐롤라인 뱀버거 풀드가 기증한 500만 달러로 세워지는 고등연구소라고 부르는 그 기관은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근처에 설립될 예정이었다.
이 기관은 공식적으로 프린스턴 대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플렉스너는 훗날 아인슈타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와 그의 진정한 겸손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적었다.
정치적 상황이 더욱 실망스럽게 변해버린 베를린으로 돌아온 직후에 아인슈타인은 강연을 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향했다.
이번에도 그는 미국과는 극도로 상반되는 정교한 형식주의를 억압적으로 느꼈다.
그는 미국이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플렉스너가 약속대로 찾아와서 애서니움에서 시작했던 대화를 계속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자신들의 대화가 추상적인 논의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초빙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프린스턴으로 데려가기 위한 합의는 플렉스너가 카푸트를 방문한 1932년 6월에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새 집의 베란다에 앉아서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을 지나 아인슈타인이 플렉스너를 밤 11시 베를린으로 가는 버스로 배웅할 때까지 이어졌다.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이 어느 정도의 보수를 원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잠정적으로 3천 달러 정도를 제안했다.
플렉스너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서둘러 “오, 그보다 적은 돈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플렉스너는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는 더 적은 금액이 아니라 더 많은 금액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인슈타인 부인과 제가 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연봉 1만 달러에 합의했다.
주 후원자였던 루이 뱀버거가 연구소의 또 다른 보석인 수학자 오스왈드 베블런이 연봉 1만5천 달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인슈타인의 연봉은 더 높아졌다.
뱀버거는 아인슈타인의 연봉도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렉스너는 『뉴욕 타임스』에 프린스턴이 아인슈타인의 주 거주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아인슈타인은 연구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방학 중에는 베를린 외곽에 있는 그의 여름 별장에서 휴식과 사색을 하기 위해 외국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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