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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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고자 신을 죽인 니체.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신의 죽음'을 공표함은 스스로 신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 내용은 상당 부분 성경을 인용했다. 특히 p261. (가장 고요한 시간 파트)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자신의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려고 사람들에게 떠나려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 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모습이다.
"나는 아이처럼 울었고 벌벌 떨며 말했다. 부디 이것만은 면하게 해다오! 내 힘을 넘어서는 일이다." 니체는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니체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핵심 사상은 "힘에의 의지"이다. 존재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며,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고, 의욕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며, 그렇게 계속 변화해 감을 말한다. 힘에의 의지가 복종하는 대상은 오로지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야 하며, 열등한 존재는 당연히 도태된다고 한다.

니체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은 '비천한 인간'이다.
1. 창조나, 신, 별과 같은 것을 동경하고 찬미하는 인간
2. 이웃 사랑이나 형제 그리고 동정이나 관용들을 중시하는 사람
3. 자기 본성을 중시하는 사람.
4.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존재로 악하다고 말한다.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현실에 안주하는, 평화주의자인척하는 게으른 패배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이 죽었다는 것이다. 약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들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이 신을 죽게 만들었으며, 그런 신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신의 탄생을 희망하며, '위버멘쉬가' 되라고 한다.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고 한다. 인간을 넘어선 존재, 인간을 극복한 존재가 되라고 한다. 더 많이 원하며, 주인이 되고자 하며, 더욱 강해지라고 강조한다. 끊임없이 투쟁하고 더 많은 것을 정복하며, 자기 자신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삶만이 가장 고귀한 삶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으면서 싸우고 있지 않다면 그는 항복한 존재이며, 노예는 용기와 힘에의 의지를 버린 자이며, 그래서 노예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자는 노예로 사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 니체가 나치즘, 사회주의자라고 의심받는 부분이다.) 그러나 노예도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용감히 귀족과 끊임없이 싸운다면 그 자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의 가치나 위계, 계급은 일대일의 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그러한 투쟁의 삶이 고귀한 삶,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니체는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새로운 계급, 신의 영역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 .

그렇다면 과연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가 되었을까? 끝부분 ' 지체 높은 인간들'편을 보면, 신의 죽음을 이해했던 지체 높은 인간들도 결국 인간적인 것을 버리지 못하고 위버멘쉬로의 여정을 포기하고 나귀를 신으로 숭배하면서 또다시 우매한 인간 집단을 이루고 만다. 차라투스트라도 수많은 자기를 버리는 몰락을 단행함으로 변화의 마지막 단계에 '어린아이'에 대한 예감을 느끼며 웃음을 짓지만 '위버멘쉬'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차라투스트라도 '지체 높은 인간들'처럼 그 길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이 아닌 '의지', '안전'이 아닌 '모험'의 삶을 갈망하고 추구한 니체, 그의 말년 10년은 정신질환을 앓다 마감한다. 자신의 병약한 몸, 연약한 정신 때문에 그리도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강박적으로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도전 정신과 초 긍정의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기독교가 섞을 대로 썩은 암울한 때였다. 니체뿐 아니라 누구라도 새로운 신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신의 잘못이 아니라 목이 곧은 인간들의 잘못이다. 니체의 말마따나 그런 인간들이 신을 죽었다고 말하게 만든 것이다. 니체는 종교가 섞은 시대에 자신이 터득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이 '위버멘쉬'가 되기를 바랐고,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것 같다. 특정한 범주를 묶어 집단화한 신, 무리에게 숭배되는 신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신이 되어 누구를 위하여 희생하지도 죽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신. 니체는 그 사람(예수가)이 그런 신 이 기를 바랐다. 그랬더라면 이 대지를 떠나지도, 자신을 떠나, 죽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니체에게 예수는 질투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살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죽고자 함 이었다.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여 대신 죽고자 오신 것이다. 나에겐 자기중심적인 신은 필요치 않다. 그런 신이라면 내게도 신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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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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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적 욕망', '견물생심'. 욕망은 스캔들을 일으킨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난 명품 가방인 '똥"을 욕망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내 주위에는 '똥"을 가진 이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주변 엄마들 가방이 '똥' 천지였다. 나와 가까운 이들이 '똥'을 들고 다니니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저 이도하는데 나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똥'을 욕망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은 직접적으로 대상(똥)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중개자나 모델을 통해서 대상을 욕망한다.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쓰는 이유이다. 연예인이 든 '똥"을 보게 하므로 '똥"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질투를 자극하여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욕망은 형이하학적인 단순함에서 오지 않는다. 형이상학 적이다.

지라르는 프랑스가 최고라고 지칭하는 '인류학자'이다. 그의 '기본적 인류학'을 기초로 하여 우리나라 학자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많이들 시도하고 있다. "나는 사탄이~~~"에서는 지라르 사상을 과학적 논리로
전개하고 있다. 그는 근대 소설을 연구 분석하면서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욕망에서 나온다는 것을 밝혀 냈다. 모방은 상당히 경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라르는 욕망에서 오는 폭력을 신화와 성서를 비교 분석하여 욕망 이론을 영성 이론으로 설명한다. 기본적 인류학을 통하여 성서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지라르는 신화를 희생양 메커니즘, 제의의 폭력으로 해석한다. 또한 문화와 문명도 희생과 피로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를 '초석적 폭력', '초석적 살해'라고 한다. 그는 문화의 기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 낭만적이지 않으며 피의 살해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인류 문화 밑에는 희생 제물이 은폐되어 있다. 수많은 기원 이야기와 건국 신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신전이나, 궁을 지을 때 아이를 제물로 받치는 것.(성덕대왕신종) 우리나라에서 상량식 때 닭, 돼지를 잡는 이유이다.

원시사회 때부터 폭력은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폭력은 모방에서 오며, 모방은 욕망에서 온다. 이는 갈등이 모방적 경쟁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 모방적 범죄= 스캔들이다.
첫 번째 스캔들이 일어나는 순간 이 스캔들은 다른 스캔들을 일으킨다. '모방 위기'는 끊임없이 번져가면서 더 악화된다.
'모방 사이클'은 욕망과 그것의 경쟁 관계에서 시작하여 스캔들의 확산과 모방 위기를 통해 계속되다가 마지막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끝난다. 정치나, 기업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한 명을 대표로 내세워 희생양으로 쓰는 방법은 비일비재 하다.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구약 성서]나 특히 복음서를 살펴보면 욕망과 갈등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다.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와 이웃에 대한 폭력을 금하고 있는 십계명의 후반부,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은 앞의 것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행위를 금하기보다는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 네 이웃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인간들은 날 때부터 이웃의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성향이 있거나 단순히 욕망하기에 인간 집단 가운데에는 아주 강한 경쟁적 갈등의 성향이 있다. 이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공동체의 조화, 공동체의 생존 자체를 항상 위협할 것이다. 서로 상대방으로 인해 경쟁적 욕망이 커질수록 이 욕망은 위험해진다. 사람들은 욕망이 객관적이거나 아니면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은 사실 그 대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타인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타인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제삼자 즉 이웃이다. 이웃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웃이 우리 욕망의 모델이라는 분명히 확인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의 재산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살인도, 간음도, 절도도 그리고 거짓 증언도 하지 않을 것이다. -p21-

현대 사회는 내적 중개 시대이다. 거리가 가까운 사이에서 갈등이 유발되는 시대. 그 대표적인 것이 sns이다. 페이스북, 인스타는 내적 중개가 유발되는 공간이다. 내적 중개는 폭력을 발생시키며, 희생적 메커니즘이다. 악플과 여론 몰이로 사람을 죽게 만든다.
오늘날은 대부분 물리적 폭력보다 '심리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더 감추기가 쉬우며, 모두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그 애는 욕먹을 짓을 했어, 당할만해, 당해도 싸~~~. 일명 현대판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언어학자들은 사회적 위기가 절정에 달하면 고대 사회 때부터 만장일치적으로 모방 폭력이 행해졌다고 한다. 폭력은 언제나 위기를 종식시키면서 하나의 희생물에 반대하는 사회를 다시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나 이 희생물은 폭력과 관련이 없는 유형의 희생물을 두며 이를 '희생양'이라 부른다. 그러나 꼭 모방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간 사회에 모방 욕망이 없었다면, 사회도 문화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에" (요한복음 8장 42~44) 욕망은 악마나 하나님에 대한 모방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과 사탄(악마)의 두 개의 '원형 모델'이다. 이 둘의 차이는,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추종자들은 곧 악마와 같은 장애물로 변하고 만다. 사람들이 선택한 모델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갈등 없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 모델 때문에 폭력적인 무차별, 즉 희생양 메커니즘에 이르게 된다. 모방 욕망의 노리개가 된다. 우리의 모델은 우리의 살아 있는 장애물이 되고 우리는 또 그 모델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에 빠뜨린다. "

이 책은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을 비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와 양상을 분석했다. 지라르는 복음서의 모든 죽음/부활이 산화와의 흡사함과, 그 유사성을 인정하나 성경 텍스트와 신화 텍스트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차이점을 이 책을 통하여 입증한다. (고대 신화의 중심을 이루는 폭력 이야기는 성서의 많은 이야기,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다.) 신화와 성서에 나오는 폭력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며, 모든 문화권에서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 이야기는 세계 모든 신화를 전복, 해체, 비판하고 있다. 형식은 같으나 주제와 관점에 차이가 있다. 신화는 마녀사냥과 박해의 텍스트로, 제의적 집단 폭력성을 정당화한다. 반면 복음서의 핵심 주제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성을 드러내고, 제의적 집단 희생양을 무효화, 종식 시킨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대부분 선택된 조건의 희생양 들이다. 이 조건, 선택 기준은 불구자, 육체적, 사회적인 결함을 가진 자들이다. 나병환자, 유대인, 이방인, 여자, 불구자와 같은 온갖 종류의 주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현상은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으로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는 그 당시 그리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희생 제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화이다. 그것이 중세를 거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혈의 희생 제의는 고대 사회의 내적 갈등을 없애고 표출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책 내용 중 재미있는 부분은 우리 '문화적 제도'가 원래 제의적 행위에서 나왔다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고대의 희생 제의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제의적 행위는 많이 다듬어지고 약해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종교적 의미가 사라졌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진 의식은 제의에서 벗어나 제도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제의는 여러 번 되풀이될수록 관습으로 으레 변하였으며, 관습은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종교적인 것에서 나왔다. 예로 교육 제도와 정치권력에서 제의적 기원을 볼 수 있는데. 교육 제도에서 소위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그 사회의 문화에 엄숙한 절차를 통해서 들어간다. '통과'로 불리는 이 의식들에는 '테스트'가 있다. 모든 의식들이 그러하듯이 통과 의식이나 입문 의식은 '희생'에 기반을 둔다, 지원자들 중의 한 사람이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해 살아남지 못할 때, 이런 경우 다른 지원자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며, 이는 입문 의식에 들어 있는 희생의 효력으로 본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총명하고 우수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총받이로 내세우는 경우이다.
대입 시험 응시자 중 승자는 몇 안 된다. 나머지는 흔히 깔아준다, 불수능, 물수능은 상위 자들을 위한 희생양을 만든다. 수능의 희생양! 제도의 희생양! 비단 입시제도 에서만 그러겠는가 슬픈 것은 지금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해결해야 할 위기가 있는 곳에 희생 제의가 꼭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위기, 계절이 변하는 것도 위기고 기아가 발생하는 것도, 모든 종류의 재앙도 위기다, 불안에 떨게 하는 많은 것들이 모두 위기이다. 궁중은 희생 제의에 의지하여 이런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 탓으로 돌리는 것, 나라에 큰 현안이 있을 때 인지도 높은 연예인의 스캔들이 터지는 것 등이 현대판 희생 제의,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현재 코로나로 인하여 여러 희생양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슬픈 모방적 폭력의 희생 제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라르는 선한 모델을 모방하라고 한다. 모방 모델에는 선한 모델과 악한 모델이 있다. 성경은 이를 구분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성경과 신화의 유사성과 급진적 불연속성>
* 가인과 아벨 vs 로물루스와 레무스
* 욥 vs 오이디푸스
* 아폴로니우스의 기적(거지 돌팔매 vs 음행 중에 잡힌 여자)
*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vs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

성서의 이야기는 언제나 폭력을 반대하고 약자의 편에서는 반면, 신화는 폭력을 정당화하며, 강자의 편에서, 승자의 편에서 승자를 신격화 시킨다.
지라르는 복음서는 신화의 해체이며, 복음서가 신화를 회복시킨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지라르가 기독교의 부활을 다시 일으킨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지적 위상은 니체와 견줄만하다고 평가한다.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명명하며 100년의 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의 지라르는 니체는 죽었다로 새로운 100년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말에 속았다. (나도 속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모든 신화 이야기를 허구의 그저 낭만적 아름다움으로, 다정하고 쾌활하며, 동정심 많은 정의와 진리의 이야기로 포장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장애인들에 대한 비장애자들의 폭력, 비정상인에 대한 정상인들의 폭력, 떠돌이에 대한 토박이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사회가 퇴화하지 않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희생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진정한 박애라고 주장했다. (요즘은 니체에 대해 다시 조명하고 평가하고 있는 추세다.) 신화의 무시무시함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험한 책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쓰인 이야기)들로만 본다면 성경은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폭력을 폭로하고 드려낸 최초의 기록이다. 신화와 성경 이야기의 유사성과 차이점, 성경과 신화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점이 재미있다. 인간의 폭력성과 사회구조의 형성 과정,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가 어떤 초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지금 일어나는 사회회 현상들의 이유와 해결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희생양을 보지 못하는 신화를 찬양하면서 그 반대로 구약과 복음서가 도처에서 희생양을 보고 있다고 비난하다면 우리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판부의 실수의 가능성을 거부한 그 사람들의 환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레퓌스 파는 요셉의 진실만큼이나 분명하고 단호한 진실을 신화적인 폭력 속에서 겨우 승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 p184

아무리 찬란한 문화와 경제의 대국을 이루었다 한들 무고한 사람의 피로 초석을 삼았다면 무너지리라, 많은 희생양을 제물로 삼아 이루어진 제국주의 일본은 자신들 속에 숨겨져있는 악의 모방적 욕망의 추악함을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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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조선 사회 - 만화로 보는 한국사 9
이원복 지음 / 계몽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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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하나 꽂을 땅 마저 잀어버린 농민들, 노비와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에게 양반 지주들의 착취는 더욱 가혹해졌다. ~~ 토지 겸병으로 엉청난 땅을 차지한 자들은 누구인가? 훈구 서력, 내수사, 세력 있는 양반들이었다~~ 엄청난 이자에 짓눌린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놈의 저주스러운 세상 ~~..."

이것이 16세기 조선의 모습이었다. 지금 현재는 돈이 양반인 세상이다. 가진자의 것은 더더더 늘어나고 없는 이의 것은 더더더 쪼그라드는 세상. 그래서 최저임금이라는 장치를 두었다. 인간으로써 삶의 수준과, 기본생계를 보장해주는 일종의 사회안전망 이다. 여유를 갖고 문화를 즐길수있는 수준이 아니다. 최소한의 인간의 꼴을 갖추게 해주는 장치 이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들 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양보하고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한다. 나중에 나아지면 이를 반영 할 수 있도록 협조 하라고 지혜롭게 굴라고 한다. 어느 블로그 글에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을 과 을들의 전쟁'이라고 했다. 소상공인들의 문제는 비단 인건비 인상으로 인하것 만이 아닌 임대료, 가맹점 수수료, 신용카드 수수료 문제 등 복합적인데 다른 문제는 제쳐두고 언제나 유독 인건비 문제만을 문제 삼는다고 한다. '을과 을들의 전쟁' 그것이 대기업에서 노리는 노림 수 아닐까?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최저 임금이 올라서가 아니다. 언제나 지혜롭게 굴고 양보해야하는 쪽은 최저임금을 받는 이들과 소상공인들 이다. 상위자들은 언제나 배를 두드린다. 굶는 법이 없다. 역사 책을 볼때마다 신기함을 느낀다. 언제나 반복 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도 똑같다.

"남자는 모두 군역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족인 관리들의 지휘와 책임 아래 서리들이 군적을 작성했기 때문에 양반 자제들은 군적에 오를리 없었고 당연히 군역은 농민들 차지였다."

"군역을 부담하는 농민은 호수와 보인으로 나뉘었다. 호수는 군인이 될 사람이고, 보인은 군인이 된 호수를 뒷바라지하는 사람이었다. 호수는 군대를 가는 대신 쌀이나 베를 바쳤다. 조역가로 사람을 사서 대립가(보수)를 주고 내보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대립가가 비싸졌고, 이 틈에 양반들은 큰돈을 벌었으나 농민들은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도망치니 보인들의 몫을 떠맡은 호수도 이를 견뎌내지 못해 도망치거나 몰락하고 양반들의 토지 겸병은 갈수록 심해졌다."

'호수 vs 보수'의 악물림은 양반의 배를 부르게 해주었다.
지금 '을 vs 을'의 악물림은 누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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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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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세상 살이에는 타인과 관계를 맺지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크든 작든,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작은 무리, 사회를 이루고 산다. 그것은 여지가 없다. 그 무리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불협화음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 한 뱃속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 이들도 세대차가 나
고, 의견충돌이 생기는대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산다면 불 보듯 뻔하다. 그 뻔한 일을 구병모의 '네 이웃의 식 탁'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확인 사살 이라고 할까 공동체
속의 두 얼굴을 사실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나라에서 저출산 해결 방안으로 실험공동주택을 실시 한다.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로 12가구 모집에 1차 4가구가 먼저 입
주하여 살게 된다. 어느 무리에나 꼭 한 명씩은 있는 완장신
봉 주의자.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자기편의 주의자, 이쪽저쪽
눈치보는 함묵 주의자 , 모든 규칙을 잘 지키는 규칙 주의자.
처음에 이들은 맞춤과 양보라는 그럴듯하고 유연한 사회적
합의를 내세워 서로의 속내를 감추고 어우러져 지낸다. 사람
의 속성이란 감출래야 감출수 없는 재채기와 같다. 친근함을
가장한 관섭, 우리가 남이가를 내세운 무례함, 보여주기 싫은
가정사를 내보여야하고, 점점 다가와 친근함을 내세우면 귀
찮아도 받아 주어야 한다.

첫 문장에세 뒷마당에 자리잡은 거대한 식탁을 요진이 묘사
하는 장면은 마치 실험주택의 규약서를 읊조리는 느낌이다.

"뒤뜰 식탁은 서로의 팔꿈치가 스쳐도 개의치 않는다고 전제
할 경우 닿기 직전까지 밀도를 높이면 어린이 예닐곱 명은 추
가로 끼어 않을 만했다."

네 이웃이 팔꿈치가 닿을 만큼 밀도 있게 당신 에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 하겠습니까? 그래야만 이 공동주택에 살 수 있습니
다. 여기에 동의하면 서명 하시오. 이런 느낌 이라면, 마지막
에 새로운 입주자가 주택을 둘러보러와서 거대 한 식탁을 보
며 기대와 이상에 젖는 장면은 마치 거대한 식탁의 최면에 걸
려드는것 같으며, 이 공동주택의 최후를 보여주는 듯 하다.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나란히 열세 사람이
나 앉을 수 있는 식탁이 꼭 이랬을까 싶게 큼지막하고 단단해
보였다. 입주자들이 오기 전부터 이 자리에 붙밖인 그대로라
는 식타...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나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 는 장소....
눈 앞의 식탁은 이 주 택에서 제일 오래갈 듯이 존재감을 드러
냈다. 이웃간의 따뜻한 나눔과 건전한 섭생 의 결정체 처럼.
여자는 뭔지 몰라도 이 식탁을 오랫동안 아침저녁으로 보고
지낼 자신이 있었다."

과연 누가 이 공동주택에서 오래 남을까? 뒤뜰에 떡하니 자리
잡고있는 거대한 식탁? 새 희망과 꿈에 부풀어있는 새 입주
자?. 어느 책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 난다.

"통풍이 나쁘면 집이 섞고, 그 집에 사는 사람도 병에 걸린
다고 믿으셨다. 그 믿음은인간관 계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져 서로에게 어느덧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진 덕분에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사람이나 집이나 약간의 거리를 둬 통풍이 가능 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듯 싶다."

사람과의 관계는 바람이 통할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바람이 통할 정도의 거리.... 밀착되어 있으면 짓물러 진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적당한 거리 유지. 실험공동주택 사람들은 서로의 살이 짓물러져 1년도 못 되어 뿔뿔이 흩어저 버린다. 기단 공동체안의 문제 만은 아니다.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일상 생활에서 우리들이 흔히 접하고 피부로 느끼는 일들이다. 부부 사이의 문 제, 육아의 고충, 맞벌이의 한계, 직장생활, 이웃 남녀간에 오갈 법한 애매한 감정 처리. 네 이웃의 식탁은 구병모 작가의 다른 환타지 작품들과는 사 뭇 다른 극사실주의 작품 이다. 제목을 봤을때는 다른 작품들
과 비슷한 환타지 인 줄 알았는데 아니였다. 전혀 구병모 작가 의 냄새가 나지않 는다. (아가미, 위저드 베이커리) 문체가 간
결하거나 산뜻 함은 없다. 한 문장 길이가 3~4줄이라(작가의
특징) 한 호흡에 읽기가 다소 버겁기는 하지만, 그래도 구병
모 작가의 다름이 묻어나 좋다. 더불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어우 러져 산다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있게 생각하게 되는
참으로 좋은 작품이다.(역시 작가님 대단 하심. 쓸데없는 말로 아무리 늘리고 늘려도 두 줄.)

# 덧붙이기#
"말하자면 이 공동주택은 집에 있기로 결정한 사람이 개
인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육아를 보람으로 삼는 것이 총체
적으로 건강에 이로운 곳 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러웠으며, 각오하고 인내 해야만 하는게 아니라 그것이 즐거움이자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성취의 기준이어야 했다."

이것이 작가님이 내린 공동주택(공동육아)의 정의 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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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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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단 한 문장으로 헤세는 10대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아직까지도 10대들의 필독서로 자 리잡고 있다. 그로인해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 계에서 가장 많이 데미안을 읽었다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나 또한 이 문장에 이끌리어, ~~~인척하고 싶은 마음에 십대 때 처음 읽었다. 더 정확히는 독일을 사랑한 전혜린 때문이었다. 전혜린을 통하여 난 독일을 동경하게 되었고 헤세에 빠 졌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건 이 한 문장 뿐 이 었다. 내 십대 때 데미안은 실패? 였다. 너 무도 내면의 세계를 좇는 싱클레어가 버겁고 힘이 들었다.한마디로 어려웠다. 무슨 말 인지 를 몰랐다.

이십대 때 다시 데미안을 펼쳤다.
데미안이 깨고자 한 알(세계)이 자기자신 임을 알았다.

"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러나 완전히는 알지 못했다. 왜? 그토록 자 기자신을 파괴하며 자신과 세상을 마주하려 했 을까? 거기까지 였다. 나의 20대는 죄충우돌, 우왕좌왕, 갈팡질팡 살아내기에 바빴다.내게도 깨뜨려야 할 알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삼십대 때는 안정과 안락함에 데미안을 잊어버 리고 살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데미안을 펼쳐들었다. 그토록 알을 깨고자 사투를 버리 던 싱클레어가 궁금해졌다. 그는 알을 깨고 나 와 맞닥뜨린 세계에 만족 했을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이데아. 두세계의 여정을 담은 이야 기 이다. 혹독하리 만치 자신을 파괴 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이데 아의 세계.

"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 부터 나왔다. 사랑과 엄격함, 모범 과 학교, 인생이 맑고 깨 끗하고, 아름답고 정 돈된,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 였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는 냄새도 달랐고, 약속하 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는 소 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 재하는 아주 격렬한 세계 이다. 그 것은 아주 좋았다.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 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금 지된 세계 안이었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
사스."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선과 악, 밝음 과 어둠, 참 과 거짓,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압 락사스이다.

활화산 처럼 뜨거운 불덩이를 가슴에 품고 사 는 시기가 있다. 폭발직전의 활화산 처럼 혈기 왕성 함과, 주체할수 없 는 마음의 요동들, 이 유없는 객기와 반항, 세상의 부조리 함, 힘의 권력을 인식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그때 를 우리는 사춘기라 명명한다. 10살의 싱클레 어는 활화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락함 의 세계에서 거친 세계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 다. 그 경계는 서로 닿아 있으며, 힘이 지배하 는 곳이다. 싱클레어는 그 힘에 굴복되어 저지 르지도 않은 도둑질을 떠벌림으로 친구 크로 머에게 혹독하게 시달린다, 그때 데미안이 도 움을 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독심술과 혜 안의 신비로운 힘에 동경과 정신적 지주로 삼 는다. 데미안의 세계는 감각너머의 세계이다. 싱클레어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안락함, 평 화로움, 밝은 세계를 깨 뜨리고 나와야 맞이 할 수 있는 세계 였다. 싱클레어는 두 려워 졌다. 자신을 깨뜨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가 두렵고 떨려 데미안을 의식적으로 외면 한다. 데미안이 떠나고 그에대한 커다란 그리움에 정신적 방황을 시작한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숭배해야 했고 또다른 이상을 찾아 쾌락을 쫓 는다. 그런 그에게 베아트리체가 나타났고 또 다른 세계를 알려 준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잣 신의 부서진 삶의 폐허에서 환한 세계를 지으 려 다시 노력 한다. 새로운 이상, 이데아를 찾 는 싱클레어에게 에바부인은 그 길의 안내자 가 되어준다.

"에바 부인에 대한 내 사랑이 내 삶의 단 하나 의 내용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날마다 다 르게 보였다. 더러 나는, 나의 본질이 이끌려 지향해가는 것이 그녀라는 인물이 아니고 그녀 는 다만 내 자신의 내면의 한 상징이며, 나를 다만 더 깊게 내 자신 속에 인도하려 한다는 것 을 확실하게 느낀다고 생각했다. "

에바 부인과 데미안은 감각적 세계의 인물이 아니다. 싱클레어가 깨뜨려 찾아가야 할 이데 아의 세계, 감각너머 인식의 세계였다.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만난 데미안은 또다른 데 미안, 싱클레어 자신 이었다.

"내가 필요할 때가 오면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라는 말을 떠올리며 싱클레어는 자신이 또 다 른 데미안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찾는것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있 다.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났더니 행복이 곁에 있 었다고 하지 않던가. 싱클레어라는 현재의 세 계에서 데미안이라는 내면의 세계 소리를 따라
감으로 드디어 찾게된 세상.

에바 부인을 싱클레어가 사랑한 여인, 친구의 엄마로만 생각했던 내 십대. 그건 불편함 이었 고 충격 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혹자는 그런 호기심으로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도 더 깊이있게 읽지를 못했던것 같다. 그렇기에 책 은 나이 변화 때마다 다시 읽어야 하는것 같다. 처음에 각인된 생각을 떨쳐 버리기란 결코 쉽 지 않지만 말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때 접 한 책은 더 그런것 같다.

어느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는 인간이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 우리 안에는 여러가지 모습이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보 지않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문득 소설 속에서 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기 모 습을 이해하고, 긍정하게 된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자기가 다 괴물같이 느껴진다. 모습이 변 하고 이상한 충동과 욕망 들이 생기는데. 그 누 구와도 나눌 수 없을 때, 소설을 읽어 보면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내가 하마터면 저 지를 뻔 했던 일들을 저지른 애들로 가득차 있 다. 질풍노도의 군상들의 인물들이 오래전 부 터 있었고,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런 충돌들 들이 당연하고 자여스러운 일이며, 내가 괴물 이 아님을 알게하고, 내 마음이 이런거 였구나. 그러면서 감정에 언어가 부여 되어 감정을 훨 씬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질풍노도의 시기.세상을 향해 마구 주먹을 날 리다가도 몸을 움츠려 한없이 자신의 속으로 속으로 파고들어가던 시기. 그런 자신을 자각 하지도 못했던 시기. 그때 데미안을 더 깊이 읽 었더라면 지금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아기로 태어나 아이가 되고, 소년이되고 청년기를 지나 성인이되고 노인이 되기까지 그 많은 변화의 과정 중 가장 격정적이고 폭발적인 시기는 소년에서 청년으 로 넘어가는 시기 뿐 이다. 이시기에 데미안이
곁에 있다면 큰 길동무가 될것 같다. 이상한 놈
이 여기도 있네, 다행이다.라고 안도 할 수 있 을것 같다. 아이에게 몆번을 데미안을 권했었 다. 아이는 외면했다. 이십대를 시작하는 어느 날 스스로 데미안을 집어들더니 다시 덮어 버 렸다. 아직은 자신을 깰 용기가 나지 않는것 같 다. 지금의 안락한 세계를 깨고 맞닥뜨릴 세계 를 아직은 불안해 하는것 같다. 지금의 나를 깨고 나오면 또 다른 내가 시작 된다는 걸 아직 은 모르는듯 하다. 나도 늦은 나이에 알았으니 기다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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