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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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16~17페이지)

 

향수라는 감정은 고향 그 자체 보다는 고향의 맛, 어릴 때 부터 먹고 자란 음식의 맛이 그리워 생긴다고 한다.   며칠 해외 여행를 떠난 본 사람이라면 그 며칠새에도 김치나 고추장이 생각나는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오랜 기간의 타국 생활에서는 오죽할까.  김치나 고추장을 공수해 먹거나 현지에서 만들어 먹어도 그 맛이 안난다고 하니 애가 탈 것 같다.   저자가 말하듯이 그 맛이 우리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서 그 맛을 추억하게 되고 결핍을 느끼게 되나보다.   추억과 결핍은 향수라는 병으로 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면은 규격화되어서 대량소비되는 음식이다.  라면의 인속에는 수많은 남들이 나와 똑같이 이 미끈거리는 밀가루 가락을 빨아들이고 있으리라는 익명성의 안도감도 작용하고 있을 성싶다.  이래저래 인은 골수염처럼 뼛속에 사무친다."(17페이지)

 

저자가 말했듯이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힌다.   요즘 먹방도 많고 음식을 소개해 주는 방송이 많다.  다른 음식은 봐도 맛있겠다 싶은 생각 정도만 드는데, 라면이나 짜장면은 참 요상하다.  먹는 장면만 봐도 침이 고이면서 바로 먹고만 싶어진다.   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 것 같다.  

 

"자연은 저 자신의 볼일로 가득 차서 늘 바쁘고 인간에게 냉정하다"(80페이지)

 

<바다>편에서는 저자가 머물렀던 동해와 서해의 단상을, <남태평양>편에서는 태평양 전쟁에 휘말렸던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섬에서의 경험을 얘기한다.  바다 얘기는 <갯벌>편에서도 이어지는데, 내륙을 흘러온 큰 강이 하구에 갯벌에 이르러 바다와 합쳐지는 풍경을 소멸이라고 한 저자의 묘사는 한참 그 경관을 상상해 보게 만들었다.  

 

"조국의 강들은 남쪽부터 영산강, 동진강, 만경강, 금강, 한강, 대동강, 청천강 순서로 열리는데, 압록강 하구는 조차 4미터의 힘으로 바다를 받아들여서 먼 산골까지 바다의 기별이 닿는다.  강이 바다를 받아들이는 물리현상을 과학자들은 감조라고 하는데, 나는 이 단어에서 산맥과 바다가 붙고 엉키는 조국산하의 관능을 느낀다.  압록강은 이 관능의 북단이다"(100~101페이지)

 

이어서 <국경>편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돌아본 여행기가 서술된다.  밀물 때 서해의 힘이 조국의 강을 순서대로 열어 압록강까지 연다니, 먼 산골까지 바다의 기별이 닿게 한다니.. 조국산하의 관능을 느낀다니..  조국을 한 여인의 몸으로 표현한 듯, 조국 산천의 본질을 꿰뚫는 글발에 몇번을 읽어봤다. 

 

바다 얘기로 나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놓더니 <세월호>편에서는 폭발하게 만들었다.   이제 세월호 사태를 접해도 무뎌졌을만도 한데, 김유민양과 아버지에 대한 사연을 읽으면서 펑펑 울어 버린 것이다.   이 책에도 자주 언급되는 개별성..  보편적인 죽음에는 이제 무뎌졌지만 개별화된 존재의 죽음에는 어찌하지 못하는 슬픔이 전달된다.  300명의 죽음이라는 숫자의 규모보다는, 단 한명의 죽음이라도 개별적 고통의 지위가 부여되었을 때  인간의 존엄성과 슬픔이 느껴지게 된다.

 

다음엔 짧은 글들이 이어지는데, 역시 김훈의 글들은 쉬이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뇌의 피로감을 느껴서 잠시 내려놓고, 고종석의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을 들었다.   이 책은 고종석이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최근에 발간한 것이다.  김훈의 책이 몇번씩 곱씹어야 소화할 수 있다면, 고종석의 책은 안씹어도 넘어가는 죽과 같다고 할까..  술술 넘어가는 책장에 이 책을 먼저 읽어버렸다. 

 

1부는 언어학자답게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고종석님의 <문장> 두권을 읽은 바 있어서 익숙했다.  2부와 3부가 재미있었는데, 2부는 고종석님이 여행했던 도시들에 대한 얘기들이다.  특히 파리에서는 4년간 살았던 적이 있어서 파리에 대한 얘기들이 많았다.  3부 "여자들"은 혁명의 아이콘 로자 룩셈부르크, 단두대의 장미 마리 앙트와네트, 암살의 천사 샤를로트 코르데, 로자 파크스, 다이애나 스펜서 등과, 소설속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4부 "우수리"는 고종석님이 기자로서 경험했던 것들을 포함한 얘기들이다. 

 

김훈의 글은 그 리듬감 때문에 낭독하면 좋다해서 입으로 음독하였고, 고종석의 글은 분명하고 간결한 문장력에 눈으로 묵독하였다.   소설만 내리 몇권 읽다가 좋은 수필 두권을 읽었더니 마음이 풍요로운 듯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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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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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이 소설 참 특이하다.    구약성서의 스토리와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구약 성서의 스토리를 변조하거나 그 뒤에 숨겨진 얘기들 상상해 내었다.   상상력은 놀랍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니 하느님 여호와는 질투와 복수의 화신인 인물이 되어 버린다.  그 깊은 속 뜻이야 범상한 인간들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저자 주제 사라마구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화두는 내 나름대로는 인류 종족의 보존과 멸종으로 보인다.   인류는 그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유도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종을 늘려가고 있다.  종족을 보존하고 늘리기 위해 이 우주에 탄생한 것처럼.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사람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생체 기계라고 보았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자식을 낳는 기계라고 말하면 과언일까.   자식을 안낳으면 인류는 멸종되어버리기 때문에, 자식을 낳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하는 것이 과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소설은 여호와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 부터 시작한다.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길 바랬다면 나무를 심지 말던지 아니면 철조망으로 둘러싸면 될 것을..  왜 여호와는 먹지말라고 말해서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아들 셋을 두니, 첫째가 카인, 둘째가 아벨, 셋째가 셋이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기였다.  여호와는 동생 아벨이 바친 고기는 아주 만족해했고, 카인이 바친 곡식은 거부했다.   동생 아벨은 이를 두고 으스대며 형을 놀려대니 카인은 아벨을 죽이기에 이른다.  여호와는 왜 카인의 곡식은 거부해서 카인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게 했을까.  그 깊은 속을 모르겠다. 

 

여호와는 평생 보호와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표식을 카인의 이마에 남긴다.  카인은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홀로 길을 떠나야만 한다.  카인은 이제부터 구약 성서의 과거와 미래를 넘다들며 수많은 현재와 마주하게 된다.  

 

카인은 아브라함의 손에 죽기 직전인 이삭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고, (성경에선 여호와가 죽이기 직전 살려주지만 이 소설은 카인이 살려줌),  무너진 바벨탑도 보게 되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없이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보게 되고 호기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도 보게 된다.   하와도 호기심 때문에 선악과 열매 먹고 쫓겨나더니 롯의 아내는 호기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여호와에게 호기심은 큰 죄였을까.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벌을 받아야 했는지 그 이후로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호기심을 치명적인 죄로서 벌하고 싶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지능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117페이지)"

 

소돔을 떠난 카인은 순식간에 시나이 광야로 옮겨갔다.  여호와와 이야기하러 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를 본 여호와는 자기의 형제를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했다.    그리고 벌어지는 장면들을 카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도 여호와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으니, 여기, 시나이 산 아래 그의 사악함을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증거가 있었던 것이다.  단지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에, 그런 경쟁자로 여겨지는 존재를 만든 것에 여호와가 분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형제를 하나 죽였는데 여호와는 나를 벌했다.  정말 알고 싶은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 카인은 생각했다."(122페이지) 

 

카인은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령하여 미디안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갚는 장면도 목격하고,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장면, 아이고 성까지 함락하려다가 실패하는 장면, 욥을 두고 사탄과 여호와가 내기를 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노아, 노아 부인, 세 아들과 세 며느리와 함께 배에 오른 카인..  카인은 배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다.   여호와는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살려준 데 대한 대가로 인류 최악의 사태에 접하게 된다.  여화와가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갔다고 본다면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실례를 범하는 것일까.  이 책이 전반적으로 실례를 범하고 있긴 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0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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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열린책들 세계문학 3
알베르 카뮈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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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월 4일, 알베르 카뮈는 차 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마흔일곱살의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가족과 함께 휴가를 맞이하여 시골에 내려와 있다가 가족은 모두 기차로 돌아가고 자신만 친구 부부의 차로 이동하다가 난 사고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참혹한 기억은 말로 표현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야 조금은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카뮈 전작의 번역가로 잘 알려진 김화영님은 사고 34년 후에 카뮈의 절친 소설가 엠마누엘 로블레스 씨로부터 그 날의 사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다급함, 참혹함, 비통함이 전해져서 코끝이 찡해져 왔다.  

 

"신문 기자 출신들에게서 카뮈의 사고사 소식을 듣는 즉시 나는 아내와 함께 마담 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어요.  카뮈의 아내인 프랑신보다 우리가 먼저 그 집에 도착한 것이던군요.  그녀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한쪽으로 불러서 그 끔찍한 소식을 알렸죠.  내가 차를 운전해서 프랑신, 크리스티앙, 이렇게 셋이서 빌블르뱅으로 급히 갔지요.  벌써부터 잔뜩 몰려든 기자들과 사진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느라고 경찰관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면사무소 홀 안으로 나는 프랑신을 데리고 들어갔어요.  프랑신은 오직 나와 검시 의사밖에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지요.  공교롭게도 그 의사의 이름도 카뮈였지요.  시신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긴 테이블 위에 뉘어져 있었어요.  시트를 들추니 얼굴에는 이마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줄의 긴 상처와 왼쪽 손등에 긁힌 자극이 나 있을 뿐이었어요.  카뮈는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어요.  잠시 침묵에 잠긴 채 마음을 추스르고 난 프랑신이 중얼거리듯 말했어요.  <그의 손이, 그 아름다운 손이...>  그녀는 고통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어요.  그러더니 의사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어요.  <사망한 것이 틀림없습니까?>  내겐 아주 의외의 질문이었지요.  의사도 역시 어이없다는 듯이, <아니, 부인. 목과 척추가 부러졌습니다.  보세요..... 두 군데 긁힌 상처에 피가 안 났잖아요.  충격으로 심장이 먼저 멎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분명하게 확인을 해야 한다고 그이가 늘 말하곤 했기에....>하고 말을 흐리는 프랑신의 목소리는 참혹했어요"

 

세계가 인정한 작가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데에서 오는 애석함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아내의 슬픔을 마주하니 카뮈가 어린 아이 둘과 아내를 남겨두고 떠나간 가장이었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망 후 주머니에서 발견된 기차표는 그의 사망의 부조리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먹먹해진다.   

 

사고 당시 튕겨 나간 가방 안에는 카뮈가 집필중이던 육필 원고가 담겨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 <최초의 인간>이다.   카뮈의 사망 후, 프랑신 카뮈 부인은 주위의 조언에 따라 초고에 불과한 이 소설은 출판하지 않는 쪽으로 굳혔다.  당시 카뮈는 샤르트르 카뮈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공격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나 카뮈 부인이 사망하기도 했고, 아버지의 전 작품을 관리하던 문학 교사 출신의 카트린은 다시 주위에 출판 여부를 문의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적인 상황도 변하면서 출판 분위기 쪽으로 바뀌었다.  카트린은 여러권의 공책들(작가 수첩)과 노트들, 파일들 등을 정리하는데에 2년 반이라는 세월을 보낸후 1994년에 <최초의 인간>을 출간할 수 있었다.

 

카트린은 카뮈의 육필 원고를 '때로는 마침표도 쉼표도 찍지 않은 채 판독하기 어려운 속필로 펜을 달려 쓴 144페이지의 원고'라고 표현했다.  짧은 문장이 짧은 호흡으로 쉽게 읽혀나간다지만, 카뮈의 길게 이어져 가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긴 문장에서 오는 호흡은 숨가쁘면서도 어떤 희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최초의 인간>은 카뮈의 자전적 얘기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자크는 40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의 묘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평소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아버지..  그 무덤 앞에 섰을 때 묘비에 적힌 생몰연대를 보고 29살에 사망한 아버지가 자신보다 훨씬 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찾아 알제리로 향한다.  어머니를 만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듣지만, 장애를 가진 어머니로부터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자신의 출생 바로 직후에 세계 제1차 대전 전투중에 돌아가신 아버지, 어려서 앓은 병으로 청각 장애에 문맹이었던 어머니..   자크는 이렇게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철저히 텅비어 있는 무의 세계와 마주한 최초의 인간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었을 뿐이다.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혹은 식민)이었던 자크 코르므리(카뮈)의 조상들 역시 <뿌리 뽑힌 채> 황무지였던 척박한 땅에 처음으로 발 디딘 <최초의 인간>들이었음이 드러난다. ....  그리고 또한 최초의 인간은 역사도 전통도 재산도 물려받은 것이 없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  가난한 사람들은 빈 공간 속에 서 있는 <최초의 인간>이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번역자 해설)"  

 

자크의 어린 시절의 회상은 가난하던 그 시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자크는 외조모 밑에서 어머니와,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과 살았다.  일할 사람은 많았지만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나이든 외조모, 장애인 엄마, 거기에 막내 삼촌까지 태어날 때부터 청각 장애인이었기에 돈벌이는 시원찮았다.   외조모는 가장이나 다름없었기에 가난에도 역경에도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 가난 때문에 어린 자크에게 가혹하기만 했고 어머니는 이를 말릴만 한 언어도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크의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크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중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 했지만, 할머니는 자크도 일을 해야한다며 반대한다.  선생님이 할머니를 설득시키고 자크의 진학 시험 공부를 도와주고 합격시키는 과정들은 선생님과 자크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소설 속에 실수로 선생님의 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자크는 부모에 의해 자신이 규정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가난을 절감하게 되다.  학교일은 가족들이 소화할 수 없는 일이기에 가족들과의 침묵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학교에서도 가난한 가족 얘기는 꺼낼 수가 없었다.  자크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지 알 길이 없었다.   죽음과 성에도 점차 눈을 떠갔지만, 가난은 어린 시절 그의 머리속을 사로잡는 전부였던 것 같다.   

 

가난은 온몸에서 배어나왔다.  공차기로 신발이 닳은만큼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잘못을 벌충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가난한 아이에겐 공차기도 호사였던 것이다.   여름 방학 세달 동안이라도 돈을 벌어야 했다.    점주는 계속 일할 점원을 필요로 했기에 할머니가 시키는대로 계속 일할 것처럼 거짓말을 해야 했고, 그만 둘 땐 다시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는 부당함에 죽고만 싶었다. 

 

할머니는 방학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지낼순 없지 않냐고 했지만, 자크는 권태와 단조로움을 주는 점포일이야말로 아무것도 안하는 것만 같았다.  점주는 자크가 일을 그만둔다고 말할 때 크게 화를 냈고, 자크는 "집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이에요"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바다와 햇빛이 주는 여름의 휴식을 즐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도 월급을 받아 할머니한테 내밀 땐 빚진 것을 조금은 갚은 듯,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집안의 가난을 조금 덜어 주었다는 생각을 하자, 사람이 자유로운 몸이 되어 아무것에도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에 찾아오게 마련인 거의 매서울 정도의 긍지가 마음속에 차올랐다.  과연 다음번 개학이 되어 그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그는 (중략) 그 어리둥절한 어린아이가 이제 더 이상 아니었다.  (중략)  그리하여 어느 날, 지금까지는 할머니가 때리면 마치 그것이 어린아이의 삶에 있어서 불가피한 의무에 속한다는 듯이 꾹 참고 맞고만 있었던 그가 돌연 폭력과 광란에 미쳐 버린 듯 그녀의 손에서 소 힘줄 회초리를 뺏어 들고 맑고 싸늘한 두 눈만 보면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은 그녀의 허연 머리를 당장이라도 후려칠 듯한 기세로 대들자 할머니는 사태를 깨닫고서 뒤로 물러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걸면서 물론 그런 몹쓸 자식을 키워 놓은 불행을 눈물로 한탄도 했지만 이제 다시는 자크를 때리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221페이지)

 

목요일은 친구와 시립도서관에 가는 날이다.  손에 들어오는 책이면 무엇이나 정신없이 탐독했다니, 책을 읽는 동안은 가난도 가족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으리라.. 

 

"그 책들 속에 담긴 내용은 따지고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서관에 들어가면서 우선 받게 되는 느낌이었다.  그 곳에서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검은색의 책들이 아니라 문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기 동네의 편협한 삶에서 그들을 낚아채 가는 어떤 공간과 다양한 지평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이 빌릴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받아 옆구리에 꼭 끼고 그 시간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대로로 걸어 나와 커다란 플라타너스나무의 열매들을 발밑에 밟으며 그 책들에서 맛보게 될 감미로운 맛을 예측도 해보고  (중략)  이제 막 켜진 가로등의 불완전한 불빛 아래서 그 책들을 펴보기 시작하는 그런 시간이 오는 것이었다.  (중략)

그들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뭐든지 다 알고 싶었다.  그들은 잘 쓴 책이건 험하게 쓴 글이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글의 내용이 알기 쉽게 분명하게 씌어 있고 격렬한 삶으로 가득 차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책이야말로, 아니 그런 책들만이 그들에게는 머리 밑에 고이고 무거운 잠을 자도 될 만큼 근거가 있는 꿈을 줄 수 있었다."(200~201페이지)

 

자크의 어린 시절에서 카뮈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보여서일까.    가난한 어린 카뮈가 자꾸 떠오른다.   가난한 동네 가난한 집, 불구인 데다가 무식하기만 한 가족들 속에서도, 카뮈의 삶에 대한 갈망과 지성에 대한 열망은 꺼지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불가능하지 않기에 무엇이나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이렇게 내면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끼는 고등학교 2학년, 어른이 되기 직전에서 미완성으로 끝났다.  무엇보다 책에 대한 카뮈의 열정과 일찌감치 나타난 그의 문학성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카뮈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것만 같고, 그래서 카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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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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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먼로는 열세번째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출간하면서 절필 선언을 한후,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타이틀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해 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된다.    이 소설집 가장 뒤에 수록된 단편 <디어 라이프>를 먼저 읽어보았는데, 먼로의 문체나 주제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무미건조함을 느끼고 내려놓았었다.  

 

북클럽에서 읽어보기로 해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첫 단편부터 여자의 심리와 욕망을 파고들어가는 스토리에 빠져버렸다.   이 소설집에는 자전적 얘기 4편을 포함하여 총 14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모두 캐나다의 작은 타운을 배경으로 한다.   타운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얘기들을 다양하게 파고든다.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들의 주제는 주로 인류사에 있어 거대한 이슈이거나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인간의 통찰이지 않은가 싶다.   먼로가 주로 인간의 삶 그 자체, 그 이면속에 담긴 인간의 심원을 주제로 하기에 노벨상 수상은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첫소설부터 빠져들더니 각 단편들마다 주인공 저마다의 현실과 생각 선택이 흥미롭다.   어떤 단편은 독자에게 진실이 알려지기 전에 궁금증을 유발하여 재미를 더해준다.  또, 미스테리한 사건, 여성의 성역할, 미묘한 남녀관계, 노부부의 결혼생활이 펼쳐지기도 한다.  결함을 가지고 있는 남자나 여자의 위축된 사랑을 다루기도 한다.  시간과 기억의 과거와 현재 모습의 차이나, 기억의 차이로 빚어지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도 들어있다. 

 

먼로의 소설은 감정은 배제한 채 상황 묘사 위주인데도 천천히 읽어줘야 한다.  문장마다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거나 복선이 될 수도 있어, 독자는 꼼곰하게 읽으면서 사유해야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여자라 그런지 먼로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잘 이해되기도 했다.  

  

 

<일본에 가 닿기를>

시인인 그레타는 실용적인 남편과는 대화도 되지 않고 지루하기만 하다. 

그레타는 딸아이와 기차 여행 중에, 기차에서 만난 다른 남자의 침대칸에 가기 위해 딸아이만을 침대칸에 남겨둔다.   딸아이에 대해, 남편에 대해, 인생에 대한 배반 행위를 저지르고, 자신의 죄에 생각하게 되지만, 다시 기회가 왔을 땐 거부하지 않는다.  여자의 내재된 욕망은 기회가 오면 드러나는 것인가. 

 

<아문센>

캐나다 추운 지방 아문센에 부임한 여교사.

여자는 그곳의 의사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결혼 허가를 받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나왔을 때 남자의 결혼 의지는 꺽인다.   평생 그 장면은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고,

그것이 그녀의 인생에 더 좋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위로하지만, 여러해가 지나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 때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정은 정말 변하지 않는 걸까. 

 

<메이벌리를 떠나며>

아픈 아내를 위한 얘기거리로서의 리아,

어린 아가씨였던 리아는 어느새 가출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를 둘 낳고는 불륜을 저질러 남편과 아이를 모두 잃어버리는 그저 그런 통속적인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남자도 아내를 병으로 잃는 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자갈>

아빠를 비롯한 그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고팠던 엄마, 그 덕에 두 자매는 엄마와 엄마의 새애인과 함께 트레일러에 살게된다.   엄마도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차에 9살 언니는.. 

 

<안식처>

가정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이모부.  가정에서의 권위를 위해서라면.. 

여자에게 가중 중요한 일은 남편을 위해 안식처를 만들어주는 거라고 믿으며, 남편에게 인생을 모두 바친 이모.. 

자신의 부모와는 전혀 다른 이런 관습적인 분위기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나,   양편에서 균형감을 갖게 되고, 이모와 이모부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자존심>

작은 실수도 잊어버리지 않는 작은 타운에서의 삶.. 

그 실수는 용케 버티어 내거나 익숙해져서 묻히기도 한다. 

 

<코리>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여자 코리는 결혼보다는 불륜을 선택한다.

불륜을 이용해 가정부는 돈을 뜯어내고, 이는 뭔가 석연치 않다. 

 

<기차>

도착역을 한 정거장 두고 뛰어내린 남자, 왜 뛰어내렸지?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근처 농장에 안주할 것만 같았지만 또 다시 기차에 오르는 남자..  이 남잔 여자가 두려운 무슨 결함이 있는걸까.

 

<호수가 보이는 풍경>

진료를 위해 혼자 운전해서 이웃마을에 간 노부인..

예약한 의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들른 요양원은 텅비어 있기만 하고, 그것은...

 

<돌리>

노부부 앞에 남편의 옛여인이 우연찮게 나타났다.   

노부인은 둘의 희희락락을 참을 수 없어 가출하고..   노부부에게 질투란..

 

자전적 얘기 네편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는 먼로의 어릴시절 이야기로 타운 보다도 더 들어간 시골 농장의 얘기들이다.   여기엔 주로 어머니가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먼로가 밝혔듯이 그녀의 삶과 글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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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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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플렛(처녀적 성은 굿윌), 그녀는 역사적 우연 때문에, 경솔함 때문에, 무지 때문에, 기회와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랜 생에 단 한 번도 다음과 같은 스릴 넘치는 모험을 경험할 수 없었다.  유화, 스키, 항해, 알몸 수영, 에메랄드 보석, 담배, 오랄 섹스, 피어스, 물침대, SF, 포르노 영화, 종교의 무아경, .....  또한 자신이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큰 소리로 '사랑해, 데이지'라고 말하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평생 동안 안해본 일들,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았다고 볼 나로서도 열거해 보자면 한도 끝도 없을 듯 하다.   죽을 때 까지 다 해보지도 못할 것들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왔다 그냥 가는것이 인생이라는 허무함이 느껴진다.    안해본 것도 많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인 것만 같다.

 

소설 <스톤 다이어리>는 데이지 굿윌의 탄생에서부터, 어린 시절, 결혼, 사랑, 어머니가 되다, 일, 슬픔, 평온, 노쇠, 죽음 까지, 그녀의 삶의 국면들을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얘기하고 있다.   비범한 재능이 있거나 숙명적인 사건 사고에 얽혀 극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이른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의 일생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은 한편의 소설로 쓸만큼의 얘기거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 얘기거리로서의 삶을 살았던 데이지.  

 

자신의 탄생으로 엄마를 잃었다는 것은 평범한 여인에게는 그야말로 순탄하지 않은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하겠다.   아버지 카일러 굿윌은 아내의 죽음으로 멘붕이 오고, 데이지는 친척도 아닌 옆집 아줌마 클래런틴에 맡겨진다.   클래런틴은 긴 세월 동안 남편에 의해 억압과 학대를 받아가며 살다가 어떤 한 우연적인 사건으로 집을 나오게 된다.  집을 나와 아들의 집에서 원예로 소일하며 데이지의 양육을 맡게 된다.     원예와 데이지라는 이름에서 상징적인 연결고리가 보인다.   거기다 남편 바커는 식물 종자를 연구하는 학자였고, 이를 인연으로 데이지는 나이들어 원예와 관련하여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소설속 데이지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노화에 따라,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우연적인 요소로 변화가 찾아오는 인생이 펼쳐진다.    자연스러운 인생의 전환 중에도 한번 정도는 갑작스러운 반전이나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회복되고 대체로 평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데이지는 이름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과 존경을 받으면서 세상을 떠나간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에 떠오르는 영상들에서 항상 혼자였음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속으로 했던 말은 "난 평온하지가 못해"였다.   평온하게 잠들기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의 바램과는 달리말이다.   누구나 삶은 평온하지 않음을,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돌아가는 것임을 독자에게 말해주는 듯 하다.

 

저자가 데이지꽃, 돌, 식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바도 그렇거니와, 소설 제목 <스톤 다이어리>에 함축된 의미도 궁금해진다.   데이지의 엄마의 성이 스톤이라는 것은 소설 첫문장에서 말해주고 더 이상 언급이 없는데, 엄마의 죽음과 함께 탄생한 데이지의 이야기라서 스톤 다이어리인 걸까.    데이지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이를 기리기 위해 돌탑을 쌓아 유명해졌으며, 죽기 전 까지도 피라미드를 만들다가 미완성으로 남기기도 했다.   죽은자와 산자를 연결해 주는 상징물로서 돌을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토너>가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라면, 이 소설 <스톤 다이어리>는 평범한 여자의 일생으로, 시대적 배경도 비슷하고 탄생에서부터 죽음 까지 연대기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두 소설 모두 소설을 읽는 극적인 반전과 효과는 없지만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스토너가 자신의 평범성을 문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죽을 때 까지 문학의 길을 걸어갔다면, 데이지는 평범한 여성의 힘으로 질곡의 세월을 살아내었다고 말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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