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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 증명서
이 책의 제문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앞장의 제문을 보니, 저자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All the Names>로, 등기소에 출생 신고가 된 모든 이름들과 공동 묘지에 묻히는 모든 이름들을 말하고 있다. 한국 번역판 제목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인데, 저자의 다른 책들 <눈먼자들의 도시>, <눈뜬자들의 도시>와 연작 시리즈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오히려 한국번역판 제목이 소설에서 말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잘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40대 되어서야 문단의 주목을 받고, 전성기 작품들은 60대에 발표되었으며, 1998년 76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뒤늦은 나이에 문학의 꽃을 피운 대표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소설의 원제는 <모든 이름들>이지만, 이 책에는 주인공 한명의 이름만 언급된다. 그 이름은 저자와 동일한 "주제", 그나마 성은 나오지도 않는다. 주제 씨는 중앙호적등기소의 사무보조원으로, 나이 5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등기소에 딸린 작은 숙소에 사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 등기소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도시의 모든 출생 신고를 받아 서류를 작성해서 산 자들의 서류보관소에 보관하고, 사망 신고를 받으면 산 자들의 서류보관소에서 죽은 자들의 서류보관소로 옮기는 것이다.
주제 씨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 인사의 기사나 사진을 모으는 일이다. 급기야 주제 씨는 유명 인사의 호적 기록부 까지 몰래 빼와 사본을 만들어놓는 방식으로 100명의 서류를 모으기 시작한다. 주제 씨에게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유명인들 사이에 알지 못하는 한 여인의 호적 기록부가 끼여있으면서이다. 100명의 유명인사 보다 더 무게감이 있게 느껴지는 모르는 여인 한명..
수많은 호적 기록부의 사람들은 단지 이름 뿐으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자들이다. 100명의 유명 인사는 누구나 아는 자들이다. 하지만 모르는 여인 한명은 주제 씨가 관심을 가지게 되자 어떤 존재가 되어 다가왔다. 이 대목에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비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주제 씨에게 그녀는 이제 하나의 꽃, 존재가 되었다. 주제 씨는 그녀를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녀의 옛 주소를 가지고 도시를 헤매고 다니는 일들은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안쓰럽고 웃기기까지 하다. 주제 씨도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자책하기도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등기소 소장에게 업무에 소홀하다고 지적을 당하지만 다음날이면 또 찾아나선다.
며칠이 지나 산 자의 서류보관소에 있던 그녀의 서류가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서류상 죽었지만, 주제 씨는 삶과 죽음이 단지 종이가 바뀐 것이라고, 죽음이란 단지 기록일 뿐이라고 인식한다. 이제 주제 씨는 그녀의 죽음의 원인을 찾기로 한다.
그녀의 죽음은 주제 씨가 찾아다닌 이후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지 추리소설을 읽는 듯 긴장감은 이어졌다. 거기에 등기소 소장까지 뭔가를 아는 것처럼 주제 씨를 관찰하는 듯 하여 긴장감은 더해간다. 마지막에 내가 예상한 대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
주제 씨가 미지의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찾아다녔다면 주제 씨에게 그녀는 계속 존재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 이름도 아닌 수많은 이름보다는 주제 씨에게는 존재감이 있으니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은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에서부터, 존재와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