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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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독하자마자 바로 재독 한 책은 처음이다.

130페이지가 안 되는 소설이라 다시 읽기에 부담이 없기도 했다.

첫 일독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었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중간중간 다른 책들도 읽었다.

두 번째는 한 호흡에 읽어내렸다.  두 번째 읽으니 첫 번째에 놓쳤던  것들이 잘 보였다.   


세밀하거나 사실적은 묘사가 없어도 압축되고 절제된 고요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부드럽고 친절한 만큼 세심하기도 하다.  이런 문장을 익히 본 적이 없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기도 하지만, 이 문장은 조금씩 변형하여 챕터 대부분의 첫머리에서 반복된다.  

운율이 되어 시적으로도 읽힌다.  시적 사색적이기도 하면서 내용면에선 한편의 잔혹한 동화같기도 하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한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도 글로 표현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서평도 무슨 소용있으랴.  간략하게 감상만으로 끝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한타의 드러나는 모습에 대해선 좀 얘기할 수 있겠다.

한탸는 폐지를 압축해 꾸러미를 만드는 일을 35년째 해왔다.  압축할 운명의 폐지에서 찾아낸 책들을 읽다가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는다. 압축 꾸러미마다 서명을 하듯 위에 자신이 읽은 책을 펼쳐 올려 꾸민다. 피로를 덜기 위한 것도 있지만 책을 더 잘 읽기 위해 맥주를 마셔댄다. 폐기되기 아까운 보석 같은 책들은 집으로 가져와 보관한다.  통로와 변기 위와 자는 곳 이외엔 책이 쌓여있다.  책들의 무게에 짓눌려 키까지 구부정해졌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한탸는 인간의 운명이 압축되어 사라지는 책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책을 폐기하면서 책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소설의 제목 "너무 시끄러운 고독"만큼이나 역설적이다.


"내가 맥주를 네 단지째 비우고 있을 때 압축기 근처에 우아한 젊은이 하나가 나타났다.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예수였다. 연이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그의 곁으로 와 섰다. 노자가 아니면 누구랴"


책 속의 위인들은 언제라도 튀어나와 함께 사색한다.  고독 속에서 책에 빠져 있던 한탸는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고 그들의 진리에 가닿을 수 있었다.  독서는 하늘도 인간도 인간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세상은 점점 비인간적이 되고 문명의 편리함을 따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한탸는 생각이 많았다.


햔탸는 책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멀리 떠날 수도 진실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옛 여인 만차를 만났을 때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멀리까지 갔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은 책들을 가까이하기는 했지만 실천이 없는 생각만으로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낀 것은 아닐까. 

새로운 세상이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책에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탸가 완전히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는 마지막 선택은 의미가 깊다. 너무나 실존적이라서 한탸의 명상을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폐지 속에서 책이라는 정신의 숭고함을 건져내고, 그 책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선사하고, 책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독서로 교양을 쌓아 철학적 명상가가 된  한탸..  책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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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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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화되고,  

비밀경찰의 압박을 못 이기고 유럽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공산주의가 무너진 1989년, 두 사람은 20년 만에 고국에 들른다.

최초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그의 고향 이타카로 돌아간 것처럼...


두 사람은 프라하행 비행기 안에서 재회하게 된다.  

 

한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서 남편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했던 이레나이다.

이레나는 프랑스에서 남편이 병사하고 다시 재혼했다.  

프랑스어가 자유로운 프랑스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을 포함하여 지인들이 오히려 고국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녀가 이방인임을 상기시켰다.

남편이 프라하에 지사를 내면서 남편과 함께 찾아온 고국은 낯설기만 하고,

친구들과 혈육들은 그녀의 지나간 20년간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기만 하다.  

20년이란 세월은 잘리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붙여진 느낌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스스로 덴마크로 망명했던 조제프이다.

조제프는 고국에서의 삶이 소중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후회도 없이 국경을 넘었고 고국에서의 기억도 빨리 사라졌다.

형과 형수를 20년 만에 만나게 되지만, 

형이 내민 자신의 일기장을 보고 유년 시절의 나와의 괴리감과, 

암울한 나라에 남아 겪어야 했던 형과는 세월의 간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제프는 향수병은 전혀 느낄 수도 없고 덴마크의 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덴마크로 돌아가고만 싶다.

 

이레나와 조제프가 비행기 안에서 재회했을 때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은 고국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이레나가 먼저 조제프를 알아보고 만나자고 제안했다.   고국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길 바라듯이.
조제프는 그녀와의 기억이 전혀 없지만 약속을 받아들였다.   고국을 잊지 않고 한번 들러본 것처럼.    

이레나는 자신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후에야 조제프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 자주 만났고, 같은 경험, 같은 추억으로 맺어졌다고 생각한 그조차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황당하기만 하다.

 

기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가족 친인척, 친구들과의 대화로 공유되면서 이어지는 것 아닐까.   혼자만의 기억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20년간의 부재는 추억도 기억도 소진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향수는 기억의 활동이 아니라 자신만의 감정일 뿐이기에, 추억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국의 지인들도 마찬가지.  떠난 자는 금세 잊혔다.  망명자들이 돌아왔을 때 잠깐 동안의 우정을 보일 뿐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에 관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국은 그렇게 망명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망명지에서도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망명자라는 꼬리표는 항상 따라다녔고,  망명자의 생활 방식과 불행의 환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방인은 그렇게 모국에서도 망명지에서도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전쟁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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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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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어디에 두는 거죠? 코를 어디에 둘까 늘 생각했어요."

"자, 머리를 옆으로 돌려 봐." 

유달리 높은 코의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와 로버트(게리 쿠퍼)가 서로 키스하는 장면은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면 떠오르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눈 후에는  "땅바닥이 움직인다"라고도 말한다.

이는 서양에서 성적 쾌감을 가리키는 문화적 상투어가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거의 죽어가는 기분"을 느꼈다고도 말한다.   이 정도면 전쟁 소설보다는 연애 소설로 명성이 더 높은 것 아닌가.  


책누에 북클럽에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자신의 경험을 르포 형식의 글로 기고한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읽고 난 후,  스페인 내전을 바라보는 다른 작가의 시각이 궁금해서 선택한 소설이 바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후 프랑코가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켜 발생한 공화국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전쟁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에서는 정부군과 반란군의 내전뿐만 아니라, 정부군이 초반 우세한 듯하자 실권을 잡기 위해 벌어졌던 정당 간 내전 속 내전 카탈루냐 시가전에 대해서도 정치적 연대기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특히 여러 나라와 여러 정당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급변하는 정치적인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지 오웰이 몸담았던 통일 노동당은 프랑코와 공모한 트로츠키파로 몰려 폭동을 일으킨 주범으로 몰린다.   통일 노동당 사람은 파시스트 반란군에 대항해 몸 바쳐 싸웠지만 잡혀 들어가고 처형되고, 조지 오웰도 위험했다.  부상을 당해서 후방에서 치료한 후 제대증을 받으러 다시 전장으로 향하는 장면은 긴박했고 동료의 구명을 위해 자신도 통일 노동당임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장면들은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카탈루냐 찬가>의 서평을 올리려고 했으나 이렇게라고 자리를 빌려서 정리해 본다.


헤밍웨이의 전쟁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엔 게릴라 부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민초와 집시들, 그리고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후방에서 벌어졌던 참혹했던 살상 등이 묘사된다.  특히 카탈루냐 시가전에 대해 언급되어 있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았다.  카탈루냐 시가전을 통일 노동당의 폭동으로 얘기하는 장면이 짧게 지나갔다.   언론의 선동에 의해 그렇게 조장되었으니 외부에선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조지 오웰은 트로츠키파의 억울함으로 인한 분노로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고 하니 오해는 풀렸을까..  현재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하튼 이 소설의 배경도 스페인 내전..

로버트는 미국 스페인어 교수로, 스페인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공화국이 파시스트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여 참전한다.  로버트는  다리 폭파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게릴라 부대를 이끈다.  헤밍웨이도 스페인 내전에도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만난 로버트와 마리아는 단 4일간의 만남으로 서로에게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내가 당신이 되어 버리는 일체감을 이루어 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순간 현재는 그들에게는 긴 인생보다도 더한 인생의 충만감을 제공했다.  누려야 할 모든 것은 짧은 시간 안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로버트에게 주어진 임무, 다리 폭파...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를 폭파해야 하는 진짜 이유를 모른다는 회의감만 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리 폭파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뿐..  전쟁은 그 폭주기관차 같은 질주 본능을 멈출 줄 모른다.   예상한 대로 결과는 흘러만 간다. 


"지금 전선에는 그 공격을 취소할 권력을 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갑자기 공격을 중단하기에는 전쟁이라는 기계가 너무 오래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규모이건 군대의 작전이란 모두 엄청난 관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일단 이 관성을 극복하고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멈추게 하기란 그것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2권 317페이지)


노벨상을 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읽고는 인간의 의지, 사투, 생명력, 뭐 그런 것들에 공감적인 공감을 하긴 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읽고는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나의 공감의 부족을 탓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책장은 쉬이 넘어갔으나 진행이 더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읽는 재미와 긴장감은 떨어졌다.   


인물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장황한 언어의 나열보다는 밀도감 있는 서술의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었다.   헤밍웨이의 글은 어휘력이 평이하다는 어느 작가의 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다시 찾아보려니 못 찾겠다.  이 소설을 읽으며 좀 공감했달까.   그동안 읽었던 노벨상 수상 작가들 작품에는 미치지 못하다는 야박한 평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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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 - 엄마와 딸, 그림 대화
조혜덕 지음 / 하나의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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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큐레이터인 저자는 어머니에게 그림이 주는 감동과 힘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림은 화가가 처한 배경과 감정의 스토리가 담겨 있기에,

작가는 그 스토리만 따라간다면 그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어머니와 함께 그림 속으로 들어가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곳으로 여행하면서, 직접 어머니가 화가가 되게 하거나 작품 속 주인공이 되게 하여 대화를 이끌어 간다.  

독자는 그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에게 말을 걸수도 그림이 거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배울 수가 있다.


이 책에는 인상파 화가 모네, 르누아르, 마네, 드가, 세잔, 반 고흐, 고갱이 등장한다. 

대표작들도 실려 있는데 봐도 봐도 좋은 그림들이다.  그림을 보면 마냥 행복하지만 그림 이면의 화가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말년이 행복하지 못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고만 싶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고생했고, 아들 장까지 사망하고는 3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 했다.  빛을 담아내는 화가에게 빛이 보이지 않다니..  모네는 잠깐 회복했을 때 희미한 빛을 따라 수련을 그렸다. 현재 루브르 부속 오랑주리에 전시된 수련 대작에 마지막 예술혼을 쏟아내었다. 


"르누아르"는 45세에 19세 연하인 모델 알린 샤리고트와 결혼했지만, 47세부터 류머티즘성 관절염과 안면마비로 고통받는다.  손과 발이 뒤틀리고 시력이 약해졌음에도 매일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60여 년간 활동하면서 6,000점을 남겨 피카소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니.. 그의 투혼이 짐작이 된다.


"마네"에겐 뮤즈가  많았다.  <올랭피아>의 모델이었던 창녀 빅토린 뫼랑,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화가였던 베르트 모리조(마네는 아내가 있었기에 그녀를 동생과 결혼시킴), 또 다른 연인인 메리 로랑, 그리고 아내까지.. 

원 없이 연애하고 사랑하면서 영감을 얻은 대가였을까.  마네는 매독에 걸려 왼쪽 다리가 썩어가는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 절단하고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은 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바텐더는 지쳐 보이지만, 바텐더 뒤에 걸린 거울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즐거워 보인다. 오른쪽에는 이 바텐더와 대화하는 남자도 보이고,  왼쪽에 노란색 장갑을 낀 여인은 마네의 연인 메리 로랑이라고 한다. 마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니, 역시나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발레리나와 경주말을 주로 그렸던 "에드가 드가"는 여성 혐오자로 평생을 혼자 살았지만, 미국 여류 화가 메리 카사트와는 진한 우정을 나눴다.

드가도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어버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촉각에 의지해 점토와 밀랍으로 조각을 했다.  


후기 인상파의 세 거장, "세잔", "고갱", "고흐"의 삶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더 비참했다.

세 화가의 그림은 현재 가장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지만 당대엔 인정받지 못 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러니 그림은 더 팔리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세잔"은 당뇨와 우울증으로 몸이 쇠약해졌고, "고갱은 매독과 다리 통증으로 힘든 삶을 살다가 자살을 시도했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 정신병 증상을 보이다가 자살로 삶을 끝냈다.

  

"고흐"가 살아있을 때 유일하게 팔렸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라고 한다. 그것도 친분이 있었던 시인 "외젠 보쉬"의 누이이자 벨기에 인상주의 여류 화가였던 "안나 보쉬"가 구입한 것이다.  

"세잔"의 작품도, "고갱"의 작품도 친분으로 팔리던가 아니면 시대를 초월한 눈을 가졌던 아트 딜러만이 알아줄 뿐이었다.  


세 사람의 인연은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집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피사로의 관대한 성품 덕에 그의 집에는 많은 화가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세잔은 피사로의 가르침을 받았고,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나올 때 피사로에게 가길 원했으나 피사로는 그를 정신과 의사 "폴 가셰"에게 소개해 준다.   고흐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그 의사 가셰이다. 


그동안 세잔의 <키드 놀이하는 두 사람>이 가장 비싼 그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 기록을 갈아치웠던 건가. 이 책이 쓰여진 2016년 8월 기준 고갱의 <언제 결혼할 거니?>가 가장 비싼 그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돈으로 3천 6백억..  그 사이 다른 기록이 없었다면 이 두 그림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비싼 그림 되시겠다. 


카타르 왕실의 공주가 그림을 수집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카타르 왕실에서 2030년에 완공되는 미술관 컬렉션을 위해 그림을 사모으고 있는데, 가장 비싼 위 두 그림도 카타르 왕실에서 구입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 박물관을 가듯이, 인상파 화가를 만나러 카타르 미술관을 가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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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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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 농단, 박근혜의 무능과 무책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이뤄진 권력남용, 삼권 분립을 무너지게 하는 사법부 사찰, 등 현 정권의 헌법 파괴적인 범죄 행위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드러나고 있다.   

촛불 민심으로 탄핵안 가결과 특검을 이끌어낸 마당에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라는 책 제목은 현재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해 보였다.  이 기회에 세상을 리셋해서 무능한 권력과 그림자 같은 박정희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올바른 정치 문화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고 싶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을 믿는다.  진보에는 퇴행이 불가피하게 공존하기 마련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탄생한 공화국은 다시 왕정이 복고되는 과정을 반복했다.  7월 혁명과 2월 혁명 이외에도 작은 시민 혁명을 거쳐서 민주주의를 뿌리내렸다.   한국의 시민 혁명의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19혁명, 6월 민주화 운동, 그리고 지금의 촛불 운동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전진과 쇠퇴를 반복했다.  혁명 이후 독재가 스물스물 제모습을 다시 드러냈고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부 10년 동안엔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가 싶더니 다시 내리막을 향하다가 현 사태를 낳았다.   


이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서 말하는 리셋은 혁명과는 다르다.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삶의 영속성을 잃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서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정념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리셋은 '잉여'의 냉소적인 반응, '오타쿠'에게서 보이는 유예라는 삶의 태도, '사토리'에게서 보이는 세상을 초월한 듯한 도피적인 태도를 넘어선다.  '리셋'의 태도는 세계에 대한 혐오감과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무기력, 언젠가 다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복수심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일본의 오타쿠에 대비되는 존재로 한국에선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설정했다.  오타쿠나 자기계발 주체는 모두 현실로 도피한 것일 뿐 삶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거부한다.   오타쿠는 어떤 마니아적인 의미이지만 자기계발 주체는 성장 서사에 온 힘을 다해 몰입한다. '난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은 현재 저성장 시대에는 희망 고문이다.   가망 없는 희망에 매달리는 꼴이다. 


실패하면 사회 구조의 탓보다는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늘 자신에 대해 긍정하는 주체는 다시 최선을 다하고 끝내 자기 착취의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저자가 자기계발이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라고 일갈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내 자녀에게 사회 구조가 이러니 자기 가능성과 잠재력에 매달리지 말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망없는 희망이라고 해도 그러기는 힘들 것 같다.  무한 낙관주의보다는 비관적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라고는 말하고 싶다.   저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며 자기를 보존하는 법을 지혜롭게 헤아리는 것이 좋겠다.   


가망 없는 희망에 매달리다가 실패를 반복하는 세상에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반복된다면 리셋을 부르게 된다.   우리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재난과 위기의 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사회 안전망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사회도 국가도 작동한다고 믿게 된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에서 국가로부터 안전한 보호를 받지 못 했다.  안전마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바로, 세월호요, 메르스요, 강남역 묻지 마식 살인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국가적 재난이었고, 제대로 준비하고 대처하지 않았기에 또 다른 재난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었던 것은 우연히도 운이 좋았던 것이었고, 언젠가 내가 다른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란 개념이 사라지고 능력대로 살아가는 '각자도생'의 삶에서는, 재난의 피해자가 되면 아무도 나를 위해서 '아니오'라는 목소리를 내주지 않는다.  각자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만 되돌아올 것이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공정한 것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라면서,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취한 것을 사회나 연대라는 이름으로 나눌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회 구조는 가진 자들 그들만의 리그로 돌아가고, 이에 대한 불만은 대중적인 반감과 혐오로 나타난다.   반감과 혐오는 현재의 정치를 중지시키고 세상을 리셋하고 싶은 정치적 형태로 나타난다.


현 정치와 사회 구조는 어느 쪽에서 접근해도 이 세상에 대한 복수와 파괴를 표출하는 리셋을 부르고 있다.   리셋은 민중 혹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이념적으로 표출하는 혁명과는 전혀 다르다.  리셋은 불신의 산물이다.  세상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고 강력하게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촛불 집회는 이 세상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지만 리셋보다는 혁명이라고 하겠다.  반감으로 한번에 확 엎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보에는 후퇴가 동반된다.  우리는 진보 중이고 후퇴가 갈 때 까지 갔으므로 다시 상승곡선을 그릴 때가 되었다.   촛불 혁명이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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