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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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중략)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흑인작가 랠프 앨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첫문장이다.   원제는 invisible man(투명인간)이다. 첫문장이 하도 강렬하여 언젠가 읽으려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소장중인데 아직 읽지는 못했다.    주인공은 흑인이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 시대 주인공은 누구도 괌심을 가지지 않아 자신을 스스로 투명인간으로 여긴다. 


성석제의 장편소설 <투명인간>에도 투명인간이 등장한다.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류에서 저 멀직하게 밀려나 생을 포기한 사람이 투명인간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것인지..  아니 어쩌면 랠프 앨리슨의 소설에서처럼 그림자 취급을 당하는, 세상이 만들어낸 투명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이렇게 투명인간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삼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은 해방전 일제시대부터 현대 까지 격변의 시대를 모두 담고 있다.   삼대에 걸친 시대적 배경을 세밀하게 묘사해서 근현대사를 이 한권의 책으로 관통해 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김만수이다.   증조부모부터 시작해서 조부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만수를 제외한 5남매가 번갈아 가며 화자가 된다.   만수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까지도 화자가 된다.   이번 화자는 누군지 파악하며 읽느라  흐름이 약간 방해받기도 했지만, 다양한 인간의 시각으로 만수와 시대를 섬세하게 그려낸 방식이 새로웠다.  


주인공 만수는 화자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가족과 주변인을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   순하고 선량하긴 하지만 생긴 것 부터 어리숙하게 생겨 무시당하기만 한다.    자기 몫을 다해내고,  인간성 좋고, 이타적이지만, 이용당하는 것인지 자신만은 모른다.   

 

특히 가족을 위해서는 너무나 헌신적이었다.    형의 죽음, 큰 누나의 이른 결혼, 작은 누나의 가스 중독 사고로 졸지에 맏이가 되어 두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산업체에서 공부도 하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악착같이 돈도 벌어야만 했다.   회사가 넘어가려고 할 땐 끝까지 지켜내려고 했다.   남동생이 남기고 간 아이도 사랑하는 여자도 책임져야 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인지..  가족이 있었기에 구구절절할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가족이 있었기에 밑바닥 까지 추락해도 어떻게든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투명인간이란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렇게 스스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환타지로 처리된 것인지 불분명해서 다시 돌아가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았다.  마지막 결말부는 인물들의 특성과 관련하여 사유의 공백을 남겼다.  이렇듯 결말부를 오래 잡고 있었던 소설도 없었다.  석수와 만수의 마지막 대화에서 단서를 찾아보았다.


석수: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신화와 동화, 민담은 그렇게 생겨났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만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실이다.


석수:  내 경험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로 선택한 사람들 중에 투명인간이 된 사례가 더러 있다.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가.   죽는 게 낫겠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보자든가.  그래서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다든가. 


만수: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고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동생 석수는 가족이라는 짐을 버리고 소외된 채 살아가면서 스스로 투명 인간이 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만수는 가족을 최우선으로 아꼈던 만큼 함께 했던 가족이 죽었는데도 옆에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엔 진짜로 투명인간이 된 듯한 여운을 남겼다.    결말이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독자마다 소설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기에 적어보았다.  이 가족의 스토리만으로도 읽는 재미는 충분하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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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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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번성한 시대는 종말했다.   인류는 성과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에 적응하기는 힘들었고, 성적 욕망에 탐닉도 해보았지만 유성 생식이라는 인간의 문제가 결부되는 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인류는 무성 생식을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종을 자신의 모습대로 만들어내었다.


인류는 모순덩어리에, 개인주의와 이기심은 끝이 없었고 폭력적이기에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지만, 

새로운 종은 인류가 꿈 꾸었던 대로 성과 죽음에 초월적이고 혈연이나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기에 행복했다.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50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출산률이 해마다 줄고 있어 곧 소멸할 것이다.  

새로운 종이 자신을 만들어낸 인류에게 바치는 글이 이 소설이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선 다분히 에스에프적이다.
소설의 본문은 1900년부터 2000년까지 인류를 대표하는 두 남자의 가문과 출생 성장, 성적인 욕망을 담은 사랑과 삶을 현대역사의 맥락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두 남자는 아버지가 다른 동복 형제 브뤼노와 미셸로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들의 삶을 통해서 인류가 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초월해보고자 했던 죽음과 성을 여러가지 시각에서 다룬다.  과학적, 생물학적 뿐만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철학적 종교적 문학적 등 다방면으로 고찰하고 있다.   저자의 다방면에 박식함을 알겠으나, 어찌나 여러 경계를 넘다들던지 읽기에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브뤼노는  50~ 60년대 성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어머니의 무분별한 성자유주의 연애에 노출되어 자랐던 탓이었는지 성적 쾌락에만 몰두했던 인물이다.   외모나 신체조건은 따라주지 않아 성적인 무한 경쟁 시대에 여자들과 관계 맺기가 쉽지가 않았다.   나체해변 등 성이 자유로운 곳을 찾아다니며 성에 탐닉한다.   마침내 자유 성 캠프에 한 여인을 만나기는 했지만 행복했던 만남도 오래가지 못하고 여자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브뤼노를 한낱 개인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관이나 그의 의식과 욕망을 구조화하는 역장은 그의 세대 전체에 속한다.  ......  브뤼노는 한낱 개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역사적 흐름의 수동적인 요소일 뿐이다.  동기, 욕망, 가치관 등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동시대인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192페이지)

미셸은 형 브뤼노와 달리 어려서부터 성적 욕망은 보이지 않고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한다.    홀로 연구하기 위해 사라졌다가 마침내 위대한 이론을 세우게 된다.  그 이론을 바탕으로 2029년에 후대 과학자가 새로운 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자는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이 전반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라고 보았다.

로마 제국의 세력이 정점에 달해 있을 때 제1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로 기독교가 출현했고,

기독교가 국민 통치의 바탕을 이루고 있을 때, 유물론적 근대과학이라는 제2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출현하여 기독교가 무너졌다.

유물론적 근대과학은 개인주의 팽배, 허영, 중오, 욕망을 낳았다.   이런 문제점들의 반사 작용으로 성적인 문제를 해소하고 죽음을 잊기 위해선 제3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로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셸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몰고 온 주동자적인 인물이 되었다.    

최근 필립 로스의 성과 죽음을 다룬 후기작들을 읽은 후라 그런지 이 소설도 그런 맥락에서 반가웠다.   필립 로스의 작품들에선 성과 죽음은 나이들면서 깨달아가는 긍정적인 요소일 뿐 초월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성과 죽음에 정면 도전하여, 스스로가 해낼 수 없다면 새로운 종을 만들어서라도 극복해 내었다.   자신을 창조해 낸 인간이 새로운 종에겐 신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초월한 새로운 종이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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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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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고 병든 사람의 세상은 자기 몸에서 반경 60센티미터로 좁아진다고 한다.   

나도 나이들었나 보다. 

무릎이 아프거나 눈이 피로하거나 허리 통증을 느끼는 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거 괜찮은가..   무릎 수술까지 가게 되면 어쩌지.. 노안이 심각하면 돋보기 써야하나.. 

예의 주시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외모에만 신경썼지 내 몸에서 말하는 소리에 그렇게 귀기울이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대개의 선진국에서 통계적으로 본 실제 인생의 전성기는 7세라고 한다.

17세도 아니고 7세라니..   국내에서는 초등 1~2학년의 나이라고나 할까.

뇌도 신장도 미완성인데..  믿을 수가 없다.   

뭐..  울 애들 커 온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나이엔 등산을 가도 가볍게 잘 오르고 발레를 시켜봐도 유연해서 잘 습득하고,

하루종일 뛰어놀고 물놀이를 해도 다음날 용수철같이 튀어올랐다.

초딩 고학년 부터는 산에 오를 때 죽는 소리 내고

현재 중딩 되더니 체육시간에 좀 무리해서 운동하면 다음날 근육통에 아파한다.  

막 태어나서는 미각도 청각도 훨씬 발달해 있는데 점점 능력이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거 보면 7세가 전성기 맞나 싶다. ㅋㅋ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다. 

진화생물학자 "마이클 로즈"는 느즈막이 번식한 초파리들만 알을 낳을 수 있도록 실험했더니 세대가 지날수록 수명이 길어졌다고 밝혔다. 

사람에게도 비슷한 실험을 한다면 열 세대만에 기대수명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음..  그러지 않아도 최근들어 초산이 늦어지고 있지 않은가.     

노화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조작으로도, 

자연사로 이어지는 의학적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으로도 수명 연장의 꿈은 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래저래 수명은 길어질 수 밖에 없나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이렇게 사람을 몸을 재미있는 통계와 정보로 얘기한다.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와 죽음"의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각 시기 마다 일어나는 인체의 변화를 과학적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동시에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곁들였다.   

저자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97세된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언어와 스포츠를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현재 아버지는 아파트 겸 복합 스포츠센터에서 운동과 글쓰기로 하루를 보낸다.

아버지는 평균적인 몸의 변화가 무색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쳐나는 인물이다.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하고 거의 매일 수영한다.     

저자도 책을 여러권 펴낸 저자인 것은 물론이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스포츠신문을 즐겨보며 농구를 곧잘 했지만, 젊어서부터 고질적인 허리병으로 고생했고 이젠 무릎관절도, 어깨도 아파서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90세가 될 때 까지 병원 한 번 안 갔던 아버지와 너무 대비된다.    


아버지가 직접 쓴 글도 실려 있다.   아버지가 80대 말에 쓴 에세이에서는 노년엔 성적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가차없이 날려버린다.  

노인회관에서 만난 여자와 자는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 "친구를 원했으면 개를 샀겠지"라고 말하며 다시는 만나지 않았단다.      이거 아버지가 어느정도 글에 윤색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으니. ^^


나도 존 쿳시의 <추락>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반가운 문장을 만났다.    아버지가 왠지 문학적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아버지는 요즘도 게걸스럽게 독서를 하는데 인생에서든 문학에서든 싸구려 감상을 싫어하는 분이다 (얼마 전에는 J.M. 쿳시의 무자비하고 통렬한 소설인 「추락」이 근래 10년 동안 읽은 책 중 최고라고 했다). "


사람은 젊어서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결코 현실로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나이들어간다는 것도 언젠가 내가 노인이 된다는 것도 부정하고만 싶어진다.    나이들어서야 시간을 어리석게 놓쳐버린 것에 후회하고 시간이 덧없음을 한탄하고, 죽음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육체가 어쩔수 없이 쇠락함을,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여실하게 증명해 준다.  

 

과학적인 사실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인용문들을 그 나이대에 맞게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는 것도 좋았다.    "노년기와 죽음" 장에 유언들을 모아놓은 부분은 위트와 재미가 넘쳤다.   죽음에 재미가 넘쳐났다고 말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죽음이란 녀석은 그렇게 다뤄주는 게 좋다.   

 

"걷은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 프랜시스 톰프슨


"노인들에게는 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키스와 포옹이 필요한 인생 단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의사 외에는 누고도 그들을 만지지 않는다." - 로널드 블라이스


"삶은 내가 10세부터 줄곧 말해온 대로, 무지무지하게 흥미롭다.  44세인 지금의 삶은 24세일 때보다, 굳이 말하자면, 더 빠르고, 더 통렬하고, 뭐랄까, 더 절박하다.  나이아가라폭포를 향해 달려가는 강물처럼." - 버지니아 울프


"젊은이는 곧 그의 육체이고, 육체가 곧 그이다" - 보이드 맥캔들리스


"사람의 비운은 이런 것이다.  모든 것을 알아낼 시간이 75년밖에 없다는 것.  그 모든 책과 세월과 아이들을 뒤에 남긴 연후보다 차리라 어릴 때에 본능적으로 더 많이 안다는 것."  - 베리 한나


"제일로 악한 것은 늙는 것이다.  온갖 즐거움을 앗아가면서도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은 남겨두고, 대신 온갖 고통을 안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늙은 채로 있기를 바란다." - 자코모 레오파르디


"세상을 떠나는 게 정말 싫소."  - 97세의 버트런드 러셀


"내 재산으로도 나를 구할 수 없는가?  죽음은 매수도 통하지 않는가?" - 소설가 헨리 제임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한 순간의 것이었다." -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빌어먹을 내가 이럴 거라고 했잖아." - H. G.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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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김훈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4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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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책날개에 쓰여진 문구이다. 

이처럼 이 소설을 잘 말해주는 문구가 있을까.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베스트셀러 위주로 읽을 때, <칼의 노래>를 읽긴 했는데 그 땐 좋은 줄 몰랐다.  

독서력도 붙고 감성도 말랑해져서 그런지 이번에 읽으면서는 코끝이 찡해지기를 수차례..  

문장에 감탄하고 이순신 장군의 온화함과 치밀함에 감탄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이 화자로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난중 일기>는 읽어보지 못했으나 웬지 이 소설이 현대판 해석 난중 일기인 것만 같다.    일인칭 서술은 이 소설에서는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순신 장군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전쟁을 이끄는 장군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에선 처연함이 느껴져서 가슴 뭉클하기도 했다.  전쟁 상황 묘사는 또 어떤가.   처참하고 참혹했던 전쟁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쟁 상황이나 전술을 짜는 이 모든 것이 장군으로서 혼자만의 고독하고 엄중한 싸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과 적과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했다.  적이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를,  왜 칼을 차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했고,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자연사로 생각했고, 나는 적의 적임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적의 고통마저도 사유거리였다.  적의 개별적인 고통, 죽음을 위로하고 설명한다면 어찌 전쟁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음의 개별성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을 다잡았다.   


다른 소설이나 에세이에서도 느꼈지만 김훈 작가를 살아숨쉬는 힌 문장의 역설의 대가라고 말하고 싶다.    게다가 운율까지 시적이어서 낭독하면서 읽기에 너무 좋다.   역설이 돋보이는 문장들이 너무 많지만 몇개만 발췌해 본다.


"적은 커서 보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으나 거대했다"


"적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적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  적들은 달려들 듯이 무너졌고, 기를 쓰고 무너져나갔다."


"물 위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서, 내가 적을 발견하면 적이 나를 발견했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죽음과 삶이 명석히 구분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칼의 노래> 하면 첫문장을 뺴놓을 수가 없다.   김훈 작가는 기자 시절부터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어휘 하나하나에 어휘 순서에도 조사 하나에도 고심했을 작가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을, 특히 바다를 묘사하는 문구들은 은유적인 표현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름다운 운율로 묘사하여 마치 시를 읽는 듯 하다.    첫문장 첫단락은 외우고 싶을 만큼 좋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 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한 챕터마다 제목이 있어서, 스토리를 떠나 한편씩 하나의 에세이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 중에 "밥"이라는 챕터의 첫문장은 끼니의 철학이 녹아 있다.   전쟁터에서 끼니 해결이야말로 어려웠을 것이다.   농민들은 모두 피난가거나 일본군의 포로로 끌려가 있는데다가 조정에서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해 식량 조달은 어려웠다.   전쟁터 끼니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통제사로서의 이순신의 고민은 먹을 것이 없어서이지만, 주부의 입장에서 읽다보면 매끼니를 준비하고 책임져야 하는 고민으로도 읽혀졌다는... ^^   이순신의 고민이 주부의 애환과 닮았다!   뭐 무엇을 느끼지는지는 독자의 몫이니깐.  ^^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전술을 세우는 모습에서는 치밀함이 느껴졌다.   배신자나 국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엄혹했고,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온화했다.    그동안 무수히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김훈의 소설을 읽고나서야 새삼스럽게 느껴진 바가 크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백전 백승의 신화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 등등.     한문장 마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첫문장을 읽어보면서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몇 문장들을 옮겨본다.


"강물에는 파도가 없어서, 배는 비단 이부자리를 깔고 나아가는 듯했다"


"살아 있는 아픔이 살아 있는 몸 속에 박혀 있었으나 병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병은 아득한 적과도 같았다.  흐린 날들의 어깨 쑤심증은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적의 생명으로 느껴졌다"


"갑판 밑에서 노를 잡던 적의 격군들이 물 위로 쏟아져내릴 때,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


"적도 오지 않고 명의 수군도 오지 않는 동안 백성들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다시 피어난 백성들은 저절로 피어난 것만 같았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 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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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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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었다.   오랫동안 그 이름도 매혹적인  <장미의 이름>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을 수도사가 해결한다는 스토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소설은 미스테리 수사물을 넘어 중세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중세 시대가 종교의 헤게모니가 장악한 시대이니만큼 이 소설은 종교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세 학자, 기호학자로 더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답게, 이 소설은 미학, 종교학, 기호학, 언어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에서 충분히 읽힐 가치가 있으며 종교의 한계를 넘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도 가치롭다.


소설의 배경인 1327년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져 교황권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였던 시대였다.   교황은 황제와 대립하였고, 기독교의 여러 교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황이나 황제의 편 쪽에 서기도 했고, 자신의 교파가 정통인 것을 내세우기 위해 다른 교파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웠다.   


윌리엄 수도사는 명민한 통찰력과 기호학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저자가 자신의 모습을 소설속에서 풀어놓은 것 같음).  더러 허영심에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애교스럽게 봐줄 정도..    어떤 사건에 대해서 예리하게 분석하여 풀어내는 장면은 셜록 홈즈가 생각나게 만든다.    윌리엄의 통찰력은 세상 만물이 책이며 그림이며 거울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물의 정황과 자연의 법칙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면 궁극적인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는 황제측 대표단으로 교황측 대표단과의 회의를 위해 문제의 수도원에 들르게 된다.  수도원장은 윌리엄의 통찰력과 분별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사건 해결을 일임하게 되는데..    도착 이전에 일어난 첫번째 사건 이후 네건의 살인 사건이  도착 다음날부터 연이어 발생한다.   소설은 모두 5일간의 이야기이다.    


살인 사건은 수도원의 장서관에서 발생한다.  장서관은 고로 책을 널리 읽히고 지식을 보급하고자 하는데에 목적이 있지 않을까.   이 장서관은 지식을 보존한다는 명목하에 철통같이 방어되고 있었다.  접근이 불가하게 미로의 방으로 만들어졌으며, 허용된 책만이 신청에 의해서 열람 가능했다.   수도원 장서관은 이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침묵과 어둠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드소는 윌리엄 수도사의 제자로 윌리엄이 사건을 풀어가는 데 도움을 주고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기독교 정통과 이단에 대한 종교 분쟁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정통과 이단은 어떻게 구분되었을까.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당시엔 돈의 문제가 최대의 잣대.   

수도원은 돈의 힘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청빈한 삶을 강조하는 수도사들은 다른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청빈하지 않은 수도사들은 대중들이 청빈한 수도사만을 따르고 자신들을 성직자로 치지 않게 될까 염려하여 청빈교리를 내세우는 교파를 이단으로 몰았다.      

좀 더 복잡한 교파간 이익이 지배하고 있지만, 여튼 힘있는 자들이 정통이 되고 힘없는 자들이 이단이 되어 버리는 시대였음은 분명하다.   윌리엄 수도사도 이단  심판 조사관을 하다가 그만 둔 것도 정통과 이단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희극론이 바로 살인 사건의 결정적인 이유였다.   희극론에서 웃음은 우리 삶에 바람직하며 진리의 도구라고  말했으며, 희극은 실재보다 못한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려 웃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당시 예수가 웃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웃음은 인간을 격하시킬 뿐이라는 종교 사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희극론을 보고 웃음이 퍼진다면 신의 권위도 떨어지고 신도들도 천박해진다고 생각했다.  웃음을 찾으려는 자와 웃음을 막으려는 자..  여기에서 살인 사건이 비롯된다. 


웃음에 대한 종교적 의미는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해석만이 진리이고, 진리를 지킨다는 신념 하나에 매달리다가 살인 사건 까지 일어난 것이다.  진리라는 것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을 때 오히려 진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 말해 주고 있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지니는 의미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보고나서야 어렴풋이 보인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유형의 존재이든 무형의 존재이든 시간이 가면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 것..    한동안 아름답게 피었던 장미도, 수도원 살인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만이 그 이름만이 남을 뿐 사라지고 없다.   진리라는 것도 그러하지 않을까.   영원할 것 같은 진리도 절대불변인 것 처럼 보였던 진리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변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았던가...      


방대한 양이기도 하고 내가 읽은 편집본이 페이지가 빡빡해서 읽기 버거웠다.  중세 시대 배경을 잘 알았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재독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책 중에서 일순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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