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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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이 책의 제문이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에 가슴에 훅 들어오더니,

완독 후에 다시 보니, 더욱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책의 내용을 온전히 압축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딸기를 좀 안다고 모든 과일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우를 꼬집고 있어, 이런 우를 범했던 한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뜨끔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결정되어 있는 세상에 내던져진다. 불확실하고 개방적인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어딘가 소속되기를 원한다. 아기가 엄마한테서 분리불안을 느끼듯이 현대인은 다른 사람들, 문화, 사회에 대해서 분리감, 고독감의 공포를 느낀다. 이런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합일을 이루려고 한다. 작가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상황, 인간의 실존 조건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또 다른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유롭고 싶지만 그렇다고 대중과의 분리는 원하지 않는, 대중과의 일치감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치하도록 '강요받는' 정도 이상의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화를 원하지 않는 대중은 대량 생산품처럼 표준화된다. 분리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알코올, 도박 등의 중독 상태에 쉽게 빠지며 일상적인 오락과 노동에 매몰되는데, 이러한 합일은 일시적일 뿐이다. 궁극적인 합일의 방법은 인간적인 결합, 바로 '사랑'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많이 소비하고, 취미도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군중과 함께 있으며 안전을 도모하고,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차이가 별로 없다. 이렇게 오락의 규격화, 기계적 작업, 노동의 규격화로 인간은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합일을 이루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피상적인 합일과 욕망을 해소하는데 집중하는 현대의 인간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보이는 인간의 상과 유사해 보인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현대인은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랑의 문제는 보통 대상을 찾아내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활동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기술을 배워야 하듯이 사랑도 배워야 한다.

저자는 사랑도 기술이므로 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이해하고 반복적인 훈련, 정신 집중,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훈련엔 자기 자신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정신 집중은 남과의 관계에서 경청을 잘하며 개인적으로는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홀로 있는 것이야말로 사색의 힘을 키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된다. 또한 정신 집중 훈련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야말로 성숙한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과 분리를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 개인의 특성도 유지시킨다. 사랑은 두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게 한다. 사랑은 주는 활동이므로,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 있는 활동이며, 그 활동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이 네 가지를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최고의 사랑, 가장 이상적인 사랑인 모성애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사랑은 '보호'를 동반하며,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책임'이 따르고, 다른 존재가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존경'을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람을 잘 알려는 욕망과 관련된 '지식'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해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사랑을 감상적으로 하게 되면, 우상이나 스타를 숭배하게 되거나, 드라마 등의 상품 속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 합일, 친밀감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이러한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만족된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랑은 과거 지난날의 사랑이나 미래의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또 하나의 오류는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실재 진짜 갈등을 회피하면서 생기므로, 갈등은 은폐하거나 투사하지 말고, 명료하게 하여 서로에게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힘을 갖게 만드는 것이 좋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반드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의 문제인가? (...)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무엇보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저자의 신앙에 대한 정의가 좋았다.

비합리적 신앙은 어떤 권위자의 의견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것이지만,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사고력, 관찰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 신뢰성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사랑을 작용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고, 사랑은 말도 행동도 보여줘야 한다고, 수없이 들어오긴 했다. 이 명저에서 이론상 확립되면서 우리의 일상적인 철학이 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출간되고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유효한 삶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이 책이 사랑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며 사랑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깨우침을 주고는 있지만, 현대 물질 만능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알아도 실천 못하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한번씩 일깨워 줄 스승이 필요하다. 이 책을 계속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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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비행공포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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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안정..

자유와 친밀감..

여성의 삶에서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이사도라는 감정에 솔직하고 개방적인 삶을 살라는 에이드리언의 유혹에 주저한다.

즉흥적인 도피와 자유는 언제나 이사도라의 욕망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남편 베넷과의 결혼 생활은 안정되지만 따분하고 자유가 없었다. 

일상을 박차고 뭔가 자유로움과 열정을 누리고픈 환상은 에이드리언을 만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이라는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열정 넘치는 삶을 살 것인지

순간적인 선택 앞에서 망설였지만,

끝내, 건실한 남편 베넷을 뒤로하고 에이드리언과 사랑의 도피를 떠나버렸다.

에이드리언과 열정과 자유의 삶을 지속될 수 있을까.


이사도라는 평범한 여성보다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고 싶었고,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자신과 그 힘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엄마의 조언대로 성공하기 위해서 아기를 낳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결혼하면 다른 남자를 원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성적 판타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는 가는 식이 아니라 혼자 힘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두 남자를 다 가지고도 싶었다.

그러면서 착한 아내, 행복한 미국인 엄마가 되고도 싶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이처럼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순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여성 해방적인 사유는 사유에 그칠 뿐 현실적으로 실행되기엔 요원해 보인다.

우리의 본질적인 삶과 완전히 동떨어져 보이기에 일관성도 없어 보인다.

내가 주부로서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얘기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글들을 읽고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에 놀랐었다. 특히, <단순한 열정>은 강박적이고 선정적인 표현까지 서슴없이 써 내려가고 있지 않나.

이 소설 <비행 공포>도 저자 "에리카 종"의 자전적인 얘기로 솔직하고 노골적이며 선정적인 표현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으로서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민망함함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미국에서 1973년도에 출간되었는데, 출간 당시에도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릴 정도로 문제작이었다고 한다. 

국내 번역본은 1978년도 이후 여러 번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자극적이고 민망한 단어들은 희석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선 지난 시간 동안 그런 단어를 사용해서는 출간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번 책이 원문 그대로의 최초의 정식 한국어판 출간이라고 한다.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울림이 있는 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유로운가, 여성의 지위는 존중받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증이라고 하겠다.  

여성의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지고 자유롭고 싶지만, 그 자리에 맴돌 뿐이다. 

구속은 싫지만 혼자인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지만 죄책감은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성적 해방은 이렇게 사유에서 그치고,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는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한, 

구조 안에 닫혀 있는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한 사람과 오래 지속되는 깊은 관계의 소중함을 믿었다. 수많은 남자들과 이 침대 저 침대 돌아다니며 얄팍한 관계를 맺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도 알았다.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남자와 한 침대에서 깨어났을 때의 끔찍한 기분도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 나의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열정과 안정감 두 가지를 다 가질 방법은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성들이 이 문제를 깊이 통찰했지만 그 어떤 명확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단지 나의 근심이 평범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만약 내가 정말 특출한 사람이라면 결혼과 간통 문제로 이렇게 고민하진 않았을 텐데. 그저 밖으로 뛰쳐나가서 내 두 손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면서 어떤 가책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텐데. 나의 죄책감은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비열한지 일깨워줄 뿐이었다. 서글프고도 오래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평범하다는 증거였다."(139~140페이지)

 

"인생에는 각본이 없다.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건 본질적으로 질서를 부여하지만 삶에는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운 무질서 상태를 존중하면서 그걸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으려 애쓰는 작가들조차도 그 과정에서 항상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훨씬 더 정돈되어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은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어떤 작가도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실제의 삶은 책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도 한 인간의 진실을 표현할 수 없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실제 인물이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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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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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문은 나 자신을, 더 확장해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 출발점이 된다. 질문 없이 수용하기만 하는 삶은 무사안일과 관습의 틀에 갇힌 나약함이 느껴진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 삶은 발전과 개혁의 성장이 느껴진다. 그래서 질문은 지상의 양식이 되고,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배철현의 "신의 위대한 질문" 중에서)가 된다.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질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새로운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질문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내에서 노벨상도,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질문이 남들의 답에서 시작하고, 형식적인 모범 답에만 주안을 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시작점에서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책의 제목이 바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이다.


뇌과학자로 유명한 저자 김대식의 전작 <빅퀘스천>을 읽고 그의 인문학적인 독서와 지식에 놀란 바 있다. <빅퀘스천>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일련의 위대한 물음 집으로, 철학, 역사, 문화를 넘나들며 논리적이고 지혜로운 대답을 풀어내고 있다.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은 이러한 대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으로 돌아가 어떻게 질문할지 되묻는 듯하다.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서 또 한 번 저자의 방대한 독서 목록에 감탄했다. 고전은 물론이거나와 현대 지식인들의 저서들도, 심지어 국내 번역출간되지 않은 책들까지 인용하여 시공간, 경계, 언어를 초월한 독서를 섭렵한 것으로 보였다. 저자의 최첨단 과학자로서의 현대적인 감각은 이런 독서로 가능한 것은 아닐까.  


국내 번역 출간되지 않은 책들이 유독 관심이 갔다. 이스라엘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아자 가트'의  <문명과 전쟁(War in Human Civilization)>가 그중 하나이다. 모든 도구를 총동원해 전쟁이라는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고.. 아자 가트는 이스라엘 특수부대 출신이라니, 그에게 전쟁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인간의 조건이었다. 이 책이 다른 수많은 전쟁과 관련한 책들과 근본적으로 격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백과사전이라고 하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루이지 세라피티"의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1981)도, 그동안 알려진 무능한 다리우스 대왕이 아니라 포로가 된 사랑하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제국의 왕관도 포기한 다리우스 대왕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는, 프랑스 석학 '피에르 브리앙' 교수의 <알렉산드로스 그늘 아래의 다리우스>도 국내 미출간이다.  


대재앙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초지능 인공지능'을 꼽은 옥스포드 철학과 니클라스 보스트룀 교수의 <초지능<Superintelligence)> 도 미출간인데, 니클라스 보스트룀은 기계가 왜 자신이 인간의 명령을 따라야 하느냐고 물을 때 이에 대해 답할 수 없다면 인류의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축복받은 집>의 줌파 라히리, <변신>의 프란츠 카프카, 선조 3부작의 이탈로 칼비노, 중세 전문가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익숙한 저자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아르튀르 랭보, 사뮈엘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같은 굵직한 저자도 소개하고 있다.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권하고 있다. <미메시스>에서는 수많은 디테일을 통해 존재하는 사실을 표현하는 호메로스와, 깊은 해석을 통해 진실을 느끼게 하는 창세기로 대변하는 두 가지 전통을 통해 문학을 해석한다. 비평의 걸작으로 사회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는데, 문학에 관심이 많다보니 읽어보고 싶다. 


장 폴 샤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도 읽고 싶은 책이다. 한 인간이 죽고 지옥에 떨어졌는데.. 그 지옥이라는 곳은 바로 난생처음 보는 두 남녀와 함께 갇힌 방안이다. 타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갇혀 오직 그들의 눈치와 비난만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승도 지옥과 별반 다른 것 없다는 것을 꼬집고 있달까.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미국과 유럽의 과학기술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한다. 공상 과학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도 그 스토리는 독보적 독창적이어서 흥미를 아니 끌 수 없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거대한 컴퓨터 "깊은 생각( Deep Thought)"은 750만 년 만에 계산을 끝내고 대답한다.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고, 그러면서 '지구'라 불리는 새로운 컴퓨터를 설계해 주겠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인생 그 자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추구하는 계산 과정이 되었다니 발상이 새롭지 않은가.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니 말이다. 


한 챕터 당 텍스트가 짧은 편이다. 자신의 생각에 현대와 고전을 넘다 드는 사례를 덧붙힌 스토리텔링을 짧은 글 속에 담았다.  간결한 문장에 저자의 의도가 잘 각인되어 있어 반복해서 읽기 좋다. 그런 의미에서 여백이 많은 페이지를 챕터 사이에 넣어 집중력을 떨어뜨린 편집이 아쉬웠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 이 책에서 직접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논지대로 해답 보다 먼저 질문을 찾아야 한다. 소개한 책들과 저자의 논리에 의한 스토리텔링은 질문의 근원에 접근하는데 도움을 준다. 과학과 인문학의 균형을 이룬 저자의 책 읽기를 보더라도 먼저 스스로 소양을 쌓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다음엔 본질을 꿰뚫는 시각과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열정이 질문을 시작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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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0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에 언급된 책들의 제목보다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설거지 연구‘였어요. 제가 여태까지 책을 읽어놓고, 리뷰를 쓸 때 남이 했던 생각들을 정리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부끄러웠어요.

림스네 2017-04-01 21:37   좋아요 1 | URL
ㅎㅎ 설거지 연구가 그런 의미였군요. 싸이러스님 오랜만입니다.
리뷰 쓸때도 그런 의미로 적용할 수 있겠네요.
저만의 생각에서 저만의 질문으로 시작한다면
리뷰 쓰는 것도 어렵지 않고 술술 풀릴 것 같습니다.
알라딘 블로그는 잘 안들어오고 네이버에서 활동하긴 하는데.. 가끔 들르면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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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장편 소설은 이 소설 <저지대>로 처음 접해본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소설을 읽을 땐 특정 상황 속 인물의 감정에 빠져들었다면,  

장편 소설은 긴 서사에 담긴 인물의 정서와 사유에 감정이입했다.  

역시 줌파 라히라는 장편 소설에서도 작가 자신만의 세밀한 묘사력이 돋보였다. 


<저지대>는 인도 서벵골에서 태어난 너무나 달랐던 형제와, 한 여자의 삶과 죽음의 서사이다. 이들의 운명이 인도 역사와 함께 하다 보니,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레 인도 역사를 접하게 되었고 더 찾아 보게 되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벵골 지역은 영국에 심하게 저항하였고 1905년 인도의 영국 총독은 자국의 이익과 인도 민족의 분열을 위해 벵골을 힌두교의 서벵골과 이슬람교의 동벵골로 분할하였다. 반발이 심해 1911년 벵골 분할령은 취소되었지만, 1947년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면서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 중심의 파키스칸으로 분리될 때 동벵골까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원인이 되었다. 파키스탄 본국(서파키스탄)과 동벵골의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동파키스탄은 식민지와 같은 양상이 되어 버렸다.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시부터 분쟁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카슈미르 주민 대부분은 이슬람교도라 파키스탄으로 편입되길 원했지만 지도자는 힌두교라서 인도로 편입할 것을 결정하면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과 인도령으로 분리되지만, 이후 인도가 반환을 요청하면서 분쟁은 계속되고, 여기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카슈미르는 3곳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다.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지대>는 인도의 분리 독립 이후 힌두교도의 정착촌이 되었던 서벵골의 툴리건지를 배경으로 한다.  서벵골 지역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립을 위한 저항이 강했던 곳으로 변화가 많았던 곳이다. 1960년대 세계적으로 혁명의 물결이 일었을 땐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공산주의 통일전선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다. 


형 수바시는 조심스럽고 동생 우다얀은 대담했던 성격의 차이만큼이나 자신의 인생을 선택함에도 큰 차이를 보였다. 수바시가 미국행 유학을 떠나고 우다얀은 학생 투쟁 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수바시는 학문으로 우다얀은 학문보다는 보고 배운 것을 몸소 실천하고 싶어 했다.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형제는 이때부터 몸과 마음이 완전히 갈라져 버린다.


"형, 문제가 있는데도 들고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그 문제에 기여하는 게 돼."


"그는 우다얀이 그 순간에도 자신을 얼마나 조롱할지 알고 있었다. 우다얀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욕망을 비웃을 것이었다."


수바시와 우다얀은 간간이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고, 자신의 일에 점점 몰입해 갔다. 아직 소설은 초반부라고 할 수 있는데 충격적 반전은 급작스럽기만 하다. 스포가 될까 잠깐 망설였지만 이는 반전 보다는 소설을 끌고 나가기 위한 주요 스토리이므로 밝히기로 한다. 우다얀은 투쟁 중에 경찰에 의해 사살되고, 고향에 방문한 수바시는 우다얀의 아내, 임신한 제수씨, 가우리와 처음 대면하게 된다.


"우다얀은 커다란 상처만 남기고 허물어진 잘못된 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그가 바꾼 것은 가족의 모습뿐이었다."


수바시의 어머니는 가우리에게 냉혹하기만 하고, 수바시는 가우리를 돕는 방법으로 가우리와 결혼하여 함께 미국에 건너가면서 이들 가족의 운명은 바다에 표류하듯이 거칠고 무의미하게 흘러만 갔다.  4대에 걸친 60년의 가족사 중 이제 20년 정도 흘렀다. 수바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해결해 주지 않았다. 시간은 이해해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40년의 시간은 인도와 미국을 넘다 들며 제각각 흘러만 갔다.  


 

"무지와 희망 속에서 의도적으로 기대를 하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수바시와 가오리에게 시간은 우다얀이 잠겨 있던 곳, 툴리건지의 저지대에서 멈추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지대로 모인다. 빗물도, 쓰레기도, 뽑아도 뽑아도 늘어만 가는 부레옥잠도..    이들 가족의 과거도 흘러가지 않고  저지대에 고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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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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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이번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도는 영혼의 이야기이다. 묘지나 유골함이 없는 사망자들은 화장터조차 갈 수가 없다. 시신이 거두어지지 않은 영혼들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의 공간에서 떠돈다. 


소설의 화자 주인공 양페이도 연고 없이 장례가 치러지지 못했다. 보일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도시를 떠돌면서 복잡하게 얽힌 기억의 회로를 더듬는다. 삶의 마지막 광경을 찾아, 저쪽 세계의 기억을 찾아 헤맨다. 소설은 양페이가 그렇게 자신을 찾아, 죽은 아내와 죽은 아버지를 찾아, 그리고 망자들과 인연을 나누는 7일간의 이야기이다. 다른 영혼들과의 만남은 저쪽 세계에서의 인연을 알아보고 서로 그렇게 기억을 나누고 위안하고 도움을 준다. 영혼들은 시신의 모습 그대로여서 사망한지 오래된 영혼은 해골의 모습을 갖는다.


양페이는 사망 첫째 날 도시를 떠돌다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했다. 둘째 날은 죽은 아내를 만나서 아내와의 기억을 불러왔다. 셋째 날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은 매장되지 못한 해골 사람들과 저쪽 세계의 얘기를 나누며 인연을 나누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했다. 일곱째 날은 이미 해골이 된 아버지를 만났고, 새로 들어온 영혼에게 이곳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며 끝을 맺는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양페이가 7일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돌면서 영혼들과 만나 대화하고, 자신의 기억을 되돌리면서 저쪽 세계의 서사가 펼쳐진다. 양페이가 친부모와 어떻게 헤어지고 양아버지를 만나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내와 헤어진 후 아내의 사망 기사를 보고 자신도 사망하게 되었는지..  양페이의 서사만으로도 흥미롭지만 양페이와 저쪽 세계에서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신문 기사로 유명했던 사람들의 사연은 모두 구구절절하다.


양페이의 옆방에 세 들어 살던 가난한 연인이 그중 가슴을 제일 저릿하게 만든다. 연인은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일하지만 사회에 적응하기는 힘이 들고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여자가 자살하자 묘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자는 신장을 팔지만 수술 부작용으로 사망한다. 양페이가 가정교사를 맡은 소녀가 철거된 집의 잔해 위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장면도 가슴 아팠다. 소녀는 아침에 등교한 후 새벽일로 잠을 더 자고 있던 부모가 건물에 깔려 사망한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우리에게도 한참 문제시되었던 철거민 문제, 그리고 한 자녀 정책의 폐해인 병원측 영아 시체 무단 배출 사건 등을 통해 중국의 현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소설이 나온 것도 중국에 무연고의 시체가 많은 세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묘지가 있는 사람이 무덤 속에서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이곳 해골의 도시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까. 비록 해골의 모습이고 완전한 삶은 아니지만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로웠던 것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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