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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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중에 본 건 <아무도 모른다>가 유일하다. 어머니의 무관심과 방치로 죽음에 몰린 네 남매를 그린 이 작품은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1988년 일본 도쿄 스가모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더 끔찍하다. 영화를 보고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던지. 트라우마 같은 기억이라서, 이후 <걸어도 걸어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의 작품이 연이어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국내에서 화제가 되어도 볼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집 <걷는 듯 천천히>를 읽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화를 봐 볼까. 저자가 2011년 니시니폰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 실은 원고를 바탕으로 만든 이 책에는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국내외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일들이 나와 있다. 제작한 영화 한편 한편에 담긴 마음은 물론 영화를 보는 관점, 영화를 포함한 매체 전반에 대한 생각도 나와 있어 저자는 물론 영화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읽어볼 만하다. 영화를 잘 모르는 나는 일본 연속극이나 연예인에 대한 글이 꽤 재미있었다.



얼마 전 <킹스 스피치>라는 영화를 봤다. 말더듬증을 극복하는 '작은' 이야기가, 왕이 국민에게 왕으로 인정받는 연설을 성공시킨다는 '큰' 이야기와 겹쳐지는 훌륭한 구성의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확실히 위화감도 크게 들었다. '뭐야, 어차피 '올바른' 전쟁에 국민을 몰아넣는 왕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본다. 왕이 아니라 왕의 말더듬증을 치료한 언어치료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자신이 쓴 연설문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올바른' 전쟁에 참전해 상처받는 것을 본다...... 그런 식으로 평범한 인간이 커다란 올바름과 작은 ('아버지로서의') 고통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야기는 어떨까. (pp.216-8)



저자의 정치관 및 세계관을 알게 하는 글도 많다. <킹스 스피치>를 보고 쓴 글은 특히 인상적이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나는 그저 뻔한 생각을 한 반면, 저자는 말더듬증을 고친 왕이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전쟁에 몰아넣은 것에 주목한다. 나아가 언어치료사를 주인공으로 해서 열심히 말더듬증을 고쳐준 왕이 나중에 자신의 아들들을 전쟁에 보내고 상처 입혀 괴로워하는 줄거리를 상상한다. 영화감독은 일반인들과 세상을 보는 관점만 다른 게 아니라 온갖 것에서 영감을 얻고 창작으로 연결하는 재주의 소유자다. 그러니 그 같은 명작들을 만들어 낸 거겠지.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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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10-08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님의 책에서 본거 같은데 이야기의 시작은 소설의 결말에서 시작되곤 한다던 말이 떠오릅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변형해보거나 창조해보거나 의문을 품고 덧붙이거나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김영하작가님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던 말이 떠오릅니다. 역시 작가 감독님들은 `본다`는 의미가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