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책상서랍을 정리해야지' 하고 마음 먹은 지 한 달째다. 서랍을 열 때마다 펜이며 메모지며 포스트잇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뒤엉켜 있는 것을 보면 기분까지 엉망이 되는데도, 막상 정리를 하려니 엄두가 안 난다. 일단 뭐라도 버려야겠고, 생활용품점에서 정리용품을 사와야 할 것 같고, 애초에 책상서랍이 작은 듯 하니 책상서랍을 바꿔야 할 것 같고, 그럴 거면 책상을 바꾸고 싶고, 가구, 방배치, 아니 방 자체를 바꿔야 겠다 싶고... 이렇게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정리고 뭐고 다 미루게 되고, 엉망인 기분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면? 독일 베를린 소재의 디자인 에이전시 ZIA의 대표 카트린 파시히와 사샤 로보가 공저한 <무계획의 철학>에 따르면 '힘들게 자기 삶을 바꾸지 않고도 예전보다 더 기분 좋게' 사는 일은 가능하다. 미루기의 고수인 저자들에 따르면, 일상은 물론 일에 있어서도 제때에 맞춰, 계획적으로, 완벽하게 임하는 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 업무와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도 충분히 돈을 벌고 커리어를 개발할 수 있으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 사례도 널려 있다.



노련하게 미루는 프로들은 종종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 리누스 토발즈는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를 개발하느라 전산학과를 졸업하는 데 8년이나 걸렸다. 아이작 뉴턴은 책을 읽느라 어머니가 시킨 농장 일을 게을리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전공인 법학 공부는 하지 않고 피아노만 쳤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궁정 화가로서 맡은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했다. 기하학이 훨씬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가 (1991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바톤 핑크>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밀러스 크로싱> 시나리오 작업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p.90)



저자들은 무계획의 삶을 그저 예찬하고 옹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속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그 중에 가장 좋았던 건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다. 이는 일반적인 멀티태스킹의 개념과는 살짝 다르다. 멀티태스킹이 많은 일을 동시에 함으로써 최단시간에 처리하는 것이라면,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는 일단 여러 가지 일을 저질러 놓고 그때 그때 관심이나 호감이 생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에 비해 일의 진척이 상당히 느리지만(마무리되지 않는 일도 더러 있지만), 한 번에 하나의 일에 집중하는 게 힘들거나 완결을 못 지을 게 두려워 좀처럼 시작을 못 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제럴드 와인버그라는 작가는 이를 통해 수많은 책을 쓰기도 했다.



"나는 하나의 원고를 끝내고 다음 원고를 쓰기 시작하는 법을 모른다. ...... 지금 작업 중인 원고들, 즉 현재 진행 중인 작품 목록을 보면 대략 이렇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를 비롯해 30개가 넘는 원고들이 마무리 단계 혹은 미완성 단계다. 그리고 매달 한 편씩 써야 하는 칼럼에 필요한 글이 36개, 다양한 매체와 약속되었거나 아직 게재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 글이 27개나 된다. 뿐만 아니라 어디에 필요할지 모르지만 메모처럼 기록하고 있는 개괄이 불가능한 수많은 짧은 글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다. 언젠가는 이것들의 용도를 찾게 될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p.98)



나는 책을 읽을 때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를 실천한다. 요즘 나는 <행복해질 용기>, <마더 나이트>,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책 먹는 법>, <벚꽃, 다시 벚꽃>, <대성당> 등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한 달 넘게 읽고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무계획의 철학>처럼 몇 시간만에 후딱 읽은 책도 있다.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는 읽기 시작한 책이 재미가 없어도 빨리 읽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부담 없이 조금씩 읽어나가도 죄책감이 안 들고, 그때 그때 기분이나 흥미, 관심사에 맞춰 읽는 책을 정하거나 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앞으로는 책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업무에 있어서도 이 방법을 실천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책상서랍 정리는 언제 하나. 일단 <무계획의 철학>에 나온대로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미뤄봐야겠다. 어쩌면 그 사이에 책상을 바꾸거나 이사를 가는 일이 생길 수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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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7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게 필요한 책 같아요. ㅎㅎ
모든 걸 동시에 시작하기,가 해답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