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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 Niche - 왜 사람들은 더 이상 주류를 좋아하지 않는가
제임스 하킨 지음, 고동홍 옮김 / 더숲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수분크림을 다 써서 이 참에 좋은 걸 장만해 볼 생각에 며칠째 백화점, 할인마트, 로드샵, 인터넷 할 것 없이 알아보는 중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브랜드도 많고 제품도 다양한지. 가격, 기능, 피부타입, 용량, 디자인별로 많기도 많고, 한 브랜드 안에도 하위 브랜드가 몇 개나 있어서 고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예전 같으면 '수분크림은 0사', '아이크림은 00사' 이런 식으로 한 품목을 대표하는 강력한 1위 브랜드가 있어서 그걸 사면 그럭저럭 만족했을텐데, 이제는 하도 경쟁이 치열해서 우위를 점하는 브랜드가 따로 없는 것 같다.
<니치>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정확히 진단하고 반영한 책이다. 초기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영국의 세(say)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말했고, 실제로 오랫동안 공급이 수요를 형성하고, 수요는 공급을 따라가면 되었다. 전에는 매대 위에 진열된 제품이 곧 내게 필요한 물건이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이고, 매출 1위 제품이 곧 제일 좋은 제품이자 나한테도 가장 잘 맞는 제품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매대 위에 진열된 제품 중에 고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제품을 스스로 찾아서 선택할 수 있고, 직접 제작할 수도 있다. 아무리 매출이 높고, 점유율이 높은 제품이라도 나한테 안 맞으면 그만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가령, 이 책에 등장하는 의류 브랜드 '갭(GAP)'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 기억에도 90년대까지는 소위 '대중' 브랜드라는 것이 존재했다. 초등학교 시절, 반 친구들 중 다수가 당시 대중 브랜드 G사, E사, U사 등에서 나온 어린이용 옷을 입고 다녀서, 한 반에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몇 명씩은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은 브랜드 수가 워낙 많고,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취향에 맞는 옷을 골라서 사입을 수 있기 때문에 여간해선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 (중, 고등학생들이 N사 점퍼를 비정상적으로 많이 입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이례적인 현상이니 예외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재화가 아닌 무형의 산업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산업의 경우, 과거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부터 '타이타닉'까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흥행돌풍을 일으키는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가 존재했다. 이런 영화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남녀노소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으로 되어 있고, 폭력과 성적인 표현은 청소년 관람이 아슬아슬하게 허용되는 수준까지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톱스타가 나오는 영화가 '예상대로' 잘 되었다는 보도보다는, 저예산의, 소재가 신선하고 탄탄한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이례적인' 흥행 성적을 거뒀다는 보도를 접하는 일이 더 많다. 미국에서는 '쏘우' 시리즈가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는 '워낭소리', '써니' 같은 영화가 그랬다.
주류, 다수, 대중을 공략하면 망하고, 비주류, 소수, 마니아층을 공략하면 흥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주류와 다른 '나만의 것을 가져라' 라는 조언을 던진다. (p.324) 단점을 보완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당신의 제품이 정말로 '그만그만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할 수 있다. 당신이 보여주거나 말할 뭔가를 갖고 있으면, 그것을 신봉하는 진정한 청중을 찾고, 그것을 끌어들여서 그것에 영양분을 공급하라. 이 단계에서 품질은 양보다 더욱 중요하다. 당신의 틈새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권위를 쌓아야 할 것이다. (p.324)
미국의 케이블 방송국인 HBO. 지금은 소위 '드라마 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전에는 공중파 방송국에 밀려 영화나 드라마 재방송이나 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HBO가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는 공중파 방송국과는 다른 케이블 방송국만의 특징, 바로 표현의 규제가 심하지 않다는 점을 활용한 제작자 알브레히트 덕분이었다. HBO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섹스 앤더 시티', '소프라노스' 등 성적 표현과 폭력 수위가 높기는 하지만 소재가 신선하고 스토리가 탄탄한 드라마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유료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당겼다.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잘 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보여준 셈이다.
이외에도 애플, 스타벅스, 몰스킨 등 니치를 활용한 사례가 책에 나오는데, 사례들이 책 주제에 맞게 하나하나 잘 분석되어 있고, 글이 마케팅, 경영서적이라기 보다는 사회학 연구 리포트처럼 생생하고 읽기 쉽게 쓰여있는 점도 좋았다. 이 책에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사례만 소개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어떤 니치 사례가 있는지도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