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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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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백(告白)은 자신의 죄(罪)를 고백하는 것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 고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죄의 시작은 모든 것이 크고 원대한 문제로 시작되지 않는다. 정말 작고 작은 사건(事件)들이 하나의 인화(引火)점이 되어 크게 화산폭발로 이어진다. 아마 이런 문제를 다룬 것이 고백이란 소설일 것이다. 모든 사건의 원흉에서 범죄의 시작점은 13~14세의 어린 청소년이었다. 제2차 성징기이면서도 몸은 어느 정도 커진 상태에서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불안한 시기이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이 있다. 이때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지는 14세 중학교를 다니는 남자아이로 나온다. 14세라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서 그는 세상과 사회의 부조리와 소외 그리고 왜곡 등에 의해 갈등을 앓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신지의 행위나 심리들은 매우 부적당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 뒤에 보여진 이면에는 이 사회와 부모라는 기성세대의 이기심이 가득하게 숨어 있었다. 결국 아이는 아이 그 자체로 망가져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최고의 범죄자인 슈야와 나오키는 그런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청소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둘은 비교하여 보자면 슈야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비인간적인 요소로 인했다면 나오키는 지나친 어머니의 간섭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난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의 최고의 피해자면서도 최고의 범죄자가 된 유코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의 격렬한 분노로서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고 틀어졌을까? 슈야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머니로부터 시작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그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평범하고 인자한 슈야의 아버지와 같이 잘 지낼 수 있음에도 그녀는 욕망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 

어머니의 욕망에 대해 슈야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전할 기회를 노렸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서 어머니가 다시 자기를 봐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 과학경연대회에서 수상할 때 세구치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구치 교수는 어머니와 결혼하였고, 어머니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안주하여 자신의 존재를 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슈야는 모든 윤리적 가치관을 버리고 대규모 살인을 기획한다. 1차 계획은 유코의 어린 딸 미나미를 죽인 것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학교 모든 사람을 죽이려 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그 이전에 과학경연대회에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의 칼날을 올렸다. 분노의 칼날을 향해할 곳은 슈야의 어머니고, 그리고 분노의 칼날이 꽂혀야 할 곳은 슈야 마음에 있는 자신의 비윤리성이어야 했다. 슈야는 대단히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논리적 물리적인 이성은 뛰어났으나 정작 중요한 윤리적 이성은 형편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월하다고 여겼다. 결론은 슈야는 그런 보통 인간과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 그 행위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상관없는 제3자인 것이다. 1차 희생자는 미나미, 2차 희생자는 나오키, 3차 희생자는 미즈키, 4차 희생자는 친어머니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희생자는 자신의 분노로 인해 자신을 파탄하게 만든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분노의 복수에서 유코의 반전(反戰)은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유코와 슈야의 관계도 조금 흥미로웠다. 사실 슈야가 미나미를 노린 이유는 약한 대상인 어린아이란 사실도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은 미나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이었다. 유코는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싱글맘 선생이었으나, 언제나 미나미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대신 차가운 공학수식만 들은 슈야에겐 비교하자면 충분히 질투감에 사로잡히게 할 일이었다. 이에 반해 유코도 슈아의 어머니로서 대해주었다.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의 불만을 뒤에서 보고 있는 어머니로서 말이다.

열심히 슈야의 홈페이지를 본 유코는 자신의 복수가 어떻게 되고 가는지 철저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야가 어머니가 보기를 원한 것을 다른 어머니가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코는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아오며 매우 헌신적으로 살아온 사쿠라노미야 마사요시 선생의 연인이다. 마사요시는 AIDS에 걸려 투병하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갔으나 그 누구에게 원망을 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딸을 죽인 2학생까지 용서하려고 한다. 그는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마사요시는 자신의 딸을 죽인 학생에게 AIDS 감염시키려한 유코의 폭주도 미리 사전에 방해하였다.

결국 자신이 AIDS에 걸리지 않음을 알던 슈야는 당당히 학교에 나와 자신이 어긋난 정의를 실현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AIDS에 걸린 것으로 착각한 나오키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나오키가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을 보면 사뭇 우리 사회의 일편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적은 2사람의 범죄자에서 슈야는 어머니의 비정함에 범죄가 싹을 틔웠다면 나오키는 어머니의 간섭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오키는 평범한 집안이다. 어딜 가더라도 평범하고 나오키 역시 평범하다. 평범하기에 그의 광기는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한 남자아이가 어딜 가도 우수한 인재로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것이 아닐까? 나오키의 콤플렉스를 보면 그의 어머니의 집착이 상당한 영향이 컸었다. 우리 아이는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남의 아이가 그래서 잘못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착해요. 왜 우리 아이어야 합니까? 라는 그런 부분이 나온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나름 정의가 있다 라면서 남의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 설정에서 일가족 5명을 살해한 어느 여중생의 엽기행각에서 그 여중생은 사실 극히 평범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소녀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평소에 그런 여자아이나 혹은 나오키가 살인행위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인가 혹은 그 이상의 문제인가? 슈야의 경우는 분명히 특별 케이스다. 그런 특별 케이스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슈야보다는 신문기사에 난 여중생과 나오키가 더욱 무서운 현실처럼 다가왔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른 자체가 더욱 겁나는 것이다. 그런 점을 더욱 부각시킨 것은 베르테르 선생이 학교로 부임오면서이다. 미즈키가 반장으로 있으면서 베리테르와 함께 나오키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미즈키는 베리테르의 가식과 억지스러움에 지겨움을 느꼈다. 자신이 가능하면 베르테르를 독살하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미즈키라도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유코가 학교를 그만둔 뒤에 슈야의 학급 내에서 일련의 마녀로서 이지메를 당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일하게 이지메를 가하지 않은 것은 미즈키였다. 미즈키가 이지메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슈야가 옳기보다는 슈야로 통해 자신들이 정의(正義)롭다고 생각하는 마녀(魔女) 같은 마녀사냥꾼이 되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추후 베르테르에게 이지메 사실이 들통이 나면서 그 사실을 고하지 않은 미즈키가 되려 마녀로 몰린다. 이때 그 마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즈키는 우유팩을 슈야에게 던지는데, 던지는 부위가 등이 아닌 얼굴이었고 순간 슈야의 얼굴에 우유팩이 닿일 때 미즈키는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군중심리이다. 군중심리로 통해 미즈키는 쾌감(快感)과 우월감(優越感)을 느꼈으나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유일하게 학급 내에서 제대로 판단하였던 사람은 미즈키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타인에 대하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추후에 슈야의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슈야의 거대한 냉장고에 보관된 고기가 되어 버린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여 시체마저 유린(蹂躪)당한 것이다.

모든 편을 읽으면서 읽을수록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이냐 질문에서 점점 난해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옳은 행위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 사람이 만들어지도록 자꾸 유도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든 나쁜 근본을 다시 찾아 되돌릴 방법은 없으나 그 나쁜 근본은 모두 없앨 수는 있었다. 나오키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슈야의 어머니는 슈야의 폭탄으로 죽었다. 결국 모든 사건의 원인자들은 사건 실행자에 의해 모두 죽게 되었다. 나오키는 어머니 살인으로 경찰에 넘어가게 되면서 그의 죄는 유아살인죄로 인한 정신강박 증세로 이루어진 돌발적인 행위로 죄가 성립되고, 슈야는 동급생 미즈키의 살인과 폭탄살해로 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2사람의 살인죄를 일으키게 하고,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복수로 통해 이루어진 조작된 살인에서 가장 큰 피해자인 유코는 복수의 여신으로 등극된다. 그녀의 최고의 복수는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2사람에게 각자의 어머니를 죽이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모든 원흉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2사람에게 시작된 것으로 만들어 모든 알리바이 만든 후에 자신은 어둠의 역사로 사라져 버렸다. 최후의 장에서 슈야에게 걸린 발신표시제한번호에서 유코는 자신이 유도살인한 것에 대해 슈야에게 폭록한다. 하지만 슈야는 그것을 경찰에게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폭탄은 자기가 만들었고, 폭탄 역시 자기 학교는 아니나 어머니가 있는 대학교라는 점, 또한 냉장고에는 동급생 미즈키의 시체마저 있었다. 이 모든 비밀은 유코가 모두 알고 있었고 모두 만들도록 유도했다. 과연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어긋난 분노의 칼날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미친 분노의 칼날을 다시 회수할 수 없을까? 책에서 어린 미나미가 죽은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약하고 거기에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죽인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그물로 씌웠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역전되면 어떨까? 최근에 본 존 롤즈의 “정의론”이 생각난다. 이것을 보는 내내 응보적 정의가 떠오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응보적 정의는 개인에서 한정짓는 것에 반해 이 작품에서의 응보는 점차 확대되어 간다. 사회가 개인을 망쳐가는 듯, 그 개인의 사건이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면 개인과 사회 어디부터 틀려먹었을까? 그것은 그런 개인과 사회를 만들어낸 아이의 거울인 어른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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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존 롤즈 지음, 황경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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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定議)와 정의(正義)이다. 특히 후자의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만남과 충돌, 다툼 등을 겪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의미가 없다. 결국 인간 정치적인 동물이므로 어느 특정 사회에 소속되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 한다.


그런 만큼 인간은 혼자가 아닌 전체적인 사회적인 구조에서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분명 아주 오래된 역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쉽지가 않다. 정의는 항상 정의롭게 지켜오기 보다는 정의롭지 못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의는 이 세상에 완벽한 이데아(Idea)로서 도래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정의를 찾아 해매거나 혹은 정의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정의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사회인 유토피아라면 굳이 정의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란 자신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욕망에 따라 정의 역시 그 욕망에 따라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망이라 하여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가령 쾌락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인간이 그 쾌락을 어디에 가치를 두는 것일까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가령 부당하게 남의 나라 및 지역에 침범하여 죄 없는 인간들을 납치하여 자신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도록 강요하는 노예소유주들은 정당한 욕망이 아니다. 하지만 친구나 가족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려 대신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가치가 있다. 이것 역시 쾌락이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사하게 해줄 수 있다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가령 어머니들이 자신의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자신의 아이가 살아남길 바라는 욕망일 것이다. 단지 그 욕망의 가치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점이다.


그렇듯이 이 사회에서 인간들은 갖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의식주(衣食住)라는 기본적인 생존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주 영역이 만족하지 못하다. 누구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행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탄생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그 태어남의 시초에서 그 자체만으로 누구를 억압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기본적인 자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지 태생적인 부분에서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관이 등장하는데, 이런 문제가 과연 정의로운지 다룬 것이다. 물론 유리한 태생과 유리하지 않은 태생에서 다소 그 개인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사회적인 차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차로 인해 당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결정지어 버리는 행위는 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은 인간 본인이 어느 사회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그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인간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동물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지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인 차이로 인해 그런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분명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상실하여 평생 자신과 자신의 후예까지도 현재 자신의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희망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존 롤즈의 정의론(正義論)에서는 그런 사회적인 정의에 대해 심도(深度) 있게 다룬 것이다. 물론 1번 독서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책의 수준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과 같은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같이 참조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에 대한 정의를 논하므로 정의론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안건으로 통해 정의에 대해 논한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윤리(倫理)라는 것이다.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영역에서 논리, 윤리, 물리 중에서 가장 높게 인정하는 게 윤리이다. 윤리는 모든 인간의 기본이 되어야 필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윤리라는 것은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즉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그 중에서 다른 사람이어도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성사가 되면 안될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진정 이타심이란 나와 관계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제3자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최소수혜자이란 점이다. 최소수혜자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본다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류이다.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놓고 본다면 이것은 조금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들은 경제적·사회적인 불충족으로 자신들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입장으로 여러 가지 정치적·문화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거나 특히 이들의 2세들은 교육에 대한 기회를 박탈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롭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겐 인간으로서 사회적·문화적으로 공평하게 누릴 평등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질적인 부분에서 같이 즐기는 것까지는 분명 잘 못된 것이나,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면 안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이다. 부정의한 사회가 되면 결국 누군가는 그만큼의 피해를 가져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부정의는 더 크고 무거운 부정의를 막기 위해 존재해야하는 필요악적인 부분이다. 부정의 그 자체가 하나의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회다.


문제는 이런 부정의에 논함에 있어서 당하는 주체가 언제나 사회적·경제적인 약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敎育)의 기회, 문화(文化)의 기회, 정치(政治)의 기회가 매우 적어지기 때문이다. 배우지 못함에 따라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배우지 못함에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으며, 올바른 판단과 문화의 향유를 느낄 수 없다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좋은 활동을 할 수 없다.


분명 이런 문제는 심각할 수 있다. 존 롤즈는 경제 자유주의 체계에서의 개인의 재산영역을 인정하나 거기에 맞추어 그런 재산영역에 해당되지 못한 개인들에게도 충분한 사회적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부분으로 넘어온다면 이런 최소수혜자의 입장을 같이 고려하여 이들에게 행복이 갈 수 있는 최대 행복을 추구함이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에 논함에 있어서 공리라는 것은 모두에게 이익이 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이익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느 이익을 대해 어느 소수에 대해 배제함으로 그 이익을 만들어 보는 것이 공리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공리주의가 아니라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이고 또한 자신 이익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런 비윤리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항상 발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가 만족하면 그것으로 멈추지만, 인간의 욕구는 한시적이지 못한 상시적으로 변하는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런 욕망이 다수의 인간으로 구성된 논리로 이루어지면 이른바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는 점이다.


인간이 이익에 연연하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거나 생활권 내지 사고를 가진 인간이라도 모두 같은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대다수의 구성원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정의로 변하게 되고, 거기서 반대되는 쪽이 소수의 약자일 경우 그대로 배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들의 이익을 위한 논리는 하나의 정의로 변하여 결국 정의가 아닌 부정의로서 정의를 실천(實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유 경제주의에서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런 타인을 자유를 박탈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부류는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역으로 그 소수약자들이 거세게 반항하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배제하려고 한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공리주의를 논한다면 소수약자를 배제함에서 그 사회는 이미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공리주의적인 정의는 자신의 이익에 치중하길 보다는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당한 부정의에 대해 대항하고 비판하는 것은 정의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이다. 특히나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만약 어떤 국가의 법과 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면 국민이 이에 대해 양심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부정의한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국가는 이런 국민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서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조직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자가 자신과 자신의 이해관계에 해당되는 사람을 위해서 국민의 의지를 무시하게 될 경우 그것은 충분히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이 중간에 간간히 보인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에서 군중보다는 일부 시민들의 정치를 선택했다. 물론 지금 국민직선제로 뽑는 정치가들 역시 소수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를 임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우수한 두뇌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인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과 윤리의식이다. 만약 이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충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많은 진통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라는 것은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국민들이 모두 평등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국민들은 정치적·사상적·종교적 등 다양한 자유를 누릴 자유가 있다.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의무와 권리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자신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와 평등을 위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일까? 존 롤즈는 평생 정의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고찰해 왔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 입장을 이해해주고 알아주는 이타심과 윤리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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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 Leaf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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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먼저 본인이 금회 영화관에서 상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작품을 알게 된 동기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김용석 교수님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7가지 서사텍스트를 두고 설명하는 가운데, 이른바 “신화(神話)-대화(對話)-진화(進化)-동화(童話)-혼화(魂畵, Animations)-만화(漫畵)-영화(映畵)” 7가지 서사에서 동화 부분에서 알았다.
 

4번째 서사에서 동화라는 것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로서 겉으로 들리는 내용들은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령 월트 디즈니의 세계명작 애니메이션에서 담론된 내용을 본다면 “백인남성우월주의” 내지 “여성종속화”적인 면이 많이 숨어 있다.

게다가 원작은 아주 잔혹하고 추잡스러운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엄청나게 미화되어 마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로서 정해져 있다. 사실 위 작품의 기초는 사실 신화이다. 신화란 인간의 표피적인 부분보다는 내면적인 욕망과 이상의 괴리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 점으로 서사라는 부분에서 신화와 동화 기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이 깔려 있으며, 문학의 시초가 신화라는 점에서 후에 새롭게 영상서사로 이어질 만화, 영화, 혼화는 문학적인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사실 서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대화로 시작한 구술서사에서 글자를 기록물에 남기는 문자서사로 발전했다.

그런 부분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서사체로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말로 오는 구술서사인가? 글로 오는 문자서사인가? 녹음되어 귀로 들리는 음성서사인가? 이미지로 되어 있는 영상서사인가?” 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 구조나 내용은 변동이 없으나 단지 보고 듣는 방법의 차이가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본인이 감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경우는 원작이 동화라는 정지된 이미지를 가진 영상서사에서 애니메이션이란 움직임의 미학을 가진 영상서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서사구조를 분석해보고 또한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비평을 적어 보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계관의 경계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기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기점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인 잎싹은 자신이 살던 양계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잎싹이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삶이 거기에 머무른 채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시간은 멈추어 있던 것이다.

양계장에서 식사시간에 맞추어 먹이를 먹고 그저 수정되지 않은 달걀을 낳는 잎싹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계장 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기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잎싹은 죽은 사체처럼 연기하여 양계장을 벗어났으며, 결국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녀가 머물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 양계장이야!”라고 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굳이 잎싹만이 아닌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의 틀과 공간 속에서 멈추어 나오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사회를 만들며 타인과의 소통으로 통해 정치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잎싹은 갇혀있는 양계장의 사회를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위해서였다.

잎싹은 암탉이었으나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오로지 병아리는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뚱뚱한 수탉만의 권위였다. 양계장의 의미는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을 표현해낸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은 추후 잎싹의 아들인 “초록이”가 양계장에서 탈출하자 수탉의 아이인 “도미솔”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탉의 벼슬이란 감투를 쓰게 된다.

이른바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하나의 속박당하는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라 아들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임으로 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패륜적인 죄악으로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죽을 때까지 맹인으로 살았으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잎싹은 그런 일부다처제의 가부장적인 세계에 갇혀 자신의 삶을 표출하지 못한 심리적인 억압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부분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뚱뚱한 수탉의 알을 품은 다른 암탉이 부러워하던 잎싹은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두 번째 극적 플롯인 “나그네의 배필의 죽음”에서(첫 번째 극적플롯은 잎싹이 양계장을 탈출하여 족제비에게 습격 받은 후에 나그네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 잎싹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초록이의 알을 처음 품을 때 자신의 얼굴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모성애를 가지고 싶었던 것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녀로 통해서이다.

생물이 살아가면서 모두 유한한 수명이 있으나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물이 자기와 똑같은 분신을 재생산으로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암탉인 잎싹이 청둥오리인 초록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물적인 가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방법이다. 그런 이질적인 잎싹의 가치를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공간의 경계에서 극히 들어낸다. 처음에 양계장을 탈출할 때와 수달과 만나 거처를 만들 때, 나그네가 죽고 나자 늪으로 갈 때도 공간적인 이동이 계속 일어난다. 잎싹은 자신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분명히 양계장이나 오히려 양계장에서 멀어져서 더 새로운 세계로 간다.

그런 공간으로 옮기면서 잎싹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대우만 받을 뿐이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가지게 되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른바 문화세계는 비슷한 부류나 동일한 접점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잎싹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갈퀴가 있어도 수영할 수 없으며, 게다가 다른 동물처럼 강력한 힘이 없다.

오로지 잎싹은 자신의 의지로만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이를 키울 뿐이다. 닫힌 세계에서 항상 자신에게 따뜻하지 못한 열린 세계로 가는 잎싹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초록이의 성장이다. 초록이의 성장은 아주 의미신장하다. 왜냐하면 초록이는 분명 청둥오리이나 잎싹이를 엄마로 본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질수록 엄마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잠수가 가능하고, 수영도 잘하며 나중에 하늘을 날아 청둥오리 파수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초록이는 엄마와의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의 열린 공간인 하늘이 이제는 초록이가 살아야 하나의 커뮤니티로 된다. 물론 처음에 청둥오리 사회에서 초록이는 외면을 받지만, 파수꾼 경연대회 성과로 통해 그 무리의 리더로 급상한다.

그것으로 통해 더 이상 초록이는 암탉의 아이가 아니라 청둥오리 무리의 일원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 세계의 구분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청둥오리와 날지 못하는 암탉 사이에는 분명 이원화적인 공간적 대립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잎싹은 청둥오리가 아니라 날지 못한다. 거기에 반해 초록이는 날 수 있기 때문에 잎싹이가 가고 싶은 세상을 대신 날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초록이의 성장을 위해 잎싹이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록이에게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 잎싹이는 천천히 야위어가고 결국 겨울이 다가오자 병에 걸린다. 청둥오리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잠시 늪에 머물다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런 사계절이란 자연의 순환 아래 초록이는 청둥오리의 일원으로써 떠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초록이가 청둥오리의 무리로 가게 되어 엄마인 잎싹이와 모든 것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동안 청둥오리 무리 속에서만 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초록이는 자신의 발에 묶인 붉은 끈을 계속 묶인 채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잎싹이와 보내던 유일한 추억이며 흔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잎싹이가 닫힌 양계장과 마당을 나와 넓은 세상에 나와 타인의 아이를 자신의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작품 마지막으로 오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에 보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갈등의 존재와의 화해이다. 물론 그 화해는 잎싹이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이 존재한다. 잎싹이가 사랑하던 나그네와 나그네가 사랑했던 어느 암컷 청둥오리의 목숨을 앗아간 족제비가 사실은 잎싹이 못지 않은 모성애를 가진 것이다. 잎싹이가 어느 작은 동굴에 가니 어린 족제비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우연히 족제비와 굴앞에서 마주친 잎싹이는 초록이가 족제비 발에 잡힌 것을 보았다. 잎싹이는 족제비의 발톱에 초록이가 죽지 않기 위해 족제비의 어린 새끼를 발톱으로 잡아 초록이를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나 잎싹이는 그런 위기에서 모면한 것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족제비는 자신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한 것이었다. 만약 사냥감을 놓쳐 자신이 굶게 되면 어미 족제비의 몸에서 젖이 나오지 않아 새끼 족제비 모두 굶어죽게 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잎싹이는 초록이를 청둥오리 세계로 돌려보내어 멀리 떠내 보내고, 자신은 족제비의 사냥감으로 자진한다. 족제비가 하얀 눈을 밟고 잎싹이의 뒤를 바라볼 때 잎싹이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잎싹이의 모습을 본 족제비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한다. 결국 자신보다 소중한 어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잎싹이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나그네의 만남과 나그네의 죽음으로 초록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잎싹이는 그런 희생으로 통해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이루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 인간 세계에서 본다면 잎싹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닌 타자의 아이를 돌보며 모든 사랑을 주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잎싹이처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잎싹이의 고귀한 사랑과 자신이 가진 모성애로 통해 진실한 자기 이상실현을 이루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른 구도에서 이 작품을 보면 초록이의 탄생과 나그네의 죽음이 절묘한 듯하다. 한국신화와 그리스신화의 차이점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게 아버지의 존재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제거당하는 존재인 반면 한국은 제거당하기 보다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나온다. 일단 내가 이것을 조금 의미를 두는 이유는 나그네가 청둥오리의 무리에서 최고의 파수꾼이란 사실과 초록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최고의 파수꾼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후레자식인 초록이는 그야말로 한국신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웅의 탄생과 일치한다. 아버지 나그네의 죽음이 있었기에 초록이는 청둥오리 세계의 영웅으로 등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록이는 그 무리의 리더로써 엄마 잎싹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듯이 초록이는 한쪽 발에 묶인 붉은 줄로 통해 엄마인 잎싹과의 과거를 공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기존 한국 무속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과 의례가 존재하는 점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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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 -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조작되었다!
제이미 킹 지음, 이미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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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이란 서적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예전에 내가 보아왔던 책들에 대해 약간 다시 상기 시켜준 듯하다. 특히 노암 촘스키 총서와 같이 근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강대국들의 음모와 그 음모에 희생된 많은 국가와 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한 부분이 생각났다. 그리고예전에 보았던 레바논전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학살극을 다룬 "바시르와 왈츠를",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화씨 9/11"도 생각났다.

그 이유는 과연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 테러, 우리가 셀 수 없이 부딪히는 비극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이루어졌을까? 내지 이것이 과연 우연이 아니라도 그렇게 비극이 톱니바퀴에 이빨을 서로 맞물러 끼워넣듯이 맞을 수가 있는가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런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모두 틀렸다 이 책이 진실이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납득되기 어렵거나 납득되더라도 너무 앞뒤가 잘 맞아 마치 누군가의 손아래 놀아나는 기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언론과 미디어에서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믿어 버리기에는 뭔가 만족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한국에서 많이 일어났고, 한국이 아닌 곳에도 많이 일어난다.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날 죽어버리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멀쩡한 인간이 아주 어려운 상황을 무릎쓰고 유명인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현실을 그대로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 책을 보는 내내 조금 다소 억측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너무 앞뒤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점. 예전에 보았던 여러 서적, 또한 뉴 오더 월드라는 극단적인 파시스트 이야기들, 이 모두 배후에 뭔가 있을까? 솔직히 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언론과 미디어에서 분명히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다르게 보여주거나 해석한다. 심지어는 아예 없는 일인양 말끔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다. 사실 언론과 미디어에서 여기에는 국가적인 혹은 권력이라는 대규모 세력이 뒤에서 배후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미셀 푸코라는 학자는 현대사회 대중들은 국가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에 의해 통제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아니라면 대중들을 미디어에 그대로 노출하여 더 이상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정해진 틀에 맞추어서 스스로 사고하기 보다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마치 이 사회의 구경꾼으로 만들고 싶은 "스펙타클의 사회"로 꾸미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가지 중요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있다면 분명 이런 사건에는 일련의 음모가 없다고 할 수 없고, 그 음모 속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추잡한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추악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추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면 그들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려 든다. 왜일까 그들도 양심이라는 엉성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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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Ⅱ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3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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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2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연 자본은 마르크스가 당시 어려운 환경에 처해진 대다수의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만을 위해 적었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시야를 가지고 적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인 듯하다.
 

그 이유는 자본 1-1권과 1-2권을 읽을 때에는 분명히 마르크스는 부도덕한 부르주아의 태도와 거기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착취현상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또는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고찰하였다.

그 부도덕한 비인간적인 형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착취도에서는 부르주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동 및 청소년들의 부모들까지 책임이 있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이를 헐값에 공장에 보내고, 아이가 힘들게 벌은 돈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들도 결국 그 부모 역시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옴에 따른 일련의 피해의식 내지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이런 구슬픈 인간의 비애와 사슬들은 결국 풀어내지 못한 채 수 백년을 이어간 것이 역사의 상처이다.

그런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한 당시 사회관을 본 후에 자본2권을 내 오른손바닥에 들고 읽으니 분명히 전에 읽은 자본 1-1권과 1-2권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은 곧 노동수단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잉여생산물을 많이 만들어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가 다시 원래의 자본과 잉여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본2권에서는 그 자본의 유통과 흐름 그리고 산업에 따른 자본의 변화능력, 그 외로 자본의 이동경로까지를 상세히 서술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이나 혹은 상업과목을 배울 때에 등장한 내용과 거의 유사한 내용들이 나왔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2권에서는 그런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불변자본, 유동자본, 유통자본, 고정자본 등등의 여러 가지 자본을 각 특성별로 나누었고, 거기에 따른 자본 소요형태와 다시 자본의 이동에서 보이는 그 형태를 추적하니 솔직히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분석능력에 입을 다물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전에 그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자본2권 보면서 느낀 것은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었던 당시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는 분명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여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고용주인 부르주아의 입장도 같이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자유는 곧 국가적 통제 및 관리의 부실을 틈을 타서 이른바 독과점이 이루어지어 결국 일부 기업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점이다. 이런 부분은 대규모 자본가에 의해 소규모 자본가들이 자본능력을 상실하여 그들 역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현대사회의 한국, 미국 등의 다양한 국가에서 대기업 독과점 및 과다경쟁으로 통해 중소기업이 망하거나 합병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만약 기업들이 합병될 경우 자본이 한곳에만 몰려가고 결국 다른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함으로 올바른 경제구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을 이미 마르크스는 문제를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도 그러하거니와 기업주들 즉 부르주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입, 유출 그리고 이동에 대해 상세히 고찰했다는 점은 “자본”이란 도서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성경”이 아니라 부르주아 역시 참고할 만한 교과도서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정자본 즉 불변자본인 공장의 기계운영에서 기계의 구입비용, 운영비, 수리비, 내구도에 게다가 기술발전에 따른 기계의 신종 발생으로 통한 고정자본인 기계가 그만큼 자본적 가치가 하락한다는 점이다. 또한 유통과정에서 창고의 적재 및 보관, 운송에 따른 비용까지도 고려했다. 특히 당시 철도의 발전에 따라 철도운송에서 철도의 내구능력과 철도 위를 지지하는 버팀목까지 고찰한 마르크스의 시야에서 그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냐는 점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매우 예리학고 논리적인 부분은 고장에서 고용된 노동자가 한편으로 소비자로서 시장의 중요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 인간들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옷도 입고, 신발도 신어야 하며, 집에 살기 위해서는 건축자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다른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한 노동가치물 즉 상품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들은 생활수단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란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결국 자신들의 생존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존문제에 대해 필사적인 그들을 속임수로 속여 이익을 가로채는 악덕 자본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고용자들에게 사게 하여 그 생산품의 현재 가격만큼 고용자들의 봉급에서 공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현금화폐가 아닌 상품으로 대체하여 상품생산에 따른 잉여가치물 처분 및 노동력에 대한 유동자본 절약, 그리고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파는 것보다 더 높은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상품이 시장에 팔리기 위해서는 창고의 이동, 상품의 유통을 위한 운송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에 내놓아도 당장 팔리지 않으면 상품의 질적 가치가 저하되어 본래의 가격으로 이윤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사회에서는 이렇게까지 고용자들에게 상품의 처분을 강요하지 않으나 분명 상품을 급여 대신으로 적용한다면 고용주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투입한 금액이 상품의 재료비와 생산에 필요한 기타 에너지와 잔잔한 부차적인 자본이라는 점이다.

어째든 자본2권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통한 자본의 이동과 자본의 종류를 예시를 들었다. 농민에겐 밀은 파종을 위한 고정자본이겠으나 빵집가게에서는 빵을 만들기 위한 재료라는 유동자본이란 점은 산업의 형태와 규모,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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