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만화애니비평 > 문재인 북콘서트를 다녀와서


어제 문재인 변호사님이 부산MBC에서 대화로 통한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보니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님, 영화배우 문성근, 내가 꿈꾸는 나라의 김기식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님, 그리고 그날의 주인공 문재인 변호사님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의 진행과 기획, 연출을 맡은 성공회대 탁현민 교수님이 있더군요. 축하공연을 하러 멀리 서울에서 오신 루타틱 보컬분, 일단은 준석이들 분들도 수고를 많이 했고요.


저는 이날의 북콘서트를 보면서 느낀 점은 이날의 대화를 보기 전에 이미 문재인 변호사님의 “운명”이란 서적을 보았고, 그리고 이 책 이외에도 다른 서적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최근에 “존 롤즈”라는 작고한 미국철학자의 <정의론>을 읽어 보았는데, 북콘서트를 보면서 <정의론>이란 서적이 많이 생각나더군요.


왜냐하면 <정의론>이란 도서는 이른바 공리주의(功利主義)에 대해 적은 책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기술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보장과 그리고 최소수혜자의 기본적인 보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상을 대해 적었는데, 어제 북콘서트에서 엄청나게 생각나더군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인 편안함과 안락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어느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경로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조차 박탈당하고도 가만히 앉아 봐야하는 세상 속에서 이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지니고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난 곳이 지역에 따르거나 혹은 부모님의 경제적·사회적인 영향에 따라 그 후예들도 같이 변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차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문화적인 불평등이 나쁘다는 것은 <정의론>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경제적·사회적인 위치에서 불평등은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어느 사회적 약자의 정치적·문화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행위는 정의(正義)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단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고, 또한 단지 그 이유로 생존의 필수조건과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과연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사람은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 말처럼 인간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이미 그 모든 것을 갖추어서 만족해야 하나 그 만족을 지나쳐서 타인의 생존까지 위협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사실 끝이 없나 봅니다. 동물은 욕구로 사용하고 인간은 욕망으로 사용하는데, 욕구는 1번 만족하면 이후 거기서 멈추고 마나, 욕망은 한번 만족하면 더 큰 무엇인가가 만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만족을 위한 욕망수준이 증가하면 할수록 분명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어긋난 욕망으로 통해 누군가 희생된다면 분명히 그것은 정의가 아닌 부정의한 사회인 겁니다.


그런 부분이 확실히 부각되는지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매일같이 노동자의 시위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TV 뉴스와 각종 매체에서는 노사협의가 이래저래 되었다고 하나 사실 매일 지나가며 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거짓이란 것을 알죠.


한진중공업 앞에서 그리고 영도에서 중구로 넘어가는 부산대교 위에서 또한 부산지방노동청 앞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허위로 알려지는지 잘 보여주는 일일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별 것 없습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계수단을 이어가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생계수단을 파괴하고, 그들을 절망으로 만드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장 내일 아침 식사를 걱정해야하고, 아이들 학교수업비 마련에 노심초사하는 나라이라면 그것은 분명 잘 못된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인권(人權)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가(國歌)는 무엇일까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국민은 국가가 있어야지 살아갈 수 있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그 국민들이 국가에게 소외당하고 차별을 당한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한 사회임은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시대의 정치에서 모든 국가의 근본은 백성(百姓)으로 보았습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괴롭히는 정치가와 수령만큼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국가를 다스릴 계책은 농민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논에서 꼴을 베고 글자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가면서 이계심이란 사람이 조목 10가지 들고 와서 예전에 통치하던 수령의 부정과 백성들의 원성을 토로했습니다.


그때 다산 정약용은 이계심이란 사람을 오라로 묶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실 이계심은 관청에 있는 원님에게 항의한 대역죄에 걸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앙정부기관에서도 잡아서 조치해야할 역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산은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잘못된 관의 행정과 부패를 척결하여 백성의 원성을 환호성을 바꾸었습니다. 오히려 이계심이란 사람에게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지 못합니다. 누구는 강하나 누구는 약합니다. 약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불평등을 불평등으로 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조금씩 개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막힌다면 세상은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그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상당히 많을 겁니다.


전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난쟁이와 대화할 때는 그 대화하는 사람도 난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난쟁이를 진정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난쟁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렇게 바른 사람이 아니기에 눈에 잘 띄지 않기 보다는 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난쟁이가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 사회가 희망이 넘치기 위해서는 난쟁이들도 더 이상 난쟁이가 아닌 나라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아닙니다.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난쟁이가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있는 것 역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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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C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유럽이든, 당시 유럽 사회는 상당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과 영국 산업혁명 이후 계속되는 산업화와 자본화 그리고 점차 뚜렷하게 나누어지는 빈부 격차로 통해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게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상(思想)과 혁명(革命), 그리고 거기에 알맞은 크나큰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 중심 사건에 세계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도 철학자인 마르크스가 등장했다. 그런 마르크스가 과학적인 사고와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기 전에 유럽에는 엄청난 철학자가 있었다.

그것은 헤겔이었다. 헤겔이란 인물은 변증법(辨證法)이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고, 그의 변증법적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철학은 독일 비판철학(批判哲學)을 세운 위대한 철학자 칸트를 이은 인물이었다. 물론 나는 헤겔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한다. 내가 헤겔이란 인물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시대에 헤겔의 변증법이 한창 유행했다는 점과 최근에 잠시 읽어본 이중텐의 “미학강의”에서 처음 알았다.

어째든 헤겔이 칸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그의 철학에서 인류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변증법이었다. 하지만 헤겔은 그런 철학적 업적에서 큰 역할을 한 만큼 칸트의 사고방식을 많이 수용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누구나 자기 발에 맞는 척도와 손들, 그리고 구두를 만드는 일에 필요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그리고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

즉 인간은 언제나 끊임없는 사고와 이성을 위해 계속된 연구, 배움, 노고로 통해 이룩해야 하나, 현실에서의 인간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현존하던 시대에도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어떻게 적어 내려갔을까?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형이상학서설, IV, 264)

정말 그렇다. 오히려 무지의 배일에 가려진 사람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가치관과 사고들이 절대적 가치이며, 진리라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칸트나 헤겔처럼 그렇게 자신의 형이상학(철학)에 대해 진지한 공부나 노력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들의 짧은 지식과 알량한 사고로 대가처럼 떠들어댄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리석은 가치와 사고는 하나의 도그마로 떠오르고, 그렇게 떠오른 오류들은 절대적 진리로 되어 교조주의적인 인간들을 양성시키게 된다.

칸트는 이런 인간의 이성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사고로 통해 인간 선험적인 부분을 대해 관념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했다. 물론 이런 “순수이성비판”이 나온 직후에 칸트는 인류 최고의 도덕윤리교과서(그것은 다소 많이 어렵다고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했다.

실천이성비판을 저술하기 앞서서 먼저 순수이성비판으로 통하여 칸트는 어떤 상황과 관념에 대하여 변증법적인 상황으로 거론했다. 그리고 각각의 사고와 주장을 각각 다른 논리와 사고로 통해 변증법적으로 서술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 함이 옳은가?

그게 바로 실천이성비판이 아닐까 싶다. 나의 짧은 지식과 걸음마 단계의 수준으로 칸트라는 거장을 다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처사다. 하지만 그의 도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분명한 단어의 사용과 의미로 전달하기 보다는 그 단어에 묶인 의미에 대한 접근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항상 생각하고 말을 하며, 말로 통해 타인과 대화로 통해 사회생활도 한다. 또한 몸을 움직이면서 인간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상황에 따라 2가지 상황에 닥칠 것이다. 어느 1가지 사안이 자신에게 이익 즉 사애(私愛)가 될 것인지 혹은 이타(利他)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그런 자기 욕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욕심을 절제하고 타인에 대한 인격적인 사고, 즉 윤리적인 사고를 중시했다. 또한 법과 제도에 따른 강제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완전한 의무보단 자신의 윤리의식으로 통한 비강제적으로 나타나는 불완전한 의무를 중시했다.

불완전한 의무로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것은 정말 존경받아야 행동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 대해 이 책의 역자이신 백종현 교수님이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버스를 타던 젊은 남학생이 약 30분 동안 서있었는데, 우연히 자리가 나서 앉았는데, 어느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버스에 타서 그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례를 보인 것이다.   

사실 그 젊은 사람이 반드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할 절대적인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은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자신의 편의를 조금 손해 봐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윤리적인 행위로 타인에게 편안함을 주었고, 그것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이성적인 판단이었기에 충분히 존경받을 행위다.

실천이성비판은 솔직히 말해 단어와 문구는 어렵지만, 그 단어와 문구 속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 그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다.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의 말처럼 그런 부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똑같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본인의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타인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끔 이 사회를 되돌아본다면 자신의 모든 부족함이 이미 충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안락함을 빼앗는 존재를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고, 또한 이득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여 자신의 음흉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칸트는 비판했다.

실천적인 이성행위는 윤리적 가치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남의 이익에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또한 어느 일정한 사안을 두고 인간들은 대립하는 경우도 생기고, 또한 자신의 논리적인 자세로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이성적으로 해결해야 하나 그 모든 이성 즉 논리에서는 윤리적인 요소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칸트가 이 실천이성에서 보여주는 사고는 즉 인간의 가치관에 대해 그것은 법과 제도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한 타인의 배려다. 인간의 윤리적 가치라는 것은 곧 자신만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칸트가 죽은 뒤에 칸트의 묘비에는 자신이 남긴 말이 돌에 새겨져 인간의 기억이 끝나는 그날까지 기록되었다.

 

그 글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사실 나는 이 문구에서 별이라는 것은 어두운 밤에 밝게 빛나는 존재이다. 그 별이 칸트의 위에 빛나는 것은 어두운 하늘에 작은 별빛들이 곧 어두운 인간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희망 즉 자율적인 의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칸트의 마음 속 깊이 있는 도덕법칙은 이 세상을 좀 더 밝고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칸트의 진정한 소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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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최성일 지음 / 책동무 논장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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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읽는 순간 나는 순간 일본 인문학자인 기다 켄의 “현대사상지도(現代思想地圖)”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권의 사상가 및 사상서도 안내하기 좋은 책자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각 사상가와 더불어 그 사상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리고 그 사상가가 저술한 도서나 혹은 관련 학문분야까지 간단히 소개했다. 그러나 기다 켄의 현대 사상 지도와 다른 점은 현대 사상 지도에서는 어느 현대철학자의 부류를 한곳에 모아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각자의 사상가 특징에 맞게끔 나열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학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눈에 보기 쉬운 것은 현대사상지도이겠지만, 대신 그가 어떤 책을 적고 무슨 사상으로 개략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어느 학파와 사상부류가 나누어져 있고, 누가 있는지 그것에 대한 연계성과 그 시초정도만 나온 것이다.


이에 비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어느 특정시대에 존재했거나 혹은 현재 존재하는 사상가를 선정하여 그의 생애와 저술서적, 그리고 번역된 국내도서까지 소개했다. 그러니깐 우리가 알면 좋은 사상가들의 어떤 책들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상가나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라도 그가 무슨 책을 저술했는지 무슨 내용으로 적었는지 정보가 없다면 사상을 접해보는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서는 그런 사상가에 대한 정보를 듣고 무슨 책이 좋은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아무런 정보가 없이 사상서적에 손을 대려는 사람에겐 더욱 난해할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나의 경우는 이제 사상도서에 대한 입문과정에 들어온 사람이고, 막 이제 근대와 현대사상에 대해 접해본 사람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나에게 상당한 많은 지침이 되어 준다. 또한 이 책에서 사상가들로 등장하는 근현대 철학자나 사상가들 사이에서 주요 철학자로 등장한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이 책에서 19C에서 가장 위대하고 현대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마르크스라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한 사상가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그만큼 사회과학이란 분야와 유물론적인 인간관은 인간의 다양한 사유와 사상을 발달시킨 것이다.


이 책에서 등장한 인물로 내가 알던 사람은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움베르토 에코, 미셀 푸코, 마빈 해리스, 피에르 부르디외, 줄라이 크리스테바, 노암 촘스키, 가라타니 고진,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체 게바라”가 있었다. 그 중에서 다소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인물로 “버트란드 러셀, 빌헬름 라이히, 미하일 바흐친, 게오르크 루카치, 루히드 비트겐슈타이느 한나 아렌트, 칼 포퍼, 르네 지라르”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름을 조금이라도 혹은 실제 읽었던 사람도 있었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어떻게 본다면 이 책을 읽은 사실은 나로 하여금 내가 봐야할 책들이 계속 늘어나고 또 늘어나서 많은 양의 독서량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다. 최근 그런 느낌이다. 어느 한권을 보려니 다른 책의 이해 없이 힘들고, 그 책을 잡으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책이란 인간의 사유를 담은 매체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사상서로 통해 사상가를 만나면 또 다른 사상가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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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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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리기별을 읽는 것은 왠지 모르게 조금 내 가슴에 담고 있는 허무와 알 수 없는 반항의식이 동감하고 있는 듯하다. 유명한 작가로 활동하시는 황석영 선생님이 본인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젊은 시절의 여담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민 개밥바라기는 허무함과 알 수 없는 자신을 혹독하게 하려는 어느 청춘(靑春)의 눈물이 보인다.

그 청춘은 단순히 남들처럼 혹은 시대적인 흐름에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먼 발치에 있기를 원한다.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 소설의 서사적인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보통 소설은 1인칭 내지 3인칭 시점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1인칭이 3인칭이 되고 3인칭이 1인칭이 되기 때문이다.

1인칭의 시작은 베트남전에 떠나가는 준이다. 그는 분명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행동을 했어도 많은 것을 허비한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찾아 계속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모험도 하였다. 그런 준이에게 세상이란 그저 허무한 공간이었다.

개밥바라기별, 어느 유랑노동자인 대위의 말에서 준이는 자신의 운명은 저기 초승달 옆에 떠이는 금성처럼 작고 희미하고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별이 아닌가 싶다. 이 작품을 보면 황석영이란 작가가 어린 시절 그리고 철부지 같은 청춘이 얼마나 덧없이 보냈었고, 그것이 다시 돌이켜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에 큰 상처를 들어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제주도 산자락을 올라가는데, 준이는 수박을 잘못 먹었는지 산자락 정자에서 그저 쉬고 있었다. 그런데 잘생긴 어느 한 여자가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말에 그는 허무한 느낌을 최대한 보인 듯이 친구가 죽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말이다. 준이는 어둡고 무서운 과거 속에 친구를 잃었다. 그것도 눈앞에서 말이다. 

준이가 미친 듯이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이나 첫사랑 미아의 눈으로 통해 그가 사실은 미아를 좋아했으나 미아 그 자신은 준이에게 질렸다는 것을 나는 주목한다. 준이는 미아를 사랑했으나 미아는 준이가 미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준이의 눈에는 항상 어딘가를 향하고, 대화를 이어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찾아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준이는 그렇게 마음속에 큰 공간을 담을 수가 없어 정처 없이 방황한 인물이었다. 그런 상처로 준이는 자퇴를 하게 된다. 도저히 이 사회라는 공간을 그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이다. 사실 준이를 볼 때는 마치 나는 상황주의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심장병에 걸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을 자신의 심장에 권총을 대고 총알을 때려 박은 기 드보르처럼 말이다.

사실 준이가 자퇴할 때 준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준이에게 있어서 정말 구역질나는 존재였다. 준이가 자퇴를 위하여 국어선생인 황새에게 자퇴사유서를 낼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준이는 스펙타클의 사회 즉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적은 사유서는 마치 이 사회와 학교는 권력자들의 존속을 위한 감옥이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가 감옥에 갇힌 피카소에게 감옥에 갇혀 안되었다고 했지만, 피카소는 친구에게 감옥에 갇힌 것도 모르고 감옥에 살아가는 것보다 났다고 말이다. 준이는 그것을 심각하게 느낀 것이었다. 왜 그토록 느끼고 싶었을까? 아니면 어느 사회학자 말을 빌려 감옥의 존재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의 감옥에 갇힌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준이는 분명 그나마 살림이 안정된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과 같이 살아가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준이에게 좋은 직장에 살아가기를 그리고 노동자의 자녀들과 부랑자 같은 아이들과 놀기 바라지 않았다. 그들과 멀리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준이는 오히려 그들의 세계(世界)로 녹아 들어갔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천대받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준이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몰래 타는 무전여행(無錢旅行) 기차 칸에 만난 약초상들, 농가에서 만난 농민, 바다에서 만난 어부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은 친구들 준이에게 주어진 인생의 전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고생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가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맛봐야 했다. 백제의 의자왕이 당나라와 신라에게 패망하여 치욕을 당하는 모습과 한일회담 반대, 독재의 그늘에서 아직까지 일제잔재와 625전쟁의 그늘은 여전히 당시 젊은이들에겐 크나큰 짊이었나 보다.

그런 세계에서 오로지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무엇일까? 나는 선이와 선이의 아버지 이야기가 유독스럽게 기억난다. 선이가 그림쟁이 정수의 만남과 동시에 집에 들어가지 않자 선이의 아버지가 정수를 때리면서 차후 그를 데릴사위처럼 데려가는데, 선이의 아버지가 증이 없으면 안되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증은 건축과에 나와 취득하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다. 자격증은 기술을 배워 사회적인 인정받은 하나의 상징이다. 결국 능력이 중시되는 자본주의 체계 속에 근현대 역사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중시키는 듯, 준이가 야간 공업고등학교 다닐 적에 한강의 기적을 말한 후에 미국의 어느 도시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준이는 모든 것을 속박하고 속박당해야지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싫어 했나보다. 어머니가 그토록 가까이 하지 마라는 사람들과 어울리니 말이다. 준이는 바른 사람이 되기가 싫어했다. 오히려 바르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바르지 않아야 오히려 세상이란 기계부속품에서 벗어날 기회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려운지 혹은 그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지 준이는 수면제를 과다복용으로 5일 만에 눈을 뜬다. 분명 지겹고도 지루한 세상에서 해방되기 위해 죽으려 했는데, 해방되지 못한 채 다시 세상을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방랑인생을 뒤로 한 채 군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떠나야 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 서울에 있는 집에 가서 가족들과 보내고, 친구들과 보내며, 또한 떠나간 미아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들은 없었다. 집에 가니 점포를 정리하여 이사하려 하고,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길을 찾아 현실에 살고 있으며, 미아는 눈내리는 그 공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 허무한 과거를 보내고 준이는 기차를 타고 어둠 속의 터널로 간다. 어둠 속의 터널은 프로이트적인 부분으로 성적인 묘사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알 수 없는 내일이고 그 내일은 오늘이란 혹은 현재란 시간의 코앞이다. 앞이 알 수 없는 지금이야 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늘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 속에 개밥바라기는 알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허무함을 달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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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告白)은 자신의 죄(罪)를 고백하는 것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 고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죄의 시작은 모든 것이 크고 원대한 문제로 시작되지 않는다. 정말 작고 작은 사건(事件)들이 하나의 인화(引火)점이 되어 크게 화산폭발로 이어진다. 아마 이런 문제를 다룬 것이 고백이란 소설일 것이다. 모든 사건의 원흉에서 범죄의 시작점은 13~14세의 어린 청소년이었다. 제2차 성징기이면서도 몸은 어느 정도 커진 상태에서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불안한 시기이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이 있다. 이때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지는 14세 중학교를 다니는 남자아이로 나온다. 14세라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서 그는 세상과 사회의 부조리와 소외 그리고 왜곡 등에 의해 갈등을 앓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준 신지의 행위나 심리들은 매우 부적당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 뒤에 보여진 이면에는 이 사회와 부모라는 기성세대의 이기심이 가득하게 숨어 있었다. 결국 아이는 아이 그 자체로 망가져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최고의 범죄자인 슈야와 나오키는 그런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청소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 둘은 비교하여 보자면 슈야는 부모 특히 어머니의 비인간적인 요소로 인했다면 나오키는 지나친 어머니의 간섭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난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의 최고의 피해자면서도 최고의 범죄자가 된 유코에서는 어머니의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의 격렬한 분노로서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고 틀어졌을까? 슈야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머니로부터 시작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그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평범하고 인자한 슈야의 아버지와 같이 잘 지낼 수 있음에도 그녀는 욕망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 

어머니의 욕망에 대해 슈야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역전할 기회를 노렸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서 어머니가 다시 자기를 봐주길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 과학경연대회에서 수상할 때 세구치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세구치 교수는 어머니와 결혼하였고, 어머니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안주하여 자신의 존재를 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슈야는 모든 윤리적 가치관을 버리고 대규모 살인을 기획한다. 1차 계획은 유코의 어린 딸 미나미를 죽인 것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학교 모든 사람을 죽이려 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그 이전에 과학경연대회에서 자신을 돋보이려 한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의 칼날을 올렸다. 분노의 칼날을 향해할 곳은 슈야의 어머니고, 그리고 분노의 칼날이 꽂혀야 할 곳은 슈야 마음에 있는 자신의 비윤리성이어야 했다. 슈야는 대단히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나서 논리적 물리적인 이성은 뛰어났으나 정작 중요한 윤리적 이성은 형편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월하다고 여겼다. 결론은 슈야는 그런 보통 인간과 같은 행위를 저질렀다. 그 행위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상관없는 제3자인 것이다. 1차 희생자는 미나미, 2차 희생자는 나오키, 3차 희생자는 미즈키, 4차 희생자는 친어머니였다. 그리고 최종적인 희생자는 자신의 분노로 인해 자신을 파탄하게 만든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분노의 복수에서 유코의 반전(反戰)은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유코와 슈야의 관계도 조금 흥미로웠다. 사실 슈야가 미나미를 노린 이유는 약한 대상인 어린아이란 사실도 있으나 정말 중요한 것은 미나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이었다. 유코는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아가는 싱글맘 선생이었으나, 언제나 미나미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해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대신 차가운 공학수식만 들은 슈야에겐 비교하자면 충분히 질투감에 사로잡히게 할 일이었다. 이에 반해 유코도 슈아의 어머니로서 대해주었다.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이의 불만을 뒤에서 보고 있는 어머니로서 말이다.

열심히 슈야의 홈페이지를 본 유코는 자신의 복수가 어떻게 되고 가는지 철저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슈야가 어머니가 보기를 원한 것을 다른 어머니가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코는 매우 힘든 인생을 살아오며 매우 헌신적으로 살아온 사쿠라노미야 마사요시 선생의 연인이다. 마사요시는 AIDS에 걸려 투병하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갔으나 그 누구에게 원망을 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딸을 죽인 2학생까지 용서하려고 한다. 그는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마사요시는 자신의 딸을 죽인 학생에게 AIDS 감염시키려한 유코의 폭주도 미리 사전에 방해하였다.

결국 자신이 AIDS에 걸리지 않음을 알던 슈야는 당당히 학교에 나와 자신이 어긋난 정의를 실현할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AIDS에 걸린 것으로 착각한 나오키는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버린다. 나오키가 인생의 낙오자가 된 것을 보면 사뭇 우리 사회의 일편을 알 수 있다. 내가 이때까지 적은 2사람의 범죄자에서 슈야는 어머니의 비정함에 범죄가 싹을 틔웠다면 나오키는 어머니의 간섭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오키는 평범한 집안이다. 어딜 가더라도 평범하고 나오키 역시 평범하다. 평범하기에 그의 광기는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한 남자아이가 어딜 가도 우수한 인재로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것이 아닐까? 나오키의 콤플렉스를 보면 그의 어머니의 집착이 상당한 영향이 컸었다. 우리 아이는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남의 아이가 그래서 잘못 그런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착해요. 왜 우리 아이어야 합니까? 라는 그런 부분이 나온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나름 정의가 있다 라면서 남의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 설정에서 일가족 5명을 살해한 어느 여중생의 엽기행각에서 그 여중생은 사실 극히 평범하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소녀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이다. 평소에 그런 여자아이나 혹은 나오키가 살인행위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인가 혹은 그 이상의 문제인가? 슈야의 경우는 분명히 특별 케이스다. 그런 특별 케이스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슈야보다는 신문기사에 난 여중생과 나오키가 더욱 무서운 현실처럼 다가왔다.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른 자체가 더욱 겁나는 것이다. 그런 점을 더욱 부각시킨 것은 베르테르 선생이 학교로 부임오면서이다. 미즈키가 반장으로 있으면서 베리테르와 함께 나오키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미즈키는 베리테르의 가식과 억지스러움에 지겨움을 느꼈다. 자신이 가능하면 베르테르를 독살하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미즈키라도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유코가 학교를 그만둔 뒤에 슈야의 학급 내에서 일련의 마녀로서 이지메를 당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일하게 이지메를 가하지 않은 것은 미즈키였다. 미즈키가 이지메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슈야가 옳기보다는 슈야로 통해 자신들이 정의(正義)롭다고 생각하는 마녀(魔女) 같은 마녀사냥꾼이 되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추후 베르테르에게 이지메 사실이 들통이 나면서 그 사실을 고하지 않은 미즈키가 되려 마녀로 몰린다. 이때 그 마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즈키는 우유팩을 슈야에게 던지는데, 던지는 부위가 등이 아닌 얼굴이었고 순간 슈야의 얼굴에 우유팩이 닿일 때 미즈키는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군중심리이다. 군중심리로 통해 미즈키는 쾌감(快感)과 우월감(優越感)을 느꼈으나 이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유일하게 학급 내에서 제대로 판단하였던 사람은 미즈키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타인에 대하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추후에 슈야의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슈야의 거대한 냉장고에 보관된 고기가 되어 버린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여 시체마저 유린(蹂躪)당한 것이다.

모든 편을 읽으면서 읽을수록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이냐 질문에서 점점 난해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옳은 행위를 한 것이 아니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나쁜 사람이 만들어지도록 자꾸 유도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든 나쁜 근본을 다시 찾아 되돌릴 방법은 없으나 그 나쁜 근본은 모두 없앨 수는 있었다. 나오키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슈야의 어머니는 슈야의 폭탄으로 죽었다. 결국 모든 사건의 원인자들은 사건 실행자에 의해 모두 죽게 되었다. 나오키는 어머니 살인으로 경찰에 넘어가게 되면서 그의 죄는 유아살인죄로 인한 정신강박 증세로 이루어진 돌발적인 행위로 죄가 성립되고, 슈야는 동급생 미즈키의 살인과 폭탄살해로 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2사람의 살인죄를 일으키게 하고,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복수로 통해 이루어진 조작된 살인에서 가장 큰 피해자인 유코는 복수의 여신으로 등극된다. 그녀의 최고의 복수는 자신의 딸을 죽게 만든 2사람에게 각자의 어머니를 죽이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모든 원흉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2사람에게 시작된 것으로 만들어 모든 알리바이 만든 후에 자신은 어둠의 역사로 사라져 버렸다. 최후의 장에서 슈야에게 걸린 발신표시제한번호에서 유코는 자신이 유도살인한 것에 대해 슈야에게 폭록한다. 하지만 슈야는 그것을 경찰에게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폭탄은 자기가 만들었고, 폭탄 역시 자기 학교는 아니나 어머니가 있는 대학교라는 점, 또한 냉장고에는 동급생 미즈키의 시체마저 있었다. 이 모든 비밀은 유코가 모두 알고 있었고 모두 만들도록 유도했다. 과연 인간이 비정상적으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의 문제일까? 어긋난 분노의 칼날은 누구에게 향하는가? 미친 분노의 칼날을 다시 회수할 수 없을까? 책에서 어린 미나미가 죽은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단지 자기보다 약하고 거기에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죽인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약자이기 때문이라는 그물로 씌웠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역전되면 어떨까? 최근에 본 존 롤즈의 “정의론”이 생각난다. 이것을 보는 내내 응보적 정의가 떠오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응보적 정의는 개인에서 한정짓는 것에 반해 이 작품에서의 응보는 점차 확대되어 간다. 사회가 개인을 망쳐가는 듯, 그 개인의 사건이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면 개인과 사회 어디부터 틀려먹었을까? 그것은 그런 개인과 사회를 만들어낸 아이의 거울인 어른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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