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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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악의(惡意)라는 소설을 보면서 생각이 나는 것은 악의가 있다면 분명히 악의에 반대되는 선의(善意)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악의를 품는다는 것은 분명 그 악의의 감정을 품는 대상이 처음부터 악의를 단순히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아주 나쁜 마음으로 그것도 비겁하고 치사한 마음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때 나는 순간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산 정약용은 원래 정조 시절의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고, 사상가였으며, 철학가였으며, 또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한국의 고전철학사에서 그 종점은 다산 정약용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산 정약용은 정치적인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남인(南人)이라는 이유로 벽파(僻派)인 노론(老論)에게 심한 정치적 보복을 당한다.


그런 보복을 당하기 전에 다산의 옛날 친구가 다산을 모함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들통 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예전 친구가 배신했다고 해도 그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위해서 감옥에서 방면시키도록 사방으로 알아보았다. 또한 그 친구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의 가족생계(家族生計)를 위해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그런 친구는 어디 있으랴? 아마 현대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런 친구가 단 1명이라도 있다면 분명 내 인생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친구는 억만금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라는 차가운 생각들은 결국 친구라는 존재 역시 이용가치로 전략해 버렸다.


이런 슬픈 현대사회의 외로운 인간 속에서 나는 이 악의라는 소설의 비극을 본 것이다. 일단 다산 정약용은 그 친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다산을 배신했다. 그는 1800년 학자군주 정조가 붕어하게 됨에 다산을 마지막까지 내몰린 것을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짓된 음모까지 꾸몄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과 황서영백서로 인해 정치적·사회적인 권리를 모두 빼앗겨 버렸다.


물론 다산의 친구가 모든 것을 공모하고 주도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자기에게 호의를 베푼 것도 모자라 용서해준 친구에게 악랄한 행동을 한 점에서 이런 슬픈 우정의 비극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믿지 못하게 하는 최악의 불신을 낳게 한다. 그런 불운의 이름을 가진 다산처럼 이 악의라는 소설에서 불운을 가진 주인공 히다카는 그야말로 선의로 베푼 자기의 마음에 오히려 악의라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고, 매우 치밀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던 사람이다. 그 이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만 본 것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서사라는 것은 결국 인간과 인간이 어느 공간적, 시간적, 역사적인 상황에 아울러 진행되는 이야기다. 그런 공간적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에게 던져지는 운명의 굴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서사구조를 가진 체계라면 당연히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해결과 관련하여 범인의 공표는 너무 이르게 나오고, 나 역시 범인이 노노구치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 이유는 노노구치가 히다카의 살인현장을 보고 난 뒤에 단순히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모니터에 비춰진 소설의 문구였다. 히다카의 소설에서 노노구치는 그의 작업속도와 분량을 잘 알았다는 점과 그리고 죽기 전의 히다카의 원고는 평소 이상으로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 원고를 손질한 사람이란 것이다. 사실 판단의 기초는 조금 핀트가 벗어나 있었다. 왜냐하면 추잡한 인간을 소재로 한 “수렵 금지구역”에서 그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그녀의 동생 미야코가 오고 난 후에 노노무라는 히다카의 집에서 나간다. 그리고 나서 그 날 저녁 히다카는 죽음을 맞이한다. 히다카의 갈등이 되는 정점은 바로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이며, 히다카 옆집에 사는 고양이의 죽음과 비교하여 히다카의 죽음에 대한 인과적인 부분은 후지오 마사야라는 남자에 대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히다카 죽기 전의 작품인 얼음의 문이다. 그 작품에 대해 히다카의 팬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겠지만, 히다카의 원고작업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히다카의 편집자, 아내, 그리고 친구인 노노구치이다. 노노구치가 어떻게 그토록 원고에 대하여 잘 분석하고 있었으며, 단지 원고 페이지만으로 그가 이상한 상태라는 점을 알았는가이다.


그런 내 생각에 달리 문제의 해답은 다른 방향에서 나왔다. 그것은 형사 가가의 등장에서 부터이다. 나는 사실 게이고 히가시노라는 작가를 잘 모르고, 거기에서도 가가 형상 시리즈는 더욱 더 모른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모든 서사의 흐름은 이 가가 형사의 등장에서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가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모든 사건의 원흉은 노노구치라는 점까지 밝혔다.


물론 서사구조에서 범인의 지목은 초반부가 중반부에 가기에 너무 빨리 다가왔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은 범죄자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노노구치는 겉으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인척하나 사실 그가 가장 악랄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서사구조에서 보이는 플롯과 반전, 그리고 집요한 추적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이 작품을 적은 작가가 그리고 그 작가의 애정 어린 캐릭터인 가가 형사로 통해 보는 세상의 담론이라는 점이다. 사실 피해자와 가해자인 히다카와 노노구치의 경우를 본다면 어린 시절의 조금 알고 지낸 학교친구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질투라는 이름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나, 그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 작품의 내면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사실은 왜 노노구치가 그런 인간이 되었는가이다. 노노구치는 공부도 우수하고 국문학을 매우 잘하던 수재였다. 그리고 히다카는 노노구치만큼은 아니나 나름 우수한 인재였다. 그런 2사람 사이가 왜 이리 되었나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의 이름을 떠오른 것이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매우 위대하고 아름다우면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책무와 의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많은 인간들은 그를 좋아하겠으나 역으로 그것을 시샘하고 혹은 배척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리면서 당대 명사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당대 명사들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자신의 어리석음 수치를 느껴야 했다.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고귀하게 죽음의 독백을 삼켰다. 과연 소크라테스는 남들에게 악을 끼칠 만큼 강한 힘을 가졌고, 사악한 행동을 공모할만큼 악랄하고 지략가였는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했으나 그만큼 증오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바로 히다카의 과거이다.


그는 학교에 가장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에 저항한 사람이다. 장난을 넘어 죽음의 위기에 턱에서 그는 학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수렵 금지구역의 모티브가 된 남자가 어느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체의 사진까지 찍었다. 그 후 그런 인간이었는지 후지오 마사야는 어느 창부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에 비명사한다. 후지오 마사야는 히다카가 중학교 다닐 무렵 가장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다.


그런 후지오가 성폭행 문제로 전학 가버리자 히다카는 편안한 중학교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다카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 분명 노노구치도 후지오의 전학으로 약골인 자신에게 유리한 학창시절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노구치는 중학교의 히다카와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노구치가 히다카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후지오의 편에 있었다는 점이다. 노노구치는 히다카가 괴롭힘을 당해도 그저 방관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외면한다.


또한 정말 문제가 되었던 여학생의 성폭행 사건에서 나체의 사진에 찍힌 여학생 뒤에 어느 남자가 찍혔는데, 그것은 중학교 시절의 노노구치였다. 그는 매우 비열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히다카가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히다카는 노노구치를 위해 아동문학 작가에 입문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자기에게 악랄한 짓을 한 후지오 옆에서 자신을 무시하려던 그에서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느낌이다. 어느 사회적인 약자가 자신의 약함을 강자에게 내맡긴 것도 모자라서 그런 부정의한 인간으로 통해 자신에게 없는 강함을 내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노노구치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히다카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2사람은 어울렸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속에는 히다카에 대한 열등의식(劣等意識)에 사로 잡혔다는 것이다.


열등의식에 갇혀버린 인간은 자신보다 더 나약한 인간을 찾아 우월감(優越感)으로 대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기 보다는 힘을 가진 인간에게 모인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정의가 된다. 타자를 생각하는 윤리(倫理)가 없는 정의(正義)는 곧 폭력(暴力)이다. 폭력이 정당화되고 미화되면 이른바 파시즘으로 치닫는다. 그런 문제에 대해 작가는 가가 형사로 통해 추적하고 혹은 가가 형사가 밝히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교사생활까지 언급한 것이다.


나는 이래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보다는 자신들이 정의롭게 되어줄 희생양을 찾는다고 말이다. 그런 희생자로 히다카가 선택되고, 그런 정의의 사도로는 노노구치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의 핵심이 해체되자 그런 행동들은 멈추었다. 인간의 이성은 과연 진리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향하는가?


악의라는 책에서 그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비열한 면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보여주는 작품이다. 거기의 악의를 저지른 노노구치는 단지 그런 인간들 중에서 가장 나약하면서도 히다카의 이름을 부러워하는 인간이다. 왜 그는 그토록 히다카를 향해 집요한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애증관계이다. 그는 히다카처럼 되고 싶으나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옆에 있으면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실망만 한다.


그것은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처럼 살리에르는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모차르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영화에서 음모를 꾸며 모차르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 악의에서의 노노구치는 살리에르처럼 악의를 가진 것은 분명하나 재능보다는 자신에 대한 노력은 없었다. 살리에르는 그가 만들고 보여주어도 모차르트에게 가려진 것이지 노노구치처럼 아예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대한 문학적 능력보다는 타인의 문학의 능력까지 훔쳐서 마치 떳떳하게 병으로 죽어가는 고스트라이터로서 마치 명예롭게 인생을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그런 거짓된 명예의 성취조차 가가 형사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작품에서 밝혀지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무엇이 인간이 그토록 극으로 가게 하면서도 결국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도 왜 이런 일은 생기는가이다.


혹시나 누가 알고 있을까나? 허구로 조작된 고스트라이터가 아닌 많은 어둠의 갈린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게 한 빛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고스트라이터도 아니면서도 고스트라이터인 것처럼 행동하는 노노구치의 비열함이 숨어있으나 정말 세상에는 그런 빛을 보지 못하는 많은 고스트라이터가 존재하지 말란 법은 없고, 이들 역시 노노구치와 다른 진정한 악의를 표출하지 않을까라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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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니컬러스 펀 지음, 최훈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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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 그건 역시 정말 철학적인 질문만 늘어놓은 아주 무거운 책이다. 겉으로 나는 이 책을 보았을 때 A5 사이즈에 300페이지 분량이라서 과거 그리스철학자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중세로 가면서 스피노자나 데카르트, 그리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의 철학자들이 담론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철학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나 그 담론범위가 내가 작게만 보고 상식수준보다 이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철학 그 근본자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니 진짜 철학을 한다면 혹은 철학에 대해 생각한다면 반드시 나오고 사유해볼 내용을 아주 어렵게 제시했다. 물론 도서를 만든 저자의 입장에서 어렵게 만들 생각보다는 철학이란 것이 그래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관철시킴으로 오히려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간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런 철학적인 근본을 알아보기 위해 3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나는 누구인가?”, 제2부 “나는 무엇을 아는가?”, 제3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솔직히 이제 철학이란 학문에 접한 나로서는 마치 이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도서를 과거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사회의 노암 촘스키까지 이어진 느낌이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마지막 역자인 최훈 선생님의 후기를 보면 총 3가지 대분류에 따라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형이상학은 처음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당시 물리, 윤리, 논리이다. 처음에 고대 철학자들은 이런 부분에서 다방면적으로 연구했다. 가령 철학자들 즉 형이상학자들은 자연과학을 연구하고, 수학을 연구하고, 의학도 연구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매우 다방면적인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도 그것은 인간의 사유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인간이 철학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인간을 대해야 하고,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 물리적인 자연현상을 알아야 했다. 단지 그 시대적인 특성과 인간이 가진 기술과학의 진보차이로 인해 그런 형이상학 범주가 다르게 여긴 것이다.


이제 현대로 오면서 논리분야는 수학이라는 학문으로 인해 그리고 물리는 자연과학이란 학문으로 발달되면서 직접적인 철학이기 보다는 철학의 그 자체보다는 철학의 담론에서 넓혀주고 새롭게 밝혀주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분류되고 혹은 서로의 담론을 넓혀주는데도 철학은 여전히 문제가 풀리기 보다는 문제가 다르게 제기된다.


가령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기초과학을 배운다. 과학을 배우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만든 부분보다는 오히려 근대와 현대에서 창시된 지식을 많이 배운다. 오히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는 말처럼 지구가 돈다는 것을 거부한 중세유럽 사회에서 당시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현재의 공학자들은 부정할 것이다.


이에 반해 철학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현대나 근대부터 시작해도 중세로 넘어 고대로 넘어간다. 아니 모든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물줄기에서 시작한다. “현실 속에서 이념”이라는 것을 주장한 마르크스 역시 이에 반박되는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념 속에서 현실”이다. 어느 반대되고 또는 변증법적으로 의견이 달라도 그것 역시 반대되어야 하는 의견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다.


철학에서 이런 서로 다른 의견 그리고 당시 사회와 문화가 지금도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에도 계속 다루고 이야기되어 철학은 뿌리를 뽑는다는 것보다는 뿌리 위의 가지를 계속 넓혀가는 것이다. 단지 맺히는 열매가 겉과 속의 맛이 다를 뿐이다. 본질은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누구의 입에서 떠도는 하나의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막상 진지하게 철학의 의미도 철학 그 자체의 의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살짝 돌린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일반적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철학이라는 것이다. 진짜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보다는 현재 살아있는 아주 덕망 높고, 지혜로우며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입에서 철학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 인간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철학자라 해도 서로간의 가치관과 의견은 다르다. 서로 다른 의견을 통해 여러 가지 관점으로 인간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정말 답을 충실하게 제공하는 친절한 서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 스스로 친절하지 못한 철학의 공간에서 고민해야 한다.


사실 철학은 고민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처럼 정확한 지식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정확하지 않은 모호한 이야기로 스스로 답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느 문제에 대해 답을 내어주는 학문이 아니라 문제의 답을 찾아 가는 학문이다. 그러니깐 답을 내려주는 공학용 계산기가 아니라 그 문제의 답인 원인인 발달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책은 1번 보고 2번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그 이상의 책읽기를 시도해도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철학이나 사상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적어도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을 지닌다. 인간이 살아가고 다른 인간과 공유점이 되어 생활양식으로 나타나는 그 문화라는 공간은 매우 크고 작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전혀 상반되고 대립되는 형태까지 보인다.


그런 문화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모두 다르게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간다. 그래서 어느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인간을 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철학은 그 다양함 속에서도 진리라는 단어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그 진리로 100% 맞다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또한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런 문제로 철학은 시작부터 시작하여 인류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굴레의 속박이다. 하지만 그 굴레의 숙박이 없다면 오히려 인간이 더욱 큰 고뇌에 부딪히거나 또는 무절제하고 아수라와 같은 세계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철학이란 굴레의 속박이 인간이 가진 오랜 고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듣는 철학자 답이 모두 맞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맞다 틀렸다고 하기에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혹은 그런 선택에서 그것 자체가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철학은 답이 없는 학문이다. 답이 있다면 이미 인간은 철학적 사유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어야 하며,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소통해야 한다. 또한 인간은 인간의 소통에서 인간 아닌 존재에서도 사유를 요구하게 된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사유적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답을 준다고 하지 않으나 어떤 사유가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책을 읽고 계속 고민하여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되지 않을까 한다. 대신 조심할 점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적인 이원화에 빠지면 안되는다는 것이다. 너무 이원화적인 사고에 빠지면 자기모순과 편견에 철학적인 인간이기 보다는 철학만 말하는 인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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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위화 지음, 조성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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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전율편
전율 편은 보는 나의 입장에선 뭐라고 할까나? 그냥 이제 나이가 43세에 들어선 남자와 그 남자보다 7살 어린 여자가 오랜만에 만나서 둘이 회상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모든 이야기의 결말을 보인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받고 모든 여자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시인인 자우린은 이제 과거의 영광은 커녕 현재의 암울한 삶에 살아간다. 

첫 장부터 책을 잡지 않았다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비롯한 철학도서와 각종 문학도서를 집어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연히 잡은 책에 종이쪽지가 나온다. 아주 오래 전에 보낸 쪽지인데, 거긴 마란이란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그 여자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다시 편지고 오고 둘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이때 그의 갇혀있던 자신의 삶에서 밖으로 나간다. 귤이 먹고 싶은데 귤을 집어들 때 그는 귤이 얼마인지 몰랐다. 게다가 귤장수는 그에게 귤값을 내놓기 보다는 귤 하나를 주고 나가라고 한다. 그의 입장은 화려한 과거와 달리 참혹한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겉은 비루하고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가 그런 몰골로 마란과 만나 과거를 회상한다. 둘은 주로 귤장수에게 귤을 얻어먹은 비참한 그는 마란과의 이야기에 꿈 같은 청춘을 맛본다. 잘생긴 외모와 화려한 말투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많은 여자들, 자우린은 과거에 많은 여자와 연애를 즐겼다. 자기 침대에서 혹은 상대의 침대나 다른 장소들 그리고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마란과의 만남도 있었지만, 당시 마란에게 자우린은 눈길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한 화려함은 없다. 자우린은 어느 순간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남자였고, 그래도 자우린은 여전히 여자에게 손을 대려 했다. 그러는 동안 그렇게 작업을 계속 거는 와중에 그 자리에 마란은 있었다. 하지만 자우린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우린의 사랑을 원했으나 자우린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예전의 아름답던 청춘을 대신해 중년의 여자로서 그를 접한 것이다.

자우린은 솔직히 말해 타고난 작업남이었다. 흔히 여자에게 음흉한 작업을 거는 남자들은 대놓고 원하기 보다는 말을 돌려 말한다. 그렇게 언제나 여자에게 “너만은 특별해, 너니깐 이렇게 마음이 아픈거야” 라는 미사어구들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시인의 입에서 나온 시의 언어는 청자로서 활동하는 여자에게 당연히 개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모든 여자들이 그의 포로로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로로 되는 것은 그의 모습이 화려한 공작새와 같을 때다. 나이가 40대인 자우린 그것도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에겐 더 이상의 매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0대의 마란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여인답게 몸이 둔해짐을 나타남은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가길 바란 것이다. 그런 2사람의 과거사냥 다운 모습으로 침대 위에 놓인 외투에서 교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자우린의 외투 한쪽 팔이 마란의 어깨를 은근스레 건들고 있었다. 자우린이 직접적으로 야한 작업을 걸지 않았으나 그것이 하나의 제스쳐가 된 것이다. 그리고 2사람은 아주 열정적인 육체적인 관계에서 서로간의 과거를 되돌아가려 한다. 이때 그녀가 자우린에게 원한 것은 자우린의 얼굴표정이었다. 과연 자우린은 어떤 얼굴을 짓고 있는가?

자우린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쾌락이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자우린이 마란이란 여자에게 과연 전율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 잊혀진 얼굴로 기억된 자신에게 육체적인 관계로 통해 전율을 느껴 잃어버린 지난 시절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자우린은 모든 과거로부터 멀어진 자신에게 과거로 가는 길을 가고 있었다. 2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탐닉하면 과거의 욕망을 채워간 것이다.


2편 우연한 사건  

이 사건은 어느 카페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토대로 장퍄오와 천허의 편지를 왕래한 이야기다. 살인사건의 발단은 어떤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남자가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어떤 불안한 시선을 가진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의 가슴에 칼을 꼽고 나서 경찰을 부른 것이다. 살인의 동기는 알 수 없이 말이다. 

그날 현장에 있던 장퍄오와 천허는 경찰의 심문에 의해 신분증을 맡겼는데, 그것이 서로 엇갈리게 가버렸다. 그래서 편지를 주고 받는데, 그 내용은 살인사건에 대한 내용이었다. 천허는 그 사건의 희생자가 여자에게 바람을 피게 만들어 죄는 받은 것이고, 장퍄오는 그것은 처음부터 여자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일 수 있고, 또한 천허의 일방적인 추론을 일일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답변한다.

그러는 와중에 장퍄오는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여자를 품에 안고 성적희롱을 즐겼다. 또한 그런 여자 이외에도 다른 여자도 말이다. 장퍄오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었다. 하지만 천허처럼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성적인 사고로 통해 천허하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장퍄오가 만난 여자이야기와 그 편지 내용과 일치해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살인과정과 동기 그리고 차후 처리까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 편지를 보낸 천허가 장퍄오가 만나는 여자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2사람은 만났고, 둘이 처음 살인을 목격한 카페에서 그 때 듣던 “당신은 왜 나를 쫓지 않은가”란 노래가 나오자 장퍄오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버린다. 

솔직히 이 작품은 어느 결백증적인 남편이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고 그 의심이 되던 남자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서 그런 부정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자신 역시 그런 살인범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결국 천허는 자신의 살인동기와 살인목적을 그렇게 찾은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앞의 살인은 치밀하지 않은 계획이라면 후자는 매우 치밀한 계획이었다. 자신이 죽일 남자에게 그 살인의 과정을 토론한 장퍄오는 참으로 허무하게 칼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대해 크게 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이 너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내가 판단하던 결착으로 가게 되어 그런 여흥이 많지 않은 작품이었다.


3편 여자의 승리

이 작품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질투로 변하고 어떻게 승화되는가이다. 린홍이란 여자는 평범한 주부로 남편인 리한린과 결혼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어느날 린홍은 리한린의 서랍에서 칭칭이라 하는 여자사진과 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결혼생활은 위기에 닥친다. 리한린의 여자에게 린홍은 순간 열등감에 사로 잡힌다.

그녀의 강박관념은 자신과 리한린의 주변 사람에게 전화하여 이것을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 중에 아주 예전에 린홍에게 관심있던 남자에게 전화하자 그는 린홍에게 최대한 남편을 절벽에 몰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린홍은 그렇게 따르고 처음에 자신의 외도를 누설당한 것을 생각지 못한 남편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칭칭의 사진을 보자 남편은 당황하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매우 조용한 집안살이를 시작했다. 같이 자던 침대에서 나가고, 쇼파에서 눈치보면서 책보고 게다가 TV조차 못본다. 그러나 린홍은 그런 자중하는 태도의 리한린을 꽤씸하게 여긴다. 린홍은 남편이 자기에게 아주 열렬히 사과하고 잘못을 토하고 아니라면 격정적으로 대하길 바랬다. 하지만 오히려 리한린은 보통 남자처럼 아내를 배려하는 척으로 잘못을 인정하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린홍에게 감정의 폭발로 이어진다. 이 장면을 보니 나도 과거의 내가 생각난다. 나 역시 그렇게 크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나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상대편에게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오히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2사람은 이혼을 하러 관공서로 간다. 이때 마지막으로 카페에서 서로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려 한다. 과거 2사람은 결혼하기 전에 이렇게 커피와 사이다를 마시면서 행복의 미래를 기대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얼굴조차 마주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린홍은 사이다를 마시다 다른 자리에 어디서 많이 본 여자 얼굴을 마주친다.

그 여자는 린홍의 라이벌인 칭칭이었다. 칭칭이 있자 남편도 놀랐으나 아내의 행동은 더욱 놀랐다. 린홍은 남편에게 대낮의 카페에서 자신에게 안아달라고 한다. 남편은 그렇게 하고 린홍은 남편을 더욱 강하게 안고 남편을 몸을 감싸고, 그녀의 혀를 남편의 입안으로 다가가서 남자의 미각을 황홀경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칭칭이를 노려본다. 칭칭이는 보다 못해 나가버리고, 린홍은 이혼대신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칭칭이를 두고 남편에게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만약 이혼한다면 칭칭이에게 가라고 말이다. 

남편은 자신은 칭칭이에게 가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다른 사람이 눈치에도 아내의 유혹을 따랐다. 결국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칭칭이에게서 모두 가져간 셈이다. 아내의 사랑이 질투로 변하고 질투는 투쟁으로 변하여 결국 사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질투는 여자의 힘이란 것일까?


4편 무더운 여름

무더운 여름은 여자의 가식을 두고 서로 허풍을 떤다. 결국 2여자는 친구사이이나 알고 보면 경쟁자였다. 그녀들은 아주 착하고 성실한 리치강이란 남자를 두고 서로간의 허풍을 다툰다. 서로 리치강이 자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기에게 호감을 보인다고, 또한 리치강이 문화국에서 일하면서 인기가수 홍화의 공연에 관계되자 2여자는 리치강에게 서로 티켓을 달라고 한다.

리치강이란 남자는 아주 착하고 좋은 남자이지만, 나쁜 여자에게는 그저 단순하고 이기적인 희생양이 되는 남자였다. 50위안짜리 홍화공연 티켓을 2여자에게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들과 헤어진다.

2여자는 서로 리치강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고, 또한 리치강이 홍화와의 스캔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와중에 홍화의 애인으로 여기던 리치강은 어느 순간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어느날 2여자 중의 리핑은 그 2여자 중의 원홍과 이야기하다가 리핑이 남자친구가 생기고, 그와 데이트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다.

리핑은 그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하나 당장은 아니나 나중에 보여준다고 한다. 결국 그 남자는 리치강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기 전에 리핑은 거짓으로 인기가수 홍화가 리치강과 스캔들이 있고, 마치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여기에 원홍 역시 되받아치기 했다. 하지만 결국 팔짱을 끼던 리핑과 리치강에서 원홍의 거짓말은 탄로났다. 서로 리치강에게 관심있었지만 마치 서로 없는 것처럼 말하다가 결국 리핑이 선수친 것이다. 내숭적인 2여자 사이에서 리치강은 그저 내숭싸움의 승자에게 자신의 한쪽 팔을 내어주게 된 것이다.

처음에 2여자가 말하듯 남자를 사귀면 그 남자가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데이트 비용도 내어주는 어장 같은 남자를 바랐다. 그런 점에서 리핑은 승리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 본다면 리치강은 승리자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에서 여자의 승리는 유혹의 여신에게 돌아간 것인가? 그런 것을 증명하듯 원홍은 흥하면서 리핑과 리치강이 가는 길 반대로 가고 있다.


5편 다리에서

자기보다 1살 어린 25살 트럭운전사는 자신의 아내가 임신여부를 끝없이 물어본다. 그는 아내가 임신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아이를 가지면 당장에 집안 가정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다. 그래서 매일처럼 아내의 임신여부를 묻는다. 여성은 제2차 성징기가 오면 월경을 시작한다.

그래서 임신하게 된다면 월경이 중단되니 월경이 된다면 임신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처음에 아들을 가지고 싶다는 트럭운전수의 소망과 달리 이제는 왠 불임사실을 기뻐한다는 말인가? 남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아이를 가지면 돈을 벌지 못하거나 혹은 보모를 사용해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던지 혹은 아이를 일찍 가지면 50대에 할아버지 할머니로 돼서 그게 좋냐고 말이다.

그런 우려를 역시 잘 해결되었는지 아내는 결국 월경을 했고, 그 월경은 남편에게 반가운 친구로 다가왔다. 이에 아내는 힘든 과정을 극복한 후에 자신에게 그저 편안한 일상과 작은 남편의 상이 있기를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는 나온 차가운 말은 이혼이었다. 남편은 이혼을 하기 위해서 아이가 없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 다리에서 사라지는 남편을 보며 아내를 절망해야 했다. 결국 여자는 무엇을 위해 결혼하였다는 말인가?


6편 그들의 아들

이 작품은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노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노부부는 힘들게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갈 때는 만원버스를 타고 가며, 오늘 아들이 오기로 한 날에 일찍 가기로 했으나 버스 안의 사람들의 밀침에 혹은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방해로 일찍 집에 못가게 된다.

게다가 버스에서 떨어져 둘 다 심한 멍과 상처를 입는다. 그래 힘들게 일하면서 한 달 월급이 600위안도 되지 않으나 이에 반해 아들에게 한 달 300위안을 보낸다. 이런 부모의 고생에 아랑 곳 없이 아들은 그저 TV 보면서 음악을 듣는다. 게다가 오늘 집에 올 때 아들은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온다. 버스는 사람 많고 비위생적이라 병에 걸릴 것 같고 토할 것 같다고 말이다.

처음에 아들의 행동에 분개한 부모는 아들의 말에 이제는 오히려 동조한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자신들은 버스를 타는데, 아들에겐 버스를 타지 말라니. 이게 어찌 보면 중국의 현대 젊은 사람들의 인식이다. 부모의 고생은 관심 없이 자신의 이익이나 관심을 최고로 하고 또래 아이들의 눈치만 보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뒤쳐져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심한 태도에 부모는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동조한다. 힘들게 일하면서 그래 키워서 무슨 소용인가? 이제 어머니는 4년 이후에는 돈을 벌 수 없다고 한다. 대신 아들은 퇴직금을 받으면 된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고기 먹으라고 하는 어느 어리석은 임금처럼 말한다. 그건 결국 현대사회의 젊은이들의 허영심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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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입문 - 인간 정신에 대한 혁명적 통찰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5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최석진 편역 / 돋을새김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 생체적인 조건을 가진 이상 동물이라는 점을 제외할 수 없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 특히 인간의 가진 사고능력을 중시하는 이성에서 우리 문명의 역사에서는 3가지 위기를 맞이한다. 1번째는 지구가 본래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으나, 사실 중세 유럽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곧 신을 모방한 존재이고, 신성함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동설(地動說)이 바른 해답임에도 불구하고 천동설(天動說)에 대한 교회권의 입김에서 천동설의 거부는 결국 당시 유럽사회와 문화권에서는 육체 내지 사회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결국 지구(地球)가 둥글고 태양(太陽)을 돈다는 과학적인 해석으로 통해 인간은 최악의 오류에 부딪힌다.

두 번째 이성적 위기는 인간이란 본래 신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 신에게 받은 생명으로 육체를 형성했으니 신성하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 다원이라는 과학자가 인간 역시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動物)이나 식물(植物)처럼 원래는 미개한 생명체이나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進化)하여 지구상의 최고의 이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은 신이라는 관념적인 존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결국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한 존재라는 점이다.

또한 인간은 영장류에 포유류이기 때문에 주변에 서식하는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원숭이처럼 비슷한 조건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들과 유전자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일치한다. 결국 인간은 신의 위대함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유인원의 진화로 통해 그리고 그 진화 속에 다양한 종족의 퇴화와 함께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충격에 빠지게 하는 마지막 선언은 인간이란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인간 의식과 이성마저 잠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밝혀낸 인물은 바로 인류 역사성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사람이다. 게다가 인간은 이성에 따라 순수한 진리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성적인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병적인 증세를 발현한다고 했다. 

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토록 합리화하였는데, 이제 그것은 단순한 인간들의 착각이라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에서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하나의 가설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들어가서 이제는 당연한 사회문화적인 영역에서 인정되었다. 인류를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로 만든 프로이트를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일단 내 별명 중에는 조금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여 만화애니메이션에 대한 리뷰를 적다가 불리게 된 별명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애니메이션 계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라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란 장르를 하나의 구조로 여기고 과학적으로 보는 방법(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의 학문을 이은 구조주의)에 내가 본다는 사실이다.

사실 기존에 이미 프로이트 관음적인 면을 살려서 영화보기를 영화읽기로 하여 영화 텍스트를 분석하는 기호학 내지 페미니즘 분석방법은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에 따라 각종 영화나 문화를 비평하는 학문도 있다. 단지 그것이 전문가의 손에서 놀아난 것이지 그 애니메이션이란 문화에 빠져 향유하는 당사자에겐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리뷰를 적어보면서 애니메이션 내의 여성캐릭터를 연구하고, 남성캐릭터와 여성캐릭터에 대한 분석을 하기 시작했으며, 거기에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까지 생각하면서 보았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집어든 미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도서부터일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을 창시한 학자로서 20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근친혼(近親婚)이라는 것을 알았고, 차후에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도서를 보면서 프로이트라는 인물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 그리고 여기에 신화학(神話學)이란 분야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을 직접적으로 접하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가족관계를 알게 되었다.

인간의 성적인 욕망은 무의식에서 발동되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사회와 문명으로 통해 억눌린다. 하지만 이것으로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와 억압 그리고 욕구불만은 인간에게 다양한 증세를 보이게 한다. 특히 인간의 무의식적인 면을 강하게 나타내는 신화와 그 신화를 가장 잘 소화해 내어 영상으로 보이는 애니메이션에서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이론을 탐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프로이트가 강의한 정신분석입문은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기회가 되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과 꿈의 해석을 사서 읽기로 하여 이제 정신분석입문을 한번 책 전체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기존에 내 머릿속에 있는 이론에서 이 책에 서술한 내용과 크게 변동이 없지만, 그것이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풀어 가는지 그리고 환자의 임상상태는 어떠한지는 처음 보았다.

인간이란 늘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다. 그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은 성적인 무의식적 욕망 즉 리비도에 의해 발생된다. 단지 그 리비도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억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리비도를 다른 곳으로 전향되더라도 기본적인 리비도의 욕망의 고리를 분쇄할 수 없었다. 그런 인간의 성적 욕망 그리고 그 욕망에 따른 인간 자기 억압과 통제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조금 더 담론을 확대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프로이트가 가진 정신분석입문으로 통해 단순히 볼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학파와 반 프로이트학파가 나온다. 우선 여성성과 남성성의 서로 교차한다고 밝히 칼 융이라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반 프로이트학파와 추후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정신분석을 새롭게 변모한 자크 라캉에 이르기 다양하게 생각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내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은 자크 라캉에 대해 의문을 가지서 부터이다.

 

이른바 기표와 기의는 일치한다는 소쉬르의 기호학 대신 기표와 기의는 미끄러진다는 자크 라캉의 기호학 연구부분에서 말이다. 물론 아직 읽다가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 자크 라캉 11번째 세미나를 보면서 라캉이란 인물이 얼마나 프로이트를 중시하고, 프로이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것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물줄기를 틀었다는 점이 독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렇게 프로이트가 추가한 정신분석학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실제 임상실험의 환자를 치료하거나 혹은 영화나 문화 그리고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나 또는 신화학, 문화인류학, 민속학과 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인간은 인간 본인이 감지할 수 없는 심연의 세계가 있다. 그 심연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또한 인간은 성적인 욕망을 지닌다.

이 글을 적는 나 역시 남성이란 동물적인 심리로 여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15초마다 야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정말 15초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남성이란 성적인 욕망 리비도에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지배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인 성적 욕망은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비추어진다. 그것은 가상과 현실의 벽을 느낄 수 없는 아니 초월한 하이퍼 리얼리티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간의 성적욕망은 더욱 더 가속화되나 오히려 억압될 수 있다. 그런 욕망과 환상 또한 복잡다양한 세계에서 정신분석을 도입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 내면에 갇힌 굴레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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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Ⅲ―2 - 완결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5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자본 3-2권까지 읽어 보았다. 자본 1-1권부터 시작하여 1-2권, 그리고 2권과 3-1권. 정말 마르크스 자본을 읽는 동안에 왜 이 책이 유명한 서적인지 왜 마르크스가 현대에서도 사회학, 경제학,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많은 내용을 혼자서 (물론 마르크스 사후에는 엥겔스의 작은 원고추가분이 있었으나) 저술했다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글로 번역하여 도서를 찍어낸 것을 페이지로 계산해도 총 3,000페이지가 넘는다. 이 위대한 업적에서 마르크스는 자본(資本)을 미완(未完)의 도서로 남기며 저 세상으로 갔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의 죽음과 함께 멈추었지만, 그 이후의 자본은 멈추지 않았다. 세계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두고 계속 연구하고 논문을 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그의 손에서 나온지가 이제 130년 전후이다. 그러나 그 많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자본은 많은 사람들 손에 잡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읽힌다. 이런 책이 계속되어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전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하여 만들고 하던 인권이 아직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좋은 머리와 우수한 언변으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서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수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 살이를 해야만 했고, 자기가 사랑하던 가족이 있었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치료도 못했으며, 최후에는 고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명 남짓한 주변 사람만 모였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의 묘지에서는 10명의 사람만 모였으나 이제는 그 10명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기리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왜 그토록 자본을 쓰고 싶었을까? 마지막 3-2권을 읽기 전까지 물론 마르크스에 대한 자료와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외치던 공산당 선언이 주요한 쟁점이었다. 물론 이 때의 마르크스는 자본을 집필하지 않았다. 당시 마르크스는 현실에서 모진 노동과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인권 선언문을 외쳤다.

만약 20년 전후의 한국에서는 이런 선언문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겠으나, 그것은 정말 금지된 선언문이 아니라 정녕 우리 인간의 가치인 생존을 위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일이었다. 대다수의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생계수단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속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본다면 자본은 이런 불합리하고 정의라는 것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은 그 시절에 진실로 그 사회의 단면을 아주 냉정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이었던 것 같았다.

자본주의 체계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사회적 지배하는 계기도 있었으나, 거기에 아울러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수공업에서 이제는 대규모의 기계 산업으로 변모하면서 인간의 노동력은 대규모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에 하나의 부속품으로 되어 버린 것을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서술하게 되었다.

자본 3-2권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그런 진행을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가장 중요한 자본이 어떻게 경제적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지도 나온다. 3-2권에서는 3-1권에 중간부분 시작하는데, 우선 화폐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소유하고 지불하고 언제나도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폐나 금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숫자를 하나의 종이서약서로도 나타낼 수 있는 어음을 소개했다.

어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 단지 현찰 대신 은행에서 발행한 유가증권이며 그것이 실제 현존하는 화폐가 아니어도 불구하고 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어음 발행에서 실제 상업적으로 상품을 처분할 수 없거나 혹은 이미 과잉으로 자본이 시장에 들어가 있는데도, 어음 내지 혹은 다양한 자본들이 계속 유입된다는 점이다.

한편 실제 은행에 보관된 금액에 비해 은행에서 발행한 화폐나 증권들은 더 많다는 것이다. 자기 자본보다 더 많은 부채가 생겨서 시장의 과잉 자본유입으로 인플레이션과 같은 문제나 혹은 자본가들이 이윤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생산물을 늘리지만, 결국 시장에서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에서 수요의 감소로 인하여 재고가 엄청나게 쌓인다.

그렇다면 자본가들 중에서 산업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순수자본이 아닌 대출받은 자본으로 운영한다면 분명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인해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 그 밑의 노동자 역시 급료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되면 그것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킨다. 가령 어느 큰 공장 하나가 문을 닫게 되면 거기에 근무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공장에 자본을 (사실 그 자본마저도 다른 누군가에게 대여 받았으나) 대여해준 자본가, 그 공장의 주요 생산물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사람, 그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운송 및 판매하는 중간 및 소규모 상인까지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자본 3-2권을 본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욕망이란 이름을 아주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분명 산업체에서는 생산물을 늘리고 잉여 생산품을 올려 이윤을 추구하겠지만, 이런 행위에 따른 과다한 자본투하와 계속되는 경쟁으로 결국 자본가 자신이 파산하게 되어 버린다.

자본가의 자본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자본가 역시 노동자로 전략하게 되어 버린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것을 지적했으나, 어떻게 생각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에서도 즉 산업자본가의 파산 역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문제와 경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보았다.

또한 그런 자본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원초적인 착취에 대해 보았다. 지대에 대한 부분에서는 어느 일정한 시세를 가진 토지에서 일정량의 곡식이 나오더라도 그 양이 어느 시세의 최소생산 토지보다 더 많은 생산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지대를 운영하는 차지농에 의해 수탈된다는 점이다.

본래의 토지소유자에겐 일정양의 금액 부분만 제공하고, 그리고 이 일정한 토지에 농노로 통해 생산되면 일정 부분의 인건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이득으로 가는 점이다. 물론 지대의 운영에서 그가 받은 이익은 토지의 우량함과 농노의 노동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런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노동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은 불변적인 상태에 있는 (인공적인)자연물을 생산물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깐 그 만큼의 수익에서 노동력만큼의 대가를 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시세에 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당하다고 하기에는 틀리다. 자본 3-2권 앞의 책들을 읽다보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나 농노에게 주는 임금에서 시간제도 있었지만, 이에 반해 성과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성과제는 일정양이나 혹은 할당량을 채우게 되면 그만큼의 임금이 나오는 임금지급방식이다.

만약 일정한 노동량을 채우고 시간을 만족했으나 성과부분이 부족하면 임금삭감하거나 과다노동(가령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을 하여도 주어진 양에 미치지 못해 임금을 삭감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고찰했으며, 그런 문제로 노동자의 수명단축, 질병으로 인한 장애현상, 어린아이들에 대한 착취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하는가에 대해 깊숙하게 들어 가보면 그런 이유가 존재할 만 것을 생각하는 것이 자본 3-2권이다. 우선 자본가는 산업자본가와 화폐자본가로 있는데, 문제는 산업자본가는 자신의 순수자본이 아닌 화폐대여로 통해 자본을 얻어 그 자본에 대한 이윤을 남겨 자신의 자본으로 재생산하거나 그 자본대여를 한 화폐자본가에게 자신이 대여 받은 자본의 일정 비율을 다시 반납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대여에서 100만 파운드를 대여 받았는데, 은행이나 혹은 합법적인 금융기관에서 원금에 대한 이자율이 5~10%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합법적인 금융이 아닌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고리대금업자에게는 100% 전후의 터문 없는 이자로서 대여 받아야 했다. 따라서 이런 비윤리적인 상업행위를 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산업자본가뿐만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노동자까지 고리대금의 늪으로 끌고 갔으며, 이들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서 부를 축적해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경제 활동하는 부류는 아직까지 이 현대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집필 당시 현대이겠지만, 내가 보는 마르크스의 자본은 근대사회다. 그러나 그런 근대사회의 이야기와 담론들이 아직도 현대에서 존재하고, 설사 마르크스의 자본에서도 그런 부분은 고대에도 있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은 정말인지도 끝이 없는 굴레 인 듯하다.

그런 굴레는 자꾸 사회에 부익부 빈익빈을 증가시킨다. 그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불평등 내지 거기에 의한 각종 사회적 문제가 일어난다. 하지만 당시 근대사회나 그 이전의 중세 고대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가난하게 되거나 혹은 노예가 된다면 자유농민 내지 자유시민이 감소하여 국가에 대한 각종 의무사항을 수행할 수 없다. 가령 노예인 자들은 국가방위인 군역에 동원될 수 없고, 가난한자들은 국가에 세금을 낼 수 없다. 또한 자본이 계속 한 곳에 축적됨에 따라 당시 국가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어느 특정 부류의 자본을 빌려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국민의 가난함, 그리고 그 국민의 대부분인 농노와 노동자의 가난은 결국 국가의 존립 자체에도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비단 유럽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조선 중후기로 들어서면서 농민들의 세금은 과다해지는데, 이에 반해 중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들은 부정축재를 하여 자신이 거두어들인 세금보다 더 적게 국고에 출납했다.

그리고 계속 부족한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계속 농민을 수탈했다. 누군가 이런 자본이 되어야 하는 화폐를 어디서 누출 시키면 결국 그 화폐 즉 세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조선 말기에는 관리들은 군역에 대해 직접 농민들에게 군역하기 보다는 군역면제를 위한 군포를 내기를 원했다. 농민이 실시하는 군역 그 자체에는 자신들의 이익은 생기지 않았고, 단순히 농민들이 내는 군포세로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방법이나 수단 그리고 시대나 사회적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누군가 계속 가난하게 되어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가 힘들다는 점은 분명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긋난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내고 그런 구조에서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탐색은 그 사회의 오류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저술한 자본은 당시 유럽사회의 자본주의에 대한 그 자체를 알아내려 했던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떻게 노동자를 착취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체계를 밝혀낸 것이다.

마르크스가 죽은지가 130년이 되어 간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은 아직도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가 유령이라 함은 정말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령으로써의 유령이 아니라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죽었는데도, 그가 미치는 영향이 아직도 크다는 점이다. 그가 생각하고 주장한 이야기는 후세 많은 철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 경제학자의 담론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직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한 채 절망의 고통에서 울부짖고 있어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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