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라디오를 켜 봐요 - Navie 255
진주 지음 / 신영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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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우산 하나 갖고 싶어지게 한다...

 

 

나에게 징크스가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많이 걸리는 게,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이 없는 거다. 오늘처럼...

하루도 비켜가지 않았다. ‘비’ 따위 나는 모르겠소, 하는 것처럼 하늘이 쨍쨍 맑아서 그냥 나가도 비가 온다. 대부분의 날들이 그랬다. 늘 우산이 없거나 가진 우산마저 잃어버리곤 했었다. 비가 내릴 거라고 했는데 괜찮아서 그냥 나갔더니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늘... 오늘처럼...

계속 내리던 비가 오후에 잠깐 멈췄다. 잠깐이니까 괜찮겠지 싶어서 우산을 두고 그냥 나갔다. 불과 몇 분 사이. 갑자기 사위가 캄캄해지더니 결국 비가 쏟아졌다. 그 잠깐, 너무 방심했나보다. 그럼 그렇지. 어김없이 또, 비...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건 징크스가 아니라, 비가 내릴 거라고 분명히 말했던 일기예보를 내가 무시했던 결과일지도 모른다.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던 나의 못된 습관이 오늘 같은 날까지 비를 맞게 한 것만 같다. 오늘, 그냥 보이던 우산을 들고 나갔으면 될 일을 굳이 무시하고 나가서 비를 맞은 거다. 하늘에서 갑자기 퍼붓는 비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거 마지막 경고니까, 이젠 우산 준비를 좀 하고 다니시지?’

 

 

살아가는 게 팍팍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날씨까지 이렇게 더해주면 정말 길바닥이라도 누워버리고 싶어진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위로의 한 자락을 찾아다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늦은 시간, 고요하게 반복재생하며 듣고 있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라디오 찾아 채널을 고정하고 있다. 바람이 너무 불어 잘 들리지 않아서 볼륨을 높여야만 하는데도, 선뜻 라디오의 OFF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나는 계속 ‘지금, 라디오를 켜 봐요...’ 중인 거다.

 

가끔 걸리면 뉴스 정도, 스치듯 드라마 잠깐 보는 편이어서 그런지, TV보다는 라디오를 즐겨 듣곤 한다.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큰언니를 따라서 초등학교 때 처음 라디오를 듣기 시작해서, 중고등학생 때는 내가 직접 찾아서 들을 정도로 좋아했었으니까. 그것도 한밤중의 라디오를... 한밤의 라디오는 모든 감성을 총동원해서 끌어올리는 정점을 만들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의 노곤함을 풀기 위해 누워있는 시간, 누군가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로 눈이 초롱초롱 떠져 있기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그 밤에 다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시간, 그렇게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음악들,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사연들, 결국은 살아가는 모양새가 비슷해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그렇게 나도 그 공감의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라디오...

그렇게 세상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서 들려오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욱 귀로 듣는 이야기들이 저절로 가슴에 담겨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여기, 그런 여자가 한명 더 있다. 신희수. 서른둘의 봄, 어느 날 문득 라디오에 손을 뻗고 들려온 디제이의 이야기와 음악에 위로를 받는 여자가 있다. 그 전파를 타고 날아와 가슴에 박혀 시린 가슴에 세상의 온기를 뿌려주는 사람, 이은세를 만난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두부로 위로 받던 여자 희수와 그런 그녀를 이해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남자 은세가 만나서 이루어가는 사랑이야기다. 얼핏 보면 일반인과 연예인의 만남쯤으로 생각하기도 쉽겠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내가 이 책에서 집중해서 느꼈던 부분은 그 여자 ‘신희수의 삶’이었다. 그 가운데 은세라는 인물은 신희수의 서른둘 나이에 시작된, 또 다른 인생의 조력자라고나 할까. 무언가 막연한 그 순간에 누가 불을 질러놓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것. 은세는 희수에게 그런 자극을 주는 사람이었다.

“부풀어 올라 흐릿해진 여름밤의 정경을 희수는 방울방울, 눈물로 떨구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났다. 세상이 이다지도 아름다워 웃음 짓는 순간에도 눈물이 흘렀다. (183페이지)”

서른둘, 인생에 있어서 뭔가가 정해져있고 쌓아져 있어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다. 그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준 1년이라는 안식의 시간이 정말 옳은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여행에 대한 동경으로 사 모은 책들만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여행을 실행에 옮기고 싶은 순간...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은 마냥 불안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때 만난 은세는, 외로움과 막연함과 두려움으로 희수의 시야를 뿌옇게 가려버린 안개를 걷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오히려 희수의 새로운 선택을 지지하며 응원해주고, 같이 시작할 내일을 기다려주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마 은세 본인도 희수처럼 다시 일어나고 자라나는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철컥’ 소리와 함께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가 잠겼다가, 다시 풀리는 순간을 확인했을 때 쏟아지는 눈물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쏟아지는 비가 아무리 가려준다고 해도 본인은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 눈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걸...

 

 

한 여자의 서른 두 해가 누군가의 눈에는 눈물로만 채워져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매. 모든 것이 어려웠던 때. 그래서 더 치열하게 앞으로만 달렸던 시간들. 당신 딸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워보였지만 차마 그 부담을 덜어줄 수 없었던 엄마의 눈물.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아직도 결혼 안하고 혼자인 딸의 현재를 당신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만 같아서 더 애달픈 게 엄마의 마음이었다. 이제라도 그만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순간, 딸이 선택한 것이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는 여행이라 더 불편한 마음인 엄마였다. 그마저도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서 붙잡고만 싶은 간절함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의 마음이 그러한가 싶게 만드는 부분들의 이야기가 내내 가슴을 적신다. 그 누구를 이해할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없게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너무 콕콕 쑤신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보듬어지게 만드는 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인가?

 

살아가는 그 순간의 위로가 되는 이야기다. 너무나 평범해서, 우리들의 엄마를 보는 것만 같아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막막한 내일이 두려운 우리들 같아서... 이런 이야기, 차마 모른 척 하고 이해 안 된다고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순간순간 치받고 올라오는 감정들 때문에 화가 나게 만들면서도 끝까지 붙들고 있게 만드는 이기적인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제일 많이 드는 생각은, 사람이 자라나고, 사랑을 하고, 정을 나누고, 마음을 키우면서 세상에서 담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 들이부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사연을 싣고 들려오는 이야기에, 필수 옵션처럼 따라오는 음악에, 지금 들려오는 모든 것에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좋네, 라디오...

 

 

서른 두 살의 봄, 신희수에게 찾아온 위로가 나에게도 찾아올까? 비록, 전파를 타고 날아온 음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른 아침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 가게 앞에서 시작되었지만,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어지게 창피한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끝에서 조우한 것은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이자 힘이었다는 것을... 서른세 살이 된 신희수는 알게 되었을 테니까.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알지도 못하는 음악 한 곡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기적처럼 나타난 것만 같다. 이제는 언제 어디에서 비가 내려도 괜찮을, 우산 하나가 준비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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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19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리 2014-11-0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리뷰 보고 라디오 구입했어용 ^^ 땡스투 눌리고 갑니다 ^^

구단씨 2014-11-11 16:56   좋아요 0 | URL
설리님 취향에도 잘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
 
자각
최양윤 지음 / 청어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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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진심을 알아차리는 타이밍...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 어떤 선택을 앞에 두고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그 순간은 짧아야 한다. 조금만 주저해도 버스는 떠나고 흙먼지만 달려들기 일쑤니까. 그걸 알면서도 늘 반복되는 시행착오가 있다. 혹시나 거절당할까, 내 맘과 같지 않아 부담을 줄까 싶어 망설이다가 가슴 속은 시커멓게 타버리는 일. 누굴 좋아하는 마음은 왜 그렇게 애가 타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주변을 맴돌며 마음을 흘린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짝사랑을 들키지 않기 위해 쿨한 척 괜찮은 척하는 연기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한다.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옆에 있어야 좋다는데...

 

승연과 윤성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 1월 12일이 지나고 있다. 0시 1분. 승연은 준비한 이혼서류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윤성과 친구로 지냈던 시간, 낯선 땅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유일하게 발견한 윤성을 마음에 담기 시작한 시간, 아닌 척 마음을 숨기며 결혼을 유지했던 1년이란 시간까지. 승연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윤성과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걸까. 이 서류로 그 확인을 할 수 있을까. 흩어진 많은 것을 한 군데로 끌어 모아 끝이 이루어지긴 할는지...

 

승연은 친구인 지영의 연인 윤성을 좋아한다. 물론 윤성은 승연의 오랜 지기다. 어느 날 윤성과 지영은 연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지기, 변호사인 시흔은 승연과 친구 사이면서 승연이 가장 솔직할 수 있는 대상이다. 재벌 수준의 집안 배경을 가진 윤성과 승연, 개천에서 용 나듯 살아온 지영과 시흔. 네 사람의 공통점은 없는 듯 보였으나 이들이 오랜 친구사이였다는 건 그만큼 인간성이 바탕이 된 존재라는 얘기도 된다. 어쨌든, 연인인 지영과 결혼하기 어려웠던(?) 윤성은 승연에게 3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제안한다. 승연은 윤성을 위해, 지영이 윤성과 맺어지길 바라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를 윤성과의 결혼을 시작한다.

 

이들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뭔가 아리송하면서도 진실을 밝혀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려면 일단 끝까지 읽어봐야 판단할 수 있는 것. 소개 글만 보고서는 두 사람의 이혼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헤어지고 나서 뒤늦은 후회로 다시 이어지는 마음이 어떻게 그려질지 설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최양윤의 소설 『자각』은 내 기대와 조금 달랐다. 그들이 결혼하기까지, 결혼하고 나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그들의 결혼기념일과 이혼서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진단하는 과정이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뭐, 일단 읽어보면 안다.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보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어떤 마음이어야 할지 알게 하는 이야기였다. 윤성의 묵묵한 태도는 믿음직스러웠고, 승연의 표정 감춘 웃음은 쓰라렸다. 뭔가 이루기 위해 참아야 할 것, 기다려야 할 것을 떠올리게 한다. 늘 그렇듯 좀 돌아서 가는 길이 더디고 아프겠지만, 마지막에 도착해서 만날 기쁨을 위해서라면 조금 먼 길이어도 괜찮지 않겠나. 말은 안 하면 모르니 상대에게 닿는 길이 멀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말을 해!! 라고 충고라도 하고 싶지만, 그게 또 맘처럼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쓸데없는 오지랖은 부리지 않으련다.

 

“넌 아무것도 모르지. 널 곁에 두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넌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말이야...

 

이 책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친구를 정의하는 부분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물음표는 언제나 화두로 떠오를 수 있는 내용임에도 늘 완벽한 정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이 조금 다른 정의를 내놓고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상대에게 짝사랑 중이어야 친구라는 이름이 유지된다고 했다.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계속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야 친구라는 이름으로 옆에 두고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는 거다. 안 그럼 두 사람 사이는 진즉에 끝났을 테니까. 듣고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니 두 사람 사이가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관계가 소원해지고 끊어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절친이나 연인, 가족도 아닌데 서로 얼굴 보고 시간이 이어지는 이성이라는 게, 친구사이로 계속 갈 수 있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 누구 한 사람이라도 상대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친구라는 이름으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구나, 싶다. 무슨 말인지 좀 알겠다. 이 의미가 세상 모든, 친구라고 부르며 관계를 유지하는 이성 사이에서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으로 유지되는 친구라는 호칭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짝사랑이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게...

 

전체적으로 읽기에 부담되거나 불편하지는 않지만,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들이 완전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음 작품에서는 조금 더 탄탄한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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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한새희 지음 / 우신(우신Books)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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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아니다, 어쩌면 울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집에서 같이 오래 살았던, 친구처럼 지내던 이모가 결혼을 결심한다. 했어도 진작 했어야 할 이모의 결혼. 이모의 15년 연애의 끝이 이별이 아니라 결혼이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안심이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할 찰나 이모가 선우에게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들려주었을 때, 기어코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혼자 남겨질 언니(선우의 엄마)와 아직은 불안한 선우에게 향하는 마음을 끊을 수가 없어서 미루기만 했던 이모의 결혼이다. 그런 이모의 결혼 상대자인 세현 오빠까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런 인지상정을 당연하게 만날 수도 있지만, 조금은 세상을 경험한 내가 보기에 이런 마음 함부로, 아무 때나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더라. 그러니 선우 옆에 이런 사람들, 내 새끼가 최고라 여기는 엄마, 동생 같은 조카에게 스스럼없이 씩씩한 이모, 아빠이자 오빠이고 형부처럼 든든한 백이 되어주는 세현 오빠가 있는 선우는, 누가 뭐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어느 날 그런 선우에게 나타난 윤정후 역시, 같은 빛을 비추는 사람이기를 바라게 된다. 살만한 세상이라고, 사람 때문에 온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지는 마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그걸 기대했다.

 

윤선우는 결혼을 두 달여 앞두고 이민재와 파혼한다. 3년이 넘는 시간을 연애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온 사람과 헤어지는 일, 그냥 이별도 아닌 결혼이란 약속을 깨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야만 했다. 윤선우가 그 순간 해야 할 일은, 이해할 수 없는데도 이해하는 척 감당할 수 있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이민재와 결혼하는 게 아닌, 이민재와 헤어지는 일이다. 결혼의 감정적 정의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만남이고 무엇을 위한 결혼인지 결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인 거다. 잘 했다. 결혼이란 약속을 깬 것은 책임질 일이지만, 그 책임을 감당하면서까지 그 결혼을 깨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윤선우는, 윤선우다. 윤선우는,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윤선우의 행복의 기준과 정의는 이민재와의 결혼이 아니었던 거다.

 

빗물에 눈물을 가린 윤선우에게 웃는 모습뿐만 아니라 우는 모습까지 예뻐 보인다고 말하는 윤정후가 등장한다. 도끼질 몇 번에 나가떨어지지 않겠다고 한다. 완벽하게 도끼질을 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미 상처입고 흉터가 남은 윤선우에게 윤정후의 접근은 마냥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과의 만남에, 신뢰에, 기대에, 그 어떤 것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을 경험했으니 두렵기도 하겠지. 사랑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다음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베푸는 호의나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기 주저하게 된다. 그런 윤선우임을 알면서도 다가감을 멈추지 않는 윤정후이기에 내내 웃음이 난다. 삭막한 세상에서 파혼이라는 상흔을 가진 여자에게 명분도 없이 붙을 꼬리표를 생각한다면, 윤선우에게 다가가는 윤정후의 태도는 잘 만들어진 연고 같다. 흉터 생기지 않게 잘 발라지는, 연고.

 

화가 나게 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더니, 윤정후의 순수한 들이댐으로 피식피식 웃음이 나게 한다. 현실 속의 윤정후는 없으니, 그래서 판타지라 생각하면서 읽어가면서도 아직은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이들의 이야기에 기대게 된다. 내가 경험한 사람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민재나 이민재의 엄마의 모습에 가깝다. 이십대 중반에 만났던 한 친구는 당시 학생 신분이었는데, 그의 엄마는 그를 카이스트 여대생과 선을 보게 했다. 가난하고 백 없는 친구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고, 지역구 레벨 있는 모임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때 그 친구를 만나면서 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인간적인 교류 그 이상을 기대했던 것 같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는 일은 이성적인 끌림이 기본이기도 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인간미가 많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생각했던 그 기본을 배제한 채 누군가를 보고 있는 시간은, 아무리 그 시간이 심장의 떨림과 설렘을 준다고 해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아마도 그때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졌겠지만, 나는 드라마에서나 봤던 캐릭터를 내 상처에 보태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이들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나마 감정을 몰입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민재의 엄마에게 파혼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할 때의 윤선우는 당당했다. 가슴 속에 상처 하나가 새로 새겨졌을 지언즉,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줄 아는 ‘인간’ 윤선우였다. 살아가면서 뭐가 먼저이고 우선인지를 아는 사람. 내 눈에 비친 윤선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윤정후 같은 남자가 한눈에 알아본 것이겠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윤정후 같은 캐릭터를 현실에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아직은 이런 인간미가 남아있는 세상이라는, 미약하지만 그 희망 하나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바람이라고 해두자. 윤선우 이모의 모습이 그 증거일 수도 있겠다. 윤선우가 윤정후와의 결혼을 결정했을 때, 이모는 자신의 결혼을 결정했다. 이모가 떠나지 못했던 이유, 먼 거리도 아닌데 같은 공간에서 떨어져나간다는 거 하나도 할 수 없었던 이유를 표현했을 때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안심하고 자기 인생 조금 더 살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이모의 마음이 그려진다. 그래, 그래서 아직은 정이 있고 감동이 남아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 남아있다는 것에 안심을 하고 싶어진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음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게 흐르는 이들의 이야기가 내 가슴 속에서는 높게 출렁이는 파도로 둔갑한다. 바로 옆에 누워계시면서 어깨가 아프다며 진료예약 확인하는 엄마를 보게 하고, 철없던 시절에 가졌던 시선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선순위로 정해놓은 생각들을 각인시킨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상기시켜주는 이런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이야기, 잔잔한 여운으로 상당히 오래 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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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joker 2014-09-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참좋습니다.~잘읽고 갑니다.

구단씨 2014-09-24 23:14   좋아요 0 | URL
공감하게 되어, 기뻐요... ^^
 
드라마 쓰는 남자, 드라마 찍는 여자
변정완 지음 / 청어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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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쓰는 남자 드라마 쓰는 여자』

 

방송국, 혹은 드라마, 대본, 연출, 배우, 작가, 피디. 엄마가 매일처럼 보는 드라마를 떠올려보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단어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이 드라마 쓰는 남자(작가)와 드라마 찍는 여자(피디)의 이야기다. 짐 떠안듯 맡아버린 드라마가 망해버려 종방연조차 초라하게 치러야 했던 명수현 피디. 그에 반해 시놉시스도 보지 않고 드라마 계약이 가능할 정도로 톱의 자리에 앉아있는 드라마 작가 류민. 수현은 얼떨결에 맡아 망해버린 드라마로 자신의 드라마 역사를 쓸 수 없었고,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던 삼촌에게 남겨진 빚더미를 그대로 볼 수만도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 그 기회를 만들어줄 사람도 단 한 명, 드라마 작가 류민을 잡아야만 했다. 잔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베일에 싸여있는 그를 찾아다닌 끝에 만나게 되지만 그는 순순히 수현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그래도... ^^ 그렇게 끝나면 또 재미없는 게 이야기의 매력이 아니겠어.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있는, 철저하게 갑의 자세로 서있는 류민, 류민 앞에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꿈을 위해 을의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수현. 두 사람이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으쌰으쌰하면서 한 공간에 함께 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드라마뿐만 아니라 눈까지 맞아버렸네. 아, 이럴 경우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만들어질까? 기획부터 시작해서 머리 맞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두 사람일 텐데, 마음까지 하나가 되면 더없이 좋은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뭐... ^^

 

큰 무리 없이 술술 읽히면서 소설로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어느 정도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충도 보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관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유명세가 주는 만족감에는 한계가 있어 보이고, 오히려 그 이면의 것들을 보게 한다.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고 승승장구 하는 게 꼭 좋은 것만 함께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도 류민이 가졌던, 드라마 작가로써의 그의 천재적인 재능이 그의 삶을 완벽하게 해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재능이 일에 있어서 그 사람의 성공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외의 것을 차단시키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거, 동전의 양면 같았다. 결국에는 좋은 사람과 함께 호흡하면서 또 그 관계의 회복을 배워가고 있었으니 해피엔딩이었지만...

 

드라마작가였다는 이력과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뭉친 사람들의 소재가 맘에 들어 읽게 된 소설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읽다 보면 어떤 장면이나 행동이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소설로 읽어가는 매력은 떨어진다. 특히 두 사람이 서로의 눈빛이 통하는 그 시작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같이 일하기로 하면서 합숙(?)하듯 시작된 생활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고 가끔 회의하면서 얼굴 마주하다 뜬금없이 마음이 통해? 물론 그럴 수도 있지.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고 본다. 근데 그 과정에 있어서의 묘사가 한 덩어리로 빠져나간 느낌이다. 작가가 소설로 내놓은 첫 작품이고 내가 가진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소설과 내가 충분히 통하지 못했음이 안타깝지만, 기본 글 실력 어디 가는 거 아니니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다려본다. 드라마를 연상하게 되는 게 아닌 소설로의 매력이 더 많이 담긴 작품으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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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생 홍금보 1 앙상블
육시몬 지음 / 청어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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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기생이란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미인, 아름다움, 천하절색 등등. 얼굴에 고운 단장을 하고 화사하게 몸치장을 하고. 음주가무에 덩실덩실 어깨춤이 춰지는 장소에 그 어여쁜 얼굴의 자리가 있다. 실제 기생이 존재했다는 시절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만난 이미지가 전부이리라. 당연한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 기생은 아름다운 여인이라 각인되었건만, 그 이미지를 와장창 깨뜨려버린 기생이 나타났으니 그 이름도 육중한 홍.금.보. 붉은 홍(紅), 능금 금(檎), 보배 보(寶). 붉디붉은 능금 같은 보배라고 홍금보라는 이름이 가진 그 의미 또한 그럴싸한데, 아뿔싸. 외모가 그 이름을 따라주지 못했으니... 기생이란 신분이 무색하게 홍금보는 박색이다. 그것도 천하박색! 보통은 독각귀(도깨비) 홍금보라 불리니 그 외모가 심히 무섭다. 꽃다운 나이 열여덟이 되었건만 아무도 홍금보의 머리를 올려주겠다는 이가 없다. 다른 기생들이 머리에 가채를 올리고 있을 때 홍금보는 댕기머리 소녀(!)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육척에 가까운 키에 기골이 장대하고 억세기까지 한 덩치 큰 소녀상을 떠올려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웃겨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위로 말고는 그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구나. 지금 세상이라면 잘 나가는 모델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르는데. 얼굴은 고은애(<달려라 하니>)를 연상시켜도 조금만 다듬으면 몸매는 미란다 커가 울고 갈 지도 모르는데. 시대를 잘못 만났어!!! 400년만 늦게 태어나지, 라고 읊어봤자 뭔 소용. ㅠㅠ

 

그런 홍금보에게도 기생으로서의 재주가 있었으니, 바로 노래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조선 최고의 ‘가기(歌妓)’다. 그런 홍금보와는 대조적으로 천하절색의 미인 설향은 벙어리 기생이다. 홍금보에게도 마음을 준 이가 있는데 통사관(통역사) 장이강 오라버니다. 그런데 이 오라버니 어장관리 하는 건지 뭔지, 홍금보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없다. 거기에 이강 오라버니는 벙어리 기생 설향에게서 눈길이 떨어질 줄 모르니 어쩌면 좋누. 때는 왜란이 마지막을 향하던 시기. 조선에 들어온 명군의 통사관이 한명 있었으니 그 이름 박수타(바티스타). 파랑국(포르투갈)의 금발의 백인 통사관 박수타가 한눈에 홍금보에게 반해버렸다. 억지로 끌려오듯 했던 조선에서, 매일 도망치는 게 일이었던 박수타에게 조선에 머물러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사랑!!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 박수타와 홍금보. 뭐, 사랑하는데 언어의 장벽쯤이야 별것이겠냐 마는... 목소리와 외모 성질까지 억세고 드세고 장대하고 폭력적이고 현실적이기까지 한 홍금보와 금발의 파랑국 남자 박수타가 연결이 될 것인지 말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의 어학교재인 ‘색주부뎐’도 궁금하고, 뭐 그렇다는... ^^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코믹스러운 캐릭터에 입혀진 가벼운 이야기 같지만, 이 소설의 뼈대는 신분의 고하로 차별이 있었던 조선시대가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대극이다. 정여립이 주도했다는 기축옥사로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간 다음, 복면의 두령 홍길동이 활약하는 시대로 배경이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 모든 백성이 똑같이 잘 사는 나라를 꿈꾸며 실체 없는 유토피아인 율도국을 향하게 하던 때. 실존인물이었던 허균의 등장과 허균이 썼다는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직접 등장한다. 홍금보가 소속된 기방 장만옥을 아지트로 매일 술에 절어 한량으로 지내는 허균과 동학운동 때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홍길동, 부유한 상인의 아들 장이강 세 사람이 막역지우로 설정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수상쩍게 펼쳐지고, 활빈당이 시국을 어지럽힌다고 여기는 시대.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목숨 걸고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는 이들의 활약과 당연하듯 왕의 자리를 거머쥔 자의 탐욕과 가진 자들이 부리는 횡포 사이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로맨스가 펼쳐진다. 그 가운데 이들이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잘하는 것 하나씩은 있는 사람들. 뭔가 하나 부족한 것 같지만 그대로의 삶을, 자신의 존재감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와 국가에 대해, 세상이 바뀌기를 염원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대견하다. 낯선 이방인이지만 박수타가 홍금보에 대한 마음을 비췄을 때, 바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해서 이야기의 맥락이 이어져 보인다. 박색이라 불리던 홍금보도 누군가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음을, 기생 신분이 물건처럼 사고팔고 가능했던 세상에서 마음을 먼저 얻고 싶은 이가 있음을. 그게 바로, 누구나가 똑같이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을 그대로 보여준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의 주인공은 홍금보다. 박색기생인 홍금보가 만들어가는 인생과 그런 성질과 외모에도 진실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싶은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위험한 순간이 닥쳐와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위험과 죽음마저 매번 홍금보를 피해가는 듯하다.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홍금보, 박색이어도 할 말 다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제멋에 사는 홍금보, 조선을 위해 들어왔다는 명군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홍금보, 양반이든 미남이든 그 어떤 외모 앞에서도 당당한 홍금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위로마저 물리쳐버리는 위인이다. 매번 닥쳐오는 위기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빠르다. 연관도 없는 일에 연루되거나, 혼자 삽질하면서 숨겨진 영웅이 된다거나 하는 에피소드가 홍금보를 더욱 매력 있는 인물로 보이게 한다. ^^

 

특히 재치 있게 표현되는 장면과 문장들이 재미를 더한다. 홍금보라는 이름 자체가 연상시키는 것은 외모다. 어렸을 적 봤던 중국영화에서 그 육중한 몸으로 무술을 하던 홍금보. 떠올리면 일단 웃음부터 나는 인물이다. 그렇게 연상되는 인물이 이 책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더군다나 남자도 아닌 여자로 나왔으니 읽기도 전에 그 웃음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벙어리기생 설향과 박색 가기 홍금보의 ‘병풍후립신구(屛風後立身嘔)’는 기발한 표현으로 들린다. 병풍을 세우고 그 앞에서 설향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다. 하지만 벙어리인 설향은 병풍 뒤의 홍금보가 부르는 노래에 ‘립싱크’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립싱크를 한자어 발음되는 그대로 립신구라 표현하다니. 게다가 박수타의 홍금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온이유 홍금보 (溫而幽 紅檎寶)’라고 했다. 홍금보뿐이야~ 하는 애절한 온리유(only you)를 말하는 것이다. 홍금보와 박수타가 매일밤 어학교재로 사용하던 ‘색주부뎐’ 속의 문장들 역시 마찬가지. 어딘가 엉성하지만 박수타는 열심히 배워 실생활에 그대로 써먹는다. 귀엽게도... ^^

 

적당한 배경과 소재, 매력 있는 캐릭터들을 보는 즐거움으로 읽을 수 있었던 듯하다. 이야기는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듯한 여운이, 지금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진출처 : KBS '안녕하세요' 공홈>

 주인공 홍금보를 이영자, 개그콘서트-황해의 이수지를 연상하면서 읽었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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