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는
최수현 지음 / 가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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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뜨거워서 좋았던 여름이라고 기억해야겠다. 『그 여름, 나는』

 

무슨 약속이든 잘 지키는 이재이, 여자를 때린다고 소문났던 윤제희. 거부하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부반장과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서로 맞지 않는 듯 보였던 두 아이가 함께 보냈던 고3.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야 한다는 재이에게 방과 후에 과외를 해주고, 재이의 꿈을 들어주고, 자존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제희. 말이 거의 없는, 남들이 뭘 하든 관심 둘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늘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았던 제희가 왜 재이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것 같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기 판단할 수는 없었으니... 막연하게나마 추측하면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아직은 미성년이니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참아본다. 졸업까지 같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이 2002년 여름, 계절의 더위와 월드컵의 열기가 맞물린 그때, 우연처럼, 기적처럼, 다시 만난다.

 

대부분 과거를 이야기하며 시작하던지, 아니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와 교차로 진행되든지 하는 구성이었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과거와 과거의 교차로 진행된다. 1993년과 2002년의 시간이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다. 그때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고, 30대 후반, 4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타임머신을 타게 하는 기분이 든다. 진짜 오래전 신문을 뒤져야만 알 수 있는 일들, 어느 통신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기기들이 거리감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나잇대를 살아가던 순간만큼은 깊게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설레던 풋풋함, 아침잠을 포기하며 투덜투덜 교복 입고 다니던 그 시간, 수능시험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냐며 성토하던 표정들까지. 저절로 기억나고, 가끔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다. 누군가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스무 살이나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고3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내가 살아갈 시간에 대해 먼 그림을 조금씩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뭐, 여러 번 생각해도 지금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냥 과거의 시간일 뿐인데 말이지.

 

재이와 제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9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던 장면들은 안타까웠고, 서로의 몰랐던 시간을 조금씩 공유해가는 모습은 애틋했다. '자식들, 귀엽네.' 싶으면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아픈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시선이 비켜갈 수가 없다. 특히 재이게에 열아홉, 스무 살은 제희를 만났다는 것 말고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때는 몰라도 좋았을 삶의 고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의 마음에 가득했을 비참함 같은 것, 꿈을 꾸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버거워서 지치던 시간, 벗어날 수 있다고 발버둥 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반복될 뿐이었던 기억들. 그게 현재의 삶까지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아닐까. 첫사랑이 있던 시간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서 소설은 소설인가보다. 꿈을 떠올리게 하고, 괜찮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도 심어주는, 긍정의 결말을 바라게 하니까...

 

읽으면서 내내 괜한 마음에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 '어머, 대전엑스포는 혹시 역사책에서 나오는 행사였던가요?' 라고 물어보며 한 발 빼고 싶었는데 말이다. ^^ 나와는 다른 시간이라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같은 시간을 기억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 이렇게 하나씩 꺼내놓는 이야기가, 좋으면서도 괜히 우울해져서 말이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응답하라 1994>에 푹 빠졌었고,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미칠 것 같았던 시간을 겨우 넘겼는데, 이제 이 책이 다시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남아버렸다. '읽지 말 것을' 하고 잠깐 후회하면서도, '어디서 같은 추억을 찾아볼까?' 싶어 다 읽은 후에도 한 번 더 뒤적거리는 내가 참 어이없어서...

 

1990년에 10대 고3 시절을 보내고, 2002년에 20대의 후반을 지내면서 월드컵을 즐긴 세대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열아홉에 첫사랑도 없었고, 2002년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고,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 일 따위의 경험은 없는 인간이지만, 이들이 만들어가는 그 배경의 시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에 고3을 지냈고, 대전엑스포의 열기가 사라진 겨울에 그곳을 찾았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친구들과 함께 갔던 맥줏집에서 황선홍의 얼굴이 그려진 맥주잔을 훔쳤다. 무엇보다, 호출기의 음성녹음이 10개만 된다는 건 지금 안 사실. 같은 시간을 지나왔던, 호출기를 사용했던 나도 몰랐던 이 이야기가 2015년을 살아가는, 온갖 스마트기기가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악역인 듯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조력자로 등장하는 귀여운 의사쌤, 제희의 꼼수에 누명을 썼지만 '끝내주는 이것'으로 미안함을 전해야만 했던 녀석. 개성 있는 인물들과 무리수 없는 이야기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다.

 

 

 

여담이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것.

 

* 수학능력시험의 최대 수혜자?

고3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아이가 있었다. 하루 7~8교시 수업 내내 과목과 상관없이 책만 읽던 아이다. 단행본 만화책, 격월간지 만화책, 온갖 소설류, 할리퀸까지. 용돈 전부를 책을 사는 데 쓴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신기했다.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보여줬다. 특히, 전교 등수도 아니고 반 등수에서 하위권을 달리던 그 아이에게 대학이란 단어가 상관없는 줄 알았다. 정말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학교에서는. 모의고사나 중간 기말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바닥이었다. 다들 그 아이가 대학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학생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봤다가 놀란 기억. 그 애였다. 수업시간 내내 소설과 만화책만 보던, 내신이나 모의고사 성적이 바닥이었던 그 아이. 겨우 얼굴과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 아이가 너무 반가워 그날 학생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은 학교 불문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와우~ 괜히 반가운 마음. 나중에서야 들었는데, 그 아이는 수능 언어영역 만점을 받고 입학했단다. 지금 수능시험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만 해도 수능시험에서 언어영역 점수를 잘 받는 건 수리나 외국어에서 만점 받기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다. 내 경험으로도 그 말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수리영역 만점 받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 우리끼리 그때 얘기를 꺼내면 어김없이 그 아이 이름이 등장한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바뀌어서 가장 크게 이득 본 사람은 그 아이라고... ^^

 

* 호출기의 녹음은 10개까지만 되었던가?

그랬나 보다. 사실 기억에 없다. 호출기 녹음이 10개까지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호출기가 새삼 신기하기도 했는데, 녹음이 10개까지만 된다는 이유로 아쉬운 마음을 녹여냈던 게 제법 잘 어울린다. 거의 대학 졸업 때까지 호출기를 사용했고, 90년대 후반부터 휴대폰을 사용했다.

 

* 대전엑스포는 어느 나라 행사였던가?

아마 요즘 아이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대전엑스포는 우리나라 행사, 맞다. 행사가 다 끝나고 겨울에 갔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 7~8명쯤 같이 갔었다. 휑한 그곳을 걸으며 춥다고, 따뜻한 뭔가를 먹자고도 얘기했었고, 우리끼리 그런 낯선 곳에, 먼 곳에 갔던 게 처음인지라 무섭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무사히 귀가했고 그날의 경험으로 우린 더 멀리까지, 며칠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은 받았음) 그때 대전엑스포는 한동안 이슈였고, 이런 게 정말 세상에 나올까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래의 시간, 상상을 말했던 게 현실이 되고 있음을 증명하던 시간.

 

* 2002년 월드컵.

제희가 한밤중에 편의점을 돌면서 경험했던 일(?)은 아마도 사실일 거다. (편의점마다 달랐을 수도 있으니 그건 알아서 판단하시고) 그 당시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엄청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 부분 읽으면서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제희의 표정이 그려져서다. 아, 도대체 몇 군데를 돌았을까? 그래도 무책임한 녀석은 아니어서 좋네.

2002년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일어났던 시간인 듯하다. 그 시간을 지났던 모든 사람, 특히 스물여덟을 살았던 이들에게 더욱 공감하는 이야기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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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송지성 지음 / 로코코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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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외로움이 거둬지는 시간... 『20일』

 

외로운데 외롭다고 말하지 못하는, 외로울 텐데 외롭지 않으려 애쓰는, 외로우면 안 될 것 같은 외로움. 말이 좀 안 되나? 그럼 이런 거. 외로움이 너무 익숙해서 외로운데 외로운지도 모르고, 외로움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마음. 『20일』일 속의 인물들에게 그런 걸 봤다. 섬으로 밀려 들어온 애희에게, 섬이 싫어서 떠난 윤기에게, 섬의 모든 것이 가족 그 자체라 여기며 사는 어매, 아재들. 각자의 외로움에 치여 그 외로움을 묻어버리거나, 서로의 외로움을 똘똘 뭉쳐 없애버리거나...

 

외로움의 곁에 있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사무치게 이기적인지. 전염병처럼 퍼뜨려 놓고 수습은 하지 않는 그런 이기적인 외로움. 윤기는 새벽녘 나가는 아배의 등에서 그 모습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 (368페이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윤기는 섬으로 다시 들어왔다. 다음 배가 들어오면 나갈 거다. 지긋지긋해서, 미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섬을 떠났는데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 온 동네의 어매 아재들이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했다. 아니다. 그들이 상주 같았다.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온 사람들이니 이런 장례가 낯설지 않다. 그 풍경 속의 낯선 여자, 애희. 모두가 나이 든 사람들뿐인 그곳에 젊은 여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조용하게 움직이면서도 그 흔적을 남긴다. 관심 없다. 상관도 없다. 이 섬에도 그 여자에게도. 그런데도 자꾸만 윤기를 끌어당긴다. 어매 아재들의 정이, 애희의 이상한 흔적들이... 닷새에 한 번 들어오는 배. 그 배를 놓치면 다시 닷새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섬에서는 그의 삶이 없다. 고기를 잡고, 어망을 손보며 보내는 하루, 바다로 나간 배가 제대로 돌아올까 걱정하면서 부둣가를 서성이는 불안함 따위 겪고 싶지 않은데, 뭔가가 자꾸 윤기를 붙잡고 있다.

 

아버지가 남긴 한 문장, 스무날을 섬에서 지내고 가라는 말. 그 말을 지키려고 했던 건 아니다. 처음 들어와서 닷새만 지나면 바로 나가려고 했다. 미련도 없을 거로 여겼다. 한 번 놓치고, 두 번 놓치고... 그렇게 쌓여 스무날을 섬에서 보냈다. 스무날이 지나고 윤기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숨은 것처럼 섬으로 들어온 애희가 윤기에게 전하고 싶은 건 뭘까.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이해하고 싶지 않던 것들이 무엇을 보여주게 될까.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일까. 애희가 윤기를 향하게 하는 무엇, 윤기가 애희에게 향할 수밖에 없던 것은. 민철 아재가 배에 그린 그림이 그의 진심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 그림을 보고 단번에 알아챈 윤기처럼, 윤기를 그 배로 데려가 보여주는 게 마치 자기 할 일이었다는 애희의 표정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왜 그토록 모른 척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 마음을 읽어도 의미를 담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배가 싫어 떠났고, 무엇도 남겨진 것 없을 거라 여겼던 섬이 싫어 떠났는데, 왜 자꾸 다른 감정이 침투하려는 것인지 감당할 수 없어서 화가 나서일지도. 그래서 다 모른 채로 떠나고 싶었을지도...

 

참 이상도 하지. 그런 마음으로 있을 때마다 자꾸 다른 게 들러붙어 감정을 하나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미우면 미운 채로 남겨두지, 왜 자꾸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 미처 듣지 못한 말을 굳이 듣게 하려 애쓰는 사람들의 진심이 보이지만, 그건 그 과정을 몰랐던 사람들이 부리는 오지랖 아닐까. 이 부분에서 나는 어느 작은 마을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정을 나누는 거라는 이유로 타인의 삶에 온갖 간섭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에 화가 났다. 나는 정말 이런 거 싫은데. 가깝게 지낸다면서 거리감 제로인 삶을 강요하는 분위기. 고립된 곳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 그런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쌓인 삶의 흔적들일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의 삶이다. 적당한 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믿는 나에게 그 섬의 분위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윤기가 섬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보기를 방해하는 많은 것 때문에.

 

어쨌든 이야기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애희와 윤기의 로맨스가 이루어지는 건 당연해 보였다. 섬으로 들어온 여자와 잠시라도 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남자의 만남이 '민철 아재'라는 매개로 무슨 운명처럼 엮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나온 결말이다. 이 소설은 오히려 그 과정과 시간의 흐름에서 매력을 뽐낸다. 취향이 아니면 읽기 힘든 소설인 듯도 하다. 이 책을 2주 동안 읽었다. 처음에는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읽다 보니 온갖 감정이 밀려들어 페이지를 더디게 넘기고 있었다. 애희의 사연, 윤기의 분노, 어매 아재들의 팍팍한 삶,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묶은' 것처럼 보이는 섬. 이 섬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까 궁금해하면서 읽게 된다. 바닷바람과 바다 냄새나듯 들리는 어매 아재들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가, 등만 봐도 그 표정을 아는 섬사람들의 혜안에 고마웠다가, 고립되어 보이는 섬이라는 공간에 답답했다가... 그런데도 결국은 미워할 수 없는 그들 삶의 방식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관객이 거의 없는 상영관에서 단편 영화 한 편 보고 나온 기분이다. 장르소설이 아니라 일반소설로 만났다면 더 만족했을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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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어 줘
이노 지음 / 마루&마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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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봐... 『거기 있어 줘』

 

 

불가능하기에 기적이라 부르는 일. 그중 하나가 시간의 회귀 아닐까.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끔 우리에게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것들. 늘 '만약에' 라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간을 움직이고 싶은 순간이다.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가는 시간을...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시작하는 많은 것으로 현재의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해 본다. 그러기 위해, 그러고 싶어서 가정하는 거니까. 지금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란 가정을 품고 살기도 한다. 이경은 좀 반대였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우연(?)한 사고가 그녀를 십이 년 전으로 되돌려 놨다.

 

죄책감과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품고 살면서, 마음을 어느 하나로 붙잡을 수 없는 상태로 하루를 버티는 이경과 승현. 스물아홉의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겪는 현재가, 사랑이 불행하다. 보이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면서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고통스러운 사이. 열아홉의 겨울, 이경의 오빠 태주가 죽었다. 그 슬픔으로 엄마가 죽었고, 그 사고로 승현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렇게 십 년을 버텨온 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마음과 현실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물아홉의 이경에게 사고가 났고, 승현은 울부짖는다. 그리고 눈을 뜬 이경은 열일곱의 봄을 다시 시작한다.

 

이미 한 차례 바뀐 과거부터 시작해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돌아온 현재의 상황이 달라지는 만큼 그녀는 안도했다. 이미 바뀌어 버린 과거는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다른 미래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59페이지)

 

호기심이 충분히 일어날 이야기의 시작이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펜던트. 소중한 사람이 주고 간 작은 물건 하나에,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지만, 아이처럼 동화처럼 바라는 순간 기적은 일어난다. 없었던 일로 해줘...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던 간절함을 이루어진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던 외침을 들은 누군가 그 소원을 이뤄준다. 자, 이제 시점은 되돌렸으니 모든 것은 이경이 하기에 달렸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그 장면을 바라는 그녀가 만들어낼, 다시 시작된 시간을 어떻게 그려질까.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처음 보는 소재도 아니 건만, 그 뻔한 설정에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한 번쯤은 간절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일이라는 것. 처음 불행의 시작을 놓친 시점으로 돌아가 이경이 되돌려놓을 것들을 궁금하게 한다. 이경이 어떻게 그 불행을 막을 것인지, 이경의 바람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진 않을 텐데 이미 한번 만났던 인연들이 서로를 다시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한 것들이 넘쳐났다. 특히 태주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 이경과 승현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서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간다.

 

한번 살았던 스물아홉 해의 시간과 다시 살아가는 스물아홉 해의 시간이 비슷한 듯 다르게 흘러간다. 아무도 모르는 일은 이경 혼자만 알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에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이경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동안 불행했던 모두가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믿음으로 다시 오늘을 산다. 하나씩 변한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삶의 자세가 변하고, 불행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좀 더 현명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안심을 찾아간다.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 또 한 번 그녀를 찾아온다. 이미 한 번 끝난 인연이 당연한 것처럼 시작된다. 정작 이경 자신이 챙기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보게 되는 시작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처럼 존재했던 사람, 상대의 마음을 듣지 않은 채로 최선이라 여기며 선택했던 일들이 다시 보인다. ‘정말,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까?’ 싶은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야 얻는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늘 그러지 못해서 우리는 만약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품으며,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며 잠깐 위로받는다. 그럴 수 없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거나, 추억 같은 시간을 한번 곱씹어 보고 다시 으쌰으쌰 시작하는 다짐의 주문이 필요할 때 만나면 좋을 이야기다.

 

예상하지 못했던 태주와 승현의 브로맨스가 즐거웠고, 걱정스럽고 두렵지만 결국 진심이 이긴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진리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그대로 증명해 보이는 소설이다. 물론, 당연히 설레게 할 로맨스는 기본이다. ^^ 생각해보니 이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밝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이야기들이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가 좋았던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다 읽지는 않았을 텐데... 다음에 만날 이야기는 또 어떤 설렘을 줄지, 어떤 감정을 끌어내어 공감을 만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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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클래식
조수현 지음 / 청어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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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두 남자로 구성된 이 소설의 시작에서 얼핏 지저분한 삼각 스캔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텐데, 의외였다. 내가 접한 뻔한 흐름으로만 간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타난 낯선 소녀 설리. 이 땅의 끝 히말라야에서 왔단다. 열여덟의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르고 오직 노래 하나만을 부르기 위해 무대에 섰다. 모든 것이 이국적으로 보이지만 그녀에게 흐르는 피는 지극히 한국적이고, 또 사랑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조용히 이어지는 한 남자의 고백 같은,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

고등학교 동창이자 서로 다른 매력으로 그려진 주인공들이 여기 있다. 학교의 유명한 야구선수 이선우는 메이저리그로 인생이 정해졌다. 학교의 핵주먹 강민은 울분을 참지 못한 결과로 자퇴를 선택했다. 그 사이의 신소라. 이선우의 여자친구이자 강민의 짝사랑의 대상인 그녀. 곧 스무 살이 되고 성인이 되어 마음껏 꿈을 펼치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삶을 살아오고 사랑을 품어왔는지, 이십여 년의 간극을 둔 이야기가 시작된다.

 

저자의 이력을 먼저 보았던 탓인지, 소설을 소설로 읽으면서 영화 같은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여기서 이런 장면, 이런 표정, 이런 흐름으로 다음 장면을 그리면서 읽게 되곤 했다. 선입견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어떤 부분은 예상했던 그대로,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의외의 전개로 조금 놀라기도 하면서 궁금해졌다. 저자가 풀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그대로 전해 받고 있긴 한 건가 싶은 궁금증, 혹은 염려 같은. 지독한 사연을 가진 이들로 묶인 흐름이, 마지막 순간에 보여줄 게 뭔지 확인하고 싶어서 끝까지 읽게 되는데, 결국은 '아, 그렇구나.' 싶은 인정. 그게 좋은 거라면, 좋은 거겠지 싶은 이해.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러운데, 매 순간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선택에 있어서 반반의 시선이었다. 이해와 불이해. 그리고 이어지는 인생의 다음 페이지가 삶의 아련함을 불러올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들이 하는 사랑이 그렇게 흘러갈 때마다 기억에, 추억에 묻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도 들고... 고전, 혹은 올드한 느낌의 옛것을 통칭하는 클래식이란 단어를 사랑에 붙인 저자의 의도가 뭔지 알 것도 같다. 첫사랑, 옛사랑은 추억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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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청혼
전은정 지음 / 청어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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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넌?! 『발칙한 청혼』

 

 

사람을 보는 기준, 특히 이성을 보는 기준이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발칙한 청혼』의 여주인공 해진은 대놓고 외모라고 한다. “미남이시여, 나와 결혼해 주세요!” 남자를 보는, 선택하는 기준 1순위가 잘생긴 남자란다. 숨기려고 해도 진심은 튀어나오기 마련. 많은 계획을 뒤로하고 지금 그녀가 선택해야만 하는 건 누가 자기와 결혼해줄 것이냐 하는 것. 그래서 여러 후보를 두고 고민하다 청혼을 하러 간다. 냉미남이라 불리는 정강현에게.

 

감히 누굴?! 어림없지. 결혼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생각했던 강현에게 해진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지. 그녀가 강현에게 거절당한 청혼을 뒤로하고, 마음 탁탁 털어 내고 2번 후보에게 청혼하러 가는 길을 강현이 막는다. “너, 우리 영감이랑 무슨 거래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할아버지가 이런 통첩을 날릴 수가 없다. 분명 뭔가 있다. 외모로 남자를 고르는 해진이란 맹한 여자와 할아버지 사이의 뭔가를 찾아야 한다. 어찌 됐건 지금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그녀와 결혼하는 것. 이 결혼은 어디로 갈 것이냐, 산? 바다? 어쩜 하늘의 구름 속으로 갈지도...

 

소개글을 보고, 그녀의 청혼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했는데 당연한 순서처럼 강현은 해진과 결혼한다. 그 과정이 좀 어이없지만 뭐, 두 주인공이 그렇게라도 만나서 알콩달콩할 거라니까, 끝이 좋으면 그냥 좋은 것. ^^

 

시작이 경쾌했다. 물론 이 소설은 로맨스이니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펼쳐지느냐 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외모로 선택한 남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여자가 결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내가 궁금했던 건 로맨스 외에 작용하는 두 사람, 특히 여주인공 해진의 배경이다. 처음 프롤로그 세 편을 잘 읽고 넘어가야 이야기의 전개가 또렷하게 보이는데, 이 부분에서 이 소설이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이 자리의 너는 누구니?’라고 묻고 싶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였든 그녀가 바라는 일이 완벽하고 통쾌하게 흘러가기를 바라게 되니까.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 해결해야만 하는 일 앞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사람들까지 유쾌함을 끌어내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더했던 소설이다.

 

작가의 전작을 통해 만났던 분위기가 이 소설에서도 약간 느껴진다. 시대물과 현대물이라는 차이만 조금 있을 뿐이니, 재밌게 읽는 데 큰 무리는 없다. 로맨스소설이 아니라 한편의 추리물로 나왔더라도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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