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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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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살아갈 힘을 주는 맛, 상처 난 마음을 다독이는 맛 21인의 작가가 말하는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맛을 읽었으니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여야겠다.

나에게 소울푸드는 상처난 마음을 다독이는 맛으로 남았다기 보다 살아갈 힘을 주는 맛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나 후였나 기억이 가물하지만 모내기 철이었으니 계절은 알만하다. 기계화가 되기 전이라 못줄을 잡고, 손으로 모를 내던 때였으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논으로 불려 나갔다. 내게 맡겨진 일은 양은 주전자에 되들이 막걸리를 받아 논일꾼들에게 가져가는 일이었다. 찰랑찰랑한 막걸리 주전자는 흘리지 않고 들고 가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찌됐든 나는 하루에 두어번씩 막걸리 주전자를 날랐다.
모내던 아저씨들이 뱅뱅도리 대접을 돌려가며 먹고 나면 나는 냉큼 그 주전자를 다시 들고 일어섰는데 그 때 주전자 바닥에 남은 막걸리가 내 몫이었다. 미리 먹을 수는 없어서 남은 것을 홀짝거렸던 것이 내가 투정없이 막걸리 주전자를 날랐던 이유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바쁜 농사철에 나도 밥값을 했다는 자찬이었을 것 같다. 그게 술 심부름이었으니 상일꾼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웅덩이에 술동이를 안치고 바가지로 퍼주던 차갑고 달콤했던 막걸리 맛을 다시 보지 못했다.

맥주마시라는 잔에 어찌 소주를 담아 마셨는지 시작은 알 수 없다. 강릉 중앙시장 순대골목에서 처음 순대국을 접하며 마시던 소주가 주량이 늘어 지방 주간지 기자로 일할 때는 밥먹는 자리에서는 밥보다 먼저 맥주잔에 따른 소주가 한순배 돌았다. 찌르르 할 때 그 느낌은 지금도 짜릿하다. 그렇게 시작한 술은 봄이면 뭉글뭉글한 바람과 벚꽃 때문에, 여름에는 비 때문에 가을에는 붉은 기운 때문에, 그리고 겨울에는 눈 때문에 해도 떨어지기 전부터 시작되기 일쑤였다. 마감 끝내고 시작한 낮술은 한 밤중에는 눈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경포 입구에 있는 카페 박스에 우리를 잡아두었다.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보다 동료들과 어울리고 있을 때 나는 덜 무서웠다. 그 때 사람들은 이제 전혀 소식을 모른다. 그 중 한 선배는 서른이 되면 자살을 하겠노라고 말했는데, 언젠가 나는 인터넷에 그 선배 이름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살아있다면 뭐라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손톱을 물어뜯던 버릇이 있었던 선배다.

지방 주간지 일이 내 일이 아닌가 싶을 때 뭘하고 살아야 평생 일하고 살 수 있을까 해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현대시를 전공하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현실인식은 한 치도 발전하지 못한 채 제자리다. 그 공부의 대가로 내가 얻은 최대치가 학과 조교였다. 계약직 3년 동안 나는 버는 돈의 절반을 술값으로 썼다. 학교 근처 단골집도 생겨서 우리 패거리가 뜨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덜마른 오징어가 써비스로 나왔다. 술을 먹으면서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오징어가 내 입으로 들어간 건 글쎄, 한 마리나 되었을까.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한 건 그날 저녁 또다시 마실 술 때문이었을까. 그 때 고전을 전공했던 내 후배는 다섯 개 들이 요구르트를 최고의 해장으로 여겼다. 나는 생으로 굶는 것이 해장법이었다. 오백씨씨 생맥주의 맛보다 그 숱한 날들 어울렸던 후배들에게 내가 술값을 내는 것으로 낙을 삼았던 때다. 유독 마음이 통했던 후배는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다가 아차 싶어 반성하고 연락했더니 이제는 그녀가 뭔가 화가 났는지 영영 무소식이다. 결혼식에도 서로 오고 갔는데, 그 후 몇 번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다. 수신확인은 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그녀가 내게 뭔가 화가 났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지금도 가끔 그녀가 이제는 나를 용서했을까 생각한다. 아니면 아마 그녀 성격에 나 같은 언니는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거다.
그렇게 술을 먹고 나는 더러 음주 운전을 했다. 열두시만 넘으면 시내 교통체계가 작동을 멈추고 차도 거의 없던 때의 일이다. 가장 위태로웠던 한 때였다. 술이 위험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그를 만났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강의를 오던 그는 슬쩍 내 책상에 휴게소에서 따온 꽃송이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 꽃을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곳에 핀으로 꽂아두었다. 그 꽃이 마를 때 그는 또 다른 꽃송이를 따다 주었다.
어느 날은 마지막 강의로 늦은 시간 돌아오는데 어쩌다 한 송이가 피었는지 모르겠다며 품 속에서 백합 한 송이를 꺼내놓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커피 두 숟가락에 프림 두 숟가락을 넣은 커피를 내놓는 것 뿐이었다.
매화를 보러 난설헌 생가에 후배 둘과 그와 함께 들렀다. 홍매, 백매 아래서 꽃향기에 취해 내가 사들고 간 ‘카스’캔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포 호수에서 비오리가 자맥질 하는 것도 보고 경포 바닷가에서 회에 또 ‘카스’를 마시고 그러다 또 다른 후배가 오고, 날은 저물고, 먼 바다에 오징어배는 뜨고 ‘카스’는 벌써 몇 병째 비워지고 봄바람은 뭉클뭉클 다리를 감싸오고 우리 모두 즐겁게 취해 갔다.
그와 나는 주문진 바다를 보면서도 ‘카스’를 마셨다. 어느 날은 그가 쓴 시를 보여주었고 다음에는 내가 답시를 적어 보여주며 또 ‘카스’를 마셨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바쇼의 ‘하이쿠’를 알았고, 동해 바다에도 밀물썰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바닷물고기가 고작 오징어 고등어 정도라면 그는 주문진 수산시장에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행했던 바다 낚시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카스’를 마셨다. 그때 처음 내가 조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거기는 조개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부도 바닷가에서 조개를 먹을 때 나는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날도 나는 ‘카스’를 마셨다. 그를 만나고 나서도, 그 해 겨울 학기가 끝나면서 그가 더 이상 강릉으로 강의를 오지 않게 된 뒤부터도 나는 ‘카스’를 마신다. 카스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를 생각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카스를 마시기 시작한 건 오로지 그 때문이다. 서른을 한두해쯤 남겨 두었고 나는 한 두 번 사랑에 실패했고, 나는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을 사람이 못된다고 마음을 접을 때 그는 나한테 단 한번도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나에게 꽃을 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사랑이었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 여자가 만나는 일은 사랑 말고도 또 있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안만나는 것도 있지만 그저 ‘카스’를 마시면서 꽃 얘기를 하고 바다 이야기를 하고, 시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되는 만남도 있다.
그 때 마신 ‘카스’는 추억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나이를 먹어도 설렐 수 있는 추억 한 바닥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카스’가 있었다.

황교익의 말처럼 ‘나는 내 영혼을 걸고 집착할 만한 음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딱히 소울푸드란 게 없’다.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10여 가지 음식 안에서 술을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삶이 큰 굴곡 없이 밋밋해서 그럴 수도 있다. 목숨 걸만한 절박한 순간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시쓰기를 포기해야겠다고 재주 없음을 정당화시키는 짓도 했다. 어쨌든 난 그저 그런 삶을 지금도 살고 있다. 그저 그런 사람에게 그나마 얘깃거리를 있게 해준 막걸리, 소주, 생맥주, ‘카스’가 좋지 아니한가. 시쓰기를 멈추었지만 ‘카스’를 마시는 일은 내가 마지막 까지 그만두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일이다.

이 책 <소울푸드>가 유용하다면 독자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신의 삶에도 이야기가 있음을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음식은 본능에 가깝고 본능은 가장 나다운 것의 본질일 것이다. 그 음식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면 나는 그 순간 가장 본능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순간 가장 나의 모습이었던 그 때, 그 기억이 유효하다면 종류나 개수에 상관없이 그것이 나의 ‘소울푸드’이리라.
이 책 리뷰식탁에 다양한 소울푸드가 차려지기를 기다려본다.

 

추신) 글쓴이들이 쓴 소울푸드 이야기 보다 글쓴이를 소개한 글이 더 좋았다. 더러 본인이 직접 쓰기도 하고 누군가 써주기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그 짧은 글 속에서 찾아보는 맛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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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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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는 방법>을 읽다보면 책 중간도 못가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앞서 발표한 <책을 읽는 방법>을 사서 읽어야 할 것이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꾸 언급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또다시 읽어야 할 책을 만나는 일 또한 책을 읽는 방법으로 소개된다. 책을 ‘잘’ 읽고 싶은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히라노가 말하는 <책을 읽는 방법>이 도움을 줄 것 같다. 핵심은 슬로 리딩(천천히 읽기)이다. 속독을 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걱정하면서 제시한 책읽기 방법인데, 결국 보다 ‘앞으로’가 아니라 보다 ‘깊게’로가 슬로리딩의 목적이다. 

“무작정 활자를 좇는 빈약한 독서에서 맛을 음미하고 생각하며 깊이 느끼는 풍요로운 독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 10쪽>

<소설 읽는 방법>은 소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히라노의 생각과 실천이다. 그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메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에 대해 생각하며 읽기를 권한다.

메커니즘은 소설이 소설로서 기능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면 소설이 재미있고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작품이 작가의 인생에서 어떤 타이밍에 나왔는가(발달), 이 소설이 사회와 문화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가(진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 나와 작가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기능) 이 네 가지 방식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한 권의 소설 무게가 달라지고 책 읽는 속도는 자연스럽게 늦춰질 것이다. 

소설 한 권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적인가 의문을 갖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시간 아까운 소설을 읽었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자신들이 책을 잘못 읽은건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내가 그렇다. 히라노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작가여서 그런지 소설 작품을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인상이 짙다. 소설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생각 속에서 창조된 세상이다. 거기에 잘못된 배치는 없다. 다만 독자들이 천천히 읽지 않고 꼼꼼히 읽지 않아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내 소설읽기, 혹은 책읽기가 무엇이 문제인지 되돌아 봐야 했다. 은근히 반발심도 생기는데, 그는 ‘창조적 오독’으로 독자의 권리를 인정해 버린다. ‘창조적 오독’은 할 수 있으되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작품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작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얼마나 사랑하는 작가인지 알 수 있어서 그가 제시하는 소설 읽는 방법을 적극 수용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딴지를 걸고 싶어도 작품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소설은 그림이나 조각 등과 달리 감상하는 데 하루든 일주일이든 반드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예술이다. 첫 행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행까지 가닿은 시점에야 비로소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게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아무리 다양한 사건들이 터져도 혹은 옛날 일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망상해도 우리는 담담히 현재를 살아가며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끄덕끄덕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은 화살표를 따라 우리는 감춰진 궁극의 술어 ‘......이다’를 찾아 울고 웃고 화내고 생각에 잠기며 마지막 한 행까지 가려고 한다.“

(<소설읽는 방법> 23쪽~30쪽)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거대한 화살표에 이르는 과정이 소설이다. 독자는 화살표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찾아가야 한다. 
 

소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받아들였지만 오늘 듣는 히라노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좋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소설을 읽을 때 좀 더 바른 자세로, 좀 더 천천히 생각하며 읽게 될 것이다. 저자도 고백하지만 소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는 일은 어렵다.

그래도 이 책 실천편에서 저자가 구체으로 작품의 일부분을 예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읽어주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한 권의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독서법으로 그 소설을 대해야 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가 작가의 작품 속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읽으면서 그 소설에 맞는 독서법을 찾아 낼 때 작가와 작품, 독자의 행복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설 읽는 방법>이 없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한 명의 독자와 만나는 순간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책이 되기도 하고 특별한 책이 되기도 하는 그 순간이 책과 독자의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한 책들 때문에 괴로웠다. 나의 모자람으로 내게 오지 못한 그 책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책 때문에 괴로운 경험을 다 하다니.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도 눈이 마주칠까봐 모른 척 하고 있다.

분명 한 건 나는 많이 읽는 것보다 천천히 읽기를 해야 하는 독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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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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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이 때의 ‘책’은 내용 보다는 ‘사물’이 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은 인격을 갖는다. 마치 생명이 있어서 지고 태어 나는 것 같다. 안타까운 건 저자가 이야기 하는 책들이 지금 우리가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구병 등이 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한 <숨어사는 외톨박이>는 어쩌면 더 이상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할 것만 같다. 이렇듯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래서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는 더 애절하고 그(책)를 다시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에 쉽게 공감이 간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책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을 쓴 사람의 책장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내가 읽은 책을 그도 읽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독자는 내 책꽂이에 책 하나를 더 꽂기도 한다. 그런데 <오래된 새책>은 기쁨 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 이토록 읽을만한 책들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책들을 알아보지 못한 시력에 절망하고, 어찌 어찌 해서 구한다고 해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 오로지 필요에 의해 헌 책방을 뒤져 고가에도 구입하는 책 수집가들도 있지만 후일, 교환가치를 생각해서 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지극한 책 사랑을 실천하는 수집가라는 확신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절판된 책이 다른 옷을 입기는 해도 오래된 새책으로 출간된 책들이 적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신영복의 <엽서> 영인본, <서재결혼시키기>, <채링크로스 84번지> 같은 책을 샀다. 물론 다른 책들도 알아보았더니 가격이 내 수준을 넘어서서 저자의 말을 확인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추억’을 자필로 읽는 맛이 특히 좋았다. 한글자 한글자 자필에 담긴 선생의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오래된 새책>을 읽고 <엽서>를 사게 된 것이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다. 

많고 많은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중에서 이 책만의 매력을 꼽으라면 ‘책’자체에 얽힌 사연들이다. 저자의 사인본이 남겨진 책이 어쩌다 헌 책 수집가의 손에까지 왔을까, ‘다 읽고 빌려달라’는 메모를 적어 친구에게 선물한 책이 이 세상 어느 구비를 돌아 저자에게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저자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듣다보면 책은 더 이상 글자가 인쇄된 종이 뭉텅이가 아니다. 정말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하고 나면 책을 얻은 기쁨도 있지만 한 때 이 책의 주인이었던 그가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책을 넘어 그 책의 임자였던 사람까지 더불어 생각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헌 책은 그저 낡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아니다. 헌 책이 되기까지 그 시간이 더해져서 새 임자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어쩌면 헌 책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매력 때문에 헌 책을 수집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저자는 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안다. 그래서 아깝지만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내 책을 내어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초판이니 재판이니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값나갈 만한 책들은 없다. 여전히 지금도 잘 나오는 책들이다. 물론 몇 권 정도는 절판이 되었다. 나또한 그 좋은 책이 어쩌다 절판이 되었을까 의아하다. 그래도 한 권 한 권 그 책을 샀을 때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오래전에 조카 녀석에게 빌려주고 못 받은 책이 생각나서 무척 아깝다. 골라서 준 책이었으니 내 책 목록에서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내 생에 잊지 못할 그 책”들일 것이다. 이걸 어떻게 돌려받나 조금 심란하다. 아니, 많이 속상하다. 신영복의 <사람아, 아, 사람아>도 끼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우라질.

내가 가진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김승옥의 단편집 <야행>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을 다시 읽어보았다. 연도를 보니 내가 두 살 되던 해 출판되었다.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내 책꽂이에서 빠지지 않은 책이다. 누렇게 바랬고 냄새도 찐하다. 오래된 책 냄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고향집에 어쩌다 그 책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구나 자기만의 책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새책>은 “오래되고 구할 수 없는 책들 모두가 ‘오래된 새 책’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바램에 동의하면서 아울러 내가 갖고 있는 내 책들을 오래된 벗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책 수집가는 책을 아주 사랑해서 그(책)를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우선 내 책들에 대한 내 사랑부터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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