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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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소란과 애써 나를 분리하며, 편하지만은 않은 스툴에 앉아 뒤로 넘어지지 않게 - 도루하려는 주자를 흘낏 흘낏 견제하는 투수처럼 - 가끔식 주의하며 책장을 넘기고 있다. 크눌프를 따라 온 동방 순례의 막바지를 그렇게 읽고 있다. 현실의 인물과 소설 속의 인물이 또 다른 소설 속에서 마구 등장하고 자세한 정보에 대한 질문을 무기력하게하는 고유 명사들이 가득한 은유에 지쳐있었을 때, 동방 순례의 후반부는 낮은 신음을 내게할 만큼의 반전과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는 명징한 전개로 속도를 내고 있다.

발 마저 까딱거리며 얼마남지 않은 책의 종료를 보며 녹녹치 않은 그리고 지루했던 작.업.을 곧 마치려는 어느 수공업자처럼 기지개라도 한 번 시원하게 펴보려는 순간이다.


누군가 나의 어깨에 - 투명한 징검다리라고는 절대 없을 것 같은 벼랑의 끝으로 자꾸만 내몰려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를 잊어버린 내 어깨 - 가만히 그리고 부드럽게 하지만 두툼한 아버지의 손처럼 확고하게 손을 얹는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토닥토닥거려준다 - 거친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자꾸만 틀렸던 문제의 답을 이제야 바로 썼다는 것을 알리는 먼 북소리처럼.


내 눈으로 활자들이 온기를 띠며 들어와 망막을 지나 각 뇌들을 거쳐 딱딱한 껍데기에 둘러싸인 마음으로 전해진다.

그 검은 활자들은 말한다.


"고통은 너무 커지면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지요. 형제 H는 시험을 겪으면서 절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삶의 덕을 갖추고, 정의를 갖추고, 이성을 갖추고 극복하고자 하고 또 삶의 요구들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든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동방 순례 P 228 - 229


"이러한 절망의 이쪽 편에는 어린아이들이 살고 있고, 저쪽 편에는 깨달은 자들이 살고 있지요."

동방 순례 P 229


주위와 애써 분리된 스툴 위에 앉은 나의 거친 뺨 위로 맑고 온기가 확실히 있는 그리고 단 소금기가 있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통은 너무 커지면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지요. 형제 H는 시험을 겪으면서 절망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그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모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삶의 덕을 갖추고, 정의를 갖추고, 이성을 갖추고 극복하고자 하고 또 삶의 요구들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모든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동방 순례 P 228 - 229

"이러한 절망의 이쪽 편에는 어린아이들이 살고 있고, 저쪽 편에는 깨달은 자들이 살고 있지요."
동방 순례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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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04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로님의 서평 제목만 보고, 헤세의 <동방 순례> 서평인 줄 알았어요. ㅎㅎㅎ

초딩 2015-07-04 21:38   좋아요 0 | URL
이 책이 헤세의 중기 작품인 ˝크눌프˝랑 유리알 유희의 선행작인 ˝동방 순례˝를 묶은 책이도라구요 :) ㅎㅎ. 책 표지에는 동방 순례가 언급도 안되어 있는데말이죠 ㅋㅋ

비로그인 2015-07-0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작품세계를 이해해 보고 싶어서.. 헤세의 그림전도 다녀와 보았지만...., 저는 헤세와 가까워지는 일에 실패 했지요...ㅜㅜ흑흑
아후~ 데미안이나 크눌프와 같은 인물을 현실에서 만난다면 저는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헤세의 작품에 등장하는 `초인`의 경지에 이른 그런 인물들이 저는 좀 거북하더라고요..^^;;

그나마 덜 직접적이었던 동방순례는 그래도 좀 좋았습니다.(응???ㅎㅎㅎ) ^^

초딩 2015-07-07 10:09   좋아요 1 | URL
:) 아주 예전에 - 좀 어릴 때 - 수레바퀴 밑에서와 유리알 유희를 읽고 엄청난 사고의 늪에 행복하게 빠진적이 있습니다. 정작 데미안은 읽었는지 기억이 없구요 :)
어떻게 허우적거렸는지 기억은 없는데 마냥 좋아했었습니다. 헤세를. :) 지금은 그 때의 생각과 감정을 반추해서 끄집어 내보려고 다시 책을 들었구요. 이럴 땐 인간의 착한 망각 장치가 좀 얄밉습니다. 양키처럼 봐주는게 없으니 ㅎㅎ
헤세는 동양인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백인이긴하지요. 아무튼 :)

비로그인 2015-07-08 03:1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혹이 아로님께서도, 현대문학의 책으로 구입하신 이유가....^^????

초딩 2015-07-08 03:45   좋아요 0 | URL
북플에서 보고 구매해서요. 땡스투도 드릴겸 ㅎㅎ :) --;;;

초딩 2015-07-08 11:32   좋아요 0 | URL
아 그리고 권혁준씨의 카프카 번역이 아주 훌륭하고 또 그분이 더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댓글을 어디서 봐서 냉큼 구매했죠 :)

비로그인 2015-07-08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로님께서도˝의 ˝도˝는 아로님 역시 번역자`권혁준`을 찾아 책을 구입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때문이었지요:-)
`소송`의 초기 번역 제목은 `심판`이었잖아요? 저도 (다수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소송`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 그 덕분에 권혁준 번역가를 신용하게 되었다는 아주 씸플한 구입 비하인드 스토리랍니다:-) 저도 저분이 더 많은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문장이 좋아요.^^

안그래도 느닷없이 생겨난 [마이리뷰]와 관계없는 그 땡쓰투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아로님이셨군요. ^^ 마음이 훈훈합니다.(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