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을 시작한지 13년이 다 되어 갑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골이 났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일들이 있네요. ㅎㅎㅎ
최근에 들어간 모임에서 어떻게 해서 모임을 주도하게 됐는데,
이 모임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임 중에서 뭔가 해야할 것이 많네요.
뭐하고 뭐하고 뭐하고...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모임을 자유롭게 해왔고,
거기에 길들여줬는지 알게 됐네요.
저는 자유가 좋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게 너무 많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모인
독서모임만큼은 조금 자유로우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생각보다 이 모임은 무언가 '형식'이 많네요.
형식도 중요하죠.
그런데 형식보다 중요한 건, 모임 그 자체가 아닐까요.
아, 제 말이 무조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게 중요한 건 그런 형식이 아니라 모임 그 자체 같네요.
내가 모임에서 어떤 말을 하고, 내가 모임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우는가 같은.
그런 모임 자체가 중요하지 모임을 하기 위한 형식에 집착하는 것은,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안 드네요.
물론 모임을 이끄시는 분들은 제 생각 따위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죠.
그래서일까요? 저는 왠지 이별을 할 날이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식에 매달리다 보니 자유롭고 싶은 제 욕망이 저를 부채질하네요.
달아나자고.
네, 저는 달아날 겁니다. 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죄송합니다. 떠날 예정이라서.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이런 인간이라서.
그럼 앞으로의 이별을 예상하며 새로운 모임 분들 바이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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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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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사소한 부탁이지만, 이들 지엽적인 부탁이 어떤 알레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95)

<사소한 부탁>은 제 입장에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칼럼을 묶은 부분과 시,소설,사진,영화에 관한 비평을 묶은 부분으로. 칼럼을 묶은 부분은 <밤이 선생이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동시대의 사건이나 사고에 관련한 즉물적 시각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단순한 칼럼이 아니라, 프랑스문학을 읽고 연구하고 비평하며 자신만의 인문학적인 시각을 갈고 닦은 한 문학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인문학자가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인문학적 삶의 힘으로 써내려간 칼럼들은 <밤이 선생이다>처럼 깊이와 격조가 있습니다. 그건 황현산의 삶이 쌓아올린 깊이와 격조겠죠. 결국 황현산의 칼럼을 읽은 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황현산의 삶의 힘인 것입니다. 칼럼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입니다.

저한테 더 놀랍게 다가온 건 뒷부분의 비평입니다. 제가 요새 생각하는 게 비평에 관한 부분이거든요. 황현산의 비평이 제가 생각하는 부분을 잘 건드려서 놀랍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저는 황현산의 비평을 읽으며 게오르그 루카치의 명구가 떠올랐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소설의 이론> 중에서) 이 말을 저만의 방식대로 해석하며 제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루카치의 명구는 저에게, 전근대인들이 느낀 자연과의 친밀감,일체감이 가져다주는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감각을,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인들이 느낄 수 없고, 따라서 근대인들은 전근대인들이 느낀 행복감을 느끼치 못한 채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걸 비평에 적용해서 저만의 방식대로 해석해보면, 비평이란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근대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떠한 삶의 성좌를 그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을 수 있겠죠.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이 되는 컨텐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토대로 무언가 다른 자신만의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다른 삶의 지도를 그려나간다는 말은 자신의 의도했든 안했든 근대인이 잃어버린 전근대인의 감각이나 삶의 방식을 비평이라는 방식으로 새롭게 되살려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대인이 잃어버린 어떤 인간적인 감각의 회복이자 인간성의 회복을 비평이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그려내는 삶의 지도, 혹은 삶의 성좌가 힘이 있어야 겠죠. 힘이 있어야 전근대인이 잃어버린 그 무엇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그것은 근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힘을 줄겁니다.

저에게 황현산의 비평은, 황현산이 비평을 통해서 그려내는 자신만의 삶의 성좌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황현산의 비평의 언어 때문입니다. 또 비평에 황현산이라는 한 인물의 삶의 힘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문화 컨텐츠가 황현산이라는 인물의 삶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서, 그 인물의 언어라는 필터를 통과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펼쳐보이는 비평의 성좌는 우리 삶을 재구성하고 재창조하여 우리 삶을 새롭게 만듭니다.  삶을 새롭게 하기, 그러면서 잃어버린 과거의 힘을 복원하기. 황현산의 비평이 보여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의 개념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저에게 황현산의 비평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로 하여금 다시금 비평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으며 꿈꾸어 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만의 비평을. 나의 삶이 녹아있는, 나만이 줄 수 있는 삶의 힘으로 가득한 비평을. 물론 그게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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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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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색깔은 그 아이가 늘 지고 다녀야 할 십자가야.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야.(19)
과학적으로 보자면 인종 같은 건 없어, 브라이드. 따라서 인종이 없는 인종주의는 하나의 선택이야. 물론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한 선택이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야.(195)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일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죠. 인간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뿐입니다. 아마 미래가 이럴 거라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맞을 수도 있겠죠. 반대로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든 안맞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예측이 맞다면 그나마 안심을 하고, 예측이 안맞는다면 당황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이 삶의 조건을 어떤 인간도 피할 수가 없겠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이 2015년에 펴낸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에도 미래를 예측한 한 여인이 소설 초반부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스위트니스라 부른 이 여인은 자신의 하얀 외모와 달리 새까만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의 외모 앞에 당황한 그녀는, 아이의 생부가 확실한 하얀 남편이 그녀가 바람을 피었다며 집을 나가버리자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녀 자신의 피에 흐르는 흑인의 피와 남편의 피에 흐르는 흑인의 피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유전적 확률 때문에 위기가 닥친 그녀는, 자신의 삶대로 아이의 미래를 예측합니다. 흑인이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그녀는 세상이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 세상이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삶에 큰 족쇄를 드리웁니다. 피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지만 세상은 변하죠. 변화의 흐름이 더딜 수는 있지만 어떻게든 변하는 세상 앞에서 스위트니스의 예측은 실패합니다. 피부 때문에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믿었던 아이는 성장하여 화장품 회사에서 큰 돈을 받는 중역이 됩니다. 성장하여 어머니의 그림자를 덜어내고 스스로를 브라이드라 부르며 살아가는 여인에게 힘든 것은 피부색깔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드리운 삶의 그림자가 그녀를 힘들게 합니다. 어머니가 그녀 내면에 쌓아놓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 성장의 방식이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잘못된 예측이 부른 비극이죠. 소설은 브라이드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지 그려냅니다. 잘못된 예측이 부른 비극의 족쇄를 어떻게 브라이드가 끊어내는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실 스위트니스의 잘못된 예측은 그녀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건 스위트니스 세대라면 누구나 가지는 삶의 모습에 기반합니다. 흑인은 차별받고 성공하지 못하는 스위트니스 세대의 삶의 모습이 스위트니스로 하여금 자기 딸의 삶을 잘못 바라보게 한 것이죠. 브라이드가 벗어 던져야 하는 것은 전세대 삶의 가치관이 드리운 삶의 족쇄입니다. 자 만약에 이 소설이 이 인종주의적 삶의 족쇄에 매달려 있다면, 이 소설은 토니 모리슨의 여느 소설과 다름없는 소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인종주의적 삶의 족쇄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대 인간의 관계가 빚어내는 삶의 양상입니다. 인종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치중했다는 건, 저자인 토니 모리슨이 항상 천착하던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동시대 삶의 양상을 받아들여 한단계 나아간 소설관을 가지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건 소설적인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겠죠. 동시에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말도 됩니다.

토니 모리슨이 인종주의의 그림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소설을 썼다는 건 크나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가의 자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관으로 가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아흔에 다다른 노년의 작가가 이런 변화를 선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의 실례를 작가가 자신의 소설로서 보여준 것이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느릴 수는 있어도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변하고, 소설가도 그 변화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만약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그 세계만을 그려낸다면 그 소설의 가치는 둘째 치더라도 변화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소설가는 변하지 않은, 죽어 있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적어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변화를 받아들여 소설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스위트니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변하지 않고 죽어 있는 삶을 사는 스위트니스와 달리 브라이드는 그 족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삽니다. 이건 토니 모리슨과 이어집니다. 스위트니스의 삶을 지배한 가치관은 토니 모리슨의 삶과 소설관을 지배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브라이드를 통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브라이드를 통해 우리는 개닫게 됩니다. 앞으로 토니 모리슨의 소설도 그렇게 될거라는. 동시에 우리도 깨닫게 됩니다. 변화의 흐름 앞에서 우리 자신도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하든 못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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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
가지야마 도시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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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책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책벌레가 내 몸을 갉아먹어서 이젠 골수까지 파고들었지요. 하하하...(20)

무언가에 푹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저에게 질문을 한다면, 빠져든 대상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에 푹빠져 거기에 대해서 알아보고 최선을 다한다는 게 좋은 것처럼 느껴져서요. 하지만 푹빠져드는 것을 넘어서서, 미쳐서 자신의 영혼까지 파는 단계에 이른다면 저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까지 파는 단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빠져든 대상이 자신을 지배하는 상황이니까요. 내가 내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지배하고, 자신은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마약중독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요? 아니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만약 이런 상황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좋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쓴 <고서 수집가의 기이한 책 이야기>는 제가 위에 쓴 것과 성향을 가진 이 중에서 책에 중독된, 책에 영혼을 판,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960,1970년대에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 마쓰모토 세이초와 함께 그 당시 가장 많은 책을 팔았던 대중소설 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대중문학계에서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장르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잠시 사람들의 시선에 잊혀졌다 '고전부' 시리즈의 요네자와 호노부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의 미카미 엔의 의해 재발견된 이 책은, 이 장르의 고전이 되죠. 책에 미친 사람들이 나오는, 책에 얽힌 미스터리를 이야기하는 장르의 고전.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이 책은 책에 미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접고 나서 바라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 미쳤고 책에 빠졌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이야기에 다다르면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인간의 인육으로 책을 만들려는 집착에 빠져든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광기와 집착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면 이제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건 아니지 않나하고. 하지만 광기와 집착에 빠져든 사람이 멈출 수 있을까요? 멈출 수 있다면 광기와 집착이 아니지 않을까요? 저는 생각해봅니다. 광기와 집착이 극한에 다다르면 도달하는 지점은 비인간성의 극한일 수 있다고. 그건 광기와 집착을 멈출 수 없기에 벌어지는 것이죠. 광기와 집착을 멈출 수 있는 이라면 광기와 집착에 빠져든 사람일 수 없겠죠. 그런데, 소설은 철학이 아니기에 광기와 집착에 대한 가치판단보다는 광기와 집착의 양상을 보여줄 뿐입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건 우리이죠. 결국 이 대중소설은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이 질문에 대답하는 건 책을 읽은 독자의 몫이죠.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 소설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 의미망 속에서 우리는 광기와 집착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해답을 가지게 된다 해도 광기와 집착에 빠져든다면 그 해답은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기와 집착의 힘은 너무 무시무시해서 우리의 이성 따위는 한번에 날려버릴 테니까요. 그래도 읽는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설사 광기와 집착의 힘이 너무 강하다 해도 우리에게 거기서 벗어날 미약한 가능성을 줄 수는 있으니까요. 저는 이 미약한 가능성에 이 책의 힘이, 독서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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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책을 읽다 - 미술책 만드는 사람이 읽고 권하는 책 56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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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미술책을 읽다-정민영

모든 미술책의 목적지는 미술이 함께하는 삶이다. 나의 미술출판 행위가 그렇듯이, 미술책 리뷰도 결국 '미술이 동행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자 미술로 삶의 경험을 바꿔주고 싶은 마음의 실천이다.(14)

<교수대 위의 까치> 독서모임을 하고 큰 실망감이 찾아들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만 집중하여 그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어떤 화가의 어떤 그림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염증은 저로 하여금 미술책 독서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미술책을 읽어서 무엇을 할까 하는 식으로. <교수대 위의 까치> 모임이 끝난 뒤에 저는 어느새 미술책과 멀어졌습니다. 몇달간을 미술책을 멀리하고 미술에 관심 없이 지냈죠.

그런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변화의 시작이 된 것은 미술책이 아닌 음악을 다룬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라는 책이었습니다. 자신의 삶과 연관하여 자신만의 음악비평을 시도한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예술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거나 예술작품 그 자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창작물을 넘어서서, 그 예술이 탄생한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의미를 얻고 후대에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낀 것이죠. 저는 그것을 실감하며 다시 예술과 관련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염증이 아니라 예술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으니까요. 당연하게도, 미술관련 책도 다시 읽기로 했습니다.

<미술책을 읽다>는 다시 미술책을 읽기로 한 저에게 일종의 입구 같은 책입니다. 미술출판 전문가로 17년을 이 업계에서 일해온 저자가 미술책 리뷰를 모아서 펴낸 이 책은 다양한 미술책들을 소개하며 독자에게 미술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양한 미술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경제학자가 바라본 미술, 나무 전문가가 바라본 미술, 연애 전문가가 바라본 미술, 음식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술 같은, 뿐만 아닙니다. 이 책은 서양화 뿐만 동양화 관련한 책들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화, 한국 전통의 그림과 한국 근현대 미술에 이야기하는 책을 소개하며, 이 책은 동양화와 한국화의 매력과 우아함,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여지없이 전합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저는 서영미술을 다룬 책보다 한국화 관련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6권의 미술책 리뷰를 다 읽다보면, 미술책이 이렇게 다양하고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경이감에 다다릅니다. 근데 그건 미술책이 소개하고 있는 미술 자체가 가진 힘이겠죠. 미술에 힘이 없다면 그런 책들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미술책을 소개하는 <미술책을 읽다> 같은 책도 나오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미술은 언제나 단순한 미술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고, 미술책은 그 무엇이 무엇인지 파악한 저자들의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무엇이 궁금하다면, 미술책을 펴서 읽으면 될 것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제가 할일도 그것이겠죠. 저는 이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자, 이제 미술책을 읽으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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