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은 유학의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이라는 역대급 난이도의 책을 읽은 저에게는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주역>에서 검은색은 글자였고,

흰색은 종이였습니다.^^;;)
<중용>은 읽다가 잠시 책이 안 넘어가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ㅎㅎㅎ
다 읽지 않았지만,<중용>은 별무리없이 완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새 저는 '고전'전문 독서가가 되는 느낌이네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것인지....
잠시 한숨이 나오지만, 모두 다 '천명'이라고 여기고
포기하지 않고 읽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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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잃은 개 2 - <논어> 읽기, 새로운 시선의 출현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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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링에게는 논리적 칼이 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동안 갈고닦은 그 칼을 <집 잃은 개>에서 마음껏 휘드른다.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과 이 시대의 관점을 섞어서. 먼저 그의 논리적 칼에 휘둘리는 것은, <논어>라는 책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 '공자와 제자들이 만난 사람들'이다. 리링은 공자의 말을 '공자의 말답게' 해석해낸다. 그는 그의 오류와 실수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는 공자가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대신에 그는 공자가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채로, 이 시대에도 충분히 필요한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어떻게 공자의 의도와는 달리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었는지를 가감없이 말해준다. 그가 휘두르는 첫번째 논리적 칼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계가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고 힘이 있는 <논어>와 인간 공자의 모습을 원없이 만날 수 있다. 두번째로 그는 논리적 칼을, 이 시대에 공자를 신성시하고 신격화하여 '공자팔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공자를 이데올로기화하고 신격화하여 흠없는 성인으로 만들어 '공자팔이'를 하는 인물들을 비판하면서, 그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문화의 정수로 소개된 유학에 의존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시도한다. 이 논리적 칼은 너무 서늘하고 매서워 그의 논리적인 칼을 따라가다보면 내 자신의 마음도 그의 논리적 칼에 베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늘].  공자는 천명을 가장 두려워했다. 천명이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집 잃은 개>를 보면 그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한 '정치적 이상의 실현'처럼 보인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이 쇠락해가는 혼란스러운 춘추시대를 살면서, 봉건제에 기반한 주나라의 예법을 다시 되살리려고 했다. '주례'만이 이 시대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그는 봉건제에 기반한 '주례'에 어울리지 않은 낮은 신분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가 되게 만들었다. 그 자신의 이상인 계급제도에 기반한 주례에 어긋나게. 이걸 도덕정치론의 관점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적적인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현실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시했다. 그가 힘을 실어 외친 그의 정치적 이상은, 현실의 정치 지도자들의 귀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공자에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이상을 위한 그의 노력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집 잃은 개>에 나오는 것처럼, 불가능할 줄 알면서 실행했던 일. 불가능할 줄 알면서 시도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 이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천명'일 것이다. 그러니 그는 '천명'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의존] <집 잃은 개>를 보면 공자는 시대적 한계에 갇힌 인물이면서, 시대적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섰고,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사제관계를 만든 인물이다. <집 잃은 개> 어디에서도 그가 신화적 인물이라거나 성인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없다. 그를 신화적 인물로, 성인으로 만든 건 그의 후대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 경제적 목적을 위해. 그들은 생생한 매력을 가진 한 인물을 미라처럼 박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박제가 된 공자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의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어쩌면 그들은 공자에게 의존하는 것일지도 몰겠다. 자신이 부족하니까, 자신이 될 수 없으니까, 자신들의 이상과 관념을 공자에게 투영하여 박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리링은 그 의존에서 벗어나라고 외친다. 의존에서 벗어나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그게 공자가 말하는 '군자'라고. 독자가 여기까지 왔다면, 벗어나야 하는 할 단계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리링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 나는 그 단계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앉아서 글을 쓰다보니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리링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부터 시작됐다는 그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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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잃은 개 1 - <논어> 읽기, 새로운 시선의 출현 리링 저작선 2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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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구성을 잠시 따라해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잡담 편>
그날 나는 <집 잃은 개1>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리링이 특유의 꼼꼼함과 전문지식으로 세밀하고 꼼꼼하게 파고들어가서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현대적인 관점으로 <논어>를 해석하는 이 책에 큰 흥미를 느껴서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다가 목이 말라서 방을 나와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찾았다. 냉장고 물병을 꺼내는데, 근처의 식탁에 앉아 어떤 싸가지 없는 나이어린 친척 여동생의 언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얘기를 듣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쳐버렸다. "참으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사람이로다." 아뿔싸!! 내 입에서 '예의범절'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살아 생전에 '유학'에 관심을 가진적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 입에서 유학적인 언어의 전형인 '예의범절'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방에 돌아와서 반성을 하면서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결론은 <집 잃은 개1>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읽은 책은 내 정신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친다. <집 잃은 개1>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집 잃은 개1>에 깃들어 있는, 공자와 <논어>와 유학과 리링의 사상과 개념과 생각이 내 정신에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켰고, 나는 거기에 따라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책이 미치는 영향은 이렇듯 무섭다. 책을 읽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의 몸과 정신을 변화시켜버리기 때문에.

<독서 편>
글자 수 1만5836자의 <논어>. 고고학,고문헌학,고문자학의 '삼고'의 권위자인 리링은 <논어>에 들어있는 1만5836자 한글자 한글자를 죽간과 백서, 금석문의 언어와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관점과 현대적인 관점으로 해설을 한다. 그는 철저한 고증과 실증에 기반을 두고, 공자에 대한 근거없는 윤색, 신격화를 거부하며 <논어>를 읽어내려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성인 공자나 진리의 책으로서의 <논어>가 아니다. 그는 <논어>에서 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드러나는 '인간 공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때로는 시대의 한계에 갇힌 양상으로, 때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으로, 때로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실패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고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의 가르침을 내리며 제자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뛰어난 스승의 모습으로, 은자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세상에 나아가서 자신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에 따라 세상을 바꾸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며 힘들어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 수많은 인간 공자의 모습을 보면서 공자만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통해 드러난 모습이 공자의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삶에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을 정도로 공자 삶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것은 리링이 자신의 사상과 이 시대의 현실을 토대로 <논어>를 해석하면서 중간중간 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해석상의 독특함과 맞물리며 독자를 이상한 균열로 이끈다. 시대의 한계에 갇히면서도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공자와 <논어>라는 모순적인 현실로.

<해석 편>
해석이라는 건 언제나 해석을 한 사람의 관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해석자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생각과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른. 그건 아마도 해석이 언제나 해석자의 삶에 기반한 '현재화된 해석' 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리링도 마찬가지다. 그의 해석이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의 삶의 사상과 가치관이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을 하는 해석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해보면, <집 잃은 개>를 통해 리링이 선보이는 일종의 해석적 투쟁(??)은, 이전의 신격화된 해석을 하는 해석자들의 삶과 리링의 삶의 투쟁으로도 볼 수 있다. 신화와 신격화에 매달리는 삶과, 신화와 신격화를 거부하며 인간적인 모습을 찾으려는 인간의 투쟁. 동시에 그 투쟁은 위태로운 면이 있다.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자들과의 해석적인 투쟁과 더불어 실증적인 고찰을 통해 <논어>에서 인간 공자의 모습을 찾으려는 연구대상과의 투쟁 모두를 포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리링이 위태로움을 넘어서려면, 책을 읽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의 책을 읽고 그를 지지한다면, 그의 해석은 독자의 마음에 살아남아 독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생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라면 리링의 해석은 사그라질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리링의 해석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길 잃은 개1>을 다 잃은 지금의 시점만 놓고 본다면, 나는 리링의 해석을 지지한다. 신화와 신격화보다는, 인간 공자의 모습을 찾는 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2권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나는 리링을 따라 공자의 사상을 둘러보며 같이 걸어나갈 예정이다. 그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 이것이 <집 잃은 개1>에 대한 나만의 현재화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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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링의 주역 강의>를 읽는 중인데,

너무 어려워서 머리털이 빠질 것 같네요.^^;;
엄청나게 많은 한자들이 눈앞을 가득 채우는데,
진짜 검은것이 글자요,

흰것이 배경이 되는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ㅎ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겠죠.
<주역> 자체가 어려운 내용인데, 저 자신도 <주역>을 처음 읽고, 
실증을 중시하는 학자 리링답게 꼼꼼하게 해석하다 보니
독서가 '어려움'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없습니다.

끝까지 다 읽을 거구요, 한번 읽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되면 읽고 또 읽어야죠.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기고 다시 열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이러다 진짜 '선비'처럼 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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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쳐서 1400페이지...
두껍고 무겁기 그지없으며, 온갖 한문이 난무하는

이 책을 드디어 완독했다!!!
책을 덮고 나서 기쁨의 함성이 나왔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읽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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