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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을 읽고 나랑 안맞고 재미없고 별로라서

그 감정을 감상문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그걸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글을 쓰다니...

내가 뭐 책을 비하를 했나, 쌍욕을 퍼부었나, 저자에게 인신공격을

했나...

솔직하고 복잡한 내 감정을 그나마 담담하게 쓴 건데,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어서는

심판하고 재판하려 하다니....

아이구 무서워서, 솔직한 글을 쓸 수가 없네.

얼굴도 본 적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공간의 무서움을 실감한 하루였다.

휴우~~ 이제는 감상문도 내 마음대로 못쓰겠네. 무서워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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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도 익숙해지면 몸의 일부가 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은 불편하다. "희망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편안한 절망을 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 튜더는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이라면,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익숙한 절망,불편한 희망> 알라딘 책 소개 글 중에서)

최근에 여러 상황이 겹치며 너무 쉽게 분노하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무심코 깨달았습니다. 분노에 익숙한 나 자신을 깨닫는 순간, 한 가지 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계속되는 분노하기가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앞에 놓인 이들이 보여주는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저는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서 분노하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내적인 스트레스를 풀어왔던 겁니다. 물론 정신의학적으로 봤을 때 화내야 할 때 화내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건강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분노하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은 제가 생각하기에 저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절망의 다른 표현이겠죠. 우리에게 익숙한 절망의 해소책으로서 정신이 분노하기를 계속 지속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나마 너무나 빠르고 성급한 분노 대신 상황이나 사건을 최대한 넓고 객관적으로 보면서 다른 방식의 사유를 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최근의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이미 그런 변화를 하고 있고요.^^;;) 한 번 해보니 괜찮더군요. 이제 익숙한 절망 대신 불편한 희망을 한 번 차분하고 신중하게 선택해 보렵니다. 그게 더 힘든 길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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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그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

한 번 발이 멎으면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거야.'(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독서를 무수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 독서를 책의 리듬을 타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즉, 자신만의 시대를 자신만의 삶으로 살아가던 독자가 책을 펼쳐 읽다가 책 특유의 리듬을 타는 것을 독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독서 이력에 이것을 적용해보자. 내가 책을 처음으로 열심히 읽던 시절에 나는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책의 리듬이든 무리없이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게 맞는 책의 리듬을 찾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서 내게 맞는 책의 리듬만 맞춰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의 독서는 어느 순간 내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 혹은 내 지성의 질적인 변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시 다양한 책의 리듬을 맞춰 최대한 포용하는 과정으로 변화되었다.(물론 모든 책의 리듬에 다 맞추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다양한 책의 리듬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 '무지의 개방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다양한 책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것은 책의 다양한 리듬을 타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지의 개방성이 빚어내는 책의 리듬 타기는 앞으로도 쭉 계속 될 예정이다. 하루키의 말대로 왜 그렇게 하는지 의식하지 않은 채, 리듬 타기 자체가 독서의 의미이자 가치이자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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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말해보자. 고전은 분명 낡은 책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전은 결코 우리 시대의 우리 감각에 맞춰진 책은 아니다. 고전은 자신이 나온 시대상과 자신을 만든 이의 생각과 삶을 품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고전은 반드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그러니까 고전은 낡았지만 반드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낡았지만 우리 시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책.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고전의 정의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고전에 대한 맹신을 거부해야 한다. 고전을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무조건 옳고, 정당하며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는 종교적 광신도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고전에 대한 맹신과 더불어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과 비하 또한 삼가해야 한다. 이건 고전에 대한 반대방향의 맹신이다. 고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고전 읽기를 무조건 거부하며, 고전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 또한 다른 의미의 광신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겨진 고전 읽기의 방향은, 맹신과 비하 사이의 길에 머물며 고전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읽기이다. 그건 무조건적인 찬양과 비난 사이에서 때로는 고전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며, 때로는 고전의 위험성을 자각하는 '고전과 나 사이의 생생한 대화과정'으로서의 고전 읽기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보여줘야할 고전 읽기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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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연히 고전을 읽고 얘기하는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지인분을 따라서

그 모임에 나가봤다.

나가서 모임을 진행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머리가 알아서 그분의 얘기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아, 나는 이 모임에 못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얘기하시는 게 그 고전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었는데,

왜 그렇게 끌리지 않던지...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에는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 나온다.


나는 10대 중반에 철학소년은 아니었지만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명하게 보이는 것을 근본적으로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도 않을 때부터 그들은 내게 히어로였다. 하지만 이후 현대철학 책을 읽게 되자, 그들 대부분이 비판대상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을 반박할 만한 식견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담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표준적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철학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으로 향했던 것이다.(p.11)

표준적인 해석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표준해석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굳이 시간을 내어 나가서 그런 표준해석을 들을 필요를

못느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은 조금만 시간을 내어 찾아보면 내 스스로

알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나는 책을 읽다가 조금 독특한 것, 다른 것, 특별한 것을

원하는 취향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모임에 나가서 나의 취향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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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9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은 자신의 해석이 반박당하고, 조금이라도 무시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일 것 같습니다. 독서 모임을 참석할 때 본인 의견이 무조건 맞다고 여기고, 반박 의견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건전한 토론을 할 수 없어요. ^^

짜라투스트라 2015-06-19 20:03   좋아요 0 | URL
아,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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