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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
토니 모리슨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피부 색깔은 그 아이가 늘 지고 다녀야 할 십자가야.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야.(19)
과학적으로 보자면 인종 같은 건 없어, 브라이드. 따라서 인종이 없는 인종주의는 하나의 선택이야. 물론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한 선택이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야.(195)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일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죠. 인간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뿐입니다. 아마 미래가 이럴 거라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맞을 수도 있겠죠. 반대로 틀릴 수도 있습니다. 맞든 안맞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예측이 맞다면 그나마 안심을 하고, 예측이 안맞는다면 당황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이 삶의 조건을 어떤 인간도 피할 수가 없겠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이 2015년에 펴낸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에도 미래를 예측한 한 여인이 소설 초반부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을 스위트니스라 부른 이 여인은 자신의 하얀 외모와 달리 새까만 아이를 낳습니다. 아이의 외모 앞에 당황한 그녀는, 아이의 생부가 확실한 하얀 남편이 그녀가 바람을 피었다며 집을 나가버리자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녀 자신의 피에 흐르는 흑인의 피와 남편의 피에 흐르는 흑인의 피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유전적 확률 때문에 위기가 닥친 그녀는, 자신의 삶대로 아이의 미래를 예측합니다. 흑인이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그녀는 세상이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 세상이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이가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양육 방식은 아이의 삶에 큰 족쇄를 드리웁니다. 피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하지만 세상은 변하죠. 변화의 흐름이 더딜 수는 있지만 어떻게든 변하는 세상 앞에서 스위트니스의 예측은 실패합니다. 피부 때문에 힘든 삶을 살 것이라고 믿었던 아이는 성장하여 화장품 회사에서 큰 돈을 받는 중역이 됩니다. 성장하여 어머니의 그림자를 덜어내고 스스로를 브라이드라 부르며 살아가는 여인에게 힘든 것은 피부색깔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드리운 삶의 그림자가 그녀를 힘들게 합니다. 어머니가 그녀 내면에 쌓아놓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 성장의 방식이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잘못된 예측이 부른 비극이죠. 소설은 브라이드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는지 그려냅니다. 잘못된 예측이 부른 비극의 족쇄를 어떻게 브라이드가 끊어내는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실 스위트니스의 잘못된 예측은 그녀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건 스위트니스 세대라면 누구나 가지는 삶의 모습에 기반합니다. 흑인은 차별받고 성공하지 못하는 스위트니스 세대의 삶의 모습이 스위트니스로 하여금 자기 딸의 삶을 잘못 바라보게 한 것이죠. 브라이드가 벗어 던져야 하는 것은 전세대 삶의 가치관이 드리운 삶의 족쇄입니다. 자 만약에 이 소설이 이 인종주의적 삶의 족쇄에 매달려 있다면, 이 소설은 토니 모리슨의 여느 소설과 다름없는 소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인종주의적 삶의 족쇄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대 인간의 관계가 빚어내는 삶의 양상입니다. 인종주의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치중했다는 건, 저자인 토니 모리슨이 항상 천착하던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동시대 삶의 양상을 받아들여 한단계 나아간 소설관을 가지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건 소설적인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겠죠. 동시에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말도 됩니다.
토니 모리슨이 인종주의의 그림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소설을 썼다는 건 크나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가의 자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관으로 가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아흔에 다다른 노년의 작가가 이런 변화를 선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의 실례를 작가가 자신의 소설로서 보여준 것이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느릴 수는 있어도 어떤 식으로든 세상은 변하고, 소설가도 그 변화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만약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그 세계만을 그려낸다면 그 소설의 가치는 둘째 치더라도 변화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소설가는 변하지 않은, 죽어 있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적어도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변화를 받아들여 소설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스위트니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의 가치관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변하지 않고 죽어 있는 삶을 사는 스위트니스와 달리 브라이드는 그 족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삽니다. 이건 토니 모리슨과 이어집니다. 스위트니스의 삶을 지배한 가치관은 토니 모리슨의 삶과 소설관을 지배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브라이드를 통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브라이드를 통해 우리는 개닫게 됩니다. 앞으로 토니 모리슨의 소설도 그렇게 될거라는. 동시에 우리도 깨닫게 됩니다. 변화의 흐름 앞에서 우리 자신도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하든 못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