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동안 다니던 독서모임을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에 좀 더 자세하게 적어볼께요.
9년동안 다니던 독서모임 분들과 텔레그램으로 간혹 소통을 했습니다.
인문학 독서모임이었기 때문에 토론도 종종 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었죠.
어저께는 작정하고 조금 문제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와중에 말을 주고받은 분과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당사자가 아닌 제3자분께서 갑자기 저에게 맹비난을 퍼붓더군요.
기회주의자... 음 기회주의자라...
테러를 해야한다... 음 생각이 다르면 테러를 해야하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일반적인 언어를 자기들 나름대로

변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면,
테러라는 말도 말 그대로의 테러가 아니라 인문학적 테러,

혹은 사고의 테러라고 이해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테러라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게 옳은 일일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는데, 짧은 분노의 순간이 지나자 오히려

강한 헛헛함이 밀려왔습니다.
뭐하자고 9년이나 모임에 나갔을까...
내 9년동안의 시간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모임에 나간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9년이 아깝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오늘 들은 말로 생각해본다면,
'조금 아깝기는 하다'고 말하겠습니다.
나의 옳음을 주장할 때, 자신의 옳음에 취한다면

남의 말 따위는 짓밟고 그 사람을
마구 공격할 수 있겠죠.
맹신의 위험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말이 옳다고 해도 맹신하고 남을 공격한다면

그 위험성은 제어되어야만 합니다.
인문학책을 읽는 분들이 이런 당연한 애기도 이해 못하고
너무 뻔한 공격을 해서 당황했는데,
생각해보니 원래 이런 일들이 너무 뻔하고

지겹게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지겨움과 뻔함과 헛헛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냥 나와버렸습니다.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의 시간만 지나면 잊어버리겠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공격해놓고 미안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는

그분의 말을 생각하면
그분은 굳이 인문학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책 안 읽어도 그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냐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11)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89~90)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91)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277)

<호모 데우스>에 대해 뭔가 쓴다는 게 두려워집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독서를 하며 떠오른 생각들을 제대로 정리를 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독 1서평 원칙을 지켜야한다는 내 마음의 강박관념이 글쓰기를 강요합니다. 강요에 따라 저는 할 수 없이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면서. 고민하다 보니 짧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게 쓰자고 하면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질 것 같아서. 그리고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만족하는 만큼의 길이를 쓸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보다 긴 글은 나중에 한 번 더 읽으면 그 때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해보죠. 

저에게 <호모 데우스>에 대한 느낌은,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유발 하라리 특유의 다양하고 상당한 양의 지식을 잘 섞어서 읽기 쉽게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읽다고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지식을 얻은 것 같다는 느낌도 좋습니다. 책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도 비슷합니다. 강렬하고 무언가 지적인 깨달음을 던져주는 초반부와 중반부, 뭔가 헛헛한 느낌의 후반부까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과거 해석에는 깊이 공감하며 큰 인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과거 해석이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가 미래를 이야기하며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에 대한 픽션적인 사고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뭔가 믿음이 안가기 시작합니다. <사피엔스> 때도 그랬고, <호모 데우스>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미래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자신이 구태의연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뻔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그가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문명의 초기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룩한 계기가 허구를 창조하여 그것을 믿는 '인지혁명'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감탄했습니다. 마치 내가 어렴풋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 정리하여 설득력 있고 통찰력 있게 얘기하여 감탄했다고 할까. '농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본도 좋았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른 역사서가 '농업혁명'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면, 그는 '농업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게 좋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호모 데우스>에도 이어집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고 하면서, 그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은 대규모의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믿을 수 있게 만들어낸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나 국가에 대한 믿음,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것이겠죠. 저는 이번에도 그 말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습니다. '아 맞다 맞어'하고. 우리를 진정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협력을 이루어내는 능력과 그에 기반한 성과, 그 협력을 이루어내기 위해 구축된 허구들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하기 시작하면 저는 그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호모 데우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저는 그가 인간이 기술을 이용해 불사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낼 때 '이건 뭔가'하고 이상하게 느껴습니다. 인간이 발전된 기술로 인해 죽음을 극복하고 불사를 이루어내는 게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단 말인가? 책의 뒤에 보면 유발 하라리는 불사를 진짜 불사가 아니라 수명이 많이 늘어나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잠시 자신의 주장에서 물러나는 말을 합니다. 지금의 인간보다 오래 살지만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수는 있다고.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불사입니까? 그건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는 기술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기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을 마치 확실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기술만능주의나 과학만능주의라는 이름의 믿음. 저는 그런 말들이 과학적이라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 해석에서는 날카롭고 독창적인 해석 능력을 발휘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할 때는 갑자기 기술만능주의라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기반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거죠. 불사 얘기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미래에는 인간이 기술로 발전된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며, 비유기체적인 알고리즘이 인간을 지배하여 지금의 인간의 자리를 박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가능하다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만 있는 이야기를 확신하려면 더 많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논거가 필요할 듯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가능하다는 말은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저는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에 기반해서 미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은 아주 오래되고 길게 이어진 뻔한 레파토리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나 플라톤의 철학 같은 고대의 철학부터 이어진 이 환상은 근대의 니체 사상이나 뉴에이지 사상으로 계승되며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미래의 기술 발전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내놓는다고 그 뻔함과 구태의연함이 사라지나요? 차라리 인간이 신적인 존재인 '호모 데우스'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다른 말을 하면 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유발 하라리가 괜찮은 점은, 자신이 상상한 미래 세계의 모습을 비교적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래에 대한 시선이 업그레이드의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는 흥미진진하게 읽다 실망감에 느끼는 걸로 끝나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두 책에서 만족을 느끼시는 분들에 비해 제가 깐깐하고 괴팍한 독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 어쩌겠습니까. 자기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야죠. 책을 읽는 방식에도. 약간의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저는 <호모 데우스>를 덮고, 다른 책으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다른 책은 제발 실망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11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1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주겠어. 영원히.(9)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의 그림자가 된 것 같아. ... 그리고 넌 내 것이고. 황홀하군!(11)
공연장의 심장은 사람이다.(15)
당신은 무대 위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죠.
모두를 웃게 해줘요. 무엇이 잘못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곧 그 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걸 알게 되죠.
모두가 당신의 영혼을 한 조각씩 원하고 있으니까.(52)
스토커 같은 관음적인 범인들은 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은 남을 훔쳐보며 편안해진다.(89)
에드윈이 현실 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케일리와 접촉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 거죠.(152)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성공하는 유명인이 될 수록 사람들은 점점 그의 영혼까지 앗아갈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237)

최근에 우연히 인터넷 방송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채팅을 치면서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고,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선보이는 것들도 재미있고 해서 즐기고 있게 됐죠. 그런데 가끔씩 예상못한 악플을 쓰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어떻게 그런 독하고 나쁘고 더러운 말들을 마구 내뱉을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그렇게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함부로 말할 권리가 있다고 진짜로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익명성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제가 그 사람이 아니니 알 수 없지만, 안타까운 건 그들에게 상호교류라는 인간 특유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만 집착하는 자폐성이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스토커도 위에서 이야기한 악플러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토킹 하는 대상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관계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스토킹의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나 별의미 없는 행동을 했는데 오해하고 착각하면서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를 써나가는 스토커는 스토킹의 대상과 상호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스토커에겐 오직 일방향의 자폐적인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에 빠진 스토커에게 스토킹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할 뿐. 어떻게 보면 스토커에겐 스토킹의 대상은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망상을 투여하는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스토킹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XO>도 스토킹의 비극이 담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컨트리 가수로 유명한 케일리 타운이 최악의 스토커 에드윈 샤프에게 시달리고, 케일리 타운과 알고 지내던 행동학전문가 캐트린 댄스가 그와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국 크라임 스릴러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제프리 디버의 소설답게, 책은 곳곳에 독자들을 홀리고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고나가는 '미스디렉션'이 가득합니다.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마술을 바라보는 이들을 홀리는 기술을 가리키는 '미스디렉션'을 잘 쓰는 작가답게 제프리 디버는 독자들을 쥐고 뒤흔들다 자신만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저도 초반에 디버에게 뒤흔들리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결론까지 다 읽고나니 남는 건 관계에 대한 생각이더군요.

최근의 저에게는 '재밌다', '재미없다'라는 감정보다 저 자신의 생각에 남겨진, '생각의 잉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XO>가 남긴 '생각의 잉여'는 관계에 가 닿고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이끌어냅니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의 관계에 집착하다 벌어진 스토킹 같은 비정상적인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관계의 상호성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가 같은. 결국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함께 산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자폐성에 집착하는 인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별로 특별한 건 없네요.^^;; 특별한 건 없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책이 제게 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이 생각은 중요합니다. 스토킹이 아닌 쌍방향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잘 모르는 것을 그려?"
", 잘 모르는 것을 그리고 있네. 아니, 그리라는 대로 그리는 건가?"
"누가 그리라고 하는데?"
"글쎄다, 하느님인가?"(13)
너희는 모를 거야, 그 그림의 가치를. 거기에는 진리가 드러나 있어. 그 그림을 해석하면 소수란 무엇인가라는 수학계 최대의 수수께끼가 풀리고, 세기의 난문이던 리만 가설도 결론이 내려질 수 있어.(444~445)
데시마 가즈키요 씨는 <관서의 망>을 그려낸 것을 후회했어. 인간이 발을 들이밀어서는 안 될 영역이 있다고 깨달은 거야.(474)

<위험한 비너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입니다.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혹시라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온 이들이라면 뭔가가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어려운 말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 드라마틱한 전개. 네, 이 모든 것들을 <위험한 비너스>를 다 보여줍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나 문장은 없지만, 독자로 하여금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히가시노 게이고 했다'라고 해야할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별로 쓸게 없네요. '자,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너무 빨리 끝낼 수는 없어 조금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책의 스토리 전개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림 이야기의 핵심은(스포일러 느낌이 있어서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 그림을 건드리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금기와 금지, 금단의 느낌이 나는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생각들에 관해 한 번 자세히 말해볼께요.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위험한 비너스>의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금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종교나 종교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계급적 지배질서를 구축한 전근대는 금기나 금지가 많습니다. 신의 영역을 넘본다느니,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면 벌을 받는다느니 하는 식의 말로 전근대는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무수한 금기나 금지를 남발합니다. 그건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종교나 문화적 관습에 기반한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신 중심의 사회가 아닌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는, 전근대의 금기나 금지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유전공학의 발달 같은 게 대표적이겠죠. 전근대 같았으면 신의 영역이라고 금기시됐던 생명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유전공학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나갔습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금기와 금지. 그러면서 발전해나가는 게 근대 사회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책의 핵심에는 금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견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간직한 그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금지. 저는 이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이 책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가 근대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금기나 금지 같은 것을 없애는 데 가장 앞장선 가장 근대적인 학문인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전근대의 특징 중 하나인 금기에 관한 책을 쓴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생각됐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아이러니한 면이 있었습니다. 최초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쓴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과 사상을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대에서 중요시여기는 논리가 중심이 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소설을 썼습니다.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이런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탄생한 셈이죠. <위험한 비너스>에도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같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가장 근대적인 학문을 한 작가가 전근대적인 금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을 썼으니까요.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제가 정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독서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종종 할 것을 다짐하면 이만 글을 마쳐야겠네요.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황 10년 - 불황이라는 거대한 사막을 건너는 당신을 위한 생활경제 안내서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이미 전개되기 시작한 불황을 앞두고 내가 한국의 30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조언을 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의 미래가 바로 한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들 개개인이 행복하고, 이들 개개인이 보편적 의미를 가진 글로벌 시민으로 당하고, 이들 개개인이 가진 개성들이 폭발하는 것, 이것이 한국이 불황 10년을 거치면서 흔히 중남미형 경제 패턴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최소한 일본 정도로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20)
일본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집을 사는 것이나 대출을 갚는 것보다도, 파는 게 더 힘든 시기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43)
거리는 시내에서 가까울수록, 유지비는 저렴할수록 아파트 가격이 덜 떨어졌다.(48)
호황에 형성된 일상성을 불황기에 적합하게 재구성하는 일, 이것이 신용카드와 함게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133)

예전부터 기회가 있어서 돈이 조금 많으신 분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 신기하다 생각한 점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대체로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제 경험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다 오히려 아끼는 모습을 보여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엄청난 부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제가 만난 사람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황 10년>을 읽으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놀랐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활기치던 2014년에 출간된 <불황 10년>의 앞부분에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로 유명한 우석훈 박사는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만난 부자가 부자답지 않아 보인다고. 아, 저는 그 이야기에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나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저자는 그러면서 뒤잉서 말합니다. 부자들은,돈을 많이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버는 공격적인 방식보다는 가진 돈을 지키는 방어적인 방식에 능한 사람들이 많다고.

저도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제가 만난 돈이 많으신 분들도, 가진 돈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필요할 때 그분들도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언제나 공격적인 방식의 경제운용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은 가진 돈을 어떻게든 지키는 모습에 능해 보였습니다. 아끼고 잘 쓰지 않고. 언제 닥칠지 모를 미래의 위기를 대비하면서.

이 부분이 <불황 10년>에서 중요합니다. <불황 10년>은 언제라도 경제적 고성장이 가능한 사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황 10년>은 해마다 임금이 오르고, 부동산 값이 뛰고, 앞으로의 경제적인 성장을 쉽게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불황 10년>은 30년동안의 장기 저성장에 시달리던 일본과 비슷한 길을 갈 확률이 높은 현대 한국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저자의 현실인식은 박근혜 정권이 활개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시대를 겪어내며, 앞으로 과거의 고성장은 힘들고 저성장이 지속되는 불황의 시대가 올 것이며, 민주주의의 활성화라든가 불평등의 완화 같은 정치적이 발전도 힘들 것이라고 여겨, 개인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담은 <불황 10년>을 쓰게 됩니다.

저자의 현실인식은 30년의 불황을 어떻게든 견뎌낸 일본의 서민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깔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의 서민들은 경제적인 광풍이 몰아치던 버블의 시대를 거쳐, 거품이 빠지며 시작된 1990년대의 경제적 불황을 30년 세월동안 견뎌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본 경졔를 보고 소비를 하지 않는, 활력 없는 경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우석훈 박사는 그 시각을 비틀어서 소개합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불황을 30년이나 견뎌내면서 저축이 많이 늘어난 통계를 보여주며 그들이 30년 불황을 이겨낸 경제적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일본의 서민들이 앞으로도 언제라도 발전할 수 있다는 고성장에 기반한 공격적인 인식이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라도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저성장에 기반한 방어적인 방식으로 불황을 견뎌냈다고 말합니다. 정부나 일반적인 경제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공격적인 투자를 서민들이 따라서 했다면 서민들의 삶은 더욱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불황 30년의 일본 경제를 망하지 않게 떠받친 것이 불황에 기반한 서민들의 방어적인 경제적 삶의 방식이었다고 하면서.

저도 그 시각에 동의합니다. 고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저성장이 예측된다면, 저성장과 불황에 맞는 경제인식을 하고, 그에 기반한 경제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 빚을 내어 흥청망청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진 것을 안정적으로 모으고, 씀씀이를 줄이면서 견뎌 내는 게 불황의 경제에 맞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진정 현실적인 책입니다.  헛된 투자, 헛된 성공의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책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과 개인 재무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재무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방어적인 방식을 통해 가진 것을 지키고,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싶다면 이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동산 부분은, 조금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그런 것도 충분히 인정하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도 있을 수 있다면서. 창업 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창업이라는 영역이 일반화가 쉽지 않은 부분이라서요.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 부분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몰라서요. 다만 하나, 선행학습이 교육에 있어서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은 해야겠네요. 행학습은 오히려 나중에 번아웃 증후군을 초래할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없이 선행학습을 아이들에게 시키는 분들은 이 정도는 알아두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계발서의 주술은 우리를 성공에 목마르게 합니다. 성공이 마치 언제 어디서라도 가능한 것이라는 듯이. 성공이 마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하지만 <불황 10년>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게 합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성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면서. 개인적으로 저는 그것이 불황에서 살아나가는 성공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불황 속에서 잘 살아가고 싶다면, 현실을 잘 견뎌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해드립니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