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독 1서평을 세우고 연달아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아직 쓰지 못한 서평이 열 몇개나 되네요. ㅎㅎㅎ
일단 책읽기에 열중한다는 핑계로 책만 읽고 글쓰기를 미루고 있는데,
내가 세운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무겁네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부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2. 오랜만에 제가 알고 지내는 독서모임 분과 카톡을 했습니다.
그분에게 물어보니 그 모임이 재미가 없어졌다고 하네요. ㅎㅎㅎ
제가 없어서 그랬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더군요.
인사말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하는 게,

제가 그 모임에서 과감하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 나름의 몫이 있는데, 그 몫이 없어졌고 그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예전보다 나오지 않는 게 확실시 되고
따라서 모임의 재미가 줄어들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분이 저보고 모임에 나오라고

하더군요. ㅋㅋㅋ
그런데 그분의 권유와는 달리 제 마음은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마지막 경험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했더니 욕이나 듣고

(그것도 꾸준히 알고 지내분에게 말이죠.)
저는 사과하는데 그 사람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며

자기 말이 옳다고 얘기하는 데
제가 왜 그 모임에 나갑니까?
욕 듣기 싫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그 뻔하디뻔한 말도

듣기 싫습니다.
뻔한 얘기 듣자고 나가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얘기 듣기에는 제 삶의 시간이 아깝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그 모임에 나갈 시간은 안 된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나갈 수 있겠죠...

물론 그 언젠가가 영원히 안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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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이랑 같이 독서모임 새로 만드는 건 어때요? 두 명만 해도 좋고, 새로운 사람을 추가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요. ^^

짜라투스트라 2018-07-14 12:19   좋아요 0 | URL
아 그분이 독서모임 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네요^^
 

부산고전함께읽기 8회 모임 2018.6.23.

젊은 소크라테스가 노련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를 만나서 악전고투하며(??)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타고라스>를 읽고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저는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지 궁금했는데 언제나 모임에 오신 분들은 제 기대를 뛰어넘더군요. 이제 그 이야기 중 일부를 한 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000: 논쟁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궤변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미덕은 이 책에 나오는 것 외에 더 많을 것이다. 대화편을 여러번 읽어서 처음보다 잘 읽었다. 미덕은 경험을 통해서 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미덕에 대해 다른 느낌을 가진 것 같다.
000: 양이 얼마 안되어 금방 읽었다. 프로타고라스의 연륜에 소크라테스가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미덕도 연륜에 따라 쌓여서 체화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의 대화편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
00: 소크라테스가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내 몸으로 체화되는 것이기에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미덕들을 하나로 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00: 미덕은 가르칠 수 있냐는 주제를 가지고 한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덕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은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대로 된 토론문화를 이루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살다가 이렇게 토론의 자세에 대해 말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00: 소크라테스의 토론 스킬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토론 스타일이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토론 스킬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위험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000: 소크라테스가 말한 미덕들이 동양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신하고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덕은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 한국사회가 토의와 논쟁을 구분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한국사회는 그것이 안 되어 소모적인 논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교육을 하고 훈련을 해야한다. 찬반을 나누어 논쟁하는 것이 사고의 이분법을 권장하는 위험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간의 신화적인 부분이 재미있었다.
000: 두 사람의 말은 다 일장일단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에 떨떠름하게 동의한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미덕은 배려이다. 배려를 하는 이가 바보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에서 배려가 분명히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00: 지나간 것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면 해야한다.
-중간에 배려에 대한 이야기들과 예멘 난민에 대한 이야기들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00: 나도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이 배려라고 생각한다. 배려를 할 때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00: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은 남들과 다른 나다움이라고 생각한다.
00: 고민을 해봤지만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이 뭔지를 못찾았다.
00: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은 분별력이라고 생각한다.
000: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은 경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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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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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탈리아. 항상 나를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이제 다시는 갈 일은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드는 이탈리아. 그렇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잊지 어려운 추억이 되어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이탈리아. 이런 생각은 인간 그 자체를 향한 애증과도 어딘가 닮았다.(343)

서경식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을 읽다보니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책이었습니다. 왜 이 책이 떠오느냐구요? 제가 생각하기에,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과 <교수대 위의 까치>가 미술비평에 있어서 다른 면모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그림을 둘러싼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 철저하게 파고드는 자신만의 지적인 탐구심을 통해서 만들어낸 해석을 더해서 자신만의 미술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미술비평을 읽다보면 '미술작품을 이렇게 지적으로 파고들어서 해석을 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위에 적은대로 서경식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에 나오는 미술비평은 <교수대 위의 까치>와 느낌이 다릅니다. 미술작품을 바라보며 떠오른 '인상'을 적은 인상비평의 느낌인데, 그 인상비평이 사람의 마음에 잘 파고들어온다고 해야할까요. 물론 서경식의 미술비평이 지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경식의 미술비평도 충분히 지적입니다. 하지만 지적인 탐구심과 해석력이 중심이 되는 진중권식의 미술비평에 비해 서경식의 미술비평은 훨씬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요.
'피에로인 듯하지만 가슴에 십자가를 건 모습을 보니 성직자일지도 모른다. 작은 머리,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깐 시선, 가냘프고 긴 목선, 살짝 익살맞은 그 모습은 애달프기도 했고, 가슴 저미는 평화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경식의 미술비평이 제 마음에 더 와닿기는 합니다. 가슴에 저릿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다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진중권의 미술비평을 제가 싫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 마음에 스며드는 힘을 놓고보면 서경식의 미술비평이 더 힘이 크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서경식의 미술비평이 더 문학적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에 끌리는 인간형이라서요. 이걸 확장시켜서 얘기하면 제가 보기에 서경식의 미술비평이 진중권의 미술비평보다 더 예술적이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진중권의 미술비평은 서경식의 미술비평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이 되겠죠.

지극히 개인적인 소회와 인상에 기반하여 얘기를 펼쳐나가지만,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시대의 아픔에 가닿고 어떤 특정한 정서를 상기시키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정서적 울림을 주는 글. 그것이 서경식의 미술비평인 것 같습니다. 충분히 예술적이고, 충분히 문학적이며, 충분히 인문학적인. 그래서 제가 서경식의 책들을 계속 읽는 것 같습니다. 개인에서 시작해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단계로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독자에게 정서적 무언가를 느끼게 하니까요. 그 무언가가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울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 무언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재일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차별당했고, 한국으로 유학간 두 형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간첩으로 몰려서 옥고를 치렀고, 그 와중에 집안이 풍비박살난 서경식이 인고와 고뇌의 시간을 거치면서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얻은 '인식의 힘'이 그 무언가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세상이 언제라도 나빠질지 모르니 지나치게 긍정적인 기대를 품지 말고 세상과 인간을 냉정하게 바라보라는 말이 주는, 세상을 조금 더 지혜롭게 살아나갈 수 있게 만드는 그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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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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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기를, 이 예언자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은 어떤 굉장한 일의 전조라는 거야. 다시 말해서 우리 인류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어떤 변화를 겪게 된다는 거지.(12)
영적인 영역에서는 모든 기도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덜 받는 것은, 덜 구하기 때문이다.(126)
이게 바로 내가 온 힘을 다해 생각하고 싶은 거였다. 진짜 환상은 프로이트가 믿는 것처럼 신앙이 아니라, 신비주의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신앙을 의심케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132)
천박한 독자들에게는 기적이 교리를 증명한다. 우리는 어떤가 하면, 교리가 기적을 잊게 만든다.(456)
너희들은 내게 묻는다. 하지만 그 왕국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하고. 그것은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그것은 너희들 가운데, 너희들 안에 있는 것이다. 왕국에 들어가려면 좁은 문을 통해야 한다.(464)
나는 신에게 복종하지 않소. 다만 그와 의견이 같을 뿐이오.(517)
신은 그대 안에 있다오. 신은 그대의 내부에서 그대가 행하는 선한 일들과 악한 일들을 지켜보고 계시다오. 그대가 이 신을 대우한 것처럼 이 신도 그대를 똑같이 다룰 것이라오.(519)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644)

정치적 전향의 이력을 가진(^^;;) 저는 종교적 전향의 경험도 했습니다. 개신교에서 무교로. 개신교에서 무교로 갔다면 개신교인들은 안타까워하겠지만, 무늬만 개신교인이었던 제게 종교는 그렇게 큰 무게감을 가지지 못했고, 지금의 무교 상황이 더 저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늬만 개신교인이었던 시절보다 오히려 지금의 제가 기독교 관련 책을 더 읽는 것 같습니다. 무늬만 개신교인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기독교의 여러 모습을 지금 발견해간다고 해야 할까요.

힘겹던 시절에 종교에 의탁하고자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나 종교에서 멀어지고 불가지론자가 된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초기 기독교 역사의 재구성과 저자 개인 삶의 여정을 섞어 특유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소설로 써내려간 <왕국>에 나오는 화자 '나'의 모습은 저와 비슷합니다. 믿음에서 구원을 받기 원했으나 믿음과 복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종교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불가지론자로 살면서 오히려 기독교의 여러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에 빠져 있을 때는 몰랐던 모습을,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고 다방면으로 보면서 알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이 모습은 종교적인 의미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모습은 과거에 에르네스트 르낭이 역사적인 의미의 예수를 재발견한 것처럼,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의 기독교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거기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계급 차별이 확고한 시대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급진적인 예수의 가르침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나중에 받아들이기도 하고,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의 분노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종교적 믿음이 알려주지 않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기독교의 의미를 저자는 지금 남아 있는 그 시대의 텍스트들과 상상력을 가미한 자신만의 창조적 해석,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찾아 나서는데 그 과정들이 흥미롭고 충분히 읽을만합니다.

마지막에 저자는 '자기 나름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적었는데 그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었겠죠. 다만, 저는 저자가 마지막에 읊조리는 말들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내 앞에 딱 버티고 서더니, 미소를 짓고,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뻔히 쳐다본다. 마음껏 즐기라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격려하는데, 그 시선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가득한지, 얼마나, 천진하고, 얼마나 신뢰에 차 있고, 얼마나 자연스러운 기쁨으로 가득한지.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춤추고,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노랙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춤추고 노래하고 이제는 다른 파트너를 고른 엘로디를 쳐다보고 있는 내 눈에 눈물이 솟구쳤고, 나는 이날, 왕국이 무엇인지 잠깐이나마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p.692) 라는 구절을 읽는데 저도 기쁘고 벅찬 감동이 솟구쳤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를 떠난 이가 종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았을 때 느낀 감동을 저 자신도 충분히 공감한다고 해야할까요. 저자처럼, 저도 종교를 한 마디 말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앞에 나타난 모습, 사건으로서 종교를 만나고 그를 통해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죠.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그 느낌, 그 감동이 저자나 저 같은 이들에게 종교를 실재하게 만듭니다. 저자나 저 같은 이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자나 저 같은 이들은 종교를 믿음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만나고 들여다봅니다. 그때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들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어도 충분히 정서적 교감을 전해줄 수 있는 강력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자나 저 같은 이들은 종교의 힘, 종교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생각보다 더 길고 긴 길을 돌아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냥 믿는 것과 그냥 비판하는 것과는 다른 알기 위한 노력 끝에서 만난 것이기에. 그 노력과 깨달음의 여정을 생생히 살아 있는 언어로서 저한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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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죽음 미래의 문학 9
존 크리스토퍼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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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진짜 야만인이네요. ... 아마 세상 모든 남자들이 마찬가지겠죠.(27)
여차하면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수도 있어요. 지금 말씀하시려는 뜻이 그거 아니에요? 우리는 또다시 그들을 잊고 말았어요. 그리고 앞으로 5분 뒤에는 또다시 그들을 잊어버릴 많한 또 다른 핑계를 아마 발견하게 될 거고요.(37)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어. ...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된 시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폭넓은 충성심은 문명화된 사치품일 뿐이야. 앞으로는 충성심이 이전보다 더 좁아질 것이고, 더 좁아지는 대신에 더 격렬해지겠지.(93)
우리가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어. 최소한 우리 일을 우리가 결정할 수는 있을 테니까. 더는 자국민을 속이고 괴롭히고 이용하는 국가의 묵인하에 살게 되지는 않을 거야.(103)
자비란 언제나 사치이게 마련이야. 저런 비극이 충분히 편안한 거리를 두고 벌어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극장 좌석에 앉아서 구경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 비극이 우리 집 문간에, 사실상 모든 집 문간에 닥쳤을 때에는 상황이 다르지.(265)
나를 바꿔놓은 뭔가가 있다면, 그건 피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비인격적인 뭔가야. 즉 우리가 앞으로 살 수밖에 없는 종류의 삶이라고.(289)

외딴 섬에 표류된 인간의 이야기를 그린 대표적인 서양문학 작품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들 수 있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그린 작품인데, 소설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신기하게도(^^;;) 합리적인 근대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대되는 소설도 있습니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사고로 난파되어 무인도에 표류된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와 반대로 소년들이 고립된 섬에서 살다 문명인의 껍질을 벗고 야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하는 게 이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지금 제가 서평을 쓰고 있는 <풀의 죽음>이 두 책 중에서 어디에 가깝냐를 이야기하기 위해 두 책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풀의 죽음>은 어디에 가까울 까요? <풀의 죽음>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파리대왕>에 더 가깝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풀의 죽음>은 볏과 식물들을 죽이는 충리 바이러스가 아시아를 거쳐 영국을 습격하며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진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무능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대응,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려지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 처 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말합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풀의 죽음>에서 문명인을 자처하던 영국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파리대왕>처럼 문명의 가면을 벗어던진 야만인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난파와 무인도에서의 삶을 통해서 야만적인 행동을 하나 마지막으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소년들에게 야만인이 된 것은 일시적인 일탈에 불과한 것이죠. 그런데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달리,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인간의 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충리 바이러스는 여전히 세상을 장악하고 있고 무정부 상태의 영국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부족 상태로 돌아갔기에 <풀의 죽음>의 주인공 존 커스턴스 무리는 앞으로도 쭉 야만적인 상태를 유지한 채 살아갈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극단이 아닙니다. 영국 뉴웨이브  SF를 대표하는 작가 J. G. 발라드의 <하이라이즈>과 비교해보면 <풀의 죽음>은 양호한 편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초고층 아파트가 스스로 고립되며 벌어지는 퇴행과 야생의 드라마를 독특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문명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본능을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부유층의 모습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며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굳이 따지자면 <풀의 죽음>은 <파리대왕>과 <하이라이즈>의 중간에 위치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진짜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야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걸까요? 흡사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진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같은 책을 들이댈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서로를 돕는 사례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며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반드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또한 이타적 본능에 대한 생물학의 이론을 이야기하며 이타적 행동이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최악의 상황에서 이기적인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야만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주류세력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모습이 하나의 행동방식일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풀의 죽음>처럼 된다고 해서 반드시 <풀의 죽음> 속 주인공처럼 된다는 건 아닌거죠.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가슴에 품을 때 <풀의 죽음>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능성의 소설이 됩니다. 아주 끔찍한 소설이 아니라. 저는 이 소설을 가능성의 소설로 읽을 때 책을 조금 더 자유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의 소설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다양한 소설을 읽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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