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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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선택이 가져올 혜택은 어마어마한 반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의 대가는 인류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 현명한 선택을 하냐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11)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89~90)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91)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277)

<호모 데우스>에 대해 뭔가 쓴다는 게 두려워집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독서를 하며 떠오른 생각들을 제대로 정리를 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독 1서평 원칙을 지켜야한다는 내 마음의 강박관념이 글쓰기를 강요합니다. 강요에 따라 저는 할 수 없이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을 쓸까 고민하면서. 고민하다 보니 짧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게 쓰자고 하면 끝도 없이 길게 이어질 것 같아서. 그리고 아직 한 번 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 만족하는 만큼의 길이를 쓸 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보다 긴 글은 나중에 한 번 더 읽으면 그 때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해보죠. 

저에게 <호모 데우스>에 대한 느낌은,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유발 하라리 특유의 다양하고 상당한 양의 지식을 잘 섞어서 읽기 쉽게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읽다고 다 읽고 나면 무언가 지식을 얻은 것 같다는 느낌도 좋습니다. 책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도 비슷합니다. 강렬하고 무언가 지적인 깨달음을 던져주는 초반부와 중반부, 뭔가 헛헛한 느낌의 후반부까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과거 해석에는 깊이 공감하며 큰 인상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과거 해석이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가 미래를 이야기하며 상상력을 발휘해 미래에 대한 픽션적인 사고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남들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뭔가 믿음이 안가기 시작합니다. <사피엔스> 때도 그랬고, <호모 데우스>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미래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가, 자신이 구태의연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뻔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그가 <사피엔스>에서 인류의 문명의 초기에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룩한 계기가 허구를 창조하여 그것을 믿는 '인지혁명'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감탄했습니다. 마치 내가 어렴풋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 정리하여 설득력 있고 통찰력 있게 얘기하여 감탄했다고 할까. '농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본도 좋았습니다. 대체적으로 다른 역사서가 '농업혁명'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면, 그는 '농업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게 좋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호모 데우스>에도 이어집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은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에 있다고 하면서, 그 대규모로 협력하는 능력은 대규모의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믿을 수 있게 만들어낸 '허구'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나 국가에 대한 믿음, 민족주의나 이데올로기가 대표적인 것이겠죠. 저는 이번에도 그 말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습니다. '아 맞다 맞어'하고. 우리를 진정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협력을 이루어내는 능력과 그에 기반한 성과, 그 협력을 이루어내기 위해 구축된 허구들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사피엔스>가 <호모 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하기 시작하면 저는 그것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호모 데우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저는 그가 인간이 기술을 이용해 불사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낼 때 '이건 뭔가'하고 이상하게 느껴습니다. 인간이 발전된 기술로 인해 죽음을 극복하고 불사를 이루어내는 게 진정 가능하다고 믿는단 말인가? 책의 뒤에 보면 유발 하라리는 불사를 진짜 불사가 아니라 수명이 많이 늘어나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며 잠시 자신의 주장에서 물러나는 말을 합니다. 지금의 인간보다 오래 살지만 사고나 질병으로 죽을 수는 있다고.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불사입니까? 그건 지금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는 기술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기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는 있죠. 하지만 그것을 마치 확실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기술만능주의나 과학만능주의라는 이름의 믿음. 저는 그런 말들이 과학적이라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역사 해석에서는 날카롭고 독창적인 해석 능력을 발휘한 유발 하라리가 미래를 말할 때는 갑자기 기술만능주의라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기반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거죠. 불사 얘기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미래에는 인간이 기술로 발전된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며, 비유기체적인 알고리즘이 인간을 지배하여 지금의 인간의 자리를 박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가능하다는 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만 있는 이야기를 확신하려면 더 많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논거가 필요할 듯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가능하다는 말은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닐까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기본적으로 저는 유발 하라리가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에 기반해서 미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은 아주 오래되고 길게 이어진 뻔한 레파토리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같은 종교나 플라톤의 철학 같은 고대의 철학부터 이어진 이 환상은 근대의 니체 사상이나 뉴에이지 사상으로 계승되며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이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미래의 기술 발전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내놓는다고 그 뻔함과 구태의연함이 사라지나요? 차라리 인간이 신적인 존재인 '호모 데우스'가 된다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업그레이드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다른 말을 하면 신선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유발 하라리가 괜찮은 점은, 자신이 상상한 미래 세계의 모습을 비교적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래에 대한 시선이 업그레이드의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피엔스>나 <호모 데우스>는 흥미진진하게 읽다 실망감에 느끼는 걸로 끝나버렸습니다. 어쩌면 이 두 책에서 만족을 느끼시는 분들에 비해 제가 깐깐하고 괴팍한 독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 어쩌겠습니까. 자기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야죠. 책을 읽는 방식에도. 약간의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느끼면서 저는 <호모 데우스>를 덮고, 다른 책으로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다른 책은 제발 실망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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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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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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