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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 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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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이며,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158)
국민 만들기,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국민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요동쳤으며, 권력자들은 힘들게 쌓아 올린 통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근대의 권력이 안게 된 또 하나의 과제는 애써 만들어낸 충성스러운 국민의 변절과 변심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권력자의 가치관 또는 비전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는데, 국민들이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수록 이 전략도 효과가 있었다.(7)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권력자에게는 유토피아이나 국민들에게는 디스토피아다. 국민을 길들이려는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민족의 신성한 역사와 동일시하며 국민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종종 역사 교과서를 고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 역시 국민을 변하지 않는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방해되는 기억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8)
권력이 역사와 기억을 바꾸려 할 때마다 사회적 반발과 분열이라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결코 모두 같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늘 유혹에 빠진다. 보수주의자들은 기득권과 전통적 가치를 영원한 신화의 이름으로 지키고자 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개혁의 신화를 영속화하려 한다. 역사 논쟁은 필연 정치 논쟁이며, 한 사회과 과거 기억에 대한 갈등 앞에서 화해 또는 분열로 나아가는 갈림길이 된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현재이자 미래가 되는 셈이다.(9)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과거에 저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고구려의 옛영토인 만주벌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러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는 저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인식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며 접한 인식과 다양한 관점,생각,사상,문화들이 저로 하여금 과격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사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절의 저를 황당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ㅎㅎㅎ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를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가 떠올랐습니다. 독재자들이나 독재권력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사례들속에서, 그 역사적 허구에 빠져 독재자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과거의 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찬란한 과거의 민족주의적 신화에 매달리며 현재 권력을 용인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저는 이런 민족주의의 악용 사례들에 대해서 독서모임에서 종종 이야기해 왔습니다. 저만의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한 번 적어볼께요. 제가 보기에 인간은 집단동물 같아 보입니다. 고양이 같은 개체적 삶의 방식을 가진 동물들은 할 수 없는 행동을 인간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소수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단일 때 더 용감해지고 과격해집니다. 저는 이런 여러 모습들속에서 인간이 집단적인 행동에 익숙한 집단적 행동의 매커니즘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대라는 서양에서 생겨난 독특한 시대적인 흐름은 집단보다는 개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을 몰고갑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강조하는 근대적 시대의 흐름과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의 괴리가 발생하는 삶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능은 시간의 틈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체제를 바꾸는 혁명이나 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신과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구 죽이는 학살이나 전쟁,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나타나든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은 언제나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전체주의,파시즘,인종주의,민족주의나 아니면 진보과 혁명,개혁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상과 철학과 함께.

본능을 거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이 모습을 내밀 때 본능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본능의 발현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완벽한 해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확률이 높은 방법은 있을 수 있겠죠. 교육과 사회 시스템, 문화와 관습의 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만약에 이런 것 없이 정치적 목적때문에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을 악용하게 된다면, 저는 본능이 나쁜 길로 가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같은 책에서 나온 사례들이 본능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위대한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사고방식이나 중국 공산당의 과거의 과오를 묻어버리고 공산당의 뛰어남만 강조하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교육,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과 과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2차대전당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억만 강조하는 현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의 신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위조하고 위대한 힌두문명의 신화에 집착하여 과거의 정치시스템에 현대를 맞추려는 현재 인도 집권당인 인민당의 사고방식과 역사교육 등등. 이 사례들대로 나아가면 우리는 더 편협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폭력적인 사람이나 공동체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죠.

위의 사례들을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를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제대로된 자아인식도 아닌데다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면 우울증이고,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면 성격장애입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좋은면과 나쁜면을 포함해서 그 모두를 가감없이 바라봐야합니다. 이걸 공동체로 확대시켜 볼께요. 조금 더 건전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인식이 건강해야 할 겁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자기자신을 있는대로 바라보는 인식을 통해. 공동체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공동체가 과거의 역사를 오직 긍정의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에 나오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떤 부정도 용납하지 않고 선하고 위해단 역사에 집착하여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력자의 모습들이 건강하지 않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해답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다양한 해답이 있겠지만 책의 시각을 따라서 역사학과 역사교육 입장에서의 해답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완벽한 의미의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좋은 것은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나쁘면 나쁜 점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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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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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으로 들어온 이상 철학은 문학의 텃세를 감수해야 합니다. 문학과 철학의 동거는 사이좋은 동거만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해야 하고 연기해야 하며 때로는 성격도 버려야 합니다.(8)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에 관한 진실일 뿐이에요.(419)

우리가 의식하든 안하든 한 시대의 철학이나 사상은 우리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을 최고로 여기든 안 여기든 우리는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물질주의적이고 물신적인 경향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으니까요. 유럽의 중세라면 사람들이 우리 시대처럼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탐욕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시절이니까요.

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의식하든 안하든 그들의 삶에 그들이 살다간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이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고, 작품을 쓸 때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쳐 작품이 완성됐을 때는 문인 자신의 삶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작품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문인 자신이 의식을 하고 사상이나 철학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면 더 그런 경향이 강하겠죠. 그래서 저는 사상이나 철학이 없는 문학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상이나 철학은 작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작품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잘 드러나나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냐 하는 차이가 있겠죠.(작품의 완성도 얘기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알라딘 인문학 독서 블로거로 유명하고 문학과 인문학을 주제로 활발히 글을 쓰고 강연도 하는 '로쟈' 이현우 씨가 쓴 <문학 속의 철학>은, 저자 자신이 '문학 속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제가 위에 썼던 것을 로쟈 이현우 씨가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강의도 하고 책도 낸 것이죠. 저자는 자신이 과거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이문 선생이 비슷한 주제로 썼던 다른 책인 <문학 속의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머리말에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 주제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 박이문 선생의 책을 저자가 주의 깊게 읽어나간 것과 유사하게, 저자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나갔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고요, 어떤 부분은 저와 생각이 상당히 비슷해서 공감을 했고, 어떤 부분은 모르는 걸 알아나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다양한 생각의 흔적들을 다 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일정 부분의 흔적들만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밑에 적은 글들이 그 흔적들입니다.

안티고네. 누군가의 말대로 해석을 하나의 권력이라고 본다면,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헤겔의 해석이 가장 큰 권력으로서 작용해왔다. <문학 속의 철학>에서 저자인 이현우는 헤겔의 해석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석의 권력에서 벗어하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는 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현우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해석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자신만의 자세가 되기 때문에.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신을 변호하는 의도로 선과 악의 문제를 논하다 결론적으로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의 이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데 추가적으로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부분이다. 선과 악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었던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닌가? 선과 악의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인간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만들어나가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 개념이 신의 선과 악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은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다면, 그에 대해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대한 이현우의 해석을 따라가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들에 의하면, 주류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합리적 인간이란 옳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충분히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이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에만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긴 건, 합리적 인간 개념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식 반론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죽음은 한 번 경험하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을 차분하게 훑어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독자를 죽음의 길로 서서히 안내하며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간접체험하며 삶의 힘,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간접체험으로 한 번 죽으며 우리는 다시 살아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조이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다, 진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는지도알 수 없는데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고 쳐도 예술이 그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도 나는 회의적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어요'라거나 '나는 예술을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가 가능한 일일까?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교적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

싯다르타. 삶의 진실을 꿰뚫는 지혜를 말로서 전달할 수 있을까? 지혜를 말로서 전달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지혜의 전달방식 중 하나라면, 문학도 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싯다르타>가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나는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학의 몸부림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빚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보니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이 문학적인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포함한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혜'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일부로서의 지혜.

사랑에 빠진 여인들. 분명히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현우의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꼼꼼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D. H.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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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자비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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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저를 대하는 걸 보면, 저도 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니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과는 다른 종일뿐만 아니라 유의미하다는 점이 제 머릿속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368)
그것이 당신이 태어나기 3천 년 전부터 일이 돌아가는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태였다는 점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요. 아난더는 당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고, 당신이 당신이 아끼는 누구와도 와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전부는 모두가 놀이판의 놀이패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우리를 희생시킬 수 있었고, 희생시켰지요.(378)
드라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승리 아니면 재앙으로 끝난다. 행복을 성취하든가, 아니면 희망까지 틀어막는 비극적인 패배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에는 끝난 뒤에도 언제나 뭔가가 있다. 늘 다음 날 아침이 있고, 또 다음이 있고, 늘 바뀌고, 잃고 얻는다. 늘 한 걸음 다음엔 다음 걸음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한 번의 진짜 끝이 올 때까지. 하지만 우리를 압도할 듯 커 보이는, 어렴풋이 먼 그 끝조차도 하나의 작은 끝에 불과하다. 여전히 모두에게는 다음 날 아침이 있다. 우리를 뺀 우주의 엄청나게 많은 나머지 다수에게 그 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끝은 임의적일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든 끝은 아무 끝도 아니다.(382)

<사소한 자비>는 <사소한 정의>,<사소한 칼>과 이어지는 스페이스 오페라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사소한 자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명사는 전부 그녀. 라드츠 제국 시리즈를 읽을 때 가장 낯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대명사는 '그녀'입니다. 계속해서 '그녀'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나오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성구분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명사 그녀의 활용은 '남성이 이럴 것이야', '여성은 이럴 것이야' 하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라드츠 제국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2.종교의 중요성.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황제가 이천년 간 다스려온 라드츠 제국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주제국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제국은 종교도 중요시합니다. 라드츠 제국 자체도 제국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있고, 제국에 속한 행성들도 각자의 종교가 있고, 이것들이 엮여서 제국의 문화, 제국에 속한 행성 자체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 이야기는 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종교에 중심을 두면서 라드츠 제국이라는 가상의 제국에 종교,문화의 양상을 보이며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인간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서 종교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자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3.분열하는 황제. 라드츠 제국을 이천년 간 다스려온 황제 아난더 미아나이는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지고 각자가 개체로서 활동하지만,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정의되는 것이죠. 그런데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사소한 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하나의 존재로서 활동해온 황제 신체들간의 반목이 극대화되면서 <사소한 정의>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분열하여 제국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브렉을 옹호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과 브렉의 행동에 반발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으로 나뉘는 것이죠.(<사소한 자비>에 가면 제3의 세력까지 출현합니다.^^) 마치 인간 정신의 분열증적인 양상을 실재화한 것 같은 이 모습을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가 얼마나 색다른 느낌의 소설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4.인공지능의 동시적 시각.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은 함선의 인공지능으로서 살아왔다 나중에는 황제에 저항하며 개체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소설은 브렉이라는 인공지능이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함선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의 시각에서는 함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기에 소설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각은 인과관계 없이 각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나열하며 보여줄 뿐입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나 SF가 인간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는 인공지능의 시각이기 때문에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소한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께요. <사소한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전작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3부작의 첫번째 작품 <사소한 정의>는 인공지능인 브렉이 명령받는 수동적 존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느낌의 SF입니다. 황제에 명령을 따르다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제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두번째 작품인 <사소한 칼>은 자기 편 황제와 손잡은 브렉이 자신이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던 함장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아소엑 행성계로 가서 아소엑 행성계의 실상을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 문화인류학적인 보고서 느낌의 SF입니다. 아소엑 행성 내부의 인종차별과 불평등,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체제의 모순을 세밀하게 그리며 브렉이 자신의 힘으로 그 부조리, 모순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품인 <사소한 자비>는 아소엑 행성계의 주도권을 쥔 브렉과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최후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첫작품이 성장소설의 느낌, 두번째 작품이 문화인류학적 리포터 느낌을 줬다면, 세번째 작품에서는 정치적인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치소설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소한 칼>을 거치며 아소엑 행성계에 자신과 연관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아소엑 행성계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 브렉은 반대편 아난더 미아니아와 모든 것을 건 전면전을 벌이는 걸 꺼리게 됩니다. 전면전이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렉은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하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함선을 타고 있는 군인들을 활용해서 아난더 미아나이를 죽이는 암살 작전을 짭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브렉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치적인 작전을 이용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이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최악의 피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정치인 것이죠. 브렉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라드츠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수수께끼의 외계인 프레즈거의 통역관과 2000년 전에 아난더에게 패배하고 밀려나서 아난더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노타이 문명의 함선에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라드츠 제국을 능가하는 과학기술을 가지고 제국에게 패배를 안긴데다 쉽사리 파악이 안되는 행동을 하는 외계인 프레즈거는 아난더에게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이고 협정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거기에다 아난더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브렉과 아난더과 싸운다면 브렉을 지지할 것이 확실한 노타이의 인공지능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가 독재자의 폭압적인 행동으로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잃은 것도 브렉에게 이득입니다. 브렉이 같은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신뢰를 보여줘서 브렉을 믿고 있는 아소엑 정거장의 인공지능이나 아소엑에 머물고 있는 함선들의 인공지능들도 반대편 아난더의 폭압적인 행동,불신,자신들에 대한 무시로 반대편 아난더보다는 브렉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브렉은 이 모든 요소의 힘을 빌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와 정치적인 대결을 이끌고 나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책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낯설고 독특한 가상의 우주제국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읽는다는 게 좋았거든요. 라드츠 제국 시리즈 특유의 독특한 문체도 좋았구요. 중간중간 나오는 지적인 대화들도 읽는 맛을 더합니다. 인공지능을 존중하고 인간과 같은 존재로서 대하는 브렉과 브렉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인간들의 모습과 반대로 인공지능을 인간과 존재로서 대하는 걸 거부하고 무시하는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브렉이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인공지능을 대하는 모습에서 책 제목인 '사소한 자비'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할께요. 앞으로도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맛을 살린 앤 레키의 다른 SF들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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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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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28)
사랑하는 대상 안에 숨은 위대함을 알아보고, 그것을 꺼내기 위해 망치까지 쳐들 수 있다면 당신은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앎이라고 다를까.(174)
지혜란 율법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하고, 성숙은 떠남으로써만 가능하다(177)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문제, 생활 방식의 문제, 실존 방식의 문제이다.(223)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니체 전체의 사상을 살펴보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니체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에 입문하려는 초심자에게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한 <선악의 저편>을 저자인 고병권이 읽고 강독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니체의 어떤 특정한 시점의 사상을 파악하는 책인 것이죠.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고 해서 지엽적인 것이라고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니체 사상의 모습들은 이미 앞으로 태어날 니체 사상들을 품고 있습니다. 이미 태어날 사상들을 기다리는, 기다리면서 그 사상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책은 담고 있습니다.

저자의 니체 강독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니체>가 '언더그라운드'에 서서 자신만의 서광(=아침놀)을 맞이하기 전 홀로 지나와야 했던 깊은 밤들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을 통해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맞지만, 종교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기다림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기다림은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가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가가 되어가는 기다림입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기다림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미래에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이 니체가 말하는 '기다림'입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변화의 강력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변화하여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기다림. 여기에서 미래는 현재와 교차합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는, 미래를 기다리지만, 그 미래를 이루어가기 위해 현재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가득 채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의 삶 속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미래와 교차하면서 미래가 되어가는 것이죠.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는 했으니 뒷부분 이야기를 해볼께요.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이란,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의 폭발이 필요한데, 사유의 폭발이 강력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깊고 깊은 응축을 통해서 폭발이 일어날 때 진정 강력한 변화, 진정한 자기극복이나 자기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때 등장하는 것이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더욱 더 강력한 변화를 위한 깊은 응축을 가리키는 말로서.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일으키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철학자로서의 니체가 '다이너마이트 니체'인 것이죠.

위의 문장을 읽다보면 궁금증이 또 생길 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가 뭐지? 이 질문에도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단순한 학자가 아닙니다. 단순히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자신의 지식을 전해는 인물은 니체에게 학자이지 철학자가 아닙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실천을 행하는 자입니다. 삶과 분리된 철학, 삶과 괴리되어 자신만의 세계관에 침잠하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서 살아나가며 삶과 철학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도래하는'을 붙이면 도래하는 철학자가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 그런데 왜 니체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린다고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니체가 자기가 살아가던 현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야기해야합니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을 '현대성에 대한 비평'이라고도 했던 것처럼,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는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던 동시대의 유럽, 동시대의 독일은 현실을 부정,억압하며 죽음 이후의 내세나 초월적 가치를 현실보다 우선시하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너무 강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럽의 근대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그것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현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근대 유럽이 내세우는 가치들이 다양한 것들을 평범하게 만들고, 특이성이나 차별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일원화하는 것에서 니체는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반화한 인간이 득세하는 세상. 무언가 다르고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나 체제에 순응하는 선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게 니체가 바라본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래하는 철학자,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는,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을 극복하는 인간형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도래하는 철학자는, 니체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가 강요하는 가치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시대의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새로운 가치의 전도를 이루고 그 전도된 가치에 따라 좋은 평가를 얻은 고귀한 덕을 따르며 나쁜 평가를 얻은 부정적인 덕과는 거리를 두는 게 니체가 말하는 도래하는 철학자입니다. 윗부분에서도 말했지만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우리 내면의 야수성을 바라보는 것들이 필요하고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한 니체. 이 말로 무수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 중심의 사회가 무너지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는 현실인식이겠죠. 거기서 더 나아가 니체는 사람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믿고 자기자신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 듯 합니다.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믿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디라면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인간들을. 니체는 자신의 바람을 위해 자신의 책을 읽는 이에게 오늘도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다이너마이트에 당해 새로운 사유의 변화를 겪은 책의 저자 고병권이 자신이 겪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게 <다이너마이트 니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니체식 다이너마이트 던지기에 일조하게 됐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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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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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노래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82)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을 들여다봅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이 시집을 읽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나는 왜 블레이크의 시들을 계속 읽을까? 왜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떠오릅니다. 이 글은 그때 떠오른 흔적들을 짧게나마 적어본 글입니다.

첫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라는 건 저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현대시들은 분명 읽기는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어의 정련이나 조탁을 통해서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창조해내는 건 이해하겠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 세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굳이 이런 시들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은 읽으면 읽는대로 이해가 잘 되는 편입니다.(물론 이해 안 되는 시들도 있기는 합니다.^^;;)

두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스며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로서 그는 자신의 시에 순수한 열정을 담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동시대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들이 뿜어낸 열정의 영향 때문일수도 있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반동적인 경향을 보이며 자유주의 사상과 개혁적인 성향을 억압한 동시대 영국 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블레이크는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향해 사람들이 나아가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순수한 열정을 시에서 보여줍니다. 제가 그 열정에 끌리는 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합니다.

세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충분히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저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많은 시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사랑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와 그 사랑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로 구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시를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입니다. 블레이크는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습니다. 동시대에 굴뚝 청소부로 혹사당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 런던에서 빈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 '사람마다의 울음 속에서/ 모든 어린아이의 공포에 질린 울음 속에서/ 모든 목소리와, 모든 금지령 속에서/ 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듣는다.'(p.38),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그의 시 곳곳에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이크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를 곳곳에서 표출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동시대 교회에 대한 분노, 현실의 인간들을 억압하는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비판하는 것 등등.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저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네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힘을 믿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세계를 만들어 그걸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의 판화와 함께 출판했습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건 그만의 독특한,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시세계로 걸어들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이며 신비로우며 낭만적인 그의 시세계는, 읽는 독자에게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이상한 감흥을 선사합니다. 오직 블레이크만이 줄 수 있는 감흥을.

여기까지 적고보니 제가 사는 게 힘든가 봅니다. ㅎㅎㅎ 사는 게 복잡하고 힘드니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가 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끌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시의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은 거죠. 이 느낌을 읽을 때마다 받기 때문에 제가 그의 시들을 계속 읽는 것 같습니다. 몇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생한 상상력이 빚어낸 시들을 몇번이고 계속해서 만나는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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