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자들의 위키피디아 - 우리 사회를 망치는 뉴스의 언어들
강병철 지음 / 들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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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강병철 기자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합니다. 2008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뒤, 문화부, 사회부 법조팀, 사회2부 서울시청팀, 정치부 국회부 등 경력을 쌓고 현재는 정치부 외교안보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기자상을 수상했는데요. 또한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수상할 정도로 언론계에서 유명한 민완기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2019년 12월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은 초판 2쇄였습니다.

서두에서 현직 기자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기레기'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현재 언론계의 문제점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정치 평론가가 우리나라 기자들의 기사 송고 형태를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쓰되 그 사실 전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우리 언론계의 행태를 꼬집은 평가 한 줄이 떠오르는데요. 더욱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 이미 90년대부터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들어왔으니, 소위 '언론 무용론'의 기원은 이처럼 오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또한 이 글 2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과거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와 관련된 모 언론사의 오보기사는 외부의 소식을 제대로 알기 힘든 많은 국민들을 오판하게 만들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선동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의도된 조직적 프로파간다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언론이라는 권력 자체가 얼마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지 앞선 역사적 사건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실린 언론계와 기자들의 잘못된 기사 송고 행태는 크게 4개의 주제 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의 포퓰리즘에서는 정치적으로 맞서고 있는 상대 당에 대한 어느 정책과 주장들을 '포퓰리즘'으로 몰고 가면서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아예 삭제하게 만드는 행태를 다루고 있는데요.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얻은 자들은 전혀 대안이나 개선을 위해 노력할 의지가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보면 그가 저임금의 불만에 가득 찬 하위 계층의 백인 남성들을 선동해, 표를 얻고 연방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거의 극명하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이 포퓰리즘의 인식적 걸개가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판의 입을 닫기 위해 쓰이고 있는 점은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우리의 정치와 이를 다루는 언론계의 기자들이 양산하고 있는 '포퓰리즘' 자체를 여실히 잘 분석해내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이면의 민주주의가 많은 시민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소위 '국가의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소위 복지 여왕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 이 사회 부조 및 복지는 포퓰리즘과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의 2장인 '시장질서'에서 "만약 시장에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도태되어야 한다면 영세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반문은 역시나 제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사회적 복지를 축소한다면 국가의 지원이 나날이 시급한 계층의 사람들은 과연 이 사회에서 어떻게 버텨 나가야 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기득권층이 선민 의식과 사회 진화론을 바탕으로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를 사회 전체에 철저히 강요한다면 그것 자체는 모두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익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장의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서 언론은 국민들의 법감정을 기반으로 사법부의 판사가 행하는 일부 판결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로 이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강력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저자가 분석하는대로 법감정 자체를 합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감정에 고양된 법감정으로 입법 행위가 이뤄진다면 그것 자체로 공익과 법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언론이 좀 더 집중해서 비판해야 하는 부분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사법부가 내린 비상식적인 판결일 텐 데요. 공화주의에 기반한 사법부가 국민의 눈치를 보는 것이 마땅한 측면이 있다면 '법 앞의 평등'이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판사 한 명이 하나의 사법부로, 그 판사의 양심이 권력에 물들지 않도록 언론과 의회가 이를 감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돈과 권력이 많은 자들에게 다른 일반 시민들에 비해 법의 판단이 관대하다고 믿고 있는데요. 저는 판사들이 법과 양심에 기반한 판결을 할 수 있도록 사법 카르텔을 먼저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심지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 또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자 기능이고,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권력의 견고한 균형과 분립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오판하지 않도록 치밀히 고안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유럽의 절대시기에서 프랑스의 삼부회가 일부이긴 했지만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온 점을 인식해 본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이전 세대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끝으로 4장 정치에서 보이는 '내로남불'과 '종북과 적폐'는 확실히 근래 우리의 정치를 묘사하는 주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발전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이러한 선거를 통해 순환되는 정치 권력 자체가 다양한 국민들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투표가 끝난 이후에는 전혀 권력이 견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한계도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주민소환제에 대한 선출 권력의 노이로제는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건전한 행정과 이에 기반한 정치의 협력은 아마도 가면 갈 수록 시민들의 기대와 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대치하고 있는 양당 정치에서 건전한 토론이 아닌 구시대적인 이념 대립과 양비론에 기반한 건설적인 비판의 함몰은 거의 주류적인 해법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인 '내로남불'은 어떤 정치인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벌인 잘못된 정치적 행태를 마땅히 성찰해야 하지만 우리 편이 하면 괜찮고 상대가 그러한 일을 벌이면 가혹하게 비난하는 행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치인의 비위나 비리 행위가 이 내로남불로 그 본질을 흐리게 되어 더 이상 정치의 개선을 어렵게 만드는데요. 과연 이런 행태에 언론이 가세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 혐오'는 더욱 심해지고 우리의 정치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근래 시민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정치의 효능감'은 그것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이 4장의 여러 주제 별 분석은 우리 정치의 직접적인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언론이 어떻게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제언한다고 여겨집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루로써 시민의 공익에 이바지해야 하며, 기득권 권력을 비롯한 여타 권력과 거리를 두고, 사법부의 판사와 같은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언론이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에 기여하는 쪽으로 기사를 송고하는 행태도 지양해야 할 텐 데요. 사실 무분별하게 카르텔이라는 단어로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검찰과 가까운 기자들, 대기업에 순응한 기자들, 특정 정당의 헤게모니에 자신의 이익을 건 기자들 등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완전한 자유 시장 체제'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어떤 자들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면 완전 자유 시장은 거의 허구임을 쉽게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다름 아니라 뉴스를 소비하는 층의 성격이 변했다는 점이다. 언론의 저열한 습성을 걸러내는 사람들의 눈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매서워졌다.

복지 정책은 수혜 계층이 특정되고 투입되는 예산이 투자라기보다는 지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에 유독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쉽게 직면한다.

그런데도 모든 지자체의 무상 복지 정책을 한 데 묶어 포퓰리즘이라 몰아붙이는 건 복지 정책 자체에 대한 보수 언론의 화학적 거부 반응일 뿐이다.

즉 이른바 ‘좌파 정부‘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야당이 찾아낸 개념이 바로 포퓰리즘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수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지만으로 권력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 공약은 정치인의 지향점과 양심에 상관없이 표를 얻기 위해 잠시 표정을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렴 블루칼라와 운동권 학생, 무직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만 모였다고 해서 이를 간단히 불순한 회합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실망감이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나 독재체제에 대한 옹호로 나아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만든 법과 제도에는 늘 정치권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자본 권력과 지식 권력, 이익단체, 지역 유지, 언론 권력 등의 의견만이 한껏 반영됐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고전 경제학의 시장경제 체제를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현대사회의 모든 국가들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적절한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정부 정책은 일종의 시장 개입이다. 그런데 재벌 대기업들이 말하는 자유주의 시장질서는 자유방임주의 시장경제 체제다.

관리해야 할 히키코모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책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직업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에서 가족 없이 혼자 게임과 인터넷 서핑을 주로 하며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웃의 편견은 극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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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0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복지를 위한 노력과 지원이 죄다 ‘포퓰리즘‘이란 단어로 평가 절하되어버리는 점이 황당하면서 절망스럽습니다. 그런 근본 없는 왜곡이 일부 극우 지지층들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건 제대로 자기 생각을 갖지 않음의 결과겠지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베터라이프 2023-10-07 23:43   좋아요 1 | URL
넵 맞습니다. 복지 지출에 대한 담론 자체를 포퓰리즘으로 몰고 가는 게 꽤나 많이 보이는 수법이었죠.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 글에 등장하는 사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음.. 극우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들은 특히나 자극적인 주장들에 너무 노출되어 있죠. 그렇다고 이분들을 전부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한 사람들로 몰 수는 없지만 극우가 보통 인종주의와 진보 좌파 격멸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니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두제보다 문제가 많은 전체주의와 엮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극우 포퓰리즘은 지금 유럽에서 악명이 높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대학 진학률이 높은 국가에서 극우를 그저 맹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실로 이론적으로는 쉽게 설명이 되지 않네요. 일단 이 책은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사회와 시민들을 오도하는 듯 보이는 여러 주제들을 묶어서 규명해 내고 있습니다. 글 전반은 꽤 평이하고요. 기자들의 안 좋은 습성들까지 담고 있어서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일독해 보시길요~^^
 
연결된 위기 -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한반도 핵위기까지, 얄타체제의 해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승욱 지음 / 생각의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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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백승욱 교수는 1966년생으로, 서울대에서 사회학 석 박사를 마치고 현재 중앙대 사회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조교수와 빙엄튼 대학 페르낭브로넬센터 방문연구원을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주로 그는 사회변동론을 기반으로 20세기 후반의 특징적인 사회학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논저는 좀 더 일반적인 사회학 교수가 나름 국제 정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그의 해박한 배경 지식 만큼이나 글 곳곳에서 보이는 특유의 심도 있는 통찰은 꽤나 놀랍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냉전 시기의 이행과 관련된 여러 분석들은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2023년 9월 출간 되었습니다.

우선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가 2장에서 언급하는 "현 국제 정세의 심각성"은 충분히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지지부진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금세기의 이 전쟁이 그저 국지전 정도의 파급력이 거의 없는 제한적인 전쟁이라 믿고 싶은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백승욱 교수의 이 글은 마치 그레이엄앨리슨의 '예정된 전쟁'의 색다른 시각으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작금의 위기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해묵은 '얄타체제'가 무슨 관련이 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텐 데요. 과거 미국-영국-소련의 정상이 계획한 일종의 전후 질서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얄타체제 혹은 얄타 회담은 마이클 돕스가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처럼, '스탈린에 이용당한 루스벨트'의 순진함을 먼저 언급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만, 저자가 3장에서 상세히 분석하는대로 당시 폴란드의 존재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관련된 복잡한 셈 법이 얄타 회담 이전의 지정학을 고찰해 봐야 할 정도로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제2차 독소 불가침 조약과 관련해, 당시 폴란드의 불법적인 분할의 역사는 아마도 얄타체제로 통해 도출된 '국제 연합'의 정치가 강대국의 영토적 야욕과 이를 부추기는 환경을 관리하려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에 저자는 이러한 논증 가운데 푸틴의 러시아가 과거 영토 야욕을 금세기에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이 '얄타체제'가 사실상 위기를 맞이했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글의 도입인 1장에서 저자는 이런 "얄타체제의 해체는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지탱해온 세계질서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고 다시금 분석하고, "그렇다고 해서 이를 대체하는 더 나은 세계 질서의 틀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만약 앞서 제가 해석한대로 이 얄타체제가 독선적인 강대국의 출현을 어느 정도 관리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면, 기나긴 냉전 시기에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적극적으로 순응하여, 전후 부흥과 번영에 성공한 중국의 사례는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는 이것을 중국이 신자유주의적 금융 질서에 매우 성공적으로 통합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력의 신장과 과거 유럽 열강에 의한 굴욕적인 역사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군사적 강국화'로 소위 진정한 유소작위가 시진핑의 열망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중국 내부의 민족주의적 열망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의 안위를 위해 이를 이용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요. 그동안 적잖은 서구의 이론가들이 '신자유주의가 부흥 시킨 중국의 번영'을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이는 지오바니 아리기의 일침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2장 후반부에서, "중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세계 경제에 통합되어 있다"는 진술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여실히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바이든이 중국 때리기에 나서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중국 경제 자체가 그만큼 신자유주의와 분리할 수 상황이기 때문일 겁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 지배 더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금융 시스템에 반대하는 시진핑 조차도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완벽히 '헤지 hedge' 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을 텐 데요. 과연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현대적 군사 대국'인 중국을 미국과 서구 유럽이 관여해, 얄타 체제가 만든 국제 연합이라는 분권적 정치 질서로 이를 관리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우리가 미래를 위해 인지해야만 하는 불확실성은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히 추측해 볼 따름입니다.


어느 정도는 윌슨의 이상을 이어받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유럽의 전체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소련의 스탈린과 협력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중국의 장제스를 포함한 전후 질서에서 이들 4개국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는데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얄타체제의 명암을 그저 교활한 스탈린의 정치적 술수로 대체할 것이 아니라, 전후 질서를 수립해 가는 과정에서 루스벨트가 주도한 자유 세계라는 기본적 인식 틀이 아마도 과거와는 다른 탈제국주의적 국제 질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저자가 인정하는 대로 트루먼이 미 대통령을 승계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소련의 스탈린이 자유 세계와 협력할 생각을 가졌을 정도로 유연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본에 대한 참전 약속도 그렇거니와, 프랑스의 드골 정부에 대한 스탈린의 조건부 인정은 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자의 명료한 분석대로 얄타체제에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있는 스탈린이 애초에 서구 유럽을 가까운 미래의 정치 군사적 대적점으로 인식했다고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어폐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전후 재건을 미국의 차관을 통해 수행하려고 했던 스탈린의 희망은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역사는 스탈린의 소련이 '고립적 사회주의'로 돌아서며, 양 진영간에 첨예한 대결 구도로 이어졌는데요. 아직도 얄타체제 전후로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결론적 운명을 너무 과신하여 너무나 단편적인 분석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것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앞으로 연구자들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본격적으로 루스벨트는 전후 체제가 종래의 제국주의적 기조 아래, 식민 지배로 이뤄지는 체제 전반에 거의 동의하지 않았는데요. 이것은 처칠이 종전 이후, 영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유지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던 것으로도 드러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이면서 '탈식민주의' 세계에 가담할 것으로 보이는 소련을 전후 질서 수립을 위한 중요한 동맹 세력으로 판단"한 것은 그의 명확한 판단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를 통해 드러나는 자유주의 세계라는 것이 당시 국제 체제의 새로운 지각 변동이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이러한 노정 자체는 단적으로 지금에서 보이는 러시아와 중국에 있어 확실히 이질적인 것이며, 이것을 단순히 진영 논리로 소급해, 체제의 의의 자체를 격하시킬 수 없는 문제라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전후를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한 조지프 나이의 여러 저서들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했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시진핑이 실현하려고 하는 '대만의 실지 회복'과 최근에 홍콩에서 보여지는 '일국양제' 체제의 사실상 붕괴는 부유하면서 동시에 군사 대국인 중국이 주변 안보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게 될 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런 연유로 주변국과 우리가 중국의 직접적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언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더욱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중국이 학습하고 있는 서구와 푸틴의 대결은 서구가 가하고 있는 제재를 통해,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의 일당독재가 사회 내부적으로 흔들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여러 해석은 복합적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시진핑 정권이 벌이고 있는 거대한 인터넷 통제 사회는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대로 중국 공산당이 체감하고 있는 현실적 위협을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도 중국 당국이 인민들에 의한 제2의 천안문 사태를 다시금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겁니다. 이에 저자가 다소 간접적으로 언급한 얄타체제의 사실상 붕괴는 아마도 자유 세계라는 틀에서 그동안 인류가 쌓아 올린 가치를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단순히 '민주주의-권위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푸틴의 근원적인 영토 야욕과 더불어, 시진핑의 군사적 불확실성이라는 부분으로 우리 세대가 떠안아야 할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 지점이 사회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본질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끝으로 작금의 현실적 위기라는 우려와 체제의 위기는 이미 글의 4장에서 상세히 분석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헨리 키신저가 베스트팔렌 체제에 대해 갖는 근본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우려하는 얄타체제의 뒤안길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파급을 초래할지 다소 두렵기도 한 데요. 그런 의미에서 국제 사회가 좀 더 합의의 묘를 발휘해, 푸틴이 갖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야욕을 필히 저지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학습한 시진핑이 대만에서의 직접적 도발에 나서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보에도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반된 시각이지만 저자는 다른 국제정치학자들과는 달리 나토의 동진에 대해서는 크게 인식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이는 2004년 초반까지 러시아가 큰 틀에서 미국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때 푸틴이 워싱턴에게 기대했던 것은 과거 스탈린이 루스벨트에게 협조했던 역사와 간혹 오버랩 되기도 하는데요. 이처럼 국제 외교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고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 체제에 속한 다수의 국가들은 설사 노골적이라 할지라도 실리 외교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당위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얄타체제의 붕괴가 무조건적으로 인류에게 어떤 '아포칼립스적 종말'을 초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저자가 논증을 통해 우려하는 국제 정치의 음울한 측면은 우리도 역시 고심해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유주의 이행 혹은 대대적인 세계 경제 재편이 그저 경제학적인 측면의 단순 현상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미국의 세가 흔들리면서 신자유주의를 통해, 이를 만회하려고 했다고 보는 저자의 분석은 실로 탁월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전환기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라는 신화의 붕괴와 자유주의 제도의 쇠락과 파시즘 부상의 시기였다.

그런데 현재는 사회주의를 경험한 두 대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오히려 세계질서에 대한 위협적 존재가 되었으며 새로운 대안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에서 ‘얄타체제‘라고 부르는 그 구도는 해체되고 있는데, 얄타체제가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안고 있다 해도 대안 없는 해체는 긍정적일 수 없다.

앞선 책에서 나는 한국정치가 새로운 개편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면 수구적 영남당과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의 적대적 공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이야기 했다.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냉전이 유럽의 냉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을 이해하려면 중국 변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에 대해서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해 정치권력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구심력)가 트럼프식 통치자의 출현, 브렉시트 같은 이탈, 다양한 포퓰리즘의 분출이나 러시아와 중국의 권위주의처럼 ‘영토적 온전성‘을 강화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신냉전‘적 대결을 주도하는 미국의 국제전략이 보호주의적 방식으로 자국 중산층을 육성하려는 국내 목표와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확장하려는 국제목표라는 서로 모순적인 방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진영 대결적 구도는 언제든 외부적 요인이 아닌 미국의 내부적 요인 때문에 동요할 가능성이 크다.

이 신자유주의가 세계적 통합을 강화하는 대가로 개별 국민국가의 통합과 문제해결 역량을 손상시켰다는 점부터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누적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 금융을 통한 자본축적 공간의 전 지구적 확장과 국가간체계 질서의 관리 불가능성이 모순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맞물려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 위협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 러시아의 대중국 무기 수출은 첨단 무기로 확대되었고, 2016년 이후 양국은 한단계 더 발전한 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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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9
리처드 벨러미 지음, 황소희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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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벨러미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학자로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연구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거쳐,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특히 벨러미는 저명한 역사학자 퀜틴 스키너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요. 그는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82년부터 이듬해인 83년까지 피사 대학에서 강의 경력을 쌓은 뒤, 옥스포드 너필드 칼리지의 연구 펠로우쉽에 참여합니다. 이어 1986년부터 88년까지 케임브리지 지저스 칼리지의 역사학 강사로 재직하고,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연구 펠로우쉽 및 강사로 활동합니다. 또한 1988년부터 92년까지 에딘버러 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시작했고, 1995년부터 2002년까지는 레딩 대학,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에식스 대학에서 학과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현재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UCL University College London 의 정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벨러미는 최근까지 11권의 논저와 30권의 공동 저작에 이름을 올렸고, 90편 이상의 논문을 쓰기도 했는데요. 그의 책들은 이미 프랑스어, 독일어, 아랍어, 이탈리어, 일본오, 페르시아 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itizenship : A Very Short Introduction, First Edition"으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벨라미는 이 논저의 결론에서, "민주주의와 시민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단언합니다. 이에 제1장에서 "시민권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하에서의 정치적 참여, 특히 투표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그는 뒤이어 도출되는 논증 가운데 하나인, "이 시민권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정치인들과 기존 정당 정치를 견제하는 데 있다"고 확언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벨러미가 자신의 글을 통해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었던 우리가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민주주의가 복지와 재분배에 대한 논의를 어느 정치 체제보다 이를 잘 보장할 수 있다"는 진술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민주주의가 그런 것처럼, 세금으로 얼마를 지불하였건 혹은 아예 지불하지 않았건 해당 재화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시민들에게 열려있다"는 1장 중간의 논증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물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80년대에 사회에 강요되면서, "부유한 시민들은 교육과 의료에서부터 연금과 개인 안전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공적으로 공급되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식으로 에둘러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이 부분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 구성원인 시민들을 위한, 복지와 사회 부조를 무엇보다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은 뒤이어 나오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부분은 모든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적 권리"와 다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가 기존의 자유 뿐만 아니라 평등도 중요시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탐탁지 않아 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역설적으로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필요성이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글의 2장과 3장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인류의 초기 민주주의의 발전과 그러한 체제에서 싹트기 시작한 권리를 가진 시민들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앞선 진술과 마찬가지로 이 그리스 모델에서도 중요하게 볼 수 있는 특징은, "법의 제정자로서의 시민의 평등"입니다. 물론 이 그리스 민주정이 여러 한계를 갖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데요. 그럼에도 제한적이지만 시민의 법적 평등에 대해 체제 전반이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뒤이어 등장하는 공화주의의 태동에 큰 기반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정을 거쳐 14세기에 이어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이와 같은 법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소위 기본권이라는 주제로 계승되었다 볼 수 있을 텐 데요. 이는 기본적인 정치적 관념의 발전에서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분석했던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인간이 사회로부터 보장 받아야 하는 기본 권리들에 대한 일종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본성의 회의적 측면을 구축했던 동시대의 철학자들이나 도덕 관념 자체에 집중했던 애덤 스미스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측면을 떠나 애초에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이것은 계몽의 발전 시기와도 결부해 볼 수 있고 그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매개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 본연의 권리로 이해할 수 있을 텐 데요. 결국 계몽주의와 공화주의는 본격적으로 시민의 권리를 잉태한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집니다.

     
저자는 시민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의료와 교육 서비스의 제공 목적이 경제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부분"이라고 이를 1장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단지 공공선을 위한 시민 모두의 공통된 인식 문제를 떠나서 국가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제한적인 경찰 국가 정도의 기능을 넘어, 공익과 사회적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의무가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 정치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법 앞의 평등'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의해 규정된 시민권과 그렇게 인정된 광범위한 권리와도 그 맥락이 맞닿아 있습니다. 앞선 공익과 관련해, 벨러미는 3장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단점 중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흔히 지적되는 것은, 사익 차원에서 시민들이 자기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투표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언급하는데요. 시민의 사적 재산의 보호와 결부된 초기 공화주의에서 희미하지만 시민의 권리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이 도출된 점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렇지만 합리적이라는 명분으로 오늘날 무분별하게 용인되고 있는 시민들의 사적 이익 추구에 대해 최소한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제한과 절제가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굳이 사회적 자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인식 수준에서 모두가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덴 데요. 불행하게도 현재의 민주주의 시스템 하에서 선출된 권력이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권력에 대한 재량권을 마치 시민들이 이를 양해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은 명확한 부분인데요. 소위 엘리트 정치와 다름없는 현재의 민주주의적 지배 권력이 다수의 일반 시민들을 위한 정치에 힘쓸 수 있도록 이를 견제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시민권에 대한 인식은 그만큼 중요한 의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벨러미는 이 부분과 관련해, 정치 권력과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유권자의 이익과 그들이 원하는 일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이런 예시를 들고 있었는데요. 이는 어떻게 보면 정치인들에 대한 확실한 견제로서 '시민권' 뿐만 아니라, 이 시민권이 적절하게 정치 체제를 전반을 추인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벨러미는 전통적인 시민권을 규정하여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국민 국가"가 큰 변화의 흐름에 놓여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민족적인 것이 아닌, 다수의 이민과 디아스포라적 상황에 일종의 국민 국가 개념의 해체라고 볼 수 있을 텐 데요. 여기에는 기존의 시민권의 범위, 즉 법적으로 어느 범주의 계층이 이 마땅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겠느냐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현재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재산이 없는 시민들'의 권리 보장과 더불어, 그 사회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이민 집단에 대한 소위 시민권의 보장과도 맞물려 있는데요. 일전에 자크 랑시에르는 이와 같은 갈등의 여지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라 칭한 바가 있습니다. 애초에 이 글에서 벨러미가 논한 본격적인 세계화의 움직임이 각국의 민주주의가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로 인식한다면 그러한 세계화가 초래한 극심한 빈부 격차는 기존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사실상 경제적으로 쫓겨나게 되는 현실을 초래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도미노와 같은 사회적 여파는 결국 유럽의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면서 동시에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관용 Tolelance "을 앞선 파국으로 인해 역사의 뒤켠으로 후퇴시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 3장과 4장에서 논증, 발현되는 '성원권'의 의미는 이처럼 중요한 맥락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대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권의 범주를 논의하는 것이 현 시대에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고, 이러한 가운데 과도한 민족주의적 오판이 파국을 만들지 않도록 시민들이 이를 더욱 견제할 필요가 있는데요. 일반적인 '법적인 시민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보다 위태로운 국민 국가 체제 하에 (많은 이민자들이 포함된) 시민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헌법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4장에서, 지속적 이민 유입이 캐나다와 벨기에와 같은 국가에서 특정 문화 집단이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문제라 판단됩니다. 이는 저자의 말대로 "모두가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아주 명확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 국가 내에서 두 개 이상의 다른 문화 집단이 서로를 인정하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두가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시급한 과제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저자의 명료한 분석대로 단순한 민족주의적 해결 방법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며, 더 나아가 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세계시민주의 cosmopolitanism'의 정치 관념 자체는 아마도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5장에서 이처럼 민주주의에서 시민권이 갖는 중요성과 함께, 시민들의 지속적인 정치 참여와 다수의 시민들이 사익과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애초에 시민권과 관련된 시민의 정의라는 맥락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그 체제를 아우르는 시민 정치 역시 다원주의에 기대야 하는 것도 분명 한 데요. 같은 5장에서 현상 유지 편향에 압도되어 다수의 시민들이 이런 경향에 안주하지 않도록 우리가 어떻게 정치를 바꿀 수 있는지를 더욱 고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언급한 이 현상 유지 편향은 저자인 벨러미의 분석대로 기존의 기득권 정치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주의 정치 전반의 사고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수의 시민들이 기존 정치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시민권에 보장된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 맞느냐는 보수정치 일각의 논란과 일맥상통하며, 과연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는 전통적인 원리 자체가 현실 정치에서는 그다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글에서 도출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시민권이 현실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명확한 한계라고 봐야 할 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정치 공동체를 좀 더 강화하고, 모두의 이익을 위한 정치의 필요성을 설파하는데 어떻게 보면 시민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글 마지막 5장의 질문들은 우리가 중요하게 일독할 필요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다수 지배 방식을 철회하고자 하는 기득권 정치의 시도, 이러한 것에 야합하고자 하는 보수 정치와 다수결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 등이 과연 모두의 이익이 부합하는지는 거의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 전반이 민주주의의 중우 정치로 경멸할 이유는 더욱 없을 뿐더러, 작금의 포퓰리즘 정치와 민주주의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그러한 포퓰리즘적 선동, 더 나아가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민족주의의 오판을 시민권의 기본적인 맥락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해 보이는 시점입니다.


-저자인 벨러미의 논증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과거 공화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재산이 없는 자들"이 "부유한 자들"과 유사한 맥락의 정치적 권리를 포함한 권리 증진이 역사의 과정에서 증명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지금의 여성의 참정권이 걸어온 노정과 앞선 과정이 유사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위한 정치적 과정 전반이 어떻게 보면, 앞선 재산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향한 노력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은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요. 그동안 여성이 남성들에 비해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지독한 편견은 여성들 전반의 정치적 권리 요구를 불식시키는 견고한 장치가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특히 사람들의 참여 여부는 공동체의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큼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물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통된 시민적 문화, 즉 현존하는 규율들의 정당성에 대한 폭넓은 합의나 정치적 토론을 위한 공동의 언어 등이 분명히 필요하다.

투표를 하든 하지 않든 민주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점을 누릴 수 있고, 표 하나가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는 데 있어 기여하는 바는 매우 적다.

기본법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국제법, 특히 그중에서도 인권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각 국가의 헌법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의 바탕이 되고 있다.

여기서 인민이란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고, 재화와 서비스, 노동을 사고팔 동등한 권리를 소지한 주체이며, 인민의 이해관계들은 주권적 정치권력에 의해 관리 감독되고, 또한 그들은 서로와 국가에 대해 충성하게끔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정치의 직업화는 정치인들이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키고 정치를 ‘위해‘살게끔 하는 유인을 제공하였으며, 정치인들은 공익을 위해 사람들을 이끌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성공을 이뤄내기도 한다.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가? 민주주의가 갖는 단점 중 반드시 명확하지 않더라도 흔히 지적되는 것은, 시민들이 자기중심적이고 근시안적인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타인에 대한 더 넓은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아우르는 확장된 시민권 개념을 활용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역시도 단순히 투표권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기적인 선거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민주적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합의에 의해 모든 집단적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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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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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난 괴테는 왕실고문관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자라납니다. 부모의 신분이나 배경으로 보아 그는 꽤나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괴테는 부모에게서 유전적으로 좋은 것들만 물려받았는지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은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인 '연인의 변덕'을 쓰게 됩니다. 1775년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인 카를 아우구스트에게 초청을 받게 되는데요. 바이마르 시절의 약 10년 간, 그곳의 정무를 담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으로서 치적을 쌓고 심지어 광물학, 식물학, 골상학, 해부학 등의 연구에도 정진하게 됩니다. 뒤이어 1792년에는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제1차 대프랑스 전쟁에 아우구스트 공을 따라 종군하고, 발미 전투와 마인츠 포위전에 참전했습니다. 바로 이 직후에 독일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괴테와 실러의 상봉이었습니다. 마치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와의 관계처럼 두 사람은 즉시 서로에게 매료되는데요. 1805년 실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의 우정은 지속됩니다. 지금 제가 서평을 쓰게 될 이 작품은, 괴테가 1807년 예나에 잠시 체류했을 때, 그곳 서점 주인인 프롬만의 양녀인 민나 헤르츨리프에게 한눈에 반해 정열을 불태우다 그 연애체험의 감정적 침전물이 바탕이 되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책은 1982년 뮌헨의 C. H. 벡 출판사에서 나온 함부르크 판 괴테 전집. 제6권에 실린 '선택적 친화력'을 참고로, 2023년 6월 국내에 번역 출핀되었습니다. 번역은 동의대 독어독문과 교수이자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한 장희창 교수가 맡았습니다.

오랫동안 유럽에서 결혼 제도의 근간이었던 기독교적 결혼관은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차츰 상실한 가톨릭의 도덕 가치 체계로서 마지막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당시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이 중심이 된 계급 체제가 다소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귀족들이나 지주계층들이 따로 정부를 둘 지언정, 자신들의 결혼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엄격한 윤리관을 유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의 욕망은 어느 정도 절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가톨릭이 요구하는 인간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혼외 관계 자체를 자신의 평판과 명예를 위해 조심하는 귀족들도 물론 적지 않게 존재했습니다. 다만, 부부의 연을 맺는 두 사람이 기본과 다름없는 인간적 신뢰와 호감 혹은 존중 없이 그저 가문 간의 결합이나 부모의 이익에 따라 맺어지기도 하고, 여성의 권리 역시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무엇보다 여성들이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부유한 남작인 에두아르트는 열렬한 구애 끝에 자신이 원했던 샤를로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초혼이 아니라 두 번째 결혼이기도 했는데요. 한편 에두아르트는 전부인이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처인 샤를로테는 천성이 온화하고, 사람에 대한 편견이 적으며, 신중한 여자입니다. 안살림을 도맡을 정도로 꼼꼼하기도 하고 남편과의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그의 감정을 잘 배려하고 성숙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꽤나 현명한 아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에두아르트가 한결 같은 열정으로 오로지 샤를로테만 바라보며 두 사람이 결합할 수 있을 때까지, 긴 시간을 인내했기에 비록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재혼이긴 했지만 소설의 도입부인 1부의 3장까지 이 두 사람의 이런 배경에 대한 꽤 상세한 설명이 잘 드러나 있을 정도로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의 초기 인물 구도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들에 있어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샤를로테라는 작명은 실제 괴테가 큰 감화와 애정을 보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에 대한 증거는 다소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에두아르트에게는 오토라는 이름의 대위인 친구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가 한 몸일 정도로 깊은 우정을 보이고 있는데요. 괴테가 간접적으로 계급 갈등을 서술했던 4장의 "귀족과 제3신분, 군인과 민간인의 대립"과 같은 사회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에두아르트와 대위의 우정은 그만큼 견고하고 중요합니다. 대위를 위해 아내인 샤를로테를 끈질기게 설득할 정도로 에두아르트의 그에 대한 태도는 진실일 정도인데요. 약간의 복선처럼 샤를로테는 대위의 집 방문을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결국 4장에서 이 세 사람은 죽이 잘 맞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틸리에라는 샤를로테의 조카가 성급한 자신의 딸에 의해 기숙학교에서 일종의 괴롭힘과 그녀를 위한 교육의 재검토 등을 이유로 두 사람의 집에 오게 되는데요. "차분하고 편견 없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샤를로테가 자신의 남편을 향해 보이는 깊은 애정과 다름 없는 진술인, "무관심과 혐오의 감정이 보란 듯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애정이 얼마나 소중하게 평가되어야 하는지"가 마치 뒤의 큰 파국을 예견하면서, 에두아르트가 드디어 눈을 뜨게 된 그 사랑의 대상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아내가 아니었다는 진실은 뼈아프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뒤에 연이어 나오는 샤를로테와 대위의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도 젊은 남녀가 가까이 몇 날 며칠을 함께하며 쌓는 신뢰와 깊은 이끌림은 일종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본질을 괴테가 마치 독자들에게 오히려 묻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깊게 사랑했지만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화자를 통한 괴테의 짧은 소회는 샤를로테와 이 관계에서 다소 냉정함을 되찾은 대위의 태도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가 살고 있는 지역의 많은 분쟁과 갈등을 몸소 나서 해결한 미틀러는 기존 기독교적 결혼관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괴테의 이 장편에 무엇보다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각기 다른 네 남녀의 파국을 견지하면서 판에 박힌 도덕 관념과 그것을 강요하는 세태에 대해 우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오틸리에의 행적과 그녀의 감정선을 이 곳에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괴테가 보이는 오틸리에에 대한 애정은 어느 한 사람을 그저 오해와 편견으로 평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흡사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오틸리에가 얼마나 진정으로 에두아르트를 사랑했는지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소설의 서사적 관점에서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를 그저 단순한 혼외 관계로 치부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가 마찬가지로 극에서 존재합니다. 물론 샤를로테와 에두아르트의 친우인 대위의 거의 불륜이라고 볼 수 있는 그 관계를 빗대어 공격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앞선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 간에 깊은 본심이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괴테는 의도적으로 오틸리에에 대한 인물 묘사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약간의 함정을 설치해 놨기에 소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성녀'를 배경으로 나오는 회화극과 그것에 대한 설정 자체를 독자들이 유심히 살펴봐야 할 부분이 분명 존재합니다. 덧붙여 사견이지만 이 오틸리에라는 괴테의 인물 조성은 어떻게 보면 여성 작가가 그린 다른 여성 캐릭터의 인물 설정보다도 더 여성에 가깝고, 내면의 놀라울 만한 도드라진 감수성을 엄청나게 만들어 낸 점은 아마도 괴테의 특출난 점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그의 다른 작품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이러한 부분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난 에두아르트에 대한 오틸리에의 애달픈 진심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앞선 부분에서 치밀하게 짜놓은 괴테의 서사적 판에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주변에서 선한 의도를 내세우며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그저 재미와 호기심 따위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파탄으로 내모는 인간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작품은 인물 간의 관계와 이들이 나누는 대화와 행위 전반이 맹목적인 관념으로 흐르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극을 이루는 흐름이 꽤나 명료하고 단순합니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백작과 그의 불륜 상대인 남작 부인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조종하면서 스스로의 의도에 맞게 그저 호기심과 재미로 터무니 없는 조언과 조정을 일삼는 인물"인데요. 이러한 행동을 벌이는 그녀와 같은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보다 선의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못지 않게 오틸리에에 대한 판단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놔야 할 것 같은데요. 아마도 이 작품을 쓴 괴테 역시, 이 부분에 있어 해석 상의 여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따로 만들어 놓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요. 물론 이 소설은 무엇보다 '사회적 소설'답게 모두에게 인간 관계 전반에 대한 열띤 토론과 대화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1부 4장에서 화자인 샤를로테가 "여기서 말하는 친화력이 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요. 앞선 대위의 발언이 구체적으로 친화력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입부터 그녀가 친화력이 무엇이냐는 질문 이전에는 이 '친화력'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샤를로테의 저 질문이 맥락 상 무조건 뜬금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번역상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누가 더 보태 주고 더 받았는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서로 간에 신세를 많이 지고 있소."

"당신네 여자들은 이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에 당해 날 수가 없소. 처음에 조리 있는 말로 우리가 반박할 수 없게 하고, 이어서 사랑스러운 말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따르게 하고, 다정다감한 태도로 우리가 당신네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만들고는, 마침내 예감 운운하며 우리를 숨막히게 만들고 마는거요."

무관심과 혐오의 감정이 보란 듯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진실한 애정이 얼마나 소중하게 평가되어어야 하는지를 그녀는 살아오는 동안 충분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긔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다루지요. 인간은 동물과 식물, 원소와 신들에게도 자신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제멋대로 같다 붙이고 말아요."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는 자, 말이나 심지어 행동으로 윤리 사회의 근본을 해치는 자는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요."

이 여자는 누구보다도 잘 자제할 줄 알았는데, 이러한 자제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경우에도 평범해 보이게끔 위장해 주는 법이다.

샤를로테는 천성이 온화하고, 결혼 생활에서도 의도적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 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태도를 지키는 여인들 중 하나였다.

순결한 감정에 싸인 채 바라 마지않는 행복의 길을 가는 오틸리에는 에두아르트만을 위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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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케빈 패스모어는 영국 워릭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맨체스터 대학에서 강사로 경력을 쌓은 뒤, 현재 카디프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현대 유럽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지난 유럽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기도 한 데요. 여기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 즉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고, 프랑스의 경우는 1945년 이후에 진행된 프랑스 정치의 전반적인 맥락을 영국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 꽤 해박한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최근까지 준비 중인 대전 당시, 마지노선을 아우르고 있는 '알자스-로렌 지역에서의 프랑스 군인과 민간인 연구'는 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그는 1870년 이후 유럽의 극우라는 다소 민감한 주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거침없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ascism : A Very Short Introruction, Second Edition"으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패스모어의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한 배경에는 제국주의 경쟁에서 뒤쳐진 후발주자라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비롯된 굴절된 분노가 그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 또한 4장에서, 히틀러가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절멸되어야 전쟁이 끝난다"고 공언했던 점과, 5장에서 히틀러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인종주의적 차원에서 이해했다는 분석은 어느 정도 짐작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런 진술을 접하게 되니 정치 전반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는 히틀러가 어느 정도는 무솔리니의 그림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다소 명백하게 그와 무솔리니가 다른 점은 지극히 인종주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6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가스실 절멸'로 처분했던 역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프랑스의 극우 정치를 이끄는 자들이 '히틀러의 이 유대인 절멸'을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재편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작금의 현실이 실로 믿겨지지가 않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글 후반부에 저자는 유럽에서 불고 있는 '극우 정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합니다. 1945년 이전의 파시즘이 지금의 극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명백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들 일부가 "훌리건과 스킨헤드의 정치학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패스모어의 평가는 실로 암울한 유럽 정치를 끄집어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패스모어의 이 논저는 다른 어떤 글보다 과거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의 정치적 대두와 집권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진술하고 있는데요. 특히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주변의 국가들에게 참고 사항이 되었고, 당시에 공산주의 혁명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비슷한 부류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유럽의 정치 지형에 있어 매우 불행한 역사가 되었습니다.특히 오랫동안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독한 편견인 "반유대주의"에 있어, 파시즘 정치가 동일한 연대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극우 포퓰리즘 내지는 극우 정치가 드러내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편견, 내지는 전자와 다를 바 없는 인종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은 단순히 지금 정치가 파시즘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 물을 계재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당시에 '코포라티즘'으로 교묘히 포장된 파시즘이 거대 자본가들을 포함한 자본가 계층에 있어 '사회주의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그 모습 자체'가 더 악랄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지금 시점에서는 파시즘과 파시스트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멸칭으로서 쓰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파시즘과 전체주의 정치에 경도되었거나 지지하는 세력들이 오늘날 극우가 내포하는 폭력의 문제와 인종주의를 희석하는 데,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음으로 놀라웠던 점은, 최근 이탈리아에서 베를루스코니와 연합했던 AN, Allenza Nazionale의 전신, 이탈리아 사회운동당 (Italian Socal Movement, MSI)이 무솔리니의 그늘에서 시작된 정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이탈리아 정치가 마치 '극단적인 돌연변이'처럼 현재에도 이르러 이탈리아 정치를 베를루스코니와 함께 막장으로 이끈 것인데요. 우선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해야 될지도 문제지만, 여기서 분석되고 있는 유럽의 뉴라이트 New Right 처럼, 극우 정치의 토양이 먼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패스모어는 최근의 미국 네오콘이 극단적인 시장 자유주의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극단화 된 보수 정치의 양상이 유럽과 미국에서 상이하다는 해석도 첨부되어 있었는데요. 최근까지 프랑스의 신자유주의가 극단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들 극우세력이, "민주주의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현 상황이 실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과거 독일에서의 나치즘은 이것을 수행한 대부분의 나치들이 인종주의와 더불어, 동성애 혐오에 빠져 있었던 점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대부분의 나치들이 '부르주아의 도덕성'을 여실히 경멸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계보를 이은 작금의 극우 포퓰리즘도 그와 같은 전제로서 거의 일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생학'적인 맥락에서 인간을 분류했던 점도 동일하고 앞서 언급한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를 비교해 본다면 과거의 파시즘과 지금의 극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는데요. 나치와 전체주의적 폭력은 자신의 지난 과거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카를 슈미트와 같이 오만한 태도로 점철되었습니다. 이에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성찰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 여실히 결여된 수정주의적 입장과 같은 왜곡된 현상이 극우 정치의 계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후반부에 도출되고 있는 저자의 조언처럼 우리가 '정치적 변별력'을 통해, 20세기 파시즘이 남긴 정치에 있어서 그런 침식을 과연 유럽과 민주주의 정치 전반이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아직 아득하기만 합니다. 특히 여전히 사회진화론을 비롯한 사회다윈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있고 그러한 영향력이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작게는 기본적인 학문적 입장에서 사회학의 건전성을 해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의 막연한 권리가 아니라 이를테면 교육 받은 시민이 이를 구분해 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현실 정치를 보다 건전하고 올바르게 만드는 시민의 의무를 잊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파시즘의 정의는 파시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만큼이나 많고, 그중에서 어떤 정의가 옳은지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다.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의 엘리트 세력과 프티부르주아지, 그리고 농민의 결속에 기반을 둔 반 근대 운동이었다.

전체주의 권력은 (가족, 교회, 노동조합 등) 모든 대안적 연대를 파괴하여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고자 한다.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설계도에 따라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계몽주의 사상은 분명 파시즘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그때까지 대학의 교수 사회를 지배하던 변호사들과 의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는 경향이 특히 심했고, 앞서 살펴본 인종주의, 우생학, 심리학, 역사학 분야의 사상들에 관심이 많았다.

의사들과 변호사들은 그들에게 신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 우생학 이론을 옹호했다.

반면에 파시즘은 대중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의 부상과 이들이 이끄는 대중 정당을 전제로 한다.

유럽 보수주의의 새로운 특징으로 부상한 이들 대중 정당은 파시스트를 모방하고 그들과 경쟁했지만, 기존의 권위 주체에 복종했고 독점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르 펜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수정주의적‘ (즉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에 동조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뉴라이트는 한 민족의 고유한 특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소수족에 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며, 그것은 모든 인종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킬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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