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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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얘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문학, 역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자유 베를린 대학에서 같은 분야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프랑크부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문학 평론으로 글을 기고했고, 이후 베를리너 차이퉁에서 편집자로 경력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1년부터 베를린 예술 대학의 문화 저널리즘 명예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얘너는 1945년의,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근 10여년의 독일 시민들의 삶을 보다 면밀히 분석한 이 작품으로 2019년 라이프치하 도서전의 논픽션 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olfszeit : Deutschland und die Deutchen 1945-1955"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의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는 글의 제목은, 6장 초반부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 시간이 독일인들에게 찾아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것은 원칙적으로 토머스 홉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상의 의미는 나치가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사실에 대해, 별반 생각이 없던 당시 사회 풍조와 그런 독일 시민 대부분의 일상적인 관념을, 어쩌면 비틀어서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혔습니다. 지금에야 독일 시민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비참하고 참혹한 과거 역사에 대해 충분히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수도 베를린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고 그 역사의 분기점을 맞이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초기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들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얘너의 치밀한 서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제가 접한 이 글의 서사들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어느 정도 자각한 옛 동독 지역의 시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갖고 달려드는 옛 소련 병사들이 현지에 있던 200만 독일 여성들을 향해 벌인 파렴치한 강간에 대해, 일부는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죄의 굴레'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역사는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과거 나치는 한창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동부 전선에서 거의 700만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노동력 보충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독일로 끌고 옵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슬라브계 주민들로 추정되는데요. 종전 이후, 앞선 이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만 했고, 소련 지역의 수용소에 분산 되어 있던 독일 병사들을 반대로 그들의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복잡한 흐름 속에 놓여 있었는데요. 이에 본격적으로 연합국이 독일에 진주하면서, 연합국이 '자유주의적으로' 어떻게 독일 사회와 정치를 재조정해 나갔는지도 그 이행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연합군의 점령 초기에 2장과 3장에서, 독일의 남성 인구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출된 상황에서 거의 힘이 없던 독일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 자립해 나가는 지를 저자는 입증되는 사료들를 통해, 글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 때의 많은 여성들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배급 상황에서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거의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요. 연합군의 군 간부에게 자신의 성을 매개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했던 여성들을 포함해, 단순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사력을 다해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나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부분은 '원죄'의 여부를 떠나 실로 안타까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지도층이라고 볼 수 있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단순히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모든 독일인들을 법의 입회 하에, 모두를 처벌할 수 없었던 부분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나치 독일의 악랄한 죄과들 가운데 충격적인 부분은, 자신들이 패망하기 며칠 전까지 독일로 끌고 온 수십만명의 강제 노역자와 전쟁 포로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전쟁 범죄였습니다. 여기에 관여한 군 요직자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조사 부족과 현지 상황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제대로 된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참으로 역사의 음울한 측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사건은 아마도 나치에 단순가담해, 그 죄를 일일이 따질 수 없었다고 판단한 했던 당시 시대상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간 본연의 양심적 기반이 무엇보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이 세대에게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연합군의 독일 진주 이후, 부역자들에 대한 구분과 분석이 다소 관료적인 측면에서 편의주의적으로 계산되어, 누구보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인류가 인지하지 못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실상 은폐 되었다고 보는 편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폴란드와 라트비아 등에 수많은 전쟁 고혼들이 묻혀져 있는 것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면밀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상황에서 이 글의 중후반부에 드러나는 독일 사회의 분열은 그것대로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언급한 연합군 군정의 식료품 배급과 이를 집행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야료로 말미암아 '암시장'이 발생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측면과 이런 상태에 놓인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직접적인 약탈 행위에 놓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먹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민은 '난폭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과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혹은 추구한다는 이런 냉엄한 현실은, 인간 본성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음 5장은 이러한 분석을 매개로 소위 '궁핍한 자들'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늑대들의 세상에서 여성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와 함께, 바로 이들이 지금의 독일을 만든 하나의 디딤돌이라는 측면에서 5장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술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독일이 살아남는 데 실제로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군 부대에서 일한 수많은 여성들이었다"는 실체적 결과물입니다. 심각한 PTSD에 시달리며 문제를 일으킨 귀환병들이 아닌 이 시대의 가정을 건사한 것은 일반 여성들이고 이것에 기반한 독일 사회가 비로소 온전히 설 수 있었다는 진술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반해, 독일 지식인 사회와 정치 일각은 어느 정도 분열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 그룹과 이와는 반대로 눈으로 나치의 패망을 목격한 지식인들 간의 반목은 가볍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만의 사례는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망명 지식인으로서 다른 지식인들에게 '비겁한' 인물로 낙인 찍힌 만은 분열된 역사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시 독일 사회가 나치에 부역한 인물들을 아주 철저하게 내쫓은 것은 아니지만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인사들을 이런 낙인으로 공격했던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는데요. 나치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위 제3제국에서, 이 체제에 대항했던 소규모 지식인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들이 연합군 정보국에 협조했던 것도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분열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독일 내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상대한 장애물로 작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독일에 진입한 대다수 미군들이 독일의 고전주의적 문화에 대해 일정 부분 선을 그은 정치적 맥락이 실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 어떤 체면과 모양새에 집중한 당시 독일인들의 성향이 관계 전반에 솔직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실로 이질적인 부분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독일 내부가 정치적으로 좀 더 통합되고 좀 더 시급하게 개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무분별한 축제 문화와 마치 현실을 도외시하는 일부 인사들의 존재는 독일인들이 얼마나 현실 회피와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는지 짐작하게 할만합니다.

끝으로 연합국이 주도한 독일 사회의 구조조정 작업은 많은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가졌던 양가 감정과 더불어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복잡한 감상이었을 겁니다.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이 과연 해방군 일지 아니면 점령군 일지를 명확히 다룰 수 없던 현실과 동쪽으로 진군하여 거의 야만적인 행태를 보인 소련군은 약간 상이하지만 만주에 구축한 일본 군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모조리 자국으로 적출했던 시기와 묘하게 연계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완독했으면서도 과연 독일이 나치의 잔재를 모조리 뿌리 뽑았는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요. 그것은 현재 독일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네오 나치의 존재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 그의 존재 자체는 독일 사회의 이러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근본적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레오 스트라우스를 더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더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낸 지식인들 가운데, 고작 '카를 야스퍼스'밖에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은, 작금의 독일 연방 공화국이 전세계에 있어 일본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평가와 다소 상반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은 이후 독일이 이룩한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 8장에서 말하는 '연합국의 독일 정신 개조'에 대한 작업이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후 '늑대의 시대'를 몸소 경험한 독일인들의 후예들이 과연 어떠한 반성과 성찰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되묻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이후 베를린에서 남성 부족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심각했다. 왜냐하면 베를린은 전쟁 전부터도 미혼 여성들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항복 후 일시적으로 가둬야 할 독일 포로들이 너무나 많아서, 연합군은 그중 약 100만 명을 이른바 ‘라인강 초지 수용소‘라는 곳에 가시철조망을 쳐놓고 지분도 없이 몇 주 동안 짐승처럼 풀어놓았다.

독일로 향한 유대계 폴란드 주민들의 탈출은 망명과 추방이 특징이던 이 시기의 가장 충격적인 이주에 속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나치의 나라에서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상황은 많은 유대인에게 극도의 심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인 것은 많은 실향민이 그처럼 과거 지향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전후 사회 현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생 공화국이 나중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문화적, 사회적 혼합은 그들로 인해 촉진되었다.

독일 여성을 이런 양공주, 혹은 당시 흔히 부르던 ‘양키 애인‘으로 냄몬 가장 큰 동기가 물질적 궁핍이었다는 사실은 최근까지도 확실해 보인다.

당시의 목격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금언이다. 사람들은 ‘전쟁 이후에야 인간을 정말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늑대의 시간,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시간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법의식과 도덕 감정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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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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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은 1956년 인도양 마스카렌 제도의 일부인 레위니옹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생후 5개월부터 1961년까지 외할머니와 알제리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그의 부친은 의사였고, 모친은 공산주의자로 남친과 브라질로 떠났기에 일찍이 외할머니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엘벡은 할머니의 결혼 전 이름이었고, 이를 필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우엘벡은 파리 북동쪽의 모에 있는 고등학교인 리세 앙리 무아장에 입학하고, 프랑스의 엘리트 전문 교육기관이기도 한 그랑제꼴 NAPG에 합격합니다. 1994년에는 비로소 그의 첫 처녀작이 출간되는데, 그 작품의 이름은 '투쟁 영역의 확장'이었습니다. 1998년에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다 준, '소립자들'이 출간되는데요. 이 소설은 즉각적으로 허무주의적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만 작품 활동과는 논외로, 그는 이슬람 혐오 작가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요. 2015년, 그 유명한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같은 해에 '복종'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이슬람에 대한 거의 신랄한 정도의 공격을 퍼붓기에 이릅니다. 지금 서평을 쓸 이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원제, "Plateforme"으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11월에 초역이 이뤄집니다. 현재는 2015년에 개정판이 나와 있는 상황입니다.

우선 우엘벡의 이 작품을 일독하기에는 몇 가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묘사되어 있는 성애(姓愛) 장면이 상당하면서도 남녀의 성기를 직접적으로 포함하는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금도 용납하기 어려운 '섹스 관광'이라는 소재와 비백인 인종 여성을 종속적인 성적 대상으로 삼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상품과 같이, 거의 거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이 부분은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소위 '쓰리썸'을 비롯 근친과 같은 상당히 터부시 되는 성적 묘사는 물론, 앞선 섹스 관광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인 가치관이 여러 문장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 부분도 충분히 불쾌할 만한 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도 우엘벡 특유의 직접적인 반이슬람주의도 엿보이고, 여기에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소위, 신자유주의적 물신주의도 드러나는데, 이는 어느 정도 냉소와 비꼼의 소재로 쓰이고 있는데요. 다만 모든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법적인 인식을 거의 무색해 하는 극명한 인종주의까지도 상당히 표면화 되어 있어, 소설을 읽는 각자가 이 부분을 고려하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 문화부의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미셸은 삶 자체가 권태롭고 자신의 하루하루가 냉소에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는 소위 배설과 같이 성욕을 돈으로 충족하고, 이러한 생활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인물이기도 한 데요. 인간의 성조차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다는 현대 자본주의의 일상을 작가가 비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목적성이 설사 그것이 어떤 개인에게는 전혀 고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더라도 여자의 성을 도구화하고, 이성 간의 관계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적 기반이 결여되어, 어느 정도 이성의 간여가 불가능하다면 아마도 이 점은 동물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다만, 미셸이라는 인물 자체가 개인의 삶에 대한 논조 뿐만 아니라, 사회 인식 전반에 전반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비틀려 있고, 단순히 개인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삶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거의 대부분 타산적인 관념으로 사고하고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점은 어쩌면 이어지는 작가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여성의 성을 사고 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비인간적인 관념 하에, 철저히 인간적인 측면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이것에 대한 어떠한 숙고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솔찮게 볼 수 있는 '비틀린 인간'의 바로 그 전형일 겁니다. 자신은 스스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극적인 비틀림 말입니다.

이런 그에게 한줄기 서광 과도 같은 여자가 우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미셸은 태국에 소위 '섹스 관광'을 나갔다가 발레리라는 스물 여덟의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극중에 드러나는 그녀는 일견 조신해 보이지만, 비키니를 입은 그녀의 몸매가 너무나도 눈부시게 매력적일 정도로 육체적 매력이 다분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자기의 이익과 같은 타산으로 판단하지 않는 이 시대에선 꽤나 보기 드문 인물입니다. 이는 미셸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그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어떤 남자인지 미리 인식한 것인데요. 미셸 스스로가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과 같이, 작가의 교묘한 배치처럼, 발레리는 이에 완벽히 대응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에 기반한 발레리의 인물 조성은 평범한 남자들을 비롯 다수의 여성들이 보기에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인데요. 그녀는 자신의 꽤 이기적이고 피곤한 잣대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 바라 볼 줄 알기에, 미쉘은 그녀를 통해, 드디어 자신이 행복을 찾았다고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들 커플들이 벌이는 '난교'와 같은 행위들이 농염한 에로티시즘과 같은 해석으로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커플의 '섹스'는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너무나 친밀한 교감의 한 형태이기도 했고, 또 다른 어떤 장면에서는 '이들이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이러한 서술들을 제가 단순히 동의한다기보다 그러한 성교 장면에 있어, 어느 정도 납득될 만한 서로 간에 짙은 감정적 전이와 충만감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후반부에 다소 충격적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자신의 사랑을 산산히 부숴버리는 파국이 미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는 슬픔과 공허함이 새어 나오는 문장들의 서사를 따라가게 되면, 한 인간의 붕괴를 우리가 직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을 통해, 작가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었는데요. 설사 스스로 불완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그 사람에게 기적이 된다는 흡사 진정한 사랑의 진면목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가인 우엘벡이 작품 전반에 녹아 있는 인간의 성을 사고 팔게 끔 하는 자본주의적 실상과 그것이 만연된 작금의 세계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싶었는지는 다소 불명확한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 끔찍한 결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세계가 그에게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만한 무언가가 되지 않는다는 추측이 들기도 하는데요. 다만, 새뮤얼 헌팅턴 식의 비서구인에 대한 차별적인 인종주의와 끝내 서구인들과 달리 하등의 인종이라는 해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후반부의 어느 과학자들의 인용은 작품성을 떠나,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평론가들은 이러한 설정이 비틀린 한 인간의 내면을 더욱 드러내게 한다는 식의 긍정적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결국 이슬람인들에 대한 혐오를 더욱 드러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참혹한 결말과 마찬가지로 극을 이끌었던 미셸이라는 캐릭터의 소멸은 '분노가 의미하는 확정성'을 강화시킨다고 여겨집니다. '이성이 결여된 집단의 인간이 증오를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괴물'이라는 문답의 고리들을 다시금 여기에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우엘벡은 한 인간이 비로소 이해한 '진정한 사랑'이 이 시대에는 가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고 싶었던 것인지 참으로 의문이 듭니다.





- 큰 의미는 없겠지만 글 10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2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미셸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종종 읽게 되었던,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와 '태국'은 미셸 개인의 삶이 극적으로 변하게 되는 장치 그 자체로 드러나게 됩니다. 휴가지에서 스릴러 작품을 읽는 미셸에게 다른 글을 권유한 발레리의 존재는 이러한 구도가 가히 극적으로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개인적으로 이 부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에 이미 마가렛 대처에 대한 경의와 구 소련을 악의 제국에 빗대는 엽기적인 암시로 가득한 이 머저리의 작품을 하나 읽은 적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그가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가 궁금했다.

‘여기 한 무리의 바보천치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 있는 게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가 프랑스를 상스런 농담과 방탕의 나라라고 소문을 냈단 말인가? 프랑스는 음산한 나라, 음산한데다 행정에 찌든 나라다.

"인종차별주의의 특징은 우선 타 종족 남성들간에 적개심이 커지고 경쟁심이 더욱 거세지는 것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이 경우 자기와 다른 종족의 여성에 대해 성적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끊임없이 그녀들은, 꾸준한 직업을 가지고 사랑스럽고 이해심 많은 ‘남편‘이며 ‘아버지‘이고자 하는 남성과 ‘영원히‘정착해서 살 수 있다면 행복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삶에서 어느 정도 변함없이 만나온 단 두 명의 여자인 발레리와 마리 잔느도 켄조 블라우스와 프라다 가방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내게 등을 돌린 적이 없었고, 결코 성을 내지 않았으며, 종종 여자들과의 관계를 그토록 숨막히고, 그토록 비장하게 만들어버리는 예측 불가능한 신경질을 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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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검색을 통해 발견한 헌책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책보고'에도 참여하고 있는 책방이었습니다.





대중 교통 이용시, 지하철 7호선 공릉역에서 찾아가시면 됩니다.





책방 입구입니다. 지하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바로 입구에서 찍은 모습니다. 이 책방은 주로 만화 도서와 판타지 및 무협 소설을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헌책방 치고는 책 분류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반가웠던 이디스 워튼입니다. 구매할까 잠시 고민해 봤네요.




이렇게 도합 5권을 구입했습니다. 총 16500원이었습니다. 잠깐 다녀온 소감을 말씀드리자면 이 책방은 주로 만화와 책대여점에서 주로 보이던 무협과 판타지 소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반 도서들의 장서 보유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만 책들은 대부분 상태가 괜찮아 보였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단편집입니다. 1998년 초판입니다. 저렇게 띠지까지 온전해서 신기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입니다. 여백에서 나온 2007년판입니다. 이미 민음사에서 개정판이 나와 인기를 끌고 있지요.




소위 문제적 작가로 불리는 미셸 우엘벡입니다. 플랫폼이라는 장편이고 2002년 초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동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조금 훑어 보았는데 묘하게 흡인력이 있더군요.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페터 슈미트의 장편입니다. 2005년 6쇄였습니다.




선물용으로 구입한 이해인 시집입니다. 2009년 20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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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5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책 많은데>표지판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겠어요 귀여운 표현ㅎㅎㅎ 무협말씀하시니 상태좋은 묵향이 있나 궁금하군요ㅎㅎ 저는 중고책방에서 찾을 목록들을 늘려가는 중입니다. ^^

베터라이프 2024-01-25 10:58   좋아요 1 | URL
워낙 무협과 판타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책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찾으시는
묵향이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 왜냐하면 여기 소개되어 있는 유튜브에 만화 희귀판 구하는 분들이 여기서 애타게 구하던 책을 발견하는 모양입니다. 한번 나중에 내방해보세요~ 책방 이름도 정겹고 좋은데 사장님들도 매우 친절하셨어요 ^^

추풍오장원 2024-01-29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고책방에서 하루종일 시간 보내며 살고 싶습니다 ㅎㅎ

베터라이프 2024-01-30 07:07   좋아요 0 | URL
이런 책방의 묘미는 곳곳에 숨어있는 좋은 책이죠 ^^ 주말에 시간 계산 안하고 박혀 있기 딱입니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2판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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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는 한때 자신의 이름보다 그의 블로그 별칭인 k-punk 로 유명세를 타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레스터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대부분 러프버러에서 보냈고, 그의 부모는 노동 계급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피셔는 공립 연구 대학인 헐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이후에 코벤트리 외곽에 있는 워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 기간에 피셔는 사이버 펑크에 관한 문화 이론 등에 심취하고, 나중에 kode9으로 알려진 음반 프로듀서 스티브 굿맨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경력 초기에는 사회에 대두하고 있던 인터넷 대중에 대해 관심을 갖고, 소위 캔슬 컬쳐 cancel culture, 즉 콜아웃 컬쳐 callout culture 라고 불리기도 하는 급진적 운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시작합니다. 또한 세계적 팝 스타였던 마이클 잭슨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담은 에세이도 쓰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논저는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그의 사후에 문단과 비평가 집단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가 남긴 폐해와 이를 추동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가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너무나 위태로워 그저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각한 우울증 증세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논저가 출간을 앞두고 있던 2017년 1월 13일, 피셔는 48세의 나이로 서퍽의 펠릭스스토우의 자신의 집에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m Realism"으로 지난 201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이번에 번역된 판본은 2022년에 나온 제2판으로, 그의 아내인 조이 피셔의 서문과 동료이자 비평가인 알렉스 니븐의 서론이, 또한 소설가이자 동업자였던 타리크 고더드의 후기가 수록되었습니다. 이에 국내도 새롭게 증보된 원서 2판을 기반으로, 2024년 1월 번역되었습니다.

이제야 밝히는 부분이지만 지난날 마크 피셔의 이 중요한 글은 그동안 제가 지속해 온 사회과학 독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던 논저였습니다. 이후에 접하게 되는 데이빗 코츠의 중요한 논저 만큼이나 그의 이 논저는 우리가 어떠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 준 귀중한 보료였습니다. 이 책의 지난 판에서도 여실히 느낀 부분이지만 마크 피셔의 글쓰기와 주제 의식은 로버트 미지크, 마크 릴라와 닮아 있는데요. 우리가 만약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마크 피셔와 같은 신랄한 사회 비평이 무엇보다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그저 신자유주의자들이 손쉽게 내뱉는, "대안은 없다"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지젝의 디스토피아적 발상은 우리가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데요. 이에 피셔는 특히 젊은 세대들을 비롯,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숙고하는데 모두가 발벗고 나서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이런 가여운 통제 속에 가둬 놓고 있는지 충분히 가혹할 만한 실정이기도 합니다.  

과거 에드먼드 버크 조차, 사회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관습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과거 계몽주의적 역사가 만들어 온 사회적 토대 역시, 우리의 삶과 사회의 지속성을 위해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은 아마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특히 공익과 도덕성 그리고 시민의 삶을 위한 사회적 부조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피셔는 과거 최소한이나마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던 후기 자본주의적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 정의'를 포함한, 사회적 가치들이 시장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방해물로 치부되어 왔다고 해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의 시민들이 그저 냉소하고 거리 두는 것 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피셔의 논증들 가운데 무엇보다 동의했던 점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홀로 유지되거나, 체제의 확장을 지속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시장의 자유를 비롯, 모든 시민이 자발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나아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에 반쯤은 체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일절 능사로 삼고, 여기에 전통적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오용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념화 되었고, 바로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이익화'와 함께 중요한 맥락이 되었는데요. 또한 이 개인주의는 전통적인 공공성의 논의를 과거 역사 속의 흔적 정도로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피셔는 자신의 논저를 통해, 거듭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견제의 몰락을 중요한 비판 논거로 삼고 있지만 저는 이와 동시에, 시민들이 공공성의 개념을 실종시키게 만든 개인주의에도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평생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외롭고 고단한 경주와도 꽤나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위 하이브리드적인 모습으로 진화해 온 작금의 금융 자본주의는 사회를 대적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으로 말미암아, 시장의 기득권과 그 배타적이고 자유로운 확장에 어떠한 견제 수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장 자유라는 논법은 거의 종교적 교리와도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새롭게 발견된 금융 기법과 그에 따른 확장은 2008년의 대몰락 이후에도 시장이 틀어 쥔 주도권은 변함이 없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 라면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분명 존재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차단 당하면서, 가히'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함께한 자본주의는 더욱 사회에 '경제적 불평등과 인간의 소외 문제 등' 병리적 폐해를 심화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속성이 내재된 간결하고 즉각적인 소비 문화에 의해, 삶에 있어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남을 의식하게 되거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망각하게 되고, 공적인 문제에 대한 감각을 영영 소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1장의 서두에서, "탁월한 자본주의 리얼리스트인 신자유주의자들은 공적 공간의 파괴를 경축했다"는 문장으로 그 본질을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맹비난 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난 받아 마땅한 이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 인용된 데이비드 하비 역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번성하도록 이데올리기적 분위기를 창출하는 지식인 전위 부대로 싱크 탱크를 운용한다"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마찬가지로 이를 피셔가 도출한 분석에 대응한다면,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서로 결탁했다는 것에 시의 적절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모두 명백하게 인정하는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고 이를 또한 인정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 있어 현대 자본주의가 무엇보다 개인의 능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진출 및 부의 획득에 일견 긍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부를 보유한 부자들과 이들과 자원을 공유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계급화를 차츰 강화시켜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1980년대 이후의 이 신자유주의적 작업의 실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기반했던 것이고, 말년에 이른 밀턴 프리드먼이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는 발언을 철회한 배경에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인정한 바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물론 그에게 가했던 비판과 공격도 한 몫을 했겠지만 말입니다.

이기적 자본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를 무엇보다 긍정한 이 신자유주의가 오늘날에도 그렇게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적인 부정적 파급을 피하고, 6장 서두에 보이는 교육 현장에서의 '시장화'와 같은 여러 부정적 이미지들과 분리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셔는 자신의 이 글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에 가져다 준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정신적 병증' 즉, 자신도 경험한 심각한 우울증과 더불어, 단순히 쾌락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향정신성 약품들의 범람 그리고 자본주의에 있어, 무엇보다 결여된 도덕성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전자와 맞물려 고찰하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지난 시절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 반대의 지평에서 맞이하게 되는 매서운 현실에 절로 몸을 떠는 것과 유사한 인식 체계라고 여겨집니다. 오로지 시장이 가져다 주는 '이익'과 그것을 통해, 저절로 사회를 덕에 이르게 한다는 그 '메시아'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이것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 경제적 근거 없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우리에게 그저 눈을 감고 이를 믿으라고 강요했던 과거의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후쿠야마가 회고했던 바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손쉽게' 처리한 사회적 안전망을 뒤로 하고, 삶의 일관성을 졸지에 시민 스스로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이런 숨겨진 본질을 규명한 피셔의 상상의 날개는 "신자유주의의 종합을 통해 자본의 인공 지능이 지구를 지배하는 미래상"과 같은 코미디 같은 미래를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를 담고 있는데요. 만약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붕괴 시키게 될 지독한 과두제가 아니라면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끝이 과연 무엇이 될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현 사회에 억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피셔의 경고는 우리가 새겨들어야만 하는 부분일 텐데요. 그의 논증을 통해, 왜곡된 자본주의가 더 이상 다수의 이익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1980년대 이전, 시민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던 다수 노동자들의 기본적 욕망을 짓밟고 나타난 '신자유주의 이행'이 과연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는가를 피셔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날이 엄혹해져 가는 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서, 그 누구보다 선구자적 입장을 취했던 그는 아마도 우리가 병들고 굶주리고 가진 힘을 박탈 당하는 '시대의 실체'를 누구보다 폭로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신랄한 이성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는 서글픔은 누구보다 저에게 더해지는데요. 더욱이 7장에서 그가 도출해 내는 신자유주의의 비도덕적 합리성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거의 계급주의적 속성으로 그 자체로 표면화 되어, 결국 축적된 부와 획득한 권력 유무에 따라 사람을 규정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시민들에게 끼치는 정신적 악영향을 진단한 리처드 윌킨슨의 작업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토록 자본주의의 폐해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지금도 끊임없이 고발하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늘어나는 시점에 피셔가 바라 마지 않았던 바대로, 그 대안을 조속히 우리가 발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투영하는 세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외삽했거나 우리 세계가 악화된 모습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맹비난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국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후쿠야마의 테제는 널리 조소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이 도발적으로 지적하듯이 어쨌거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왔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1975년에는 (무력화된 노동 조합, 민영화 된 철도 및 공익 사업을 비롯한) 현재의 정치경제적 풍경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녹색 비판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정치 체계가 결코 아니며 사실상 인간의 환경 전반을 파괴할 운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공적 영역이 공격받고 ‘보모 국가 nanny state‘가 제공하던 안전망들이 분해됨에 따라 가족은 항구적인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압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수사가 기세를 떨치던 그 순간에도 새로운 종류의 관료주의, 가령 ‘목표와 목적‘, ‘성과‘, ‘임무 진술‘ 등의 담론은 증가해 왔다.

명백히 비도덕적인 합리성(신자유주의)은 명백히 도덕적이고 규제적인 합리성(신보수주의)과 어떻게 교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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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백승욱 지음 / 북콤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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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 교수는 1966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미국 뉴욕 주의 공립대학인 빙엄튼 대학의 방문 연구원,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는 이매뉴얼 월러스틴, 페르낭 브로델, 조반니 아리기 등을 활용하여,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세계 체제에 대한 분석을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백승욱 교수의 사상적 단초들을 살펴봤을 때, 어느 정도 진보 쪽에 가까운 지식인으로 읽히는데요. 이번에 일독한 그의 논저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에 뼈아픈 소리를 할 줄 아는 학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난 2022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번 글은 지난 글의 서평을 포함하면 두번째 일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연결된 위기'는 사회학자가 보는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라고 볼 수 있었다면 이 글은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비판적으로 조망해보는 일종의 시론과 같은 성격으로 읽힙니다. 특히, 백낙청 교수 등과 같은 기존의 사회학자들이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여기는 1987년이 아니라, 1991년 즉,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주도한 '3당 합당'과 그 이전의 공안정국을 통한 체제와 이어진 사회 급변을 자유주의적 맥락으로 다뤄 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우리 사회에 크게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법적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이식과 그러한 변용이 과연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의 유산인 '전통적 자유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요목조목 따져보고 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 나라는 김영삼 정부를 지나 1997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가 경제 구조로서 거의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착근했던 국가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착근이라는 표현을 착근을 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강한 요인으로 거의 당했다고 풀어보고 싶은데요. 물론 1980년대 이전의 개발 독재 세력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강화를 위해, 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러한 맥락의 광범위한 사회 개조가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철저히 수행되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전에 강준만 교수 역시, 우리나라를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라고 규정한 바가 있습니다.

일전에 샹탈 무페는 레이건과 대처가 보수 정치의 기득권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이행에 대대적으로 나서면서 이에 대응해야만 했던 진보 좌파의 무능을 신랄하게 꼬집은 바가 있습니다. 물론 무페의 저런 의견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제와 정치 세력의 '국가 개조'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휩쓸리고, 빌 클린턴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리버럴과 같은 소위 아류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면서 진보는 거의 몰락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마도 노조의 무력화로부터 시작된 시민 계층의 전반적인 고용 불안은 이 지점에서 진보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는데요.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미국 지식인 계급과 프랑스에서의 진보 계층이 경험한 사회 대안으로서의 점진적 역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국은 비록 외부의 요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국가에 이식하게 된 것이지만 너무 이상하게도 시민들 모두 이 신자유주의적 맥락을 아주 철저히 받아들인 국가였습니다. 이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지배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 체제의 변질에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인데요. 더욱이 나날이 심각해졌던 고용 문제와 자신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 불평등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해 받아들였던 점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소위 '먹고사니즘'이 이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대까지는 본질적으로 제도적 정치와 시민들 자신의 삶이 현저하게 유리된 상태였다고 진단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자유주의란 일반적인 인식과는 매우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초반에 지속적으로 서술하고 있듯, 시대가 흐를수록 공권력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이것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과 같이 - 이를테면 검찰 - 이러한 맥락의 (제도적) 변화가 어떻게 자유주의와 맞닿아 있는지는 저로서도 의문이 듭니다. 더욱이 저자의 입을 빌어, 과거 박근혜 정권이 탄핵을 당하기 전까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완벽한 무능이 4년간 이어진 시기에, 과연 진보 야당이 제대로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선 누구나 진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무능이 초래한 파급은 문재인 정부 시절의 '검찰총장'이 다음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는 당시 보수 야당이 소위 차도살인 (借刀殺人)에서의 차도 즉, 대상이 된 권력의 칼을 자신의 칼로 삼아, 결국 전무후무한 '차도 정권'이 탄생한 비극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명과 암은 바로 이 지점을 먼저 짚어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직 검찰 총장이 이끄는 이번 보수 정부는 거의 민주당이 만들어 준 셈이라는 인과론적 도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이 글에는 몇 가지 놀라운 부분이 있는데요. 1990년 1월의 삼당합당이 연계된 이후, 박철언과 김종인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 특히 노태우의 오른팔이라고 여겨졌던 박철언의 놀라운 행보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김종인을 오이켄류의 신자유주의자로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기존 언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꽤나 신선한 평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달리, 박철언이 관여하여 소위 '통합 정권'에 대한 공감대를 그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다른 서사는 진위 여부를 떠나 꽤나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민자당의 탄생에는 여러 정치적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보수 독점적 엘리트 카르텔'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편승해 온 것으로, 권력의 향배나 권력의 이동의 논법들이 본질이 제거된, 그저 언론 지면상에 오르내리는 기사에 불과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상상 밖의 이야기들처럼 말입니다.

끝으로 한국 정치에서 병리적으로 작동하는 '적과 아'의 첨예한 대치 상황은 저자의 분석대로 카를 슈미트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는데요. 이건 약간 첨언이지만, 슈미트가 자유주의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 반감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게 만연된 대결의 정치가 결국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는 법에 의존하지 않는 공익에 대한 공감대를 망각한 시민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자체가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치 기득권 세력에게 오용되었고 자신들 스스로 권력의 의지에 대한 시민 다수의 이해 요구를 넘어서는 무리한 차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자는 자신의 글에서 일관되게 '의지의 정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철학적인 입장에서 이 의지의 정치가 무분별하게 권력을 위해 남용되었고 현실의 산적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편에 대해 갖는 '정치적 우위'만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정치 체제 전반의 무능을 모두가 일조해서 증명해 낸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에 있어 정치 전반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은 앞으로도 당면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후반부에 '1991년 연표'라는 색다른 기준의 분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시기의 진보와 통치계급이라는 구분으로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해 놓고 있는데요. 이는 1991년을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요약본이라 여겨집니다.   




현실에서 이런 시도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그랬을 때 자유주의 헤게모니 수립의 취약성은 ‘영남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집권 세력과 ‘포퓰리스트‘에 장악된 민주당 간의 적대적 공생으로, 결국 비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의 득세라는 위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자유주의(신자유주의를 포함해)에 대한 비난이 일상 언어적 습관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분석을 동반한 자유주의 ‘비판‘으로 나아가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바탕으로 수립된 자유주의의 전화된 질서로서 새로운 국제 질서, 즉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전쟁 억제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보인다.

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이전으로 퇴행하게 되면서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주의 논쟁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즉 그것을 차단하게 된다.

책을 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지식인은 과도할 정도의 이론적 비관주의를 유지해야 하고 그것이 지식인의 사유의 건강함을 유지시킨다.

문재인-민주당 집권 세력이 정권을 상실하게 된 것은 언론과 공안 권력 두 세력을 완전히 자기 통제하에 두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심각한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김종인은 김재익 사단의 긴축, 안정화 정책이 결국 인플레이션 압력을 지연했을 뿐이고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10년간 방기해 낙후시켰으며 재벌 개혁의 시기도 놓쳤다고 비판한다.

87년 체제의 핵심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기됐던 사회적 요구와 갈등이 대표되고 통합된 것이 아니라 배제됐다는 점, 따라서 기성 정당이 중심이 된 보수 독점적 엘리뜨 카르텔의 구조가 복원됐다는 점이다.

긴 시간을 지나고 나서 1991년의 질문을 제대로 짚고 가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정치 관념으로 추방과 검거, 시해 셋 말고는 어떤 담론도 등장할 수 있는 지금, 벗어나기 힘든 미로에 갇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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