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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자들의 위키피디아 - 우리 사회를 망치는 뉴스의 언어들
강병철 지음 / 들녘 / 2019년 12월
평점 :
이 글을 쓴 강병철 기자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합니다. 2008년 서울신문에 입사한 뒤, 문화부, 사회부 법조팀, 사회2부 서울시청팀, 정치부 국회부 등 경력을 쌓고 현재는 정치부 외교안보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기자상을 수상했는데요. 또한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수상할 정도로 언론계에서 유명한 민완기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2019년 12월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은 초판 2쇄였습니다.
서두에서 현직 기자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기레기'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현재 언론계의 문제점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정치 평론가가 우리나라 기자들의 기사 송고 형태를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해 쓰되 그 사실 전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우리 언론계의 행태를 꼬집은 평가 한 줄이 떠오르는데요. 더욱이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우리 국민들에게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 이미 90년대부터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들어왔으니, 소위 '언론 무용론'의 기원은 이처럼 오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또한 이 글 2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과거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모스크바 3상 회의와 관련된 모 언론사의 오보기사는 외부의 소식을 제대로 알기 힘든 많은 국민들을 오판하게 만들기도 했는데요. 이것을 선동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의도된 조직적 프로파간다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언론이라는 권력 자체가 얼마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지 앞선 역사적 사건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실린 언론계와 기자들의 잘못된 기사 송고 행태는 크게 4개의 주제 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의 포퓰리즘에서는 정치적으로 맞서고 있는 상대 당에 대한 어느 정책과 주장들을 '포퓰리즘'으로 몰고 가면서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아예 삭제하게 만드는 행태를 다루고 있는데요. 포퓰리즘이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정치 권력을 얻은 자들은 전혀 대안이나 개선을 위해 노력할 의지가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보면 그가 저임금의 불만에 가득 찬 하위 계층의 백인 남성들을 선동해, 표를 얻고 연방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거의 극명하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이 포퓰리즘의 인식적 걸개가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판의 입을 닫기 위해 쓰이고 있는 점은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우리의 정치와 이를 다루는 언론계의 기자들이 양산하고 있는 '포퓰리즘' 자체를 여실히 잘 분석해내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 이면의 민주주의가 많은 시민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소위 '국가의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이 소위 복지 여왕이라는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 이 사회 부조 및 복지는 포퓰리즘과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의 2장인 '시장질서'에서 "만약 시장에서 무능하다는 이유로 도태되어야 한다면 영세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반문은 역시나 제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사회적 복지를 축소한다면 국가의 지원이 나날이 시급한 계층의 사람들은 과연 이 사회에서 어떻게 버텨 나가야 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기득권층이 선민 의식과 사회 진화론을 바탕으로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를 사회 전체에 철저히 강요한다면 그것 자체는 모두의 이익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익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장의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서 언론은 국민들의 법감정을 기반으로 사법부의 판사가 행하는 일부 판결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로 이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강력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저자가 분석하는대로 법감정 자체를 합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감정에 고양된 법감정으로 입법 행위가 이뤄진다면 그것 자체로 공익과 법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언론이 좀 더 집중해서 비판해야 하는 부분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사법부가 내린 비상식적인 판결일 텐 데요. 공화주의에 기반한 사법부가 국민의 눈치를 보는 것이 마땅한 측면이 있다면 '법 앞의 평등'이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판사 한 명이 하나의 사법부로, 그 판사의 양심이 권력에 물들지 않도록 언론과 의회가 이를 감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돈과 권력이 많은 자들에게 다른 일반 시민들에 비해 법의 판단이 관대하다고 믿고 있는데요. 저는 판사들이 법과 양심에 기반한 판결을 할 수 있도록 사법 카르텔을 먼저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심지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 또한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자 기능이고,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권력의 견고한 균형과 분립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오판하지 않도록 치밀히 고안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과거 유럽의 절대시기에서 프랑스의 삼부회가 일부이긴 했지만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온 점을 인식해 본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권력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이전 세대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끝으로 4장 정치에서 보이는 '내로남불'과 '종북과 적폐'는 확실히 근래 우리의 정치를 묘사하는 주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발전하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데요. 이러한 선거를 통해 순환되는 정치 권력 자체가 다양한 국민들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필연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투표가 끝난 이후에는 전혀 권력이 견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한계도 명확해 보입니다. 특히 주민소환제에 대한 선출 권력의 노이로제는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건전한 행정과 이에 기반한 정치의 협력은 아마도 가면 갈 수록 시민들의 기대와 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대치하고 있는 양당 정치에서 건전한 토론이 아닌 구시대적인 이념 대립과 양비론에 기반한 건설적인 비판의 함몰은 거의 주류적인 해법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인 '내로남불'은 어떤 정치인의 과오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벌인 잘못된 정치적 행태를 마땅히 성찰해야 하지만 우리 편이 하면 괜찮고 상대가 그러한 일을 벌이면 가혹하게 비난하는 행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치인의 비위나 비리 행위가 이 내로남불로 그 본질을 흐리게 되어 더 이상 정치의 개선을 어렵게 만드는데요. 과연 이런 행태에 언론이 가세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 혐오'는 더욱 심해지고 우리의 정치는 거의 희망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근래 시민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정치의 효능감'은 그것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이 4장의 여러 주제 별 분석은 우리 정치의 직접적인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언론이 어떻게 더 나은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제언한다고 여겨집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루로써 시민의 공익에 이바지해야 하며, 기득권 권력을 비롯한 여타 권력과 거리를 두고, 사법부의 판사와 같은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언론이 특정 정치 집단의 이익에 기여하는 쪽으로 기사를 송고하는 행태도 지양해야 할 텐 데요. 사실 무분별하게 카르텔이라는 단어로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싶지는 않지만 검찰과 가까운 기자들, 대기업에 순응한 기자들, 특정 정당의 헤게모니에 자신의 이익을 건 기자들 등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완전한 자유 시장 체제'란 극단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어떤 자들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면 완전 자유 시장은 거의 허구임을 쉽게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다름 아니라 뉴스를 소비하는 층의 성격이 변했다는 점이다. 언론의 저열한 습성을 걸러내는 사람들의 눈은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매서워졌다.
복지 정책은 수혜 계층이 특정되고 투입되는 예산이 투자라기보다는 지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기에 유독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쉽게 직면한다.
그런데도 모든 지자체의 무상 복지 정책을 한 데 묶어 포퓰리즘이라 몰아붙이는 건 복지 정책 자체에 대한 보수 언론의 화학적 거부 반응일 뿐이다.
즉 이른바 ‘좌파 정부‘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야당이 찾아낸 개념이 바로 포퓰리즘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수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치 시스템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지만으로 권력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 공약은 정치인의 지향점과 양심에 상관없이 표를 얻기 위해 잠시 표정을 바꾼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렴 블루칼라와 운동권 학생, 무직자, 시민단체 활동가들만 모였다고 해서 이를 간단히 불순한 회합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실망감이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나 독재체제에 대한 옹호로 나아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만든 법과 제도에는 늘 정치권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자본 권력과 지식 권력, 이익단체, 지역 유지, 언론 권력 등의 의견만이 한껏 반영됐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고전 경제학의 시장경제 체제를 현실 속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현대사회의 모든 국가들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적절한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정부 정책은 일종의 시장 개입이다. 그런데 재벌 대기업들이 말하는 자유주의 시장질서는 자유방임주의 시장경제 체제다.
관리해야 할 히키코모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책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직업이 없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에서 가족 없이 혼자 게임과 인터넷 서핑을 주로 하며 지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웃의 편견은 극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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