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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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아. 사람은 평생 자기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해. 그래. 나는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이름 짓고 살아왔지. 하지만 『돈키호테』를 받아쓰면 받아쓸수록, 세상에 맞설 내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나는돈키호테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어. 돈키호테라면 벌써 그 모든 불의와 부패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았겠니? 그런데 나는 한순간도 온전히 몸을 던지지 못했어. 그저 시늉만 한 거야. 나는 범접할 수 없는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며 그를 흉내 낸 산초일 뿐이더라고

"그럼 산초였던 나는, 나는 어떡하란 말이에요?"
"내 생각엔, 솔이 네가 돈키호테다. 나는 네가 비디오 가게에서늘 TV 프로그램 보며 깔깔 웃던 게 기억이 나거든. 마치 브라운관으로 들어갈 것처럼 몰두했지. 그런데 나중에 네가 그런 TV 프로그림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는 얘길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 저렇게 솔이는 자기 꿈을 이루며 사는구나. 그때 나는 이미 널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단다."

・미안하다."
"미안할 거 없어요. 산초로 한 몇 년 지내시다 다시 돈키호테처럼 도전하면 되죠. 영화감독."
"하하. 돈키호테가 산초가 될 순 있어도 산초가 돈키호테가 될순 없단다."
"왜죠?"
"열정이 사라졌으니까. 열정이 광기를 만들고 광기가 현실을박차고 나가는 인물을 만들거든. 나는 고갈된 열정 대신 현실에발을 디딘 산초의 힘으로 돼지우리를 만들고 하몽을 염장할 거란다. 어른 진솔은 이제 아저씨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는다."

마드리드의 레지던스에 입주해 있던 소설가의 기행문엔 이런대목이 있었다.
세르반테스가 세비야에 머물던 시절은 그가 레판토 해전과 포로 생활이란 고초를 겪으며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전전하고 귀국한 뒤였다. 그는 상이군인이었고 전쟁포로였으며 한물 간 소설가였다. 자신의 경력을 인정받아 정부 요인으로 신대륙에 가일하고 싶었으나 고작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금 징수원으로 고용됐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며 세금을 맡겨둔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횡령죄를 선고받고 감옥까지 가야 했다. 나이는 이미 50대에 접어들었고 한쪽 팔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는 꿈꿨다. 신대륙에 가는 바람을 이루기는커녕 감옥에 갇혀야 했던 그는, 장애인에다 전과자에 불과한 늙은이인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꿈꿨다. 바로 이곳에서.
「돈키호테」가 잉태된 세비야 성당 어느 뒷골목이야말로, 내가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찾아 스페인에 온 뒤 가장 전율을 느낀 공간이었다. 나는 한국식으로 크게 허리를 숙여 그의 동상에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감옥에서도 꿈을 꾼 자의영혼을 위해 건배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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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때려치우고 엄마 집에 내려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내려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한주를 보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서른 살 인생 동안 이만한 쉼표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제구실하며 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구실하며 살려다 보니 어느새 망가져버렸고, 제구실따위 못 하게 됐다. 스스로 멈춰버린 일주일. 그 시간은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였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길가의 쓸모없는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엄마에게 털어놓자 엄마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돌멩이가 많이도 먹네."

부주의가 부른 불운이 쌓이고 쌓여 불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쉼없이 달려온 삶의 커리어가 한 방에 무너지고 나서야 내 것이 아닌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도내 것이 아니었고 내가 이룬 성과도 내 것이 아니었다.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지 내 몫을 챙기는 데 부주의했고, 영악하게, 때론고약하게 굴면서라도 나를 지켰어야 했다.

"그러니까 왜 필사하는 거예요?"
"그건 말이다. 음・・・・・・ 돈키호테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지. 그리고 대한민국에 그 누구도 『돈키호테』를 필사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이건 한국어로 된 최초의 『돈키호테』 필사본이지."
"하지만 그걸 누가 알아줘요? 스페인 사람들이 알아주려 해도한국어로 된 거면 알아볼 수도 없지 않나요?"
"누가 알아준다고 모험을 떠나는 건 아니란다. 나만의 길을 가는 데 남의 시선 따윈 중요치 않아. 안 그러니 솔아?"

"저는 그런 장영수 씨의 번역을 도우며 그가 소설 속 돈키호테와 동화되는 과정을 목격이라도 하는 듯했어요. 어느덧 회사에 완전히 적응한 그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일에 앞장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요. 대표는 그런 장영수 씨에게 너보고 『돈키호테』 번역을 하라 했지 돈키호테가 돼라 했냐며 타박했고, 장영수 씨는아랑곳없이 사소한 직원 복지부터 저자들의 미지급 인세까지 따지고 들어 대표를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죠. 민주화운동을 했던 선배가 이런 부정의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할 거냐며 막몰아붙이면, 대표가 참다못해 화장실로 숨어버리기도 했어요. 사실 대표도 친한 후배인지라 무작정 장영수 씨의 말을 무시할 수는없었고, 장영수 씨는 그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저희들의 방패막

인정받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그걸 깨기 위해 나섰다고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승아 씨는 그제야 아저씨의 행동이 단지 자신을 챙겨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뜻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돈키호테』 번역은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돈키호테』 이거 일이 년 해서 될 게 아닙니다. 평생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내가 영어 강사로 탑이긴 했지만 번역은 다른 문제더군요. 나는 번역보다 중요한 돈키호테의 꿈을 배웠어요. 이제이 책과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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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뮌헨 사람들은 모두 맥주에 소시지를 먹고, 주말이면 축구 보고,하나같이 BMW를 모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이런 이미지는 뮌헨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선입견, 그러니까 그저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물론 뮌헨의 상인들이나 우리나라의 여행사들이 이 이미지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매일 막걸리에 파전을 먹고 집에 가서 태권도를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삶은 선입견 바깥에 있다. 이제 진정한 뮌헨의 모습을 찾아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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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인생이 비극임을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이 비극에서조차 성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위대한 전환이다! 모든 것이 우리가 과연 내려감(down)을 올라감(up)으로 볼것인지 또는 칼 융이 말하는 "걸려 넘어진 곳에서 순금을 발견한다는 사실을받아들일 것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레이디 줄리안은 그것을 더욱 시적인언어로 이렇게 표현한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뒤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이 분명하고 정직한 말에서, 우나무노가 보는 인생이 곧장 앞으로나아가는 직선 코스가 아니었음을나는 읽는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삶은 전체적이고 완벽한 질서보다 훨씬 많은 예외와 무질서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인생은 상실이면서 회복,죽음이면서 부활, 질병이면서 치유로 이어지고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것들의 알력 또는 충돌처럼 보인다. 우나무노는 ‘신앙‘(faith)이라는 개념을, 너무나 강하여 죽음마저도 포함시키는 저변의 생명력에 대한 ‘신뢰‘(crust)와 동일시한다. 신앙은 이성(理性)을 포함하지만,우나무노에게는, 이성보다 큰 범주다. 진실은 문제를 해결하고 사물을 돌아가게 하는 실질적인 무엇만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상충하는 것들을 화합시키는 무엇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비참한 결과를 빚는다고 해서 그것이진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떤 것이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한 것 또한 아니다. 인생은 태생부터 비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근사한 논리보다 오직 신앙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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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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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월감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테‘ 하면 곧장 신곡을 떠올렸지만, 그게 제 지식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저 제목만알고 있을 뿐,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그로 인해 제 삶이 영향을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독일 아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시대와 삶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작품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주거나,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때 비로소 ‘안다‘고 표현했습니다.

독일 학생들이 ‘안다‘고 말할 때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자기 나름의 경험으로 해석된 얘기들을 하는 것이었죠. 제가 단테를 안다고 했을 때, 과연 제가 단테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이고, 단테가 저에게 준 의미는 무엇인지, 제게는 그런 차원의 성찰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그저 언제 사용할지도 모를 수많은 ‘죽은 지식‘을머릿속에 쌓아가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은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책 읽기입니다.

지식을 가능한 많이 머리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천천히 깊게 읽고 사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독일 교육의 기본입니다. 저는 독일 학생들이 자기 관심 분야에 관해서는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깊은 사유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학생들은 한국에서는 거의 본 적이없습니다. 잘못된 교육과 왜곡된 평가 방식 때문이지요.
우리는 경쟁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다형 단답형의 지식문항들을 풀어내기 위해, 잡다한 지식들을 낮은 수준에서 되도록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심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깊이 사유하고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자유로이 펼치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킬러 문항‘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사실은 강남의 소수 아이들에게 국한된 ‘그들만의 게임‘에나 적용되는 얘기이지요.
샌델과 마코비츠는 실제로 미국의 명문대학 입학생의 출신을분석함으로써 능력주의의 신화를 깹니다. 간단히 말해서 능력주의의 가장 확고한 징표, 즉 미국 명문대학 입학은 ‘학생의 능력‘이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재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를 사회의 공동선을 다 때려 부수는 ‘폭군‘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면서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를어떻게 망쳤는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첫째, 능력주의는 미국 사회를 ‘오만함(hubris)에 가득찬 엘리트‘와 ‘굴욕감(humility)에 휩싸인 대중‘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엘리트란 누구인가요. 그들은 바로 명문대학의 졸업생들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명문대학 졸업장이능력의 가장 확실한 증표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선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퍼드, MIT 등의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대개
‘능력 있는 엘리트‘라고 부릅니다.

능력주의가 폭군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오만한 엘리트와 분노한 대중으로 미국 사회를 완전히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미국을 ‘절망사(death of despair)‘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역사상 최악의 불평등 사회가 되었지만, 능력주의이데올로기로 인해 대중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중들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미국의 약탈적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무능에서 찾는다는 거지요.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다‘라는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추긴 결과이지요. 그래서 불행한 대중들은 ‘혁명 대신 자살‘을 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바로 ‘절망사의 나라‘입니다. 2018년 한 해에만 약 15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절망사‘로 죽었습니다. 사실 절망사가 미국보다 더 심각한 나라는 확고부동한 ‘자살률 세계 1위‘ 대한민국입니다.

베라르디는 "한국인의 일상은 사막"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실이 사막은 이데올로기의 모래바람으로 가득합니다. 한 대기업 광고에서 기업 오너가 직접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이 카피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본이 내뱉는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24시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자본이 보내는 긍정과 소비와 노동의 ‘복음‘을 듣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어라,
끝없이 소비하라, 쉬지 않고 일해라. 저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나는 긍정입니다"라는 H 그룹의 광고를 보고 정말 ‘파렴치하다‘고느꼈습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너무도 노골적으로 설파했기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노예 감독관이 채찍질 하면서 폭력으로노예를 지배했다면, 현대 사회는 노예 감독관을 우리 가슴속에심어놓는 방식으로 지배합니다. 밖에서 폭력으로 감시하는 것이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착취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이유는 ‘타인에의한 착취‘에서 ‘자신에 의한 착취‘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착취가 정치의 영역을 넘어 문화의 영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이 끔찍한 자기착취를 ‘자기계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를 착취하지 않는 인간은 불안해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내는 이것이
‘한국형 착취 양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를 보는 관점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의 언어를 통해서 이해하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눈을 통해서, 혹은 그들이 씌운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한국 사회에 대해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저들의 생각입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준 가이드라인 그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거죠.

‘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일까, 아니면 나를지배하는 저들이 내 머릿속에 집어넣은 생각일까‘ 이러한 각성이시작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느껴, 나는 이렇게욕망해‘라고 할 때 바로 그 ‘나‘가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나‘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저들인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겐 이런 자기성찰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한국이 30-50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한국을 제외한 여섯 나라는 모두 제국주의의 과거를 가졌다는 것이다. 한국만 제국주의 과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지배한 과거가없더라도 당당히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한국이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30-50클럽 중에서 한국만이도덕적 권위를 가진 나라다. 그것을 정말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한국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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