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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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월감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테‘ 하면 곧장 신곡을 떠올렸지만, 그게 제 지식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저 제목만알고 있을 뿐,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고, 그로 인해 제 삶이 영향을 받은 것도 없었습니다.

독일 아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품을 읽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시대와 삶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작품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주거나,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때 비로소 ‘안다‘고 표현했습니다.

독일 학생들이 ‘안다‘고 말할 때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자기 나름의 경험으로 해석된 얘기들을 하는 것이었죠. 제가 단테를 안다고 했을 때, 과연 제가 단테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이고, 단테가 저에게 준 의미는 무엇인지, 제게는 그런 차원의 성찰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그저 언제 사용할지도 모를 수많은 ‘죽은 지식‘을머릿속에 쌓아가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은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책 읽기입니다.

지식을 가능한 많이 머리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천천히 깊게 읽고 사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독일 교육의 기본입니다. 저는 독일 학생들이 자기 관심 분야에 관해서는 거의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깊은 사유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학생들은 한국에서는 거의 본 적이없습니다. 잘못된 교육과 왜곡된 평가 방식 때문이지요.
우리는 경쟁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다형 단답형의 지식문항들을 풀어내기 위해, 잡다한 지식들을 낮은 수준에서 되도록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심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깊이 사유하고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자유로이 펼치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킬러 문항‘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사실은 강남의 소수 아이들에게 국한된 ‘그들만의 게임‘에나 적용되는 얘기이지요.
샌델과 마코비츠는 실제로 미국의 명문대학 입학생의 출신을분석함으로써 능력주의의 신화를 깹니다. 간단히 말해서 능력주의의 가장 확고한 징표, 즉 미국 명문대학 입학은 ‘학생의 능력‘이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재력에 달렸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를 사회의 공동선을 다 때려 부수는 ‘폭군‘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면서 능력주의가 미국 사회를어떻게 망쳤는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첫째, 능력주의는 미국 사회를 ‘오만함(hubris)에 가득찬 엘리트‘와 ‘굴욕감(humility)에 휩싸인 대중‘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엘리트란 누구인가요. 그들은 바로 명문대학의 졸업생들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명문대학 졸업장이능력의 가장 확실한 증표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선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퍼드, MIT 등의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대개
‘능력 있는 엘리트‘라고 부릅니다.

능력주의가 폭군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오만한 엘리트와 분노한 대중으로 미국 사회를 완전히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미국을 ‘절망사(death of despair)‘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역사상 최악의 불평등 사회가 되었지만, 능력주의이데올로기로 인해 대중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중들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미국의 약탈적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무능에서 찾는다는 거지요.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다‘라는 의식을 내면화하도록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부추긴 결과이지요. 그래서 불행한 대중들은 ‘혁명 대신 자살‘을 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바로 ‘절망사의 나라‘입니다. 2018년 한 해에만 약 15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절망사‘로 죽었습니다. 사실 절망사가 미국보다 더 심각한 나라는 확고부동한 ‘자살률 세계 1위‘ 대한민국입니다.

베라르디는 "한국인의 일상은 사막"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실이 사막은 이데올로기의 모래바람으로 가득합니다. 한 대기업 광고에서 기업 오너가 직접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이 카피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자본이 내뱉는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24시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자본이 보내는 긍정과 소비와 노동의 ‘복음‘을 듣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어라,
끝없이 소비하라, 쉬지 않고 일해라. 저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나는 긍정입니다"라는 H 그룹의 광고를 보고 정말 ‘파렴치하다‘고느꼈습니다.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너무도 노골적으로 설파했기때문입니다.

과거에는 노예 감독관이 채찍질 하면서 폭력으로노예를 지배했다면, 현대 사회는 노예 감독관을 우리 가슴속에심어놓는 방식으로 지배합니다. 밖에서 폭력으로 감시하는 것이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착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착취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이유는 ‘타인에의한 착취‘에서 ‘자신에 의한 착취‘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다른말로 하면, 착취가 정치의 영역을 넘어 문화의 영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이 끔찍한 자기착취를 ‘자기계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를 착취하지 않는 인간은 불안해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내는 이것이
‘한국형 착취 양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인이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를 보는 관점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의 언어를 통해서 이해하기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눈을 통해서, 혹은 그들이 씌운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한국 사회에 대해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저들의 생각입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준 가이드라인 그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거죠.

‘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일까, 아니면 나를지배하는 저들이 내 머릿속에 집어넣은 생각일까‘ 이러한 각성이시작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이렇게 느껴, 나는 이렇게욕망해‘라고 할 때 바로 그 ‘나‘가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나‘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진 저들인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에겐 이런 자기성찰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한국이 30-50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한국을 제외한 여섯 나라는 모두 제국주의의 과거를 가졌다는 것이다. 한국만 제국주의 과거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지배한 과거가없더라도 당당히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한국이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30-50클럽 중에서 한국만이도덕적 권위를 가진 나라다. 그것을 정말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한국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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