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게 하나 있으니 바로 입국 심사였다. 미국의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고, 방학이 아닐 때 아이들을 데리고 입국하는 경우 꼬치꼬치 묻다가 되돌려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에서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오면 영락없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학구열 높은 한국 엄마들 중 관광 비자로 들어가서 학교까지 보내는 경우가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미국은 불법 체류자까지도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이 동네마다  있다고 한다. 간 김에 우리도 그런 데 가서 영어 좀 배우다 올 걸 그랬나?

나야 정말 순수 관광 목적으로 들어가는 거였지만 방학도 아닌데 왜 아이들 데리고 왔냐고 물어보면 영어로 좔좔 이유를 읊어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편이 써준 모범 답안을 준비해서 딸아이랑 앉아 밤마다 연습까지 해보았다는 슬픈 전설이... 입국 심사에 대한 걱정만 하다가 오히려 정작 필요한 여행 준비는 대충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고. 

일본을 경유하면 일인당 30만원 정도 절약할 수 있기에 일본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탔으면서도 일본에서도 입국 심사를 할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으니 원... 인천을 출발한 지 1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은 김포공항보다도 작아 보였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그야말로 삐까번쩍한 인천공항과 비교하니 초라할 정도.  

나리타 공항에서의 입국 심사는 정말 간단했다. 물어보는 말도 없었고 단지 소지품 검사만 했다. 역시 일본은 가까운 나라라는 생각에 일본 여행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정도다. 단지 다섯 개밖에 안 되는 입국심사대 앞에 한 시간 이상 줄을 세워놓고 대기시키는 바람에 일본인들이 생각보다 일처리를 합리적으로 못한다는 인상을 받긴 했다. 그 덕에 천천히 공항 구경을 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본에서 입국 심사 포함 1시간 20분 정도를 보내고 인천에서 타고 온 비행기를 다시 탔고, 8시간 몇 분인가 만에 미국 LA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초긴장 상태로 작성했던 입국신고서(파지 다섯 장 냈음)와 세관신고서를 들고 한참을 걸어가자 나타난 입국 심사대는 와우, 소리가 나올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좌악 늘어서 있었다. 심사관이 모두 30~40명은 되어 보였다. 일본하고 너무 비교되었다. 그만큼 LA 로 들어오는 외국인이 많다는 얘기겠지 뭐. 심사관이 많다 보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드디어 내 차례. 30대 초반의 약간 꼬장꼬장해 보이는 금발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물론 영어로. 다행스럽게도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걸 묻지도 않았고, 못 알아듣고 뚱하니 쳐다보면 알아서 다시 말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1. 너 어떤 나라에서 왔니? - 코리아, 아니 사우스 코리아. 2. 너희들 모두 가족이니? - 그래. 3. 모두 몇 명이니? - 눈짓으로 보면 몰라, 세 명이잖아. 4. 미국에는 왜 온 거니? - 여행하러 왔다. 5. 미국에는 얼마나 있을 거니? - 3주 정도.  

전자여권에 입국 허가 도장을 꽝꽝 찍는 걸 보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여행 준비에 50% 이상을 차지했던 걱정과 불안이 허무하게도 단 5분 만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입국 심사 공포는 다 뭐였더란 말이냐! 너무 많은 정보가 별로 보탬이 안 될 때도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한 후에야 깨닫는 순간이었다. 돈 많이 들여가며 한 가지 배운 셈이다. 한참 어렵다는 미국 경제 사정 생각해서 돈 좀 쓰러 왔다는데 까다롭게 굴면 안 되지 암, 그렇구말구. 

하지만 안심도 잠시 세관신고서에 음식이 좀 있다고 신고를 했더니 바로 통과를 안 시켜주고는 짐검사를 한 번 더 받으라고 했다. 잠시 불안했지만 뭐 한국에서 고추장하고 김 들고 들어오는 사람 수도 없이 보았을 테니 내가 가져간 것들이 위험해 보이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 당당하게 검사원 앞에 가서 섰다. 검사원은 가방을 열어 보라거나 그러진 않고 몇 가지 질문만 했다.  역시 영어로.

1. 어디서 왔니? - 한 번에 사우스 코리아. 2. 사우스 코리아라고? 여행이니? 좋겠다. 그러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코 앞에다 들이대면서 그림을 짚으며 어설픈 한국말로 물었다. 씨앗이 될 만한 각종 과일 그림과 그 밑에 여러 나라 말로 과일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였다. 사과? 배? 밤? 흙? 물론 나의 대답은 모두 NO 였고, 그게 바로 우리 가족이 무사히 최초로 미국에 입국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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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9-05-0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덩달아 긴장했다가 덩달아 푸쉬쉬~ 김 뺐어요 ^^;
드디어 미국에 발을 내딛으셨군요! 어여 가자구요. ㅎㅎ

소나무집 2009-05-07 09:49   좋아요 0 | URL
김 빠지는 입국 심사였지만 주워듣고 간 풍월이 너무 많아서 당시에는 완전 조마조마했어요.

꿈꾸는섬 2009-05-0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의 미국 여행기 기다리고 있었어요.^^
입국심사를 무사히 마치셨군요.ㅎㅎ

소나무집 2009-05-07 09:52   좋아요 0 | URL
네, 미국 얘들도 척 보고는 영어 못 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아예 어려운 질문 같은 거 안 하는 것 같더라구요. 바로 제 앞에서 심사 받던 사람에게는 저보다 더 많은 질문을 했어요.

전호인 2009-05-0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걱정한 것만큼 어렵지 않게 미국의 땅을 밟게 되는 순간이로군요.
이제부터는 부군과 가족들간의 뜨거운 만남이 전개되겠지요. ㅋㅋ

소나무집 2009-05-07 09:54   좋아요 0 | URL
남편과의 첫 만남은 그리 뜨겁지 않았어요. 미리 나와 기다릴 줄 알았는데 한 시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더라구요. 그동안 소심한 여자 마음속에서 온갖 망상이 자나갔을 거라는 거 상상되시죠?

마노아 2009-05-0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현장감 있어요. 좋아요, 좋아~ 이제 여독이 좀 풀리고 계시군요.^^

소나무집 2009-05-07 09:55   좋아요 0 | URL
여독은 완전히 다 풀렸구요.
휴일엔 아이들과 함께 체험학습 보고서 작성하느라고 시간 다 보냈어요.
그야말로 진짜 보고서를 만드느라...

순오기 2009-05-0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의 설레임과 긴장감이 그래도 전해와요~ 즐거운 여행 후기 기대합니다.
일본공항에서의 기다림, 정말 어이없고 황당했어요~~
혹시 6월 13일 놀토에 중학교독서회 문학기행 예정인데 완도에 가볼곳 있을까요?
문학작품을 읽고 관계된 곳이면 더 좋겠는데~ 학생, 학부모 30명 이상 예정인데 소나무집님이 안내해줄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추천해주세요~~

소나무집 2009-05-08 14:50   좋아요 0 | URL
님도 일본 다녀오셨으니까 잘 아시겠네요. 미국 입국 심사는 9.11 테러 이후 더 까다로워졌나 봐요.

초록이좋아 2009-05-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렇게나 고민하시더니 넘 싱겁게 끝나버렸네요.

소나무집 2009-05-11 09:3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이지.
작년 11월부터 관광비자로 바뀌면서 좀 헐렁해진 느낌도 들고,
마침 우리가 간 시기가 미국 얘들 봄방학이라 방학 때 놀러왔나 보다 했을 수도 있고...

잎싹 2009-05-1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후기 보러왔어요.
님의 글로 나마 함께 떠나봐야겠네요.~~

소나무집 2009-05-17 19:58   좋아요 0 | URL
제가 다녀온 곳,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올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