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리커버)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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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톨스토이의 명대사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달리 불행하다.'의 의미에 대하여 이따금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습관처럼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기도 한 이 대목은 소설을 읽은 사람이건 읽지 않은 사람이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며 제법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톨스토이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이 문장을 꺼내 들었을까 하는 작가의 의도 또는 작가의 철학적 기반에 대해서는 이것이다 하고 답을 내기 어려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작가가 생각했던 그 말의 진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를 읽으면서도 나는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그 문장을 떠올렸다. 바삭바삭 부서질 것처럼 건조하고 짧은 호흡의 문체에 소설 속 주인공 아오이의 행복한 일상이 얹히는 것은 꽤나 이질적인 조합으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일본 교포 출신의 주인공이 이탈리아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주하는 것도, 그곳에서 포도주 수입상을 하는 미국인 남자친구 마빈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는 것도, 자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허락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는 것도 행복의 무작위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사례쯤으로 여겨졌다. 사실 현실에서의 행복은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무작위로 받게 되는 하나의 작은 선물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작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현실에서의 불행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 비록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곤 하지만 말이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행복의 이러한 무작위성과 불행의 개별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는 비가 잎을 흔들고, 공기를 흔들고, 7월의 거리를 적시고 있다. 사륵사륵 희미한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시간도, 장소도, 모든 것이 형태를 빼앗기고 만다. "따분하지 않아?" 태산목을 지나, 오른쪽 정원을 따라 이어지는 검정색 철책을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걷고 있던 안젤라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p.65)


교포 출신의 아오이는 일본에서 밀라노로 다시 돌아온 지 삼 년째이다. 주택가의 작은 보석 가게에서 일주일에 사흘만 일하면서 한가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밀라노에서 사업을 하는 마빈은 보석 가게의 손님으로 왔다가 아오이와 사랑에 빠져 동거를 하게 된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마빈이지만 아오이의 가슴 한켠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다. 도쿄의 대학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던 쥰세이에 대한 그리움이 그것이다. 마빈과의 행복하고 조용한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빈의 누나인 안젤라가 찾아오고 아오이의 삶에 균형을 깨는 묘한 긴장감을 던진다.


"마빈에게 등을 보인 채, 콸콸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손을 대고 말했다. "나에게는 나의 생활이 있어요." 물소리, 물 냄새. "그거야 알지(I know.)." 소름이 끼칠 정도로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마빈." "알고 있었어. 아오이에게는 아오이의 인생이 있고, 나는 근접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상처 입은 목소리였다. 마빈은 절망적으로 피식 웃으며 "I know"를 반복한다. 나는 후회했다."  (p.160)


마빈과의 사랑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던 어느 날 쥰세이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완전히 털어냈다고 생각했던 쥰세이에 대한 기억은 그날 이후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빈과 함께 시작했던 새로운 생활 속으로 되돌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오이는 자신의 짐을 싸서 나와 방을 따로 얻고 보석 가게에서도 풀타임 아르바이트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마빈은 아오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엄마와 달리, 나는 이 도시의 인간이다. 국적이야 어떻든 간에.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소리도 없이. 그러면서도 전혀 그칠 기미가 없다. "아오이." 페데리카의 방은 기묘하다. 방 전체가 페데리카 같다. "네?" 담배를 낀 손가락에, 오늘도 남편에게 선물 받은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  (p.196~p.197)


우리의 사랑이 엇갈리는 것도,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도 결국에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랜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다. 비슷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낸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불행은 각각의 선택이 도출한 개별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는 서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노라고 자신이 믿는 신 앞에서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거짓을 고백하곤 하겠지만 말이다. 십 년 후 5월 25일 피렌체의 두오모를 함께 오르자고 했던 쥰세이와의 약속을 아오이가 기억하고 로마행 열차를 타야 했던 것처럼.


명절 연휴의 피로가 대기중에 떠도는 미세먼지처럼 탁하기만 하다. 며칠 지나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비슷한 날들이 예전처럼 이어지겠지만 지금 당장의 피로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듯하다. 우리의 불행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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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코앞까지 바싹 다가왔다. 비교적 짧은 연휴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 명절은 언제나 비용 대비 만족도(소위 가성비) 면에서 평균 점수를 밑돌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무서워서, 혹은 자주 뵙지도 못하는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공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애써 고향 쪽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빠듯한 월급에서 설 선물과 세뱃돈, 오가는 경비 등을 지출할 생각에 절로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물론 이런 명절이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조카들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렵지만 말이다.


요 며칠 봄처럼 따스했던 날씨는 명절을 코앞에 두고 돌변한 느낌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에 제법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아직 2월도 초순이니 겨울 추위를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건만 워낙 따뜻한 겨울 날씨가 길게 이어졌던 까닭에 계절 감각이 둔해졌나 보다. 인터넷에서 설 선물 시세를 여기저기 훑어보던 나는 선물보다 현금이 오히려 싸게 먹히겠다는 얄팍한 계산과 함께 인터넷 서핑을 멈춘다. 잔뜩 흐린 하늘에 바깥은 여전히 칙칙한 무채색에 휩싸인 듯하고 문틈으로 새어드는 한기에 나는 이따금 나도 모르는 기침을 한다.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권여선 작가의 산문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명절 때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친정도 없고 시댁도 없기 때문이다. 명절에 차례도 안 지내고 함께 모이지도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면 나는 콩가루 집안 출신의 콩가루이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 특히 내 또래의 여성들은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콩가루에 대한 로망을 가진 그들은 한술 더 떠 긴 연휴 동안 자유롭게 여행이라도 떠나지 그러느냐고 권하는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여행을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내 생각에 긴 연휴 동안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만이 집구석을 떠나 어디로든 여행을 가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집구석에서 한껏 자유로운 나는 더 자유롭기 위해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그리고 설사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나는 평생 취업 한 번 하지 않고 자유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온 자유인으로서의 윤리랄까 도의랄까, 그런 게 있어서 번듯한 직장인들이 놀러 가고 고향 가고 여행 갈 때는 가급적 안 움직이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들이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때 여유롭게 여행을 가면 될 걸, 하필 말도 못하게 붐비는 명절 연휴에 티켓과 여로를 놓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콩가루가 되어본 적 없는 가여운 사람들만이 그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여행 타령을 한다."  ('오늘 뭐 먹지' 중에서)


이 대목만 보더라도 권여선 작가의 인기가 드높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윤리 의식이 투철하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나는 권여선 작가에게 몇 번이고 지고 만다.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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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10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에 해외여행 떠나시는 분들은 이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도 궁금해지네요.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는 유명대사를 차용할 듯ㅎㅎ

꼼쥐 2024-02-13 17:12   좋아요 0 | URL
권여선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일 테지요. 아니면 콩가루 집안이기 때문일까요? ㅎ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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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던 어느 여성 생태학자가 생애 처음으로 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70에 가까웠다. 늘그막에 웬 소설이냐고 타박을 들어도 한참을 들었을 나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여인의 소설이 어찌 된 일인지 입에서 입으로 조금씩 소문이 나더니 2018년 출간 이후, 2022년 1월 기준으로 1,200만 부가 팔리면서 미국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음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니 실로 놀랍지 않은가.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박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것도 놀랍지만 그것이 생애 첫 작품이라니...


1960~70년대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했던 당시의 시대상과 척박했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습지가 잘 어우러진, 게다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어느 누구의 보호나 보살팜도 없이 자란 탓에 자본주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처절한 고독과 사랑에 대한 갈망, 배신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애착과 자연의 순환 구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성장했던 한 여인의 성장 스토리는 자본과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외톨이가 된 카야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물속에서 풀이 자라고 물이 하늘로 흐른다. 꾸불꾸불한 실개천이 느릿하게 배회하며 둥근 태양을 바다로 나르고, 수천 마리 흰기러기들이 우짖으면 다리가 긴 새들이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p.13)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카야는 다섯 아이의 막내였다. 여섯 살에서 일곱 살로 넘어가던 시기에 엄마를 필두로 언니 오빠들이 모두 아빠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왼쪽 허벅다리에 파편을 맞고 폐인이 된 아버지의 수입원은 매주 수령하는 상이군인 연금이 유일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디 오빠마저 집을 떠난 후 카야는 아버지와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빨래를 하고, 땔감을 구해 오고,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카야는 오빠의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의 끝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해가 저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빛이 머물다 방 안에 고였다. 아주 짧은 찰나 어지러운 침대며 묵은 빨래 더미들이 바깥의 나무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다채롭게 보였다."  (p.25)


글을 읽을 줄도 셈을 할 줄도 몰랐던 카야가 학교에 갔었던 건 단 하루. 아이들의 놀림과 마을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에 카야는 스스로 습지에서의 고독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을 모르는 카야는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편지를 읽은 아빠는 편지는 물론 엄마의 체취가 묻은 모든 것을 불에 태우고 떠나버린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진 카야는 홍합을 캐고 훈제 물고기를 팔아 식료품을 사고 보트에 연료를 채웠다. 이런 모습을 가엾게 여긴 건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점핑 부부와 조디 오빠의 친구인 테이트가 유일했다. 흑인인 점핑 부부는 교회에서 얻어온 헌 옷과 신발을 주기도 하고 카야가 캐 온 홍합을 구매하기도 했다. 한편 습지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테이트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치고, 카야와 함께 습지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애정을 키워갔다. 마을의 백인 사회에서 카야는 마시 걸로 불리는 것은 물론 더럽고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록수는 몰라도 시카모어는 이미 눈치를 챘다. 암회색 하늘 가득 수천 장의 황금빛 잎사귀를 휘날렸다. 어느 날 오후 늦게 수업이 끝난 뒤 테이트는 가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도 가지 않고 미적거렸다. 테이트와 카야는 숲속 통나무집에 함께 앉아 있었다."  (p.153)


습지를 탐험하고 관찰하는 친구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테이트가 대학 진학과 함께 도시로 떠나자 카야는 다시 혼자가 된다.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던 테이트. 그러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테이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외로움만 커져간다. 결국 카야는 바람둥이 체이스와 사귀게 되고, 학업을 마친 테이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카야에 대한 사랑과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 테이트는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카야의 습지 생물에 대한 관찰 기록과 수집품을 본 테이트는 출판을 권유하고 그렇게 카야는 출판 기념회에 초대된다. 그 덕분에 군인이 된 조디 오빠와 극적으로 재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신문에서 체이스의 약혼 소식을 접하게 된 카야는 분노한다. 카야를 단지 노리갯감으로 여겼던 체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카야를 만나러 오지만 카야는 이를 단호하게 뿌리친다. 화가 난 체이스는 카야를 폭행한다. 그러나 카야가 자신의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러 마을을 떠난 사이에 체이스가 20m 망루 위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카야는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난 한 번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날 미워했어. 사람들이 나를 놀려댔어. 사람들이 나를 떠났어. 사람들이 나를 괴롭혔어. 사람들이 나를 습격했단 말이야. 그래, 그 말은 맞아. 난 사람들 없이 사는 법을 배웠어. 오빠 없이. 엄마 없이! 아무도 없이 사는 법을 배웠다고!"  (p.434)


델리아 오언스의 첫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얼어붙은 독자들의 마음을 녹이고 주인공인 카야의 삶에 깊이 주목할 수 있게 되었던 까닭은 문학적 아름다움과 소설의 구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갈매기가 울고 파도가 치는 등 자연의 침묵 속에서 간간이 퍼지는 자연의 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의 숨결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작가의 호흡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리라. 자연을 동경하지만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 배척으로 일관해왔던 나와 같은 도시내기의 태곳적 향수는 카야라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산들바람처럼 스쳐가던 아름다운 문장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었던 게 아니라 어느 오지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한나절을 머무르다 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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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피고인석에 앉힌 채 본인 스스로가 검사도 되고 변호인도 되면서 삶의 법정을 개최한다. 드물게 나타나는 행복을 참고인 삼아 내 불행의 원인을 따져 물을 때도 더러 있다. 그리고... 결론도 나지 않을 판결문을 우리는 매일 밤마다 반복하여 작성한다. 나의 불행은 유죄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배심원단의 표정은 냉랭하다. 나는 방청석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나를 조금 더 이해해 달라고, 나의 불행이 유죄라는 사실을 조금 더 믿어 달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인 결국 나에게로 회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유죄인가?


미세먼지가 걷힌 주말 오후.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을 큼지막하게 써서 대문에 붙여야 할 것만 같은 포근한 날씨.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 청소를 하고, 세탁기에 넣어둔 밀린 빨래를 돌렸다. 그렇게 분주하고 정신없는 오전을 보낸 나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서재에 앉았다. 언제인지도 확실치 않은 낡은 노트에서 보았던 문장. 예전부터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날짜도 기입하지 않은 채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써놓는 버릇이 있다. 어떤 글은 다른 누군가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로 도배가 된 것도 있고, 또 어떤 문장은 내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 보았음직한 표절문 비슷한 것도 있고, 또 어떤 문장은 지금 읽어도 꽤나 괜찮아 보이는 것들도 간혹 눈에 띈다.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요, 그쪽 계통에서 일을 한 적도 없는 까닭에 나의 글쓰기 실력이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거리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번 같은 언저리에서 맴을 도는 게 다이지만 가뭄에 콩 나듯 제법 그럴듯한 문장이 우연처럼 얻어걸릴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했던 델리아 오언스의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거의 다 읽었다. 생애 처음 쓴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나는 야금야금 아껴가며 읽느라 마음에도 없었던 병렬 독서를 해야만 했다. 

"평생 처음 혼자 맞는 밤이었다. 처음에는 숲속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앉아 차양문 밖을 살폈다. 한 그루 한 그루 모양을 낱낱이 아는데도 이따금 나무가 달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참 침도 못 삼키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때마침 청개구리와 여치가 친숙한 노랫소리로 밤을 채워주었다. 어둠은 달콤한 향내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럽게 뜨거운 낮을 하루 더 견뎌낸 개구리와 도마뱀들의 텁텁한 숨결, 습지가 낮게 깔린 안개로 바짝 다가왔고 카야는 그 품에서 잠이 들었다."  (p.26)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 있다. 행복도 불행도 다만 우리 삶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 요소일 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는 건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았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서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문장을 낙서처럼 끄적이고,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예전에 알던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처럼 반갑게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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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4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4-02-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스럽게도 제가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을 가지고 있어요. 아직 읽지는 못했고요.ㅋ

꼼쥐 2024-02-14 16:47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ㅎ
한 번 읽어보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다 읽으실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수도 있어요.
 
퀴팅 : 더 나은 인생을 위한 그만두기의 기술
줄리아 켈러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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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의 아시안컵 8강전 축구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16강전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도 그랬고 이번 경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후반전 막바지까지 끌려가다가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서야 겨우 동점골을 넣음으로써 연장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극적인 것을 떠나 지켜보는 국민들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후반전 추가시간도 거의 끝나갈 무렵, '졌구나' 하는 체념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순간에 터진 동점골. 텔레비전으로 시청을 하는 우리도 이럴진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는 마음에 저절로 울컥해지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유행어처럼 쓰게 되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간혹 그릿(Grit)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젤라 더크워스가 주창한 이 개념은 사실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s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이며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치는 투지 또는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성공'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군인처럼 끝없는 투지를 요구받기도 한다. 어떠한 이유로든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패배자' 혹은 '실패자'라는 낙인을 각오해야만 한다. 오늘 새벽에 펼쳐졌던 축구 경기도 다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선수들이 이제는 더 이상 뛰기 힘들다며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더라면 경기를 지켜봤던 많은 국민들로부터 그런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낙인은 그들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벗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릿의 유무가 삶을 재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갖길 바란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자유를 여러분에게 주고 싶다. 언제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 시작한 모든 일을 끝마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자유를 주고 싶다.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꺼이 그만두면 삶의 가능성은 확장될 수 있다. 이는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놓더라도 자신에게 기회가 많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퀴팅은 희망으로, 내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의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써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얻는다."  (p.38 '머리말' 중에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릿은 미덕이고 퀴팅은 죄악이라고 믿게 되었다. <퀴팅(Quitting)>의 저자인 줄리아 켈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다가 그만두었던 경험, <시카고 트리뷴>에 입사해 기자로 일하면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고, 8권의 소설 시리즈를 집필하여 자신의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경험을 되살려 <퀴팅>을 썼다. PART 1 '퀴팅의 과학: 뇌는 퀴팅을 원한다', PART 2 '만들어진 그릿의 신화: "이제 그만할래"는 어떻게 모욕적인 말이 되었는가', PART 3'퀴팅의 기술: 다시 시작하는 법'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무책임한 조언을 하자는 게 아니라 시작했던 어떤 일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그만둘 것인지 계속할 것인지를 냉철하게 결정할 수 있는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


"삶은 도박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책에서는 정확히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책에서는 삶이 무조건 자기 책임이라고 호언장담한다."  (p.154)


노력한다고 누구나 다 일론 머스크가 되지는 않는다. 온갖 노력을 쏟아부으며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는 어렴풋이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혹은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두려워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그런 상황을 적어도 한 번은 맞닥뜨리게 된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그동안 쌓아온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을 벗어나고 보면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이 과거 자신이 누렸던 세상에 비해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용서다. 매번 상황을 바로잡지는 않았던, 실패하기도 했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실패할 테니까. 실패하고 계속 무언가를 그만둘 테니까."  (p.331 '맺음말'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궤변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시작하는 모든 일은 자의든 타의든 결국 그만두기 위함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어느 누구도 간절히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던 어떤 순간, 계속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어떤 순간부터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게 다를 뿐이다. 단 한 번뿐인 삶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도 이와 같은 규칙을 적용하려 드는지도 모른다. 익숙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가 하는 일과 추구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죄의식이나 열패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언제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신중한 판단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그만두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만둘 시기를 하염없이 미루는 고지식한 사람이나 기준도 없이 수시로 그만두는 프로 이직러 모두에게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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