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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같은 이름의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다. 차량 통행이 많은 편도 일차선의 도로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운동장을 둘러 싼 울타리가 꽤나 높은 편인데 아마도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이 차도로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오가는 차들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문 외진 곳이라 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해서 그리 만들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그 학교와 인접하여 산다는 것만으로 학교에서 적잖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지라 학교의 시설물이나 정원수 또는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누리는 혜택이란 게 뭐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이따금 한가로운 시간이 날 때면 가볍게 산책을 하는 장소로 이용한다거나 갑자기 몸을 움직여 땀을 내고 싶을 때 축구공이나 농구공 하나 들고 가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학교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학교의 울타리 주변에는 암적색의 철 지난 넝쿨장미가 열을 맞춰 피어 있는데 나는 그 주변을 지날 때마다 시들어가는 꽃 옆에서 한나절 눈을 감고 누워 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한나절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면 가을이 훌쩍 지나 있을 것만 같다. 바야흐로 조락의 계절, 시들어가는 붉은 꽃들이 아쉬운 시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다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다. 내가 느끼는 처연하다는 감정인 즉 과거로 회귀하는 그리움을 껴안고 생겨난 것이기에 시들어가는 장미의 꽃송이나 그 위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이 마냥 애틋하기만 하다. 그 곁을 스치듯 걷는 철부지 학생들의 왁자한 웃음이 때로는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져 발걸음을 붙잡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의 추억은 대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향수에 젖게 하거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간절함을 낳는다. 가을에 유독 우리가 추억에 젖는 이유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이 스러지는 주변 풍경을 보면서 자신도 문득 그와 같이 쇠락의 길로 접어 들고 있음을 감지하는 순간,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정부 여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가을에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락하는 계절에 자신의 신세 또한 처량해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계절에 떠오르는 추억은 모두 아름답게만 느껴져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욕구는 한층 강해지는 것이다. 나는 자신들의 쇠락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 몸부림 치는 그들의 처절한 발악이 안쓰럽게만 느껴진다. 현재의 잘못이 역사를 잘못 배운 젊은이들 탓인 듯 덮어 씌우려는 생각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은 바로 젊음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과거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지금까지 무엇 하나 고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고쳐질 가능성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잘못만 문제 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낮은 취업률도 견딜 수 있고, 원칙만 지켜진다면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도 당당히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부끄러운 이유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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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vdlEjfdjwlrh 2017-07-1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가옵니다.오랜만에.장미는 지난 뙤약볕에도 묵묵하게 자태를뽐내고 초라하지않게 고개를떨구고 또 내년을 기약할것입니다.빗방울에 잎들도 나뿌끼고.자연.비..비....장미.이계절데로 감사하며 살고싶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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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기억회로의 엔터키를 누르지 않으면 어제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시인은 참 귀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병률의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고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부피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전날의 기억들을 분리수거도 채 하지 못하고 20리터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는 나날들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날들이 모여 한꺼번에 뭉텅이로 달아났다는 걸 깨닫는 아침이면 지난 세월에 가벼운 손인사라도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몃 두통이 인다. 이따금 찬바람만 휑하니 도는 절간 같은 마음일 때 시인의 한마디는 군불처럼 따숩다.

 

<끌림>으로 시작된 이병률 읽기는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그는 어디론가 떠났고 책의 표지가 바래고 글귀들이 일상처럼 무뎌졌을 때, 그는 돌연 한 권의 책을 들고 나타나곤 했다. '이병률 여행산문집'이라는 부제에 눈길이 멎었다. 그는 또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인가, 생각했는데 책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아름다운 낮과 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한다. 더이상 감정을 위조할 수 없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충격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사랑을 사려드는 이는 있지만 이별은 값이 엄청나서 감히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이별은 사랑보다 한 발자국 더 경이에 가깝다."

 

그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여행한 듯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그 수많은 영혼들은 수억 광년보다 더 먼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 외로워 했는지도 모른다. 그 거리를 좀 더 가깝게, 혹은 하나로 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읽은 직후였다.

 

작가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소소한 일상에 주목하고 있다. 그 많은 사건들을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인 양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깊이 반성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하나 매만지고 음미하고 느끼다 보면 하루는 정말 천천히 흐를 것만 같았다.

 

"우리로서는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없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수화로 일러줍니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와 적당히 거리를 두는 일과, 우리 몸에 바싹 붙어 지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흠씬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의 한낮, 마음 한켠이 까슬까슬하여 집어든 책을 내쳐 다 읽고 말았다. 내가 시인의 책 한 권을 읽는다 하여 메마르고 척박한 세상이 칠십억 분의 일만큼 더 다정해질 것도 아니지만 한 번 믿어보라는 작가의 꼬드김을 차라리 믿고 싶은 심정이다. 하루 종일 해가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스산한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어둡다. 이 비 그치면 가을은 한뼘 더 깊어질 터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가까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 반비례하여  점점 멀어져만 가는 심리적 거리는 어찌하랴. 이 계절 방향을 잃은 우리는 무참한 계절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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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 다섯 명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나이가 다 같았던 건 아니었던지 서로에 대해 형이나 언니, 동생 등으로 호칭을 바로잡느라 분주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같은 나이의 '젊은이' 또는 '청춘'으로 보일 뿐 나이 차이는 하등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들에게 말했더라면 그닥 기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고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던 우리는 침묵과 단답식의 질문을 몇 번 주고받다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화의 주제는 갑자기 '청년실업'의 문제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주제에서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나 나나 그 주제가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두 명은 외국에 취직을 하여 캐나다와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더라면 굳이 합격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국내 기업에는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은 공히 지금 확실히 결정된 건 아니지만 이민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아쉽거나 미련이 남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들은 하나같이 '전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질문은 괜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로 하여금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하게 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등떠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언론에서는 '헬조선'이나 '금수저', '흙수저' 등의 신조어를 자주 보도하면서 그것이 마치 어느 철없는 젊은이의 정서적 결함 또는 무능한 어느 젊은이의 푸념쯤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비켜가도 한참 비켜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헬 코리아'도 아니고 '헬 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스템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아니라 16세기나 17세기의 조선시대와 비슷하다는 걸 은연중에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음서제도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한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에 의한 낙하산 인사나 특채의 만연, 갈수록 악화되는 소득 양극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주택 가격의 상승, 편법이나 탈법이 판치는 부의 대물림, 법으로 굳어진 듯한 무전유죄 유전무죄.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탈 대한민국을 부추긴 것은 그들에게서 미래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칙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현실이요, 기득권의 욕심이 빚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일 뿐이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곧 닥칠 대한민국의 암울한 미래를 보았다. 젊은이가 사라진 국가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해외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조차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고 싶도록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제 나라에 뿌리박고 사는 젊은이들도 강제로 내쫓는 나라가 대한민국의 민낯임을 그들과의 대화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암울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본 것이다. 지금 권력을 가진 자, 지금 자신의 부를 누리는 자들이 당장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를 병들게 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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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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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어떻게 읽었어?'라는 질문이, '어떤 부분이 좋았어? 감동적이지는 않아?', 뭐 이런 질문들이 줄곧 떠오르게 됩니다만 저는 이석원의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이거 뭐지?'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잠시 동안 독자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어떻게 읽었어?' 보다는 '어떻게 썼을까?'의 문제가 더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그냥 장난 한 번 친 걸거야. 아니면 소설을 쓰기 전에 스케치 삼아 대충 기록한 것이거나.'하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뒤로는 책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수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평을 업으로 하는 문예비평가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소설이나 희곡 같은 것은 허구로서 인간 본연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수필만은 문학이면서 거짓 아닌 사실로서 삶을 반성하고 의미를 추구하게 됩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 많이 헛갈릴 수 있습니다. 사실의 사전적인 의미는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나 현재의 일, 눈에 보이는 것, 현상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으로 나와있더군요. 결국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보았던 것, 그것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 의미에 대한 성찰 등이 사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은 이 책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이 책이 소설이었다면 이런 식의 문제 제기는 무의미했겠지요. 그러나 '산문집'이라는 말이 표지에 선명한데 제가 어찌 자의적으로 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통상적으로 '산문집'은 '수필'로 여길 뿐 '소설'로 인식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해괴하게도 장르에도 없는 '이야기 산문집'이라는 용어를 버젓이 내세우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냥 '산문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낯이 뜨거웠던 것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실 '이석원'이라는 사람을 들어본 적 없었고, 그가 작가이든 아니든, 가수이든 아니든 하등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피천득선생의 '인연'이 사실 논란에 휘말렸던 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애제자였던 분의 주장은 선생과 아사코의 만남이 사실이 아닌 허구이고 따라서 선생의 글은 수필이 아닌 소설이라는 것이엇습니다. 독자인 저로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문학계 안팎의 떠도는 말로는 선생의 글이 어느 정도 사실성에 기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사십대 이혼남인 작가는 어느 날 삼십대 초반의 여인을 소개받았고, 정신과 의사였던 그녀는 당시에 그녀의 남편과 긴 이혼 소송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알게 된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잊고 지내다가 결국 이혼에 성공한 여인이 먼저 문자 연락을 해옴으로써 재회를 하게 됩니다. 이혼 기념(?)이었는지 두 사람은 그날 밤 서로의 육체를 탐하였고 그 후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작가를 불러냅니다. 물론 성인의 남녀가 만나 달리 할 것은 없고 계속해서 서로의 육체를 탐할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섹스 파트너였던 셈이었지요. 그런 관계에 신물이 난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였던 그 날 지하 주차장에서 그녀의 전남편과 조우하여 시비가 붙는 바람에 작가는 경찰 조사를 받게 되고 급기야 그녀와도 헤어지게 됩니다.

 

책의 내용은 대략 그러했습니다. 아, 다른 것도 있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책의 내용과는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예컨대 작가를 좋아했던 대학 후배의 이야기나 키스방을 하는 친구의 이야기, 밑도 끝도 없는 불운 올림픽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크게 감명 깊다거나 책에서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은 아니었고, 단순히 지면을 채우는 정도였습니다. 결말 부분에서 책의 제목과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자와 헤어진 후 마음을 잡지 못했던 작가에게 익숙한 문자 한 통이 옵니다. '뭐해요?'라고 묻는 여자의 문자였죠.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소설로 말하자면 열린 결말이었던 셈이죠.

 

적어도 수필은 자기 고백적인 글로서, 작가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는 글이어야 한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음악에도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가 있긴 합디다만 그러나 이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책을 차라리 소설이라 말하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비록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흔하게 듣는 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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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do 2015-10-05 22:27   좋아요 0 | URL
일본에선 `사소설`이라 불리는 그건가 봅니다. 한때 작가들이 많이들 썼던 건데; 그 장르가 원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건지 말들이 많아서.....그러게요. 차라리 소설이라고 하지.....

꼼쥐 2015-10-06 17:37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저는 산문집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실에 기초하여 쓴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소설이라고 하면 더 깔끔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하러 `사소설`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akardo 2015-10-07 15:27   좋아요 0 | URL
사소설도 소설의 하위 개념이니 다 같은 소설이죠; 그냥 소설이라고 하는 게 가장 깔끔하긴 하겠습니다. 아무튼 저 같음 자기 얘기임을 드러내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굳이 자기가 겪은 거라는 걸 강조하는 이유 저도 참 궁금합니다. 하하;등단해야만 소설을 쓰고 책으로 낼 수 있다고 작가분이 믿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꼼쥐 2015-10-10 14:28   좋아요 0 | URL
이분의 작품 중에는 소설이 한 권 있더군요. 궁금해서 대충 훑어봤는데 그닥 재미있어 뵈지는 않더라구요. 그것도 다 취향의 문제이긴 하겠지만 저하고는 왠지 궁합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사실 소설로 쓴다해도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여느 연애담과 특별히 다르지도 않고...
 
일요일의 카페
프란세스크 미랄례스.카레 산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동화책이려니 읽었던 소설이 있습니다. 익숙하지도 않은 스페인 소설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국적을 제가 미처 몰랐다 하여 소설을 읽은 후 제가 받았던 따뜻한 느낌이 반감된다거나 불쑥 십여 도쯤 뚝 떨어져 냉냉한 느낌으로 변하는 건 아닐 겝니다. 책갈피에 끼워둔 어느 해 가을처럼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져 흩어질 것만 같은 추억. 거적때기처럼 마냥 후줄근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노란 추억 한 잎 반가워 이렇게 글을 씁니다.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표시를 했던 그 시간의 궤적이 새삼스럽고도 별스러운 기억을 하나 둘 건져 올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 수 있는 너른 공간을 마련한 듯합니다. 죽음을 주소재로 삼은 <일요일의 카페>는 여느 소설처럼 어둡거나 음침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껏 동화책이려니 여겼던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코코아 또한 소설의 분위기를 따뜻하고 잔잔하게 이끄는 소품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죽음이라는 게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야'라고 말해줍니다.

 

"인생이라는 위가 비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매듭짓지 못한 일을 끝맺기 위해 죽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는 거 알아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상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화해를 해야 하는 거죠. 나 자신하고부터." "그러면 죽음이 우리에게 덜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물론이죠. 인생이 충만했다면 죽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맛있는 점심식사 뒤의 뜨거운 차처럼." (p.123)

 

1월의 어느 일요일. 소설 속 주인공인 이리스는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었던 것이죠. 기차가 지나다니는 다리 위에서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뛰어들려는 순간, 아이가 손에 든 풍선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 소리에 놀란 이리스는 자살을 포기게 됩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매일 지나다니던 길모퉁이에서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카페를 발견합니다. 그녀가 읽은 간판의 이름은 이랬습니다. '이 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이리스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카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섭니다.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에 일요일 오후는 나쁜 시간이다. 특히 꿈을 억누르는 잿빛 망토가 도시를 뒤덮어버리는 1월의 일여일 오후라면 더욱 그렇다." (p.13)

 

자리에 앉아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주문하고 잠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맞은편 자리에 웬 낯선 남자가 다가와서 앉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넵니다. 본인을 루카라고만 소개할 뿐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 남자는 이 탁자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의 탁자라고 말합니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이리스는 그게 인연이 되어 일주일 동안 그 카페를 드나듭니다. 두 번째로 이리스가 앉은 테이블은 과거의 테이블, 세 번째는 그늘 속에서 빛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테이블, 네 번째는 용서의 테이블, 다섯 번째는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테이블,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별의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그때마다 루카를 만났고 이리스는 나이도 알 수 없는 루카에게 마음이 흔들립니다.

 

"굴곡이 심한 인생을 살아낸 사람들만이 행복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어. 행복이란 대조의 게임이니까. 감정의 스펙트럼 한가운데로만 헤엄치는 사람은 결코 인생의 본질을 경험할 수 없어. 이게 우물의 교훈이야. 하늘이 광활하다는 걸 이해하려면 때로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 (p.53)

 

소설 속에서 루카는 그가 읽었던 일본 소설(제 생각에는 하루키 소설 '태엽 감는 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을 빗대어 이 이야기를 합니다. 마법 같은 카페에 드나든 일주일 동안 이리스의 삶에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동물보호소의 신문 광고를 보고 강아지를 입양하고, 그 동물보호소에서 십대 시절 짝사랑했던 올리비에르를 만나기도 합니다. 카페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리스의 부모님과 같은 날 사고를 당한 루카는 이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이리스의 부모님을 대신해 그녀를 만나러 왔던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특히 예고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거의 공황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견딜 수 없는 우울이 몰아치고 한 점 빛도 통하지 않는 어둠 속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입니다. 삶조차 의미가 없어집니다. 단지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삶의 소중함에 대해, 현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빛과 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인생을 이해하려면 과거를 바라보아야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려면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p.150)

 

뭉클한 감동이 있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의 의미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이리스에 빗대어, 또는 루카의 말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다고 느꼈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이리스처럼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의미마저 희미해졌다 느껴질 때 소설 속에 나오는 아래 문장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죽음은 한 번도 열심히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슬픈 일이지요."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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