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등산로는 적당히 부드러웠다. 간밤에 내렸던 비로 길가에 쌓인 낙엽더미에선 구수한 숭늉 냄새가 피어올랐고, 뽀얗게 송홧가루를 뒤집어쓴 떡갈나무 이파리는 비에 씻겨 마치 노란 립스틱을 바른 듯 가장자리에 노란 테를 두르고 있었다. 까치를 비롯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가슴 깊숙이 스미는 아카시아 꽃 향기. 청량한 아카시아 향기가 잠에 취해 느른하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카시아 꽃은 날씨에 따라 이따금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향기를 내뿜기도 하고, 때로는 누이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향기로 주변의 사람들을 다독이기도 한다.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영수회담이 어제 있었다. 비공개 회담에서는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발언만 놓고 본다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발언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발언을 비교할 때 두 사람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듯하여 씁쓸하기만 했다. 이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야당의 대표인지 종잡을 수 없었던 상황. 전날 먹었던 술이 덜 깼는지 대통령은 눈만 껌벅껌벅 졸린 듯했고, 옆에 배석한 사람들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듯했다. 앞으로 3년이나 남았는데 걱정도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이것과 조금 다른 방향의 욕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마땅히 있어야 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없어 마음이 상하는 경우지요. 이것이 인정의 부재를 넘어 무시와 모멸이 되면,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괴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p.35)
페터 비에리가 쓴 <자기 결정>은 무척이나 얇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페터 비에리라고 하면 모르는 이들도 많을 테지만 그가 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는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이니 말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작가는 사실 그의 저서 <자기 결정>이나 <삶의 격>과 같은 철학서에서 더 빛을 발한다.
"문학적 글쓰기는 말에게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시적 힘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입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는 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p.30)
우리는 이따금 자신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어제 대통령의 얼빠진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자기 결정>에서 페터 비에리는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한다. 본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데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건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먼 세상 이야기일지도 모른다.